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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기독교 교육의 선구자'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 (21)-(30)

영국신사77 2019. 10. 11. 11:15

[역경의 열매] 주선애 (21) 기독교 교육은 학문이 아닌 체험하면서 배워야

올바른 가르침의 효과 얻기 위해 실천하면서 가르치고자 노력… 삶의 현장서 복음 가치 찾아야

입력 : 2019-07-08 00:07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1960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여성지도반 및 제3세계국가 학생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다.

‘분단된 내 민족을 어떻게 구원하고 한국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일생의 과제다. 나는 신앙교육을 통해 이 과제를 조금이라도 이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게 내 소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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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우리가 처한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의 사회화 과정이다. 단순히 서구 사회의 교육을 모방하거나 이식할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교육에는 교육 현장에 학생들을 직접 동참시키는 실제적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 교육을 통해 올바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게 기독교 교육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토록 하는 것은 각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는 의미다. 이로써 더 나은 교회와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교육자는 사람들이 이를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배우게 해야 한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며”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행함이 따르는 교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가르침의 효과를 얻기 위해 실천해 가면서 교육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는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복음의 핵심과 신앙생활의 기본적 가치다. 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그러나 가르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복음을 깨달아 복음에 기초한 가치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 복음의 가치를 삶의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는 게 현대 교육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선배 애국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기독교 교육을 학문으로 배운 일이 없다. 그러나 나라를 살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지도자 양성의 시급성을 깨닫고 기독교교육에 힘을 모았다. 전덕기 목사의 상동청년학원, 안창호 선생의 대성학교, 이승훈 선생의 오산학교처럼 기독교 학교들을 세워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낙후되고 혼란에 빠진 민족 구원의 길을 열어 왔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던 박영효 선생이 선교 초기 한국에 입국하려는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 부탁한 말이 좋은 표본이 된다.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헌법을 고치기 전에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백성을 기독교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은 신앙을 생활화한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이라 믿고 있다. 나 역시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화급함을 느껴 학문의 부족함을 스스로 알면서도 깊이 있는 학문적 탐구보다 교육에 마음을 더 기울였던 게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교회가 이런 소명을 안고 있는 내게 통로를 열어줘 평생 이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데 대해 하나님과 교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내가 1970년대에 맡은 과제는 여성들의 신학교육이었다. 당시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에서 여전도사를 교육하도록 하고 초급대학 과정을 개설해 내게 책임을 맡겼다. 숭실대를 떠날 수 없다고 했더니 숭실대와 장로회신학대가 협의해 각각 ‘반 전임’으로 가르치도록 결정했다. 두 학교의 짐을 지고 번갈아 강의하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2) 오랜 남존여비 전통에…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장로교 여성사’ 집필 과정 통해 나라·민족 교회 위해 크게 쓰임 믿어

입력 : 2019-07-09 00:05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1978년 열린 ‘장로교 여성사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여전도사 양성과는 초급대학 같았다. 하나님의 일에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인격에 결함이 없는 사람들을 선택해 교육하기로 했다. 이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에 여전도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역할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 봤다. 오랜 남존여비 전통 아래 여성이 집 밖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거나 가르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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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처럼 딸을 종처럼 여기거나 가난하면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 목록의 하나로 취급했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전도사 제도가 생겨났을까.’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했다. 시골에 갈 때마다 연로하신 장로님 목사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조선시대 말 개화운동에 이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절제운동 기독교교육운동 문맹퇴치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도운동도 함께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엔 왜 전도사의 역할이 오히려 축소됐는가.’ 일제강점기가 말기로 오면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 등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일제 총독부가 제재하고 핍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여전도사들이 산으로 숨거나 가정으로 들어가 버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활발하던 모습들이 사라져 버렸다.

광복 이후 여전도사 제도가 복구됐지만, 활동 분야는 초기에 비해 현저하게 축소됐다. 가정 심방과 목회자를 돕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교회에서 제기됐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일본의 정치적 박해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여성들의 자아의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때 내 동료들만 봐도 일제강점기에 여성은 조용히 집에 있어야 아름답다고 교육받았다. 목회자들이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개화기에 가졌던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세를 여성들이 이어가지 못한 탓도 있다. 우리 사회에 선배 여성 지도자들이 없었던 것도 여전도사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데 영향을 줬다.

