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002년 평양 방문 당시 옥류관에서 이만열 교수(가운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 목사님의 외침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좋습니다”라고 동의를 표했다. “아래층에는 보위부 안전원들이 가득 있습니다. 한꺼번에 자리를 뜨지는 말고 방에 올라가서 성경책을 갖고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단장 최홍준 목사님의 지령 같은 한마디에 현장엔 긴장감이 돌았다. 어떤 목사님은 주변 참석자에게 “우리 집 연락처를 드릴 테니 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분위기는 점점 긴박해졌다. 목회자 50여명이 함께 모여 순서를 짜고 행동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예배가 시작됐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찬송이 그토록 절절한 호소이자 간구로 마음에 와닿았던 적이 있던가. 찬송 소리는 점점 커졌다. 부를수록 힘이 생겨 테이블을 치다가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찬송했다. 통성기도를 할 때는 더 뜨거워졌다.
기도회는 부흥회가 됐다. 다들 오직 북한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북한 사람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든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회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이 하루하루 지옥처럼 살아가는데 나는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살면서 감사함을 잊어버린 죄를 고백했다.
‘내가 이곳에 그냥 살았더라면 고생하다가 벌써 죽었을 터인데 이렇게 복 받은 몸으로 살아오다니. 순교한 사람도 그렇게 많은데 나는 순교를 피해 남한으로 와서 즐기면서 살아온 것 아닌가.’
주님을 위해 죽다 살아남은 사람답게 열심히, 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지 못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최 목사님이 “이제 이만열 교수님과 주선애 교수님께서 나오셔서 각각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안내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사님들이 많은 자리에서 말을 아껴왔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말씀을 선포하고 싶은 마음을 성령님께서 주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교수님은 평양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신앙 선배들의 고귀한 헌신을 소개해주셨다. 이 교수님에 이어 앞에 나섰다. 그리고 담대하게 이야길 전했다.
“저는 이곳 평양에서 나서 여기서 자랐는데 1948년 이곳에 핍박의 기운이 감돌 때 순교할 자신이 없어 남한으로 도망갔었습니다. 50여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마음이 착잡합니다. 곳곳마다 집채만 한 크기로 걸려 있는 현수막엔 ‘수령님은 살아 계신다’가 쓰여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우렁차게 찬양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예배가 없었다면 그저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왔다고 보고하게 될 뿐이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북한에 대해 무관심한 채 풍요만을 추구하던 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전 7시에 시작한 예배는 오후 2시까지 금식하면서 진행됐다. 2시가 넘어서자 보위부원들은 말을 바꿔서 이제 그만하고 봉수교회에 가라고 했다. 그제야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고 봉수교회로 갔다.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맞은 교회 목사라는 사람은 정치 선전 같은 말만 쏟아 냈다. 연이어 칠골교회를 방문했다. 거기에서도 목사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예배당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접촉할 수 없게 한 모양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2) “황장엽 선생님, 하용조 목사님 위해 기도해주세요”
탈북자동지회 방문해 인사 나눈 뒤 매주 북한 음식 만들어 전달…하 목사 병문안서 “예수 이름으로…”
입력 : 2019-07-23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첫 번째)가 2009년 평양 숭실대 재건 모임에서 황장엽 전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세 번째), 방지일(네 번째) 박종순(다섯 번째) 목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5월 제107주년 평양 정의여고 총동문회가 열렸다. 150여명이 몇몇 은사들을 모시고 여학생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동창회 회장은 후배인 곽선부 선생이었다. 곽 회장이 “우리 황장엽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나는 놀라서 국정원에 계신데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는 걱정 말라며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했다. 전 회장이자 정의학교 교사를 지낸 김명현 언니도 같이 가자고 했다.
황 선생님은 매주 토요일 오전에 잠깐 탈북자동지회에 나오셔서 탈북자들을 만나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송파구에 있는 황 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은 작고 구석진 방이었다. 우리는 같은 고향 분이어서 인사드리러 왔다며 간단히 소개했다. 웃음을 보이진 않으셨지만 반기는 듯했다.
