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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기독교 교육의 선구자'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 (11)-(20)

영국신사77 2019. 10. 11. 11:07

[역경의 열매] 주선애 (11) 고달파도 슬프지는 않았던 남산 해방촌 기숙사

추위와 배고픔 이길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주의 길 가는 이들이 겪는 잠시 동안의 고생일 뿐이라 생각

입력 : 2019-06-24 00:07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50년쯤 장로회신학교 여학생, 교수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남산 해방촌엔 유달리 북한 사람이 많이 살았다. 이북에서 피난 온 대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송죽원’이란 학사가 생겨 그곳에서 생활하게 됐다. 건물은 꽤 컸지만, 난방이 안 됐고 전기도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한겨울에도 미군들이 쓰던 매트리스 한 개에 두 사람이 같이 누워 잤다. 너무 추워 견디기 힘들 때 조금 따뜻하게 자는 방법이 있었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반대로 누워 내 발은 옆 사람의 겨드랑이 밑에, 옆 사람의 발은 내 겨드랑이에 감싸고 자면 발에 따뜻한 기운이 돌아 잠이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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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교 여학생들은 공부하느라 바빴다. 북한에선 영어를 배우지 못했는데 영어는 필수였고 헬라어 히브리어도 해야 하니 도통 정신이 없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식사는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죽 한 그릇이 전부였다. 영양 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밤에 공부하려면 빈 잉크병에 석유를 담아 솜이나 헝겊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켰다. 그렇게 펄럭거리는 뿌연 불 밑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공부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노라면 졸음이 몰려와 꾸벅꾸벅 졸다가 불에 닿아 머리카락을 태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늘 허기지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피난민 여학생들은 금요일 저녁마다 6~7명씩 모여 철야기도를 했다. 기도처는 기숙사 인근 충무로교회였다. 기숙사는 밤 10시만 되면 사감 선생님의 점검이 있었다. 선생님의 최우선 임무는 10시 이후 아무도 나갈 수 없도록 커다란 대문을 굳게 잠그는 일이었다.

담장은 높고 육중한 대문은 안쪽에서 열 수 없게 잠겨 있었다. 사감 선생님의 점검이 끝난 후 몰래 모인 우리는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대문 옆에 설치된 청결통(화장실)을 활용하는 게 우리가 세운 탈출전략의 핵심이었다. 청결통 위로 올라가면 담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양에서 오신 양효숙 언니가 용기를 내 담을 넘었고 미리 준비해 둔 열쇠로 밖에서 대문을 열었다. 처음이 어렵지 성공하고 보니 별 것 아니었다. 다시 들어갈 때는 여러 사람이 떠받들어 한 사람이 담을 넘은 뒤 청결통 위에서 내부 상황을 확인하고 사감 선생님이 없을 때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당 마루에 엎드려 개별기도를 하고 한 시간쯤 후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기도를 했다. 회개 기도를 주로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 동지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시간이었다. 마음에 시험이 드는 기도 제목을 내놓으면 한마음으로 중보기도를 해줬다.

우리에게 이 시간은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서로 고백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기도공동체였다. 북한에 식구들을 두고 혼자 넘어온 학생들이 마음의 치유를 받는 기회이기도 했다.

기숙사 탈출과 진입 외에 큰 문젯거리는 역시 겨울철 추위였다. 내복이 변변치 않았던 터라 기도할 때마다 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우리는 추위를 버텨보려고 한 사람 위에 한 사람이 엎드리고, 그 위에 또 한 사람이 엎드려 서로의 체온과 몸무게를 감당해 보느라 안간힘을 썼다. 손끝까지 꽁꽁 얼어붙을 때쯤 기숙사 담장으로 향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동무들 표정엔 슬픔이 전혀 없었다. 주의 길을 가는 이들이 겪는 잠깐의 고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모두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도 후 담장 앞에 도착할 때면 항상 기숙사를 나올 때보단 그 높이가 낮게 느껴졌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북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 떠올라 눈물…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에 삶과 인격 오롯이 표현돼 감동 받아

입력 : 2019-06-25 00:01/수정 : 2019-06-25 00:27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1949년쯤 사진을 촬영했다.