여교역자 양성 문제에 대한 연구는 내게 한국교회여성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978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50주년을 앞두고 임원회에서 ‘장로교 여성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역사학자에게 맡기려 해도 예산이 없으니 ‘주선애 선생이 써보시오’라고 결의해버렸다. 전문가가 아니고 자료도 없고 등 여러 이유를 대며 고사할 수 있었지만 순종했다.

1년 안에 책을 만들어 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덜컥 받아들고 자료를 찾았지만 거의 찾지 못했다. 결국 생존해 계신 어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돌아가신 김양선 목사님이 소장하셨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님들의 보고서 복사본을 양성담 사모님으로부터 받아 연구의 기초로 삼았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대학부 학부장 겸 기독교교육학과장을 맡고 있었다. 교육과 집필을 동시에 소화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결국 1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희년 총회에서 ‘장로교 여성사’를 배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쓰면서 소중한 3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첫째, 주님의 십자가는 그 고통이 큰 만큼 가치도 지대해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 주님은 그 은혜를 무(無)값으로 주셨다. 둘째, 목석처럼 학대받아 온 여성 선배들이 정말 위대한 걸음을 걸어왔다. 셋째,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여성들이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3) 중년여성 해방구 ‘교회여성지도자교육원’ 열어

젊은 시절 가족을 위해 헌신만 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이들에게 꿈과 믿음의 동력 얻게 해

입력 : 2019-07-10 00:06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맨 뒷줄)가 1979년 여성지도자교육원 수업 중 ‘인간관계 훈련’ 강의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 50대 여성과 대화를 나누다 가슴 사무칠 얘길 들었다. “선생님, 대학 다닐 땐 꿈이 참 많았는데 결혼하고 애들 키워 대학 보내고 나니 남편은 일에 빠져 밤중에 들어오고 아이들 역시 자기 생활에 시달리고 저는 혼자 종일 집에 앉아 있기만 해요. 이렇게 허송세월해도 될까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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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회에 이런 중년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꿈을 주고 믿음의 동력을 얻게 하는 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로회신학대(장신대)는 월요일엔 공간이 많이 비고 교수님들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교수회의를 거쳐 봄학기에 ‘교회여성지도자교육원’을 개원하기로 결정했다.

영락교회에서 어머니반을 맡던 시절 어머니들은 “성경을 여기저기서 배웠지만 일관성 있게 배우지 못해 개론을 좀 배우고 싶다”는 요청을 하곤 했다. 그래서 커리큘럼에 성경개론을 반드시 넣고 조직신학개론, 기독교교육, 인간발달심리, 상담학 등 2년제 교육과목을 짰다. 그렇게 월요일마다 1시간 30분짜리 강의를 3과목씩 들을 수 있게 했다. 점심시간엔 서로 교제를 나누며 신학대 캠퍼스의 아름다움도 만끽하게 했다. 중년 여성들이 공부도 하고 휴식도 즐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개원 첫날부터 60~70여명의 중년 여성들이 몰려왔다. 그다음 학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입학했다. 평신도 지도자반 1·2학년 총 5개 반에 300명 정도가 모였다.

교육원 수업 중에는 따로 날을 잡아 하루 종일 20명씩 그룹으로 교육하는 ‘인간관계 훈련’이란 필수 과목이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워크숍은 늘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어떤 사람은 교육원을 통해 잊고 살았던 학구열이 되살아나 새로운 비전을 품고 신대원에 진학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박사학위를 취득해 교수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권사님 한 분은 여학교 동창들을 모아 성경반을 조직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가정에 복음을 전해 신앙 없던 남편들이 교회에 다니게 됐다는 보고도 받았다.

한국교회가 점차 기독교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장신대 기독교교육과도 발전을 거듭했다. 한일신학교에서 고용수 교수를 모셔왔고 오인탁 교수는 독일 튀빙겐대에서 교육철학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임창복 사미자 교수도 각각 미국 피츠버그대와 드류대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다. 모두 내가 기독교교육을 가르친 학생들이었다. 왕마려(Maria Mellrose) 선교사를 대구 계명대에서 모셔오면서 기독교교육연구원도 문을 열었다. 다른 학과 못지않은 교수진이 구성됐고 혼자 해오던 무거운 짐을 맡길 수 있어 해방감도 느꼈다.