황 선생님은 평양상업학교를 다녔는데 어려서 양촌에서 지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이 양촌 가까이 있어서 자주 찾아가 놀던 곳이었다. 양촌과 가까운 곳에 숭의학교 숭실대 평양신학교가 있었고 서양 선교사 자녀들도 많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황 선생님이 가깝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그 어려운 망명길을 혼자 떠나왔지만 여기서도 부자유한 생활일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 동정이 가기도 했다. 경호원들이 항상 방 안과 밖에서 지키는 국정원에서 숙식하는 건 그야말로 감옥 아닌 감옥이었을 것이다. 토요일마다 이 사무실로 북한 음식이라도 갖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북한 만두와 북한식 콩비지, 장조림 등을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서 갖다 드렸다. 그 과정에서 이분이 주체사상을 버리고 우리 주님의 복음으로 거듭나면 북한의 어두운 세계를 빛나는 기독교 국가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사명감을 느꼈다. 예수를 핍박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 바울로 변했듯이 그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전도를 잘하지 못하지만,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연예인과 지성인들을 교회로 이끌며 전도에 탁월한 달란트를 보였다. 그래서 하 목사님에게 전화로 황 선생님 전도를 부탁하면서 토요일에 좀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기쁘게 받아들여 책을 가져오기도 하고 선물로 모자도 사 와서 황 선생님과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전주대 이사장이었던 하 목사님은 황 선생님을 전주대 석좌교수로 대우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사님 아들의 결혼식에서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황 선생님이 경청하시더니 후하게 칭찬을 하셨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선생님 이번 주일에 교회에 꼭 가서 하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십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황 선생님은 끝내 침묵하셨다.
하 목사님이 아산병원에 입원했을 때 일이다. 황 선생님이 병문안을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나는 입원실에서 두 분께 조금 무리일 것 같은 청원을 했다.
“오늘은 황 선생님이 하 목사님을 위해 먼저 기도하시고 저도 기도한 다음에 하 목사님이 황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싶어 긴장되는 마음으로 황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그분이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시작해 제법 기도를 하시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그제야 황 선생님의 마음에 조금 싹을 틔운 듯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3) 황장엽 선생 느닷없이 내게 “우리 형제합시다”
만난 지 2개월여 만에 마음 문 열어… 이후 우리 집에서 생일상 마련, 매년 빠짐없이 축하예배 드려
입력 : 2019-07-24 00:01/수정 :2019-07-24 00:27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왼쪽)가 2010년 황장엽 선생(가운데)의 마지막 생일날 방지일 목사와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간절한 기대를 갖고 하용조 목사님뿐 아니라 여러 목사님께 황장엽 선생님을 방문해 기도해 주시고 전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김준곤 방지일 목사님을 비롯해 홍정길 김진홍 이철신 김상복 최일도 이수영 목사님, 김형석 이만열 교수님, 이영덕 전 총리 등을 모시고 황 선생님과 교제를 나눴고 축복기도를 해주시도록 부탁했다. 황 선생님 역시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좋아하시는 듯했다.
황 선생님을 처음 만난 지 2개월여 후 선생님은 느닷없이 내게 “우리 형제 합시다” 하고 말했다. 나는 좀 뜻밖이라 부정도 긍정도 안 하고 미소만 지었다. 주님 안에서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사실 누구와도 형제나 자매를 맺어본 일이 없었다. ‘저분이 얼마나 외로우면 저런 말을 할까’ 싶어 내가 우선 위로를 드려야 신앙으로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으로 긍정했다. 그러나 그를 오빠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그만큼 나를 신뢰해 주는 게 고마웠을 뿐이었다.