누구나 생애 가장 특별한 축복이라 여길만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정신적 영적으로 삶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잊히지 않는 축복의 순간이다. 지금도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내 영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1948년 남한에 와서 처음 예배를 드린 곳이 영락교회였다. 지금의 봉사관 자리에 있던 베다니전도교회(현 영락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마당까지 가득 차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교회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귀에 꽂히는 우렁찬 찬송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찬송을 듣는 게 몇 해 만인가 싶었다. 북한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가 떠올랐다. 한 목사님의 모습은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성도에게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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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서울에 돌아와 영락교회 유년부 지도를 맡았을 때 한 목사님은 이따금 유년부를 찾아와 축도를 해주셨다.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데 탁월한 목회자였다. 기도 한 번을 하시더라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언어로 해주셨다.

한 목사님은 매 주일 아침 일찍 주일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본당과 교회 마당에 놓여 있는 돌계단 중간에 서 계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그곳에 서 계시며 영아부부터 중고등부, 대학부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모든 학생과 교사, 성도들과 인사를 주고받으셨다. 멀리서 지나가는 성도가 목사님께 다가서지 못해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손짓만 전해도 빠짐없이 목례로 반겨 주셨다.

한 목사님의 인격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에 나는 탄복했다. 순수하고 복음적인 설교에 그분의 삶과 인격이 오롯이 표현됐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새해가 되면 장로회신학교 이광순 교수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는 목사님 자택을 방문해 세배를 드리곤 했다. 거실이 넓지 않아 세배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오붓하게 말씀도 나눌 수 있었고 한 해를 의미 있게 시작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 일행이 댁을 나설 때면 늘 문밖까지 따라 나오셔서 눈길 조심하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그의 겸손함에 언제나 내 머리가 절로 숙어졌다. 한 목사님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닮을 수 있을까 싶을 뿐이다. 지금도 영락교회에 가면 한 목사님의 향취를 느끼곤 한다.

1950년 5월 학교를 졸업하면서 박형룡 박사님의 권면에 따라 진학의 길을 찾아봤다. 때마침 연세대에 신학과가 생겨 성서신학대학원 과정을 공부해 볼 요량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장로회신학교 추천서가 필요해 신청했는데 며칠 후 박 박사님의 사모님한테서 나를 보자는 연락이 왔다. 영문을 모르고 찾아간 자리에서 뜻밖의 얘길 들었다.

“주 선생, 어찌 학교를 배신할 수 있어요.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자유주의 신학을 가려고 하십니까.”

나의 무지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외국에서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울면서 사모님께 사과를 드렸다. 기도 끝에 진학 대신 목회의 길을 내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제일 먼저 부르는 곳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여기겠다고 결심했다. 며칠 후 부산에 있는 김형식 전도사님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 만남은 곧 부전교회로 향하는 사역의 길이 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3) 피난중에도 찬송… 기독교인 삶은 달랐다

목회 중인 부산에 피난민들 몰려와… 식량 떨어지고 전사 소식 들려와도 찬송 부르며 기도로 아픔 견뎌내

입력 : 2019-06-26 00:04
1950년 5월 26일 서울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제3회 졸업식 모습.

부산 변두리에 자그마한 목조 건물로 건축된 부전교회엔 교인 100여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를 이끄셨던 김형식 전도사님의 설교는 정말 뜨거웠다. 교인들은 젊은 전도사를 잘 따랐고 새벽기도는 물론 밤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백남조 집사님께서는 서울에서 오는 나를 위해 흙벽돌로 방 한 칸, 부엌 한 칸을 자기 집 마당에 지어주셨다. 내겐 오랜만에 독립적인 주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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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정부를 수립한 지 3년도 안 돼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의 꿈은 혁명뿐이었다. 남한은 군인이나 무기가 채 준비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소련과 의논해 남한을 공산화하기로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전쟁에 남한은 꼼짝 못 하고 당해야 했고 전쟁이 계속되자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평양과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 조금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 집을 찾았다. 단칸방 뜰에는 피난 보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부상당한 군인들은 학교에 마련된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도울 사람이 모자랐다. 나는 임시 육군병원에 심방을 다녔다. 곳곳에서 열리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교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피난민들은 대부분 학교나 교회 건물에 모여 살았고 마당에 불을 피워 밥을 짓는 형편이었다.