이 무렵 박창환 장신대 학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번에 주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좀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역할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학장님, 여자들에겐 장로 안수도 안 주는데 어떻게 제가 대학원장을 하나요. 전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제가 하면 대학 이미지도 떨어질 겁니다.”

진심으로 사양했다. 그러나 박 학장님은 “여성 안수도 안 주니까 주 선생이 해야지요”라고 거듭 요청하셨다. 나는 ‘이분이 미래를 보며 모험을 하시는구나’ 생각했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들은 즉각 미국 퀸즈칼리지에 서류를 보내 명예박사 학위를 신청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20여년 만에 정교수가 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4) 은퇴 후 어려운 교회 도우려 나이 육십에 운전면허

시골 마을 조그만 교회 재정 없어 사경회·교사강습 대부분 못 받아… 오랜 꿈 실행하려 용기 내 운전

입력 : 2019-07-11 00:07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1984년 8월 한국교회 선교100주년기념 교육대회에서 강의하고 있다.

때때로 대학원장 회의에 참가해 보면 대학원장들은 기사가 운전하는 비싼 차를 타고 왔다. 나는 대중교통을 타거나 이따금 택시를 이용했다. 비싼 차를 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게도 운전 기술이 필요해보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이 60에 처음 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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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됐다. 40대부터 은퇴 후에 대한 꿈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창밖으로 시골 마을의 조그만 교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교회들은 재정이 없어서 사경회도 못 하고 교사 강습도 받아볼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일 것이다. 은퇴 후 에는 이런 교회를 도와야겠다.’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시절의 계획이었다.

이제 60세가 됐으니 용기를 내야지 하고 학교 근처에 있는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두 달 치 학원비를 냈다. 두 달 치를 낸 것은 시간이 충분히 없을 뿐 아니라 노인의 모든 학습은 젊은이보다 몇 배나 느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 시험공부를 위해 시간을 쓰기가 너무 아까워서 꼭 학교 출퇴근 버스 안에서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실기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 무난히 면허증을 딸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나의 운전을 극구 말렸다. 오랫동안 운전한 사람도 나이 60이 되면 그만둘 때인데 왜 위험한 운전을 하려느냐고 했다.

나는 몰래 중고차를 사서 학교에 놓아두고 학교 기사에게 동승운행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학교 주변을 가끔 운전하며 익혔다. 그러다 집에까지 몰고 가서 식구들과 타협을 했다.

내가 운전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많은 중년들이 망설이다 용기를 얻었다며 좋아한다. 그래도 83세까지 23년 동안 노인인 어머니의 기사 역할뿐 아니라 그 많은 회의 참석에 이용할 수 있어서 늦게나마 배운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운전하면서 더 많은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출퇴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엔 한창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데모 행렬이 거리를 누볐고 곳곳마다 길이 막히고 최루탄에 휩싸였다. 시골에선 초가집을 헐고 수도를 새롭게 만들며 길을 닦고 농사법을 바꾸는 저녁 모임들이 한창이었다.

박 대통령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에 열심이었다. 고속도로를 내고 나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고 했고 통일벼를 심어 쌀이 남아돌 것이라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박 대통령이 밀고 나가고 있었다. 나도 장기간 집권하기 위한 홍보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라가 새로워지고 국민들의 안색이 밝아지는 것 같아 소망이 생겼다.