하루는 황 선생님 생신을 앞두고 탈북자동지회 홍순경 회장과 김성민 국장이 선생님께 의논을 드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 선생님께서 “생신이 다 뭐냐. 나는 안 한다”고 거듭 손사래 치더니, 문득 “정 그러면 주 선생네 집에서나 하면 할까”라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분의 생신 잔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걱정은 됐지만 못한다고 할 수가 없어 “네, 제가 조촐하게나마 준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나는 예닐곱 차례 우리 집에서 그분 생신상을 차렸다. 탈북자동지회 임원 몇 분과 경호원 8명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정말 조촐한 생일상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꼭 빼놓지 않았던 게 생신 축하 예배였다.
선생님은 식사도 하루 한 끼만 드시고 약간의 견과류와 과일, 차 등의 간식을 드셨다. 체중이 41㎏에서 조금만 늘어나도 단식을 한다고 했다. 근신하고 절제하는 습관이 대단했고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누워서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앉아서 책상에 기대어 잠을 자고 그때부터 하루에 한 끼씩 드시는 습관을 들였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2010년엔 선생님이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민주화동맹의 새 사무실에서 뷔페를 차린다고 하셨다. 다들 놀랄만한 일이었던 게 황 선생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나올 줄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사람을 많이 데려오라고 하셨지만 여러 사람에게 청하기 미안해 몇몇 분들께만 소식을 알렸다. 장영일 전 장로회신학대 총장님과 사모님, 이철신 이성희 목사님 등이 그 몇 분 중 하나였다. 그 외에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제자들 몇몇을 불렀다. 경호원들이 멋스럽게 방을 꾸며주기까지 한 그 생일파티가 황 선생님과의 마지막 작별파티가 될 줄은 몰랐다.
얼마 후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조사가 있는가 보다’ 하면서 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형사 두 명이 동행해 식사하며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에 갔던 적이 있습니까.” 나는 10년 전에 교환교수로 갔다 온 일이 있다고 답했다.
“황장엽 선생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나는 종교인으로서 황 선생님이 주체사상에 반대되는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4) 접이칼 들고 죽어버리겠다는 황장엽 향해…
굶주린 동포 도움 구하려 망명했으나 희생된 식구·제자에 대한 죄책감 심해
입력 : 2019-07-25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를 ‘한국 자매’라고 불러줬던 새뮤얼 모펫(Samuel Moffett) 선교사 부부의 2003년 모습.
황장엽 선생님은 2003년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빈 그릇과 함께 내게 건네주셨다. ‘주선애 선생께. 4월 20일은 망명 6년이 되는 날입니다. 답답한 심정을 적어 보았습니다.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온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속삭임 소리.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보니 벌써 새벽 3시 30분. 물론 이대로야 죽을 권리가 없지. 공들여 찾은 진리. 든든히 포장하여 맡길 곳이라도 정해야 하겠는데 아직 무거운 죄 봇짐 걸머지고 허둥지둥 가련한 신세. 어떻게 나 홀로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꼭 찾아야 한다. 미련 없이 떠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길을, 생명을 주고받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게 인생을 안겨준 ‘위대한 어버이’께 바치는 감사와 속죄의 정성 다하여 끝까지 싸우다 싸움터에서 이 세상 하직하고 갈밖에 다른 길은 없을 터.’
2003년 4월 23일 탈북자동지회 사무실 문밖에 피 묻은 글과 칼이 꽂힌 장면이 신문에 났다. 나도 놀랐지만 많은 사람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평온한 듯 아무 말도 안 했다. 실상 그는 죽고 싶다는 말을 때때로 하시곤 했다. 항상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며 보여준 일도 있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국정원에 황 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방 안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황 선생님이 갑자기 접이칼을 들고 나타나 죽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 큰소리를 질렀다. “뭐 지도자가 이따위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였다. 그는 칼을 책상 위에 놓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조금 이해가 갔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황 선생님의 신앙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 시대에 다시 찾을 수 없는 애국자로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분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오게 된 것은 남한으로 가라는,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강한 명령 때문이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북한 노동당 비서로서 600만명이나 굶주려 죽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 큰 고민을 하다가 남한의 도움을 구해볼 생각으로 왔다고 했다. 그러나 식구들뿐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까지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으로 마음의 고통이 무척 심했다.