부산은 점점 난민촌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보통사람과 달랐다. 피난생활 중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찬송 소리가 들렸고 밤이면 천막교회 안에서 철야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비록 식량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물지게를 지고 멀리 다닐지라도 불평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전사자들의 소식이 들려오면서 비보를 들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기도로 아픔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환난이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부산 거리엔 슬픔에 가득 찬 피난민들의 탄식소리가 높았지만 전쟁 통에도 크리스마스는 다가왔다. 교회마다 단출하지만 반짝이는 장식이 걸렸고 아이들은 모여서 밤샘을 하며 새벽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를 아는 교인들은 마구간 같은 곳에 머물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통해 성탄을 마음에 기리고 감사함을 느꼈다. 피난살이가 어렵고 고생스러웠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우리 소망과 생명 되신 주님의 탄생이 더 없이 피부로 와 닿았을 것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교인들과 밤새 찬양을 부르며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하러 다녔다. 아직 부산 지리가 익숙지 않아 교인들을 따라다니며 찬양에 목소리를 더할 뿐이었지만 밤새 피곤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었는데 어느 뚝방 같은 곳에 올라서서 보니 흰 눈이 내린 ‘콘셋(반원형) 막사’ 수십 개가 큰 벌판에 흩어져 있었다. 뚝방에 올라선 채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자 갑자기 막사에서 군인들이 뛰쳐나왔다.

“할렐루야.” 군인들이 눈 위에 꿇어앉아 두 손을 움켜쥐고 기도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얼마나 자유가 그리운 자들인지요. 찬송을 부르고 싶어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릴 구원하신 것처럼 저들에게 자유를 주옵소서.’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4) “깔치 왔네” 비웃던 아이들… 나중엔 울며 회개

유학 준비 중 잠시 고아원 맡게 돼… 사랑받지 못해 비행 일삼는 원생들 십자가 사랑 깨닫게 해달라 기도

입력 : 2019-06-27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60년쯤 신망원 출신인 김태연씨(가운데)의 장신대 졸업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로회신학교 박형룡 학장님 말씀을 따라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학장님은 신학교에서 종교교육을 가르치길 원했던 날 장로교 선교부에 직접 데리고 가 소개하면서 여학생이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선교부에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선교부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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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님의 적극적인 추천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영어회화 선생님은 대구 중구 남산동에 계신 캠벨 선교사님의 아내 캠벨 부인이었다. 나는 동산병원 간호사와 함께 선교사님 댁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기초를 닦았다. 어느 날 선교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와서는 신망원이란 고아원에 가서 좀 도와달라고 청했다.

“고아원 아이들이 원장더러 나가라고 데모를 해서 원장 목사님이 나가버렸지 뭡니까. 지금 선생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데 주 선생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망원은 대구 달서구 성당동 변두리 야산에 있었다. 복숭아밭을 일궈 작은 집을 짓고 고아 50여명을 수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6·25전쟁으로 집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도둑질을 배워 비행을 저지르던 아이들을 선교사들이 모아 놓고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아이들의 언행이 너무 거칠어서 지난번 원장이 엄하게 관리하려다 충돌을 빚은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아이들에 내게 던진 첫 마디는 “깔치 왔네”였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여자가 왔다’는 은어였다. 줄임말로 표현하는 요즘 시대의 은어와는 또 다른, 그들만의 언어가 매 순간 쏟아져 나왔다. 어느 날 아침에 내 신발이 없어졌다. 다른 날 아침엔 밥그릇이 모자랐다. 돈 되는 집기를 훔쳐다가 파는 게 일상인 아이들이었다.