어느 날 새마을운동본부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바쁘다고 핑계를 댈까’하면서도 어떻든 나랏일이니 한번 나가보기로 했다. 새마을운동을 지도하는 여성들만 몇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개화기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배들, 애국부인들, 그들의 학문에 대한 열기,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일으킨 YWCA운동,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 등 하고 싶었던 여성 관련 강연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신자든 아니든 우리나라 여성들을 상대로 사회교육을 할 수 있다는 데 사명감을 갖고 강연했다. 한 번은 새마을운동본부에서 내가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교수님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어느 당의 정치 강연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교육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몇 년을 ‘새마을 여성 강연자’로 살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5) “연예인들 사이에 성경공부 붐 일어났어요”

새벽 2~3시에 귀가하는 연예인 많아… 하용조 전도사, 낮에는 학교 생활 밤에는 성경 공부 인도로 1인 2역

입력 : 2019-07-12 00:02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운데)가 1980년대 초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오른쪽)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970년대 중반쯤이었다. 내 연구실에 자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학생이었던 하용조 김지철 전도사였다. 두 사람은 아침마다 조용히 성경공부를 같이 하고 싶은데 장소가 변변치 않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출근하던 나는 학교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학교 측이 내 수업을 대부분 2교시부터 시작하도록 배려해 준 이유다. 아침에 비어 있는 공간이었던 연구실을 두 사람에게 흔쾌히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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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전도사와 김 전도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자 김준곤 목사님의 제자였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울 뿐 아니라 지성적이어서 장래를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하 전도사가 연구실에 와 고민스러운 일이 있다며 얘길 꺼냈다.

“지금 학교 공부를 하면서 교육전도사로 마포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영어공부를 해서 유학 준비도 해야 하는데 다른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곽규석(코미디언)씨가 부도가 나서 낙심 중에 있다가 예수를 믿게 되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구봉서(코미디언) 정훈희(가수)씨까지 우리 성경공부에 몰려오는데 안 할 수도 없고 바쁘기는 하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이 듭니다.”

그 순간, 이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이자 큰 은혜라는 확신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교육전도사를 그만두고 그들과 성경공부 사역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생활비는 다른 방편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용기를 내라고 북돋아줬다. 하 전도사의 이야기가 내게 감명 깊게 다가와서 구씨 집에서 진행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가본 적이 있다. 10여명이 모여 있었다. 다음 주일, 내가 지도하던 영락교회 어머니반에서 그 일을 이야기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성경공부 붐이 일어났는데 그 일을 담당하던 하 전도사가 너무 바빠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 전도사에게 마포교회 전도사 일을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우리 반에서 좀 도울 수 없을까요.”

단번에 연보가 넘치게 나왔다. 연예인 그룹장인 곽씨와 영락교회 당회장이셨던 박조준 목사님이 회합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곽씨는 박 목사님께 “1년만 보조해주시면 우리가 책임지고 감당할 테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반에서 모은 헌금과 교회의 선교지원금이 함께 전달됐다.

마음에 흥분과 감사가 넘쳤다. 그런데 주일모임을 위한 장소가 없다는 소식이 또 들려왔다. 망원동 판자촌 사역을 도와주시던 마애린(Eileen Moffett) 선교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우선 자기 집 뜰을 쓰면 어떻겠느냐”며 선뜻 공간을 내주셨다.

연예인들은 대부분 밤일을 하고 새벽 2~3시에 귀가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 전도사는 낮에 학교생활을 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사역 외에도 밤마다 술에 취해 귀가한 연예인들의 전화에 잠도 못 자고 그들을 찾아가곤 했다.

연예인예배를 마치면 하 전도사의 셋방에 모여 라면을 끓여 먹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늘 가수 윤복희 자매가 손수 다 했다. 교회라 해도 장로 권사 집사도 없으니 하 전도사가 안내하다 올라가 예배 인도하고 설교하고 예배를 마치면 연예인 성도들을 위해 택시도 잡아줬다.

연예인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 선교사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심장이 떨린다. 나는 하나님께서 연예인들을 통해 교회 부흥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며 이 시대에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6) 길고도 짧았던 장신대 23년, 눈물의 정년 퇴임식

입력 : 2019-07-15 00:01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89년 영락교회 목회자 사모들과 그룹 상담을 진행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학생들의 데모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배척을 받아 ‘주 교수 나가라’는 벽보가 붙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됐다. 당시 기도 중에 하나님께 받은 응답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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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생들을 두려워하느냐. 장로회신학대 학생들은 너의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 아니냐.” 나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맞습니다. 주님이 섬기러 왔다고 하셨지요. 저도 섬기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종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는 종들의 종입니다.”