나는 오랜 친구 선교사이자 장로회신학대 동료 교수인 새뮤얼 모펫(Samuel H Moffett·한국명 마삼락) 내외에게 황 선생님을 방문하도록 청했다. 그분들은 기꺼이 수락했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다. 꽃다발을 드리며 정중히 인사했더니 황 선생님은 “나 같은 죄인이 무슨 꽃다발입니까” 하며 받기를 거절하다가 할 수 없이 “주 선생이나 하시오”라며 내게 건네셨다.
모펫 선교사의 기도를 들은 황 선생님은, 옛날 자기가 어렸을 때 어느 선교사가 집에 와서 복음을 전해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으로 책상머리를 짚고 옮겨 가면서 “사람이 이렇게 살아요. 그리고 죽어요” 하며 책상에서 손을 밑으로 하고 그다음 손을 위로 향하면서 “죽고 나서 이렇게 올라가요. 이것만으로도 표현이 잘 되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복음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 보여줬다. 어린 시절 그의 기억에 남아 있던 간결한 복음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잠겨 있던 복음을 떠오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5) 황장엽 별세 소식에 ‘하나님, 그 영혼 받아주세요’
‘한번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 기도하기 좋아한 사람이니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
2010년 10월 9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 전과 다름없이 황장엽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은 휴대폰이 생긴 뒤부터 6년간 빠짐없이 아침이면 같은 시간에 내게 전화를 거셨다. 그날도 다른 말씀 없이 “건강하시우?”하는 물음을 건넸다. 나도 다른 얘길 꺼내진 않고 “선생님도 건강하시지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튿날 아침. 그날은 온누리교회 창립 25주년 기념예배를 위해 상암월드컵경기장에 모이는 날이었다. 축사 순서를 맡았던 터라 마음이 좀 분주했다. 시계를 보니 8시40분이었다. ‘왜 선생님 연락이 없지?’ 황 선생님은 6년 동안 하루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혹시 조찬 강연을 가면 그 전날 연락을 주셨다. 나도 피치 못할 모임이 있어 연락받지 못하면 그 전날 말씀드리곤 했다. 때로 내가 잊어버리고 그 전날 알리지 못한 경우엔 아침 식사 모임 중 전화를 받으러 방 밖으로 나와 전화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전화가 없었다.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도 받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도리가 없어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예배가 시작되고 기도가 끝났을 때 한 자매가 곁에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황장엽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정말?”하며 되묻고는 내 몸이 벌벌 떨리는 걸 느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맞은편 강단에 앉아 있던 하용조 목사님에게 소식을 전했다. 목사님은 예배 도중 황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수만명에게 알렸다. 나는 순서자 자리에 앉아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그 영혼을 받아주세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전도하며 봉사한다고 했지만 한번도 주님을 모시기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거나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신앙을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을 하나님은 아시오니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절히 기도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황 선생님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시지요.”
그를 전도하기 위해 나 이상 애쓰던 수잔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장례식장에서 내게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고 그가 천국에 갔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솔티 대표가 황 선생님을 위해 긴 편지를 영어와 한국어로 써서 보내 왔다. 평생 이렇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써본 일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편지엔 황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이야기와 꼭 한 가지 부탁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체사상을 내려놓으시고 예수를 믿으세요.’ 황 선생님은 편지를 받고 내게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주 선생하고 똑같군.”