한두 아이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살갑게 대해봤지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은 관심받기를 거부했다. 사탕을 주면서 이야기 하려 하면 ‘자신을 이용하려고 수단을 쓰는 것’이라고 해석해버렸다. 사람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탓이었다.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시간을 정하고 복숭아밭에 나가 무릎을 꿇고 특별새벽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영혼들을 구원해 주소서. 부모도 소망도 없이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아이들입니다. 이 동산에서 살다가 한구석에 묻혀도 좋습니다. 저들이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하루는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예배 시간을 가졌는데 기도 중에 아이들 한두 명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성령이 역사하시자 온 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울음을 참던 아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지은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두 대 훔쳤습니다.”

“담요를 도둑질해 팔아먹었습니다.”

“나는 새엄마와 싸웠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 스스로 자기를 돌아봤다. 회개 제목들이 늘어나자 울음소리도 커졌다. 밥 먹을 시간도 지났고 학교 갈 시간도 지나 버렸다. 문득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교에 전화를 했다. 고아원에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아이들이 오늘은 등교할 수 없다고 전하고 복숭아밭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이어갔다.

아이들이 복숭아나무 밑에 한 명씩 앉아 울며 기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강력하게 통회하는 모습을 보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튿날 새벽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보다 먼저 복숭아밭에 나와 기도하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성령의 역사가 아이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5) 드디어 6년간 준비한 미국 유학길 올라

성경학교 이상근 목사님 도움으로 3번의 시험과 신분 조사 무사히 통과… 전액 장학금과 여비·잡비 지원

입력 : 2019-06-28 00:01/수정 : 2019-07-02 10:5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가운데)가 1956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 대구역에서 동료 및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망원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2년여가 흘렀다. 대구 고등성경학교(현 영남신학대) 여자기숙사 사감으로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박형룡 박사님과의 약속도 있었기에 신망원 사역은 늘 함께 기도하던 친구 한순애 권사에게 맡기고 이상근 목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성경학교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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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교회가 부흥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성경학교로 몰려왔다. 여자기숙사에만 150여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 목사님은 미국 뉴욕성서신학교(현 뉴욕신학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목회를 하시다가 성경학교 교장을 맡으셨다. 내게 사감 역할 외에도 강의를 한두 시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기숙사에선 저녁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저녁이 부흥회처럼 뜨거웠다. 학생들은 통성기도를 할 때 그야말로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며 기도했다. 좀 조용히 해달라는 선교사들의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나는 아이들을 자제시키기가 조심스러웠다. 학생들에게 시험이 될 것 같아 선교사들이 양보해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골 교회에서 갈급한 마음으로 신앙을 갖고 성령 체험을 한 이들을 어떻게 자제시켜야 할지 사감으로서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낮 시간을 나의 공부 시간으로 정하고 학교를 떠나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영어공부를 하곤 했다. 오후에는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직접 사왔는데 고아원에서의 경험이 이때도 유익했다. 영양가 있고 저렴한 반찬거리를 구입하는 요령을 체득했기 때문에 가난한 살림을 이끌어 가는 데 보탬이 됐다.

기숙사에 있으면서 미국 유학을 위한 시험을 치르려고 여러 번 서울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 목사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미국 신학교 입학원서를 써 주시는 등 지도편달을 해주셨다. 당시 미국 유학 시험은 3번 치르게 돼 있었다. 문교부에서 지정한 우리나라 역사 시험과 외무부에서 지정한 영어 시험을 치르고 나면 끝으로 미국 대사관에서 영어회화 시험을 한 번 더 치러야 했다.

이 모든 시험을 통과한 후에 신분 조사를 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급행료를 얹어주면 더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기다렸다. 오래 걸리더라도 양심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이 목사님은 뉴욕성서신학교가 복음주의 초교파 신학교라서 한국교회와 결이 닮았을 거라며 전공으로 기독교교육학을 추천해주셨다. 내겐 별다른 정보가 없었지만, 이 목사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했다. 그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두고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지만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이 목사님을 통한 지시였음을 확신한다.

