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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기독교 교육의 선구자'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 (1)-(10)

영국신사77 2019. 10. 11. 09:05

[역경의 열매] 주선애 (1)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 되길…” 아버지가 남긴 한 마디 유언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

입력 : 2019-06-10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내 삶에 기독교교육을 향한 길을 낸 건 스물셋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 세상은 잠깐이라오. 내가 죽더라도 선애를 잘 키워 주오. 선애는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이 되도록 길러 주오.”

장맛비가 퍼붓던 1926년 7월 21세의 앳된 여인이 평양에서 황해도 장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역에 내려서도 40리 길을 쉼 없이 걸어 구미포란 곳을 향했다. 폐결핵으로 요양 중인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온 여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마지막 숨을 혼자 거둘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눈물이 흘러 빗길을 걷는 발걸음을 더 힘들게 했고 18개월 된 딸은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피하지 못한 채 엄마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 여인이 내 어머니요 어린 딸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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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한 농가의 작은 사랑채에 창백한 얼굴로 혼자 누워있었다. “잘 왔다”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한참 말이 없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울음이 서서히 멎을 무렵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겨우 마지막 말을 맺으셨다. 그렇게 남긴 유언을 가슴에 품은 채 어머니는 70여년간 홀로 사셨다. 남겨진 재산도, 혼자 살아갈 만한 경험도 없이 어린 딸과 둘이 세상에 내던져진 삶이었다.

어머니 변정숙 여사는 어떻게 해야 딸을 기독교 선생으로 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의논해 볼 곳도 가르쳐줄 만한 사람도 주변엔 없었다. 아버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긴 한 마디 유언을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셨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에겐 경황이 없어 남편의 유언에 “예”라고 답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 게 일평생 한이 됐다. 그리고 ‘내 기어코 당신의 뜻을 몸으로 이루리라’고 수없이 되뇌며 살아오셨다. 그 후로 76년이 지나 97세가 되기까지 어머니의 삶은 충분히 “예”라는 대답으로 점철됐다.

증조할아버지는 순회 전도 여행을 하던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증조할아버지의 전도로 할아버지 3형제의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이 됐다. 우리 할아버지 주인섭은 3형제 중의 맏아들로서 아들만 5형제를 낳아 키우셨다.

그러나 아들 다섯이 20대를 전후해 하나하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폐결핵은 치료약이 없어 그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으며 요양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아들 5형제를 모두 먼저 천국으로 보내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던 나의 아버지 주기남은 넷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인 평남 대동군에 있는 추빈리교회에서 일찍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아주 열심히 했던 청년이었으며 주변에 있던 꽃을 꺾어 아동 설교를 하는 등 특출난 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에 관한 사진이나 기록은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귀한 유언은 어머니의 일평생을 지배했다. 놀랍게도 그 유언은 예언처럼 이뤄졌다. 내가 신학교에서 일생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기도와 유언이 나를 일관된 축복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 약력=1924년 평양 출생, 장로회신학교, 영남대 졸업. 숭실대 교수, 장로회신학대 교수, 대구 신망고아원 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탈북자종합회관 관장 역임. ‘어린이 성장의 이해’ ‘장로교 여성사’ 등 저술.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1989) 목련장(1994) 김마리아상(2010) 수상.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영상=장진현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2) “이 아이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할머니의 기도

다섯 아들 잃은 아픔 많은 할머니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 받아… 외롭게 자란 날 불쌍히 여겨