솔티 대표는 편지로 약속한 날에 한국에 와서 황 선생님을 만나면서 또다시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도록 권했다.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결국 침묵하시더니 “주 선생한테 맡기고 나가시오”하는 게 아닌가. 솔티 대표의 그 큰 눈이 눈물로 빨개졌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발걸음을 돌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강압적으로 할 수 없는 전도, 무능한 내게 맡기신 뜻이 무엇인지요. 저의 연약함과 미련함을 용서하시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통일을 주시옵소서. 영생을 허락하시옵소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기도는 끊어지지 않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6) ‘새생활 체험학교’로 탈북자들 남한 생활 적응 도와
황장엽 선생 통해 탈북자들 고충 알게 돼 하나원 찾아 정보 제공하고 삶의 방향 잡도록 지원
입력 : 2019-07-29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네 번째)가 2010년 ‘새생활 체험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한 탈북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황장엽 선생님 사무실에 다니면서 탈북자들을 만나다 보니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탈북자들은 생활비와 주거는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생활 방법이나 언어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삶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한에 와서 새로운 삶을 꿈꿔본다는 의미에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새생활체험학교라고 지었다. 공동생활을 통해 그들이 한층 성숙해지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네 가지 목표도 세웠다. 첫째로 탈북자 복음화, 둘째로 탈북자 한국사회 정착 지원, 셋째로 하나님 사랑으로 복지 지원, 넷째로 통일한국을 향한 북한 교회와 사회의 일꾼 양성이다.
한 달에 한 번 주일에 4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떡을 만들어 하나원(탈북자들의 사회정착을 돕는 통일부 산하 기관)을 찾아갔다. 담당 목사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원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새생활체험학교에 관한 정보를 주면서 탈북자종합회관을 스스로 찾아오도록 권했다. 동원에만 익숙한 북한에서의 습관 때문에 스스로 찾아온다는 건 탈북자들에게 생소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쉽지 않았을 걸음을 내디디고 종합회관을 찾아온 탈북자들에게 남한 사회를 배우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잡아 살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 자신이 남한생활을 다양하게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탈북자들을 인솔해 남한의 여러 곳을 다녔다.
새생활체험학교는 환영예배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예배는 처음 겪어 보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북돋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성별, 나이별로 두세 명씩 조를 나눠 도우미들에게 한 조씩 맡겼다. 탈북자 선배와의 만남 시간도 가졌다. 이 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질문도 많았다. 특별 면담 요청도 했다.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님이 사역하는 다일공동체에 가서는 남한에도 노숙자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사회주의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기독교적 분위기의 공동체를 보게 했다. 노숙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자원봉사자가 돼 섬기는 체험을 하고 북한과는 너무 다른 무료급식소와 풍부한 음식들, 자율적 시민봉사자들을 통해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보고 느끼게 했다.
홀트아동복지관 방문은 굶어죽은 시체와 공개처형 장면을 봐온 이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회가 됐다. 수십 년간 누워 지내야 하는 사람, 기형아로 태어나거나 지체가 부자유한 장애인, 흉한 모습을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참사랑으로 정성스럽게 보조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느끼도록 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참 평화가 있음을 경험하게 했다.
무료병원인 천사병원도 방문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길에 버려진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모습, 필리핀이나 캄보디아의 구순열(입술갈림증) 아동들을 시술하는 모습 등을 보면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이런 병원을 꼭 해야 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북한에 두고 온 동생이나 아이들 생각이 떠오르는지 북한에 돌아가 이렇게 선한 일을 하며 살자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2007년 탈북자 종합회관에서 새생활체험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새생활체험학교 참가자들은 금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서 냉면과 돼지고기 파티를 하고 둘러앉아 자신이 겪은 탈북 과정과 남한 생활을 서로 얘기하며 감사 기도회를 가졌다. 모든 순서가 끝나는 날엔 중요한 결단의 시간을 가졌다. 목사님을 모시고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말씀을 선포하고 한 사람씩 축복기도를 해 줬다. 서로 사랑의 포옹을 통해 과거 몰랐던 하나님 사랑을 전하며 새롭게 살 것을 약속하고 결단하도록 이끌어 줬다.