그 후에도 시위는 계속됐지만, 학교는 내게 에덴동산처럼 평안하게 느껴졌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견해 보이고 청소 노동자들이 다시 보였다.

학교의 난방이 변변치 않아 추운 겨울날이면 벌벌 떨며 다녔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저녁을 먹고 나면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더 앉아 있고 싶어졌다. 하지만 교회에 강의를 가야 했다.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는 저 사람과 뭐가 달라서 배불리 먹고 책가방 들고 교회로 가고 있는 것이냐.” 나는 또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저 역시 저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제가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용서하옵소서.”

23년 세월은 길고도 짧았다. 1989년 정년퇴직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퇴임 감사예배는 강의실 몇 개를 합쳐 강당처럼 쓰던 공간에서 진행됐다. 감사의 답사를 해야 할 차례가 왔는데 학교에서 생애를 보내게 하신 하나님 은혜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예배 후 기독교교육과 학생들이 미리 마련해 놓은 깜짝파티가 있었다. 제자들은 예쁘게 만든 화환도 씌워줬다.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행사였다.

퇴임 감사예배 후 ‘내가 더 봉사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중에 목회자와 사모, 여전도사들이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을 때 마땅히 찾아가 의논할 곳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영락교회엔 결혼 법률 청소년 신앙 직업 등의 상담은 하지만 교역자 사모와 여전도사들을 위한 상담은 없었다. 상담 사역을 맡았던 목사님께 “내가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신학생들을 장기간 가르친 경험으로 한번 맡아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매주 목요일 상담실에 나갔다. 처음엔 내담자가 별로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늘었다. 대개는 전화 상담이었다. 의논 한마디 없이 갑작스레 신학을 하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남편이 못마땅한 사모, 남편이 의처증에 걸려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모 등 심각한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상담을 시작하면 두세 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들고 울며 얘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일이 계기가 돼 교역자의 가정 문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사모 성경반을 조직해 매주 월요일에 모이기로 했다. 7~8명이 와서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도록 인간관계 훈련을 곁들였다. 때로는 야외로 나갔다. 사모라는 직분상 폐쇄적이기 쉬운 결점을 보완하고 좀 더 개방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많은 토의와 나눔의 시간을 가지며 성경공부를 했다.

상담을 통해 정말 교회가 살려면 교역자 가정이 먼저 건강해져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교역자들의 영성을 살리고 정신 건강도 관리할 수 없을까 생각하는 계기도 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7) 소외된 여교역자 노후대책 위해 안식관 짓기로

월남해 혈혈단신 외롭게 생을 마친 사연에 마음 아파 결의… 뜻 공감한 많은 분들 도움으로 건립

입력 : 2019-07-16 00:01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위치한 여교역자연합회복지재단 안식관 본관 전경.

여교역자 ‘노후대책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로 결의했다. 평생 고생하면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여전도사들에게 나는 빚을 지고 사는 것 같았다. 특히 북한에서 넘어온 내 또래 여전도사가 있었는데 병이 나서 교회 일을 못 하게 됐다. 갈 곳을 찾다가 기도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후 몸이 심하게 부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병문안 갈 시간을 내지 못하고 며칠을 미루던 사이 그가 하나님 나라로 떠났다. 부모도 자식도 없을 텐데 혼자 앓다가 생을 마친 그 전도사를 생각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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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면에 있는 임야 9000㎡(약 3000평)이면 안식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땅만 있으면 건축은 어떻게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헌납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러 번 답사를 해보니 진입로에 음성 나환자촌이 형성돼 있었다. 아무래도 안식관으론 적합지 않으니 급히 땅을 매각해 그 돈을 바치기로 했다.

나 외에도 두 사람이 땅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평소 여교역자들의 현실에 나와 같은 시선으로 봐주던 홍순춘 전도사와 박정득 권사였다. 홍 전도사는 자기가 갖고 있던 청주시 땅 5400㎡(약 1800평)를 기증했고 박 권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임야와 전답 18만㎡(약 6만평)를 기증했다.