입력 : 2019-06-11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75년 어머니의 고희(70세)를 맞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10리 넘게 떨어진 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 교회는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에 그치지 않았다. 한글반을 열어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소녀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쳐줬다. 글자를 공부하며 써볼 종이가 필요했지만, 당시 형편상 살림을 맡은 오빠에게 연필과 종이를 사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오빠가 쓰다 버리려 했던 몽당연필과 낡은 창호지로 글자를 연습했다. 신이 난 어머니는 글을 배우는 게 너무 좋아 부엌에서 불을 땔 때 쓰는 소나무 부지깽이로 바닥에 글씨를 쓰며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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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농가로 시집보낸 첫째와 둘째 딸이 고생하는 게 애처로웠던 것 같다. 막내딸인 어머니만이라도 도시에서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미소를 하는 집과 혼사를 맺으셨다. 16세 신부와 18세 신랑의 결혼이었다. 대가족인 데다 정미소집이어서 일이 오죽 많았으랴. 16세에 시집온 며느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도맡아서 했고 추운 겨울에도 얼어붙은 대동강 얼음을 깨고 식구들의 빨래를 했다. 손잔등은 하루도 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 손으로 저녁이면 가족들의 양말을 기우셨다.

그나마 식구들이 건강하기라도 하면 행복했겠지만 하나둘 시름시름 앓아 세상을 떠나는 남정네들을 보며 마음이 어땠을까. 아버지마저 병들어 눕게 됐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도 임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른들 모르게 어머니께 과일을 사다 주시곤 했다. 어른들에겐 어려워 말 한마디 못했지만 그런 남편의 보살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됐던지 어머니는 두고두고 내게 그 이야길 해주셨다.

나는 서문밖교회 유치원도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치마폭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여섯 살 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다고 하면 다들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지만 사실이다.

다섯 살쯤 됐을 때 같다. 할머니가 캄캄한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나를 깨워 손목을 붙들고 조용히 길을 나섰다. 깨끗하게 정리된 공원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모란봉 풀밭이 나왔다.

할머니는 그 풀밭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참을 혼자 놀다 할머니에게 다가와 보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동이 트고 햇빛이 할머니와 내가 걸어 온 길을 환하게 비춰줄 때쯤 모란봉을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체험적으로 새벽기도란 걸 알게 됐다.

할머니는 아들 다섯을 다 잃은 아픔을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받으며 사셨다. 늘 성경을 읽으셨지만, 한글을 늦게 배워서인지 잘 읽지 못하셔서 내가 선생님이 돼 드렸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익혀 할머니에게 알려드리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아이고 우리 선애는 정말 신통해. 신동이야 신동!” 지금도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며 쌓아 올린 할머니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내 친구 중 누군가가 어머니께 질문을 던졌을 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리 주 선생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따르고 사랑을 많이 받는데 어쩜 그럴 수 있지요”라는 질문에 어머니는 “할머니 기도 덕분”이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내게 할머니의 기도를 들려주셨다.

“하나님, 우리 선애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아버지도 형제도 삼촌이나 사촌도 없는 외로운 아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3) “남성 못지 않은 실력과 인격 갖추자” 강조

여성들 교육하면서 남존여비 때문에 남성들 공격하는 식 여권운동 늘 반대

입력 : 2019-06-12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36년을 전후해 정진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할 때의 모습.


날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과일과 견과류 등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베개 옆에 놓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해두신 특별 간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키웠지만 모두 20대 안팎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쩌다 나와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손녀딸 2명만 혈육으로 남았다.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내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뒤 남대문 거리에 나가시곤 했다. 발길이 많은 곳을 부러 찾아가 사람들이 “그놈 참 잘생겼구먼. 아들 손자요?”라고 물으면 할아버지는 머뭇거림 없이 “예”라고 답하곤 하셨다. 엄연히 여자인 날 남자로 둔갑시키는 상황에 할아버지 두루마기를 세게 잡아당기면 멋쩍은 듯 헛기침만 몇 번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에미나이(여자아이의 평양사투리)’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늘 “이놈아”하면서 남자아이 부르듯 부르셨다. 그 시절 기억 때문인지 나는 여성들을 교육하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 때문에 남성들을 공격하는 식의 여권운동을 늘 반대했다. 대신 “남성 못지않은 실력과 인격을 갖추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유년시절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앙의 본질을 처음 깨닫게 되는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내게는 친구들과 줄지어 다니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던 날이 그 순간이었다. 평양의 12월은 혹독하게 추웠다. 유독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더 추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한파 속에서도 캐럴을 함께 부르는 순간은 온 세상을 녹일 수 있을 듯 따뜻하게 느껴졌다.