‘결단의 시간’까지 오는 동안 탈북자들은 눈에 띄게 자유로움이 늘었다. 북한에서 또래 친구들과 놀 때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즐기는 모습도 보였다. 탈북자들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수료식에 임했다. 수료식 후에도 헤어지기 싫어 한두 시간 더 머물다가 돌아갔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고 기다리는 식구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4박 5일씩 진행되는 새생활체험학교를 50여회 진행하면서 1100여명의 탈북자들이 이곳에 정착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나원에 가서 탈북자들에게 학교를 소개하는 일도 빠짐없이 했다. 그간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고 느낀 것도 많았다.
한국교회가 탈북자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타국에서 온 이주민이나 조선족 노동자 정도로 여기고 대하면 서로 마음만 상해 교제가 끊기게 된다. 결국 선교는 실패로 돌아간다. 남한 성도들이 ‘탈북자는 무섭다’ ‘신뢰할 수 없다’ ‘싸우기 잘하고 불평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탈북자 사역을 할 때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탈북자들이 남한을 모르는 것 이상으로 우리 역시 북한을 모른다. 둘째, 탈북자들을 돕는 일의 기초는 얼어붙은 마음을 사랑으로 녹여주는 것이다. 셋째, 계속 인내하라. 훈련이나 교육은 오랜 세월이 걸린다. 넷째, 사랑과 온유함이 무엇인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북한은 사랑이 결핍된 나라다. 다섯째, 탈북자들을 조급하게 통제하려고 하지 말라. 그들은 통제 때문에 병든 사람이다. 여섯째, 사람을 급히 판단하지 말라.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됐을까를 생각하라. 일곱째, 서운해하지 말라. 원래 말이 거칠고 윗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다. 여덟째, 금전 거래만은 금물이다. 아홉째, ‘평생 거지’를 만들지 말라. 계속 도와주기보다는 자립하도록 도우라. 열째,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과 태도를 보여 주되 가르치려 하지 말라. 이같이 한다면 탈북자들이 남한에서의 삶에 더욱 높은 가치를 둘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10년 연말에 내 임기는 모두 끝났다. 내 인생의 다음 단계는 쉬는 것일지 아니면 또 다른 사역으로 인도하실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던 중에 깨달음이 왔다. ‘통일은 다가오는데 저 북방의 황폐한 땅, 죽어가는 우리 형제들을 섬기고 재건할 일꾼은 누구일까.’ 탈북자들과 같이 지내면서 나는 그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들과 생활을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셨다. 북한 선교와 교육, 행정 등 북한을 재건하는 역할은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돌아가 그들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북한 재건을 위한 인재를 키우자.’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8) 탈북자 통일역군으로 세우려 ‘샬롬공동체’ 열어
서로 격려하며 성장 기회 갖기 위해 개원… 그들이 북 기둥이 돼 주 찬양할 날 꿈꿔
입력 : 2019-07-31 00:05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2013년 7월 서울 강동경찰서에서 탈북자를 주제로 강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탈북자종합회관을 통해 5년여간 11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그중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을 보이는 사람들을 몇몇 발견했다. 중국에 숨어 있는 동안 중국 선교사들의 순수한 신앙을 이어받아 소명감이 뚜렷해진 학생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교육을 시켜 주면 북한 재건에 참여할 수 있는 리더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들 중 몇 사람을 우리 집에서 지내도록 하면서 공동생활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지성림은 고려대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신문사 기자로 취직을 했고 결혼해 두 자녀를 뒀다. 주승연은 연세대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과정을 끝내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공동생활 경험을 기초로 북한 지도자 양성을 시작하기로 했다.
‘탈북 기독 청년과 대학생들을 찾아보자. 그들을 격려하고 꿈을 갖도록 하자.’ 이 생각을 기초로 두 사람과 의논한 결과 기초생활비만으로는 공부하기가 어렵고 월 25만원을 지원하면 밤일을 하지 않고 생활을 꾸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하용조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월 200만원을 교회에서 보내 8명의 장학생을 정하고 생활비를 지원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김동호 목사님께서도 돕겠다고 나서셨다. 감사한 일이었다.