성결교 신학교를 졸업한 박 권사는 장사하느라 하나님 일을 못 한 것이 죄송해 ‘나중에라도 꼭 기도원을 운영해야겠다’ 싶은 마음으로 땅을 찾다가 용문산 관광지에 있는 목장을 매입했었다. 그러다 여전도사들의 노후를 위해 쓰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기꺼이 무상으로 헌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박 권사가 기증한 땅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전답이어서 그곳으로부터 약 10㎞ 떨어진 곳에 새로 땅을 샀다. 1982년 4월 드디어 법인 설립 인가가 나왔다. 그때부터 30여년 꿈꿔오던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뤄져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됐다.

건축이 시작되자 뜻에 공감해준 분들이 목소리를 내주셨다. 한경직(영락교회) 목사님은 “안식관 건립에 협력하십시다”하며 격려하셨고, 이종성 장로회신학대 학장님은 “나머지 절반의 도움이 됩시다” 하며 돕자고 나서주셨다. 나는 “교회의 소외자를 도웁시다”라고 외치며 각각 호소문을 냈다.

처음 안식관 준공예배를 드린 건 1986년 4월 28일이었다. 그날 한경직 목사님이 오셔서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기 위해 이렇게 많이 수고한 사람들이 여교역자들인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대접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축복하셔서 여교역자들과 여러 성도가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줘서 안식관 준공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선생님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이 여전도사들이 스스로 안식관을 짓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늙은 사라가 아기를 갖게 하실 때 나타나셨던 것처럼 여교역자 안식과 건축에도 나타나신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목사님들이 안식관을 방문해서는 “어느 나라에 이 같은 규모의 여교역자 안식관이 있겠느냐”고 감탄한다. 이제는 공동체로 자리를 잡았다. 영성훈련원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영적 성장에 힘쓸 뿐 아니라 교회나 단체가 영성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8) ‘분뇨 못’ 뚝방촌 아이들… 사랑과 인내는 변화 가져와

벌금 무서워 화장실 못짓는 판자촌… 기독교교육과 학생 4명이 숙식하며 화장실 짓고 야간 중학교도 만들어

입력 : 2019-07-17 00:07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둘째 줄 왼쪽 네 번째)가 1975년 제1회 망원중학교 졸업식에서 이상양(둘째 줄 왼쪽 세 번째) 전도사, 학생, 교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급작스러운 산업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확산됐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은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었는데 무척 남루한 차림의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다녔다. 하루는 아이들이 사는 곳이 궁금해 뒤따라가 봤다. 한강 쪽으로 몇 분쯤 걸어가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천 세대의 판자촌이 둑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둑 너머에는 강 쪽으로 다시 둑을 쌓고 거기에 서울 시내 분뇨를 모두 쏟아부은 ‘분뇨 못’이 형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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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허가 판자촌은 공중에서 사진을 찍어 보고 새집이 생기거나 확장될 경우 벌금을 물리기 때문에 화장실이 없다고 했다. 막대기를 세우고 모래를 채운 가마니로 막아놓은 화장실은 몇 곳 있었지만, 도저히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인근 밭에서 용변을 봐야 했고 파리가 새까맣게 온 마을을 덮었다. 나는 마음이 슬퍼서 지금의 성산대교 근방 둑에 서서 울었다.

다음 날 나는 학부 기독교교육과 3학년 강의실에서 망원동 뚝방촌 사람들의 참혹한 삶을 본 대로 전했다. 강의 후 서너 명의 학생이 따라 나오면서 “저희가 한 번 가볼 수 없겠습니까” 하며 위치를 물었다. 학생들은 그날로 동네를 찾아갔고, 학생들도 눈시울을 적셨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후 하루에 100원짜리 방을 얻었다. 그 동네 한복판에 있는 비닐 창문의 한 칸짜리 온돌방이었다.

이상양 정태일 기현두 고애신 4명 학생은 그 방에서 같이 먹고 자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동네에 환자가 생기면 업어서 병원에 가기도 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화장실을 짓는 일이었다. 관청에서 못 짓게 할 것을 알고 밤마다 전깃불을 켜놓고 조금씩 지었다. 땅을 길게 파고 시멘트로 화장실을 지었다. 다음은 더러운 개울 위로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밤마다 몰래 노동을 했고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다녔다.