얼마 후 신분조사까지 끝나고 출국 준비도 마무리됐다. 미국 뉴욕연합장로교 지도자 양성부에서 전액 장학금과 여비, 잡비까지 지원해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공로 없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1950년 박형룡 학장님과 미국 유학을 가기로 약속한 지 꼭 6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전쟁 물자나 구제 물자를 운송하는 배를 이용하도록 돼 있었다. 부산까지 가기 위해 대구역으로 나왔다. 대구역에는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신 선생님 동료 학생 등 50여명이 나와 기도로 송별해 줬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6) 2주만에 도착한 미국… 영어 울렁증에 손짓으로만

조국에 유익한 사람 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을 각오 다지며 기도

입력 : 2019-07-01 00:08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왼쪽 첫 번째)가 1956년 9월 미국 뉴욕성서신학교 캠퍼스에서 베티 파킨슨 부인(가운데)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배가 부산항을 떠났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무거운 선체가 움직이는데 그제야 ‘정말 고국을 떠나는구나’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당시 내게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지구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가는 듯했다. 미국까지는 14일이 걸린다고 했다. 난간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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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떠납니다. 이제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내 조국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돼 돌아오게 해주옵소서. 만약 내 신앙이 떨어져서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이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지독한 뱃멀미로 14일을 고생한 끝에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미국 장로교연합회 여성부 직원인 도로시 와그너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과거 중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던 그는 동양인인 나를 자연스럽고 친절하게 대해줬다. 와그너씨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자고 뉴욕에 가기 위해 기차 정거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3일간 대륙횡단 기차여행을 해야 했다. 기차는 작은 호텔 같았다. 침대로 변신하는 의자도, 무엇에 쓰이는지 모르는 조그만 스위치들도 마냥 신기해 보였다. 아침 식사 때가 돼 식당칸을 찾아갔다. 열차 안에 동양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어서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았다.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본능적으로 주문을 하라는 얘기임을 알아챘다. 알고 있는 영어를 총동원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밥과 닭고기를 주세요(Rice and chicken please).”

“뭐라고요(What)?”

직원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영어가 잘못됐나?’ 미국 땅을 밟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초짜가 아침 식사 메뉴가 몇 가지 정해져 있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알 리 없었다. 결국 나는 손으로 앞사람의 접시를 가리키며 ‘저거 달라’고 손가락질을 해 버렸다. ‘이제부터 얼마나 망신을 당해야 하는 걸까.’ 식당을 가기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3일을 꼬박 벙어리처럼 보낸 뒤 뉴욕에 도착했다. 선교본부에서 장학생을 전담하는 베티 파킨슨 부인이 나를 반겨줬다. 무척 얼어 있던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데려다주는 대로 따라갔다. 파킨슨 부인은 긴장한 내게 농담을 섞어 가며 딸을 대하듯 대화를 이끌어 줬다. 그는 모든 외국 학생들의 어머니 노릇을 해줬던 정말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뉴욕성서신학교 건물은 어둡고 육중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따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두 명랑하고 친절했다. 복도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웃고 인사하며 지나갔다. 아직 그런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어리벙벙하게 지나가곤 했다.

한국에서 나름 애를 써가며 하노라 했던 영어공부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첫 수업에 들어갔다.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의 내용을 20%도 알아듣지 못했다.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는데 받아쓰기도 힘들었다. 학생들은 열심히 질문하는데 뭘 물어보는지, 교수님이 어떤 대답을 해주시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낙심도 되고 긴장도 됐다. 이 공부를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내야 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7) 태극기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항의

전쟁 후 고통받는 우리나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미국과 비교돼… “한국은 영적으로 축복” 응답받아

입력 : 2019-07-02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56년 미국 뉴욕성서신학교 기숙사 책상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여학생 기숙사에 있는 자매들은 친절했다. 무엇이든 도와주려 했다.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다시 정리하고 숙제를 날마다 제출했는데 타자도 서툴고 영어도 누군가가 교정을 봐줘야 했다. 미국 학생들보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외출은 주일에 교회 가는 것 외에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시간이 아까워 양치하면서도 공부할 것을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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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기도시간이 사라졌다. ‘이건 아닌데. 내가 주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데 기도도 못 하고 공부에만 열중하는 건 내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야.’ 한국에서 아침마다 조용히 주님과 교제하던 시간이 그리웠다. 기도하다 문득 하늘을 보면서 속마음을 내뱉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죽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는 보따리 싸서 집으로 가는 게 훨씬 낫습니다.”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귀국해 버리면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할지 고민이 됐다. 마음속에 싸움이 또 하나 생겼다. 전쟁을 겪은 지 몇 해 안 된 황폐한 나라에서 고통당하는 내 백성을 생각하며 그들을 간절히 돕고 싶었다. 미국에 와 보니 물자가 차고 넘치는 데다 모든 게 화려하고 사람들은 사치스러웠다. 쓰레기통만 봐도 이 많은 종이가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까웠다. 모든 게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도록 마련돼 있었다.