2013년 말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 주셨다. 한 사람은 강교자 박사였다. 강 박사는 전주대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가르치고 대한YWCA연합회 총무와 회장으로 20여년간 활동하신 분이다. 다른 한 사람은 손성인 박사였다. 그는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농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건국대 교수로 활동했다.
우리 세 사람은 탈북자가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의 역군으로서 선구자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됐음을 인식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통일을 준비하고자 탈북자들과 한국교회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운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사무실 개원을 준비했다. 향후 진행할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2013년 12월 2일 동서울가나안교회에서 개원예배를 드렸다. 이름은 ‘남북이 함께하는 샬롬공동체’로 지었다.
학생들은 매월 한 번씩 우리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강사를 모셔서 강의를 듣기도 한다.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과 장래의 꿈을 나누고 통일의 지도자로서 긍지를 갖고 생활한다. 특히 방학 때는 지리산으로 함께 수련회도 간다. 수련회를 통해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 격려하며 성장의 기회를 갖고 있다. 몇몇 학생들은 통일 후에 북에 가서 양계를 하겠다는 목표로 닭을 키우기도 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서 북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통의 창’이 돼 준다. 북한을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기 위한 준비는 남한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에 가서 교회 지을 생각은 하면서 북한을 세워 갈 사람들을 양성할 생각은 못 하고 있는 현실이 염려된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했다. 탈북 청년들은 얼어붙은 땅으로 돌아가 가시밭을 갈아엎고 돌들을 골라내고 옥토를 만들어 주님의 생명의 씨앗을 뿌릴 사람들이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 같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환상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나는 영원을 향한 꿈과 함께 탈북민들이 북한의 기둥이 돼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꾸고 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9) 어머니들 기도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여성들이 맡은 일 많지만 개교회주의 갇혀 의식·세계관 좁아져… 초교파적 여성 기도모임으로 깨어나
입력 : 2019-08-01 00:05/수정 :2019-08-01 00:22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뒷줄 왼쪽 두 번째)가 2004년 초교파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장영일 장로회신학대 총장은 우리 집에서 진행한 탈북자 모임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곤 했다. 총장 사모님도 오랫동안 탈북자들을 위한 봉사에 정성을 쏟으시며 새생활체험학교를 할 때면 탈북자 아이들을 업어 주고 돌봐 주셨다. 두 분은 내게 큰 힘이 돼주셨다.
나는 늘 장로회신학대가 학생들에게 통일을 향한 꿈을 준비하게 하고 교단도 협력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탈북자를 돕던 노영상(윤리학) 교수와 장 총장, 교단 북한선교위원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남북한평화신학연구소를 만들기로 했다. 꿈에 그리던 일 중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 종합회관을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기 위해 기부받은 돈 4000만원과 통일 선교를 위해 쓰려고 작정했던 나의 헌금을 합쳐 장 총장께 드렸다. 학교와 학생들이 북한 사역의 마중물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에서는 지금도 통일에 관한 연구 논문과 관련 서적을 꾸준히 출간한다. 매주 화요일 통일 선교를 준비하는 장로 100여명이 모여 강의와 토의를 나눈다.
일상 속에서 탈북자만큼 깊이 관심을 뒀던 게 우리 사회의 여성이었다. 한국교회에는 여성단체도 많고 교회마다 여성들이 맡은 일도 많다. 하지만 개교회주의에 갇힌 채 여성들의 의식과 세계관은 점점 좁아졌다.