그 팀의 단장인 이상양은 폐결핵 환자였다. 성품이 부드럽고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겨 동네에서는 ‘천사 전도사’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 전도사에게 등록금을 하라고 돈을 주면 금방 뚝방촌 사람들을 돕는 데 다 써 버렸다. 학교에 갈 버스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분뇨 처리장에 드나드는 성동구의 분뇨차 기사에게 부드럽게 찾아가 대화하고 전도하며 사귀었다. 차량은 주로 한강 둑 위로 다니기 때문에 광나루까지 동선이 이어졌고 기사는 이 전도사를 차량으로 태워다 주곤 했다.

한 번은 내게 “교수님, 버스 차장들(시내버스에서 문을 여닫으며 손님을 태우고 내리던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문을 여닫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내가 알 리 없었다. “1400여번이래요.” 이 전도사는 늘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공부를 중단한 아이들을 위해 18㎡(약 9평)짜리 공간에 세를 얻어 장로회신학대에서 낡은 의자를 가져와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다. 첫날 수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기도하자고 했더니 기도시간에 분필이 날아오는 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전도사가 없는 돈으로 밥을 지어놓고 심방을 가면 아이들이 와서 먼저 다 먹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교육은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2~3년 후엔 공장에 나가는 아이들이 공부하기 전 자기들이 반찬을 사서 저녁을 지어놓고 이 전도사를 위해 저녁상을 차렸다. 사랑과 인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9) ‘한집 한 통장 갖기’로 쪽방촌에 새 소망 피어나

이 전도사 ‘내 집 갖기 운동’ 제안… 통장 보며 활짝, 동네에 희망 움터

입력 : 2019-07-18 00:01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 네 번째)가 1976년 이상양 전도사(왼쪽 세 번째), 망원동 빈민선교를 돕던 영락교회 백합회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상양 전도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수록 뚝방촌 사람들의 상담 요청이 많아지고 도움 청원도 늘어났다. 이 전도사는 봉사하는 동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어느 날 저녁 공터에 불을 밝혀 놓고 동장과 동네 어른, 이종성 장로회신학대(장신대) 학장님을 불러 모임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는 무허가 집에 사는 이들이 집이 언제 뜯길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걸 멈추게 하고 싶다며 ‘내 집 갖기 운동’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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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도사는 그들에게 새 소망을 주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 첫 단추는 ‘한 집 한 통장 갖기’였다. 이 전도사가 저축통장을 책임지고 맡기로 하고 주민들이 하루 벌이를 하면 생활비를 떼고 저축을 독려키로 했다. 그는 땅을 매입해 연립주택을 지을 계획도 갖고 있었다. 판잣집을 헐면 정부에서 보상금을 지급하는데 거기다 집을 지을 수 있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주민들에게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며 27㎡(약 9평)짜리 집을 지어 우리 손으로 단장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격려했다.

그는 통장을 1000개나 만들었다. 그리고 ‘한 집 한 통장 갖기’를 시작했다. 나는 금융 사고가 많을 때에 가능할까 싶은 의심도 있었지만, 이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길 기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그러곤 이 모든 과정을 미국에 있는 마애린(Eileen Moffett) 선교사에게 알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집은 어떻게 짓는다 해도 대지가 없으니 미국에서 대지 구입비를 도와줄 곳이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기도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2700㎡(약 900평)를 살 수 있는 땅값이 마련된 것이다.