“하나님,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축복해 주시면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고통을 지나 이제 좀 살 만하니까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을 죽게 하십니까. 살아 있는 사람도 생필품이 모자라고 집 없는 피난민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불공평하십니다.”

기숙사 방 담벼락에 태극기를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얘야. 미국은 물질로 축복했지만 네 나라 한국은 영적으로 축복하지 않았느냐.” “아멘. 하나님 말씀이 맞네요. 우리가 받은 축복이 더 큰 축복입니다.”

내게 기도는 생명줄 같았다. 열심히 공부해야 했지만, 공부가 기도만큼 가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열심히 기도하려면 공부를 못하고 열심히 공부하려면 기도를 못 하게 됐다. 어느 날 아침 기도하다 졸고 나서 일어나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도를 앉아서 하지 말고 일어서서 다니면서 하자.’ 복도를 따라 식당으로 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다니면서, 화장실을 가면서 기도하면 졸지 않겠다 싶었다.

복도를 걸을 때 혼자 중얼거리면서 기도하는 게 습관이 됐다. 화장실에서도, 목욕하면서도 주님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기도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앞으로 크리스천들은 이런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하겠구나.’

지금도 나의 묵상기도는 새벽기도뿐 아니라 일상의 기도도 포함된다. 일상의 묵상기도가 있게 된 건 그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가장 바쁠 때 가장 기도를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크리스천들은 일상생활 가운데 기도하는 시간이 줄고 자기도 모르게 ‘선데이에만 기도하는 크리스천’이 돼간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에 깨어 있어야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9) 험난한 기독교교육과 여성교육… 두 마리 토끼 다잡아

한국선 생소한 기독교교육학 정체성과 교육의 가치 홍보에 힘써… 여학생 모집 위해 등록금 절반만 받아

입력 : 2019-07-04 00:05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 줄 왼쪽 세 번째)가 1961년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뉴욕성서신학교를 졸업한 나는 1958년 8월 귀국길에 올랐다. 미국에 갈 때는 배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선교부에서 항공권을 마련해줘 비행기를 타고 왔다. 여의도비행장에 내렸는데 당시만 해도 여의도는 정말 시골이었다. 비행장엔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드리운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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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우리나라 기독교교육학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소개하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한국에 없던 기독교교육학과를 혼자 개척하고 기반을 놓으려 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미국에서 겨우 2년 공부하고 와서는 큰일들을 자진해서 하겠다고 나선 내가 지나친 만용을 부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심을 다하는 내 모습을 보던 김성락 숭실대 학장님은 “산골 개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우선 미국에서 가져온 기독교교육학과 소개 책자들을 참조해 4년간 이수해야 할 과목들을 짜봤다. 당시 이화여대에 기독교학과가 있었고 연세대 대학원에 기독교 과목이 있을 뿐, 기독교교육학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기독교교육학과가 무엇을 가르치는 학과인지 물었다. “주일학교 선생 하는 것이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부터 교육하면서 기독교교육학과의 정체성을 알리고 얼마나 필요한 교육인지를 가르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를 하기로 했다.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 주최로 시행한 강습회엔 해가 갈수록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강습회가 연례행사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교회에 기독교교육에 관한 관심이 확산됐다. 학생들 중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대학을 다시 다니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꽤 됐다. 나이도 30대 중반이어서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젊은 여교수에게 수업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학생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개척자가 가는 길은 어디나 험하다고 했던가. 기독교교육학과엔 강의를 부탁할 다른 강사도 없었다. 다른 학과장들에게는 강사를 하게 해달라고 소고기를 사 들고 온다는데 나한테는 아무도 찾아오질 않았다. 오히려 다음 학기 강좌를 맡기기 위해 다른 학교로 품앗이를 하러 가야 했다. 여자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건 교수뿐 아니라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여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여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절반만 받기로 했다. 몇 명 되지 않던 여학생들은 수줍어서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곤 했다.