2003년 9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딸인 앤 그레이엄 로츠 여사가 내한했다. 로츠 여사는 이틀 동안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기독교인 여성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켜 줬다. 대회 후 평가회를 하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깨어 일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큰 공감을 얻었다. 평가회 이후 다양한 후속 모임이 진행됐고 각 교파나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차원에서 때와 상황에 따라 기도할 수 있는 모임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이니 이름을 ‘에스더 기도회’라 정하고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한편으론 일본의 식민 지배를 이겨내고 눈물과 피를 흘리며 조국을 되찾는 동안 기독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점검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함께 뜻을 모은 이들은 2005년 1월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 모여 한국기독여성모임(KCWA)이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1907년 평양에서 성령이 휩쓴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은 몇몇 선교사들이 성경공부를 하며 기도할 때 죄를 자복할 마음이 생겨 회개 기도를 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제자들은 세상의 화려함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귀부인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을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모임에선 회개 기도와 북한을 위한 중보기도 운동, 성결하고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자는 의식개혁 운동, 성경공부 운동이 제안됐다. 이후 종교교회 새문안교회 영락교회 연동교회 등에서 모임을 가지며 1년에 한두 번은 24시간 금식기도회를 열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 등의 제목으로 나라를 내 자녀처럼 품으며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이 어머니들은 교회를 깨우고 국가 지도자들을 깨우는 처절한 기도자이자 신앙의 어머니들이다. 이 어머니들의 기도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40·끝) 95년의 삶, 감사로 채울 수 있어 감사
사랑 실천하는 삶 살아야…길·진리·생명이신 주님 따라 살다 보면 그 사랑 배우고 또 실천할 수 있을 것
입력 : 2019-08-02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지난 6월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이 땅의 어머니들에겐 자녀의 올바른 세계관 정립을 통해 밝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 여성들부터 말씀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고 자녀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2016년 2월 23일 연동교회에서 ‘3·1절 맑은 사회 기독어머니 기도회’가 한국기독여성모임(KCWA) 주최로 처음 시작됐다.
‘현명한 어머니는 사회를 바꾼다’(대하 7:14)를 주제로 진행된 기도회에는 기독여성 15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다음세대의 회복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세속적인 교육관을 회개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자녀 입시에 집착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신앙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위기에 놓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어머니들은 매주 금식기도를 하고 매일 선한 일을 한 가지씩 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몇 가지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자녀교육에 진력할 것’ ‘외식과 체면을 벗고 신앙이 바탕된 가정을 추구할 것’ ‘교회를 판단하거나 비난치 말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 건설에 이바지할 것’ 등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 한국 여성들이 이제 잠에서 깨어나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 선배들처럼 민족을 살리고자 맑고 빛나는 나라를 이룩하는 데 집중하면 복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생을, 자자손손 후대들을 위한 영적 제사장 국가를 세워 거듭나게 하는 데 바친다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는가.
어머니뿐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 성수만큼 중요한 게 이웃 사랑이다. 이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존재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다 보면 그 사랑을 배우고 또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통일 한반도의 꿈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뤄 주실 대한민국을 향한 역사적 선물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이웃인 탈북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마땅하다. 나와 동역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탈북 대학생들은 이제 장성해 사회에 정착했다. 지금은 아들딸을 데리고 매달 우리 집을 찾는다.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옛날 대가족처럼 30여명이 모여 식사하고 예배를 드린다. 금요일이면 탈북민들이 우리 사회의 크리스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경공부를 한다. 열심을 다해 말씀을 새기고 도전해가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한국교회가 탈북민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 정통교회와 성도들뿐 아니라 탈북민 세계에도 이단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그간 충격적인 소식도 많이 들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다가가 이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단은 특히 물질적으로 다가가 마음을 뺏는다. 생활비는 물론 쌀과 반찬까지 주며 거짓 복음을 강요한다. “하나님은 믿지만, 돈을 주기 때문에 이단교회에 안 갈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왜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통일 후 한국교회가 당면할 어려움은 상상보다 훨씬 클 것이다.
9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간의 삶을 돌아보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손길을 따라 가을 낙엽처럼 흘러왔을 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시간을 감사로 채워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