빈 병과 엿을 바꿔 파는 사람,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싣고 파는 사람, 생선을 이고 다니며 파는 아주머니 등이 모두 통장을 갖고 저녁이면 이상양 전도사를 찾아왔다. 저금통장을 보며 활짝 웃는 표정이 아름다웠다. 점차 술 먹는 사람들이 줄었고 싸움도 사라졌다. 동네에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사가 시작됐고 흙벽돌 집이 길게 들어섰다. 때마침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의 모범이 된다며 마을 동장에게 포상금도 지급했다. 그 후로도 숨은 기도자들의 헌신으로 모금이 이뤄졌다. 영락교회 어머니 성경반이 중심이 된 ‘백합회’도 그중 하나였다. 크리스마스엔 조그마한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 가가호호 방문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그들에겐 큰 기쁨이 된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전도사의 병세가 깊어지더니 검사 결과 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때문에 망원동에 처음 갔고 거기서 숱한 고생을 하다 그렇게 된 것 같아 죄책감에 휩싸였다. 수술하고 누워있던 병실에 찾아갔더니 이 전도사는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이 이곳에 보내주셔서 제 생애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달관한 신앙 간증이었다. 3월 개학을 앞두고 시간을 내 이 전도사를 찾아갔다. 그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이번에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면 제 집사람과 아들을 부탁합니다” 하며 유언처럼 자기 심중을 들려줬다. 얼마 후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977년 3월 25일. 장신대 학도 호국단 주최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장신대 학생들은 매년 3월 말 이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리곤 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0) 묘향산 관광이나 하라고? 차라리 금식기도회!

북에서 참석 요청한 아리랑 축제에 300명 중 90명만 참석한게 문제 돼 예정된 봉수교회 방문일정 틀어져

입력 : 2019-07-19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002년 평양 방문 당시 고려호텔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한민족복지재단에서 ‘6·15회담’ 기념으로 북한의 봉수교회 성도 300명과 한국교회 지도자 300명이 함께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한민족복지재단 전 이사장이었던 이승희(연동교회) 목사님의 배려로 방문단에 합류하게 됐다. 54년 만에 방문하게 된 내 고향.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볼 마지막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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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서해로 나갔다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아니라 평양을 향해 직진하듯 날아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북한 땅을 내려다보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산에는 푸른색이 안 보였고 붉은 산등성이들과 바둑판처럼 몰려 있는 집들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농사짓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땅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착륙한 비행장엔 커다란 벤츠 버스 10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남한에서도 보기 드문 고급 버스였다. 짐 조사가 대충 끝나자 나는 버스 앞자리에 앉았다. 열심히 북한 사람을 구경하려고 확 트인 앞 창문과 옆 창문을 번갈아 가며 내다봤다. 이동하는 길목엔 자동차는 하나도 안 보이고 이따금 시커먼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얼마나 고생한 얼굴일까’ 싶어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30분 정도 주행하는 동안 한 사람도 우리 일행이 탄 차를 쳐다보지 않았다.

큰 버스가 10대나 줄지어 가는데 몇 대인지,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한 번쯤은 호기심으로 볼 만도 한데 사람들은 기계처럼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말하는 자유는 물론, 보는 자유조차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해 연동교회 권사님과 함께 9층 방을 잡았다. 내가 자라던 신양리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양 시내를 완전히 밀어버리고 평지를 만들어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평양 기차역이 얼마 멀지 않고 대동문에서 보통문으로 가는 큰길에 호텔이 자리 잡은 걸 보니 내가 다녔던 서문 밖 유치원, 정의여자고등학교도 어디쯤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낮은 언덕들이 많이 있어 장대재 남산재 오동포재로 불리던 곳에 벽돌집 교회당이 우뚝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됐고 그 위엔 크고 웅장한 건물만 서 있었다.

건물 담벼락에는 큰 글자로 쓴 구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어버이 수령님은 살아계신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미제(美帝) 침략자들을 섬멸하라.’ 사거리 한복판에 여순경이 수신호로 교통정리 하는 모습은 한국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그날 밤은 대한민국 축구팀의 월드컵 8강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방마다 텔레비전은 있었지만, 북한 선전만 나왔다. 월드컵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내려와 총무 목사님께 축구 경기 결과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은 중국 베이징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4강에 진출하게 됐답니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와!”하고 소리치며 서로 껴안고 기뻐하며 야단이 났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딴 세계 사람들 같았다.

그때 공지가 전달됐다. 어젯밤 참석을 요청한 아리랑 축제에 300명 중 90명만 참석한 게 문제가 돼 예정된 봉수교회 방문 대신 묘향산 관광을 간다는 거였다. 한 목사님이 외쳤다. “우리가 묘향산에 관광이나 하려고 왔습니까. 차라리 여기서 금식기도회를 하면 어떻습니까.”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8991&code=231115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