세월의 더께를 깔고 앉은 도시일수록 속은 낡고 복잡하다. 미국 뉴욕시가 품고 있는 지하 공간에는 오래된 전력선과 스팀 파이프(steam pipe)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기온이 떨어지면 맨홀 뚜껑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색 김은 마치 뉴욕시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냉방과 난방에 쓰이는 증기를 고압으로 보내는 스팀 파이프는 툭하면 폭발하고, 전력선은 매년 누전·화재·정전을 되풀이한다. 폭발로 무거운 쇳덩이, 맨홀 뚜껑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2007년 7월의 어느 날에도 그랬다. 오후 6시쯤 그랜드센트럴역 근처 도로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연기는 맨해튼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 빌딩(77층)보다 높이 치솟았다고 한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과 굉음도 함께했다. 1명이 숨지고 30여명이 다친 이 사고의 원인은 1924년에 만든 스팀 파이프였다. 9·11테러 악몽을 완전히 떨치기 전이었던 때라 뉴욕시민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하지만 전력선과 스팀 파이프를 모조리 교체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의외의 곳에서 해법의 실마리가 나왔다. 2009년 통계학자인 신시아 루딘 MIT공대 교수는 뉴욕시 전력관리 기관이 보유한 40년치 유지·보수 정보에 주목했다. 담당자가 작성한 일지 형태로 된 이 정보는 공공정보 개방 정책에 따라 인터넷에도 공개돼 있었다. 쓴 사람에 따라 양식이나 내용이 뒤죽박죽이라 ‘데이터’로서 큰 가치는 없어 보였다.
‘뉴욕 전력망 빅데이터 프로젝트’를 맡은 루딘 교수는 오랜 시간 쌓인 빅데이터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어 인공지능(AI) 기법을 이용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전력선은 어디에 있는지, 시급하게 교체해야 하는 곳은 어딘지를 미리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이걸 바탕으로 뉴욕의 맨홀 5만1000개 가운데 사고 위험이 있는 맨홀을 예측했고, 정확성은 꽤 높았다.
루딘 교수의 프로젝트는 공공 빅데이터를 잘 사용한 사례로 꼽힌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효율적으로 도시재난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에 매료된 뉴욕시는 주택 위험 점검 등 다양한 분야에 빅데이터를 적용하고 있다.
일상에도 빅데이터는 깊숙하게 파고든다. 스타벅스코리아가 내놓은 ‘사이렌 오더 서비스’에도 숨어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매장을 지정해 주문하고 결제까지 하는 사이렌 오더 서비스는 한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 서비스에는 개인의 구매 이력, 이용매장 정보, 주문시간, 날씨 같은 다양한 빅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한 뒤 ‘맞춤형 상품’을 추천하는 기능이 있다. 스타벅스코리아에 따르면 사이렌 오더를 이용한 주문 가운데 37%는 빅데이터 추천 메뉴에서 발생했다.
AI를 활용한 자율주행차, AI닥터 등 조만간 우리 곁으로 다가올 미래도 빅데이터를 밑그림으로 한다. 여러 나라에서 데이터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原油)’라고 부르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국경을 넘나드는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디지털 통상 협상’도 뜨겁다. 한국도 데이터 이동의 자유화, 개인정보 보호라는 큰 틀을 마련하고 ‘데이터 경제’로 뛰어들고 있다. 데이터 개방과 활용을 발목 잡는 규제를 걷어낼 채비도 갖췄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 주도로 발의한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안)’은 1년 가까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정쟁에 휘말려 법안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올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 사실상 자동 폐기될 운명이다.
금융권과 산업계 등에선 데이터 3법의 각 법안 명칭에서 한 글자씩 따 ‘개망신법’이라고도 부른다. 왜 이렇게 부르는지 정치권에서도 알 것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데이터 경제의 낡은 스팀 파이프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깊게 고민할 때다.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