1960년 4 19의거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강의를 거부하고 시내 거리로 뛰쳐나갔다. 여학생들이 내 연구실로 들어와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해요. 데모에 나갈까요, 말까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등록금을 반만 냈다고 반쪽짜리 학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대학생입니다. 스스로 의견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게 여성교육은 기독교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였다. 1963년 장로회신학대에서 여전도사 교육을 위한 강사로 서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총회에서 특별 위탁이 왔는데 교수가 없으니 초급 대학과정으로 여전도사 교육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역자 키우는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로회신학대와 숭실대를 오가며 강의하면서 여전도사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0) 35세에 여전도회 회장 맡아… 시대 이끌 사명

복음주의와 교회일치운동의 분열… 여성들이 주관해 화합기도회 열고 선도적으로 평화유지 해주길 호소

입력 : 2019-07-05 00:13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 줄 왼쪽 네 번째)가 1959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 장학생 신분으로 장로교 여성대회인 풀듀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여성 대표들이 전국적으로 5000여명이 모여 향후 3년간 활동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다. 한국 여전도회에선 정신여학교 교장선생님이신 김필례 회장께서 17대부터 20대까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이끌어 오셨다. 미국 선교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선생님과 풀듀대회에 동행했다. 이 대회 참석은 내게 한국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깊이 고민하게 해 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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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와 풀듀대회 체험담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에 보고하기로 한 날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내가 절대 다수의 표를 받아 여전도회 회장으로 피택된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사양했다. “전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제가 회장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5세에 회장이 된 것이다. 임원들은 모두 50대 이상이었다. 어머니 같았던 임원들은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신앙의 동역자인 젊은 내 친구 이필숙 전도사를 총무로 택해 주셨다. 김 회장께서 여전도회를 젊은이에게 맡겨 시대를 이끌어 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갖고 모험을 하신 것이었다.

1959년 9월 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총회장은 총회보고를 위해 총무와 함께 참석하게 돼 있었다. 개회예배가 끝나고 회원 점명을 하는데 누군가가 회장을 부르더니 언성이 높아지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부끄럽게도 몸싸움으로 확대됐다. 결국 총회는 휴회되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운동(NAE)과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분열이었다. 너무 떨리고 무서워 총무와 나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이후 교회일치운동 측은 서울 연동교회에, 복음주의운동 측은 승동교회에 각각 모였는데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면 좋은가요”라며 부르짖을 뿐이었다.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앞으로 닥칠 분쟁과 분열을 상상하니 기가 막혔다.

‘나 개인은 박형룡 박사님의 복음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게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한 건 에큐메니컬 교단이다. 이를 어쩌지.’

어느 편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나와 총무는 김 회장님 댁을 찾아갔다. 회장님은 차분하게 한참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우선 갈라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수년 전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가 분쟁할 때 여성들이 끼어들어 분위기가 더 흉악해졌지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쌍방이 다시 교회 화평위원회를 조직해 분열을 막자며 노력했다. 여기에 찬성하는 교회 청장년연합회 회장 황성수 박사와 주일학교연합회 고응진 장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세 단체가 “총회 분열을 원치 않는다”고 외치며 성명을 냈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은 ‘평화 합동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하고 전국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울 시내 큰 교회를 돌며 기도회를 주관하고 여성들이 선도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주길 호소했다. 기도는 점점 뜨거워졌고 호응은 확대됐다. 용기를 얻어 분열에 반대하는 목사님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목사님들은 여전도회 사무실로 전화해 엄포를 놨다.

“여전도회가 제3의 세력을 만드는 것인가. 주선애 회장은 박형룡 목사를 배신하는가”라고 소릴 지르며 여전도회를 공격했다. 둘 사이에서 중보를 한다는 건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6826&code=231115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