새벽 2~3시가 되면 초롱의 촛불을 켜 들고 어른, 아이 30~40명이 떼를 지어 하얀 눈길을 사박사박 걸으며 교인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갔다. 사방이 캄캄해도 교인들의 집만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조용히 골목길을 걸어가 불이 켜져 있는 집 앞에 소리 없이 모였다. 캐럴 대장이 시작하는 찬송을 따라 힘차게 불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적막을 깨고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르는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체험은 없어도 진정 예수님은 기쁨을 주러 오신 분이며 마땅히 세상 사람들은 주님 오심을 기뻐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새벽송’을 받은 교인은 문을 열고 헌금을 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둔 과자를 꺼내 주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는 만둣국을 끓여 꽁꽁 얼어 있는 캐럴 대원들의 몸을 녹여 주기도 했다.

캐럴 새벽송이 기쁨과 감동의 순간들로만 기억된 건 아니다. 오래도록 속이 상했던 기억도 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친구들과 새벽송을 준비하고 있는데 주일학교 부장이자 내게는 아버지와 같았던 백부님이 오시더니 “선애 너는 집에 가거라”하셨다. 단호하기만 한 백부님의 표정과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

당시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관념 때문에 백부님은 내가 새벽송 가는 것마저 금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후 머리가 크면서 나는 백부님을 설득해가며 캐럴 대원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여성 찬양리더들이 다양한 무대에서 성도들을 이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유년 시절엔 없었던 여성 캐럴대장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4) 안창호 선생의 돌더미 보며 독립 위해 헌신 다짐

“독립 위해 산책 나올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 세워 놓으셔” 마음에 민족애 생겨

입력 : 2019-06-13 00:0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왼쪽)가 정의여학교에 다닐 때 모습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상당수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에 적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1910~20년대 조선땅의 일본인들은 사회의식이 강한 여성이 독립운동을 펼쳐 식민지 조선을 잃을 것에 대비해 계략을 펼쳤다. 여성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로 정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은 ‘오덴바(말괄량이를 뜻하는 일본 말)’라고 가르쳤다. 당시 여자아이들은 말괄량이가 아닌, 조용하고 정숙한 여성이 되고자 했다. 그런 까닭으로 김활란 고황경 김마리아 선생 등이 가졌던 애국심은 희미해져 갔다.

일본어와 일본 역사는 배웠지만, 한글과 한국 역사는 배우지 못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일제의 포악성은 더 심해졌다. 창씨개명을 통해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쇠붙이는 모두 공출해갔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을 위한 위문품 주머니인 위문대 만들기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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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시간엔 목검(木劍)을 배웠다. 오후가 되면 근로봉사로 대동강 모래사장에 나가 땡볕 아래서 리어카에 모래를 실어 나르는 작업을 했고 일본군의 식량 확보를 위해 가을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도 부엌일을 감당해야 했다. 나 역시 캄캄한 부엌에서 혼자 밥을 지어야 했다. 아궁이에 솔가지를 놓고 신문지 같은 불쏘시개에 불을 붙였다. 성냥을 그어 불이 붙으면 신문지나 솔가지에 가만히 불을 대야 하지만 겁이 많은 나는 성냥불이 붙자 무서워서 아궁이에 휙 던져 버리곤 했다. 목재상에서 사온 톱밥은 뱅뱅 돌리는 풍구로 바람을 넣어야 불이 붙었다. 적당한 양을 부어 가며 풍구로 바람을 넣어 능숙하게 불을 붙이기까지 족히 1년이 넘게 걸렸다.

정의여자보통학교 시절 소풍으로 학교에서 멀지 않은 대성산 송태에 가게 됐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산에 올라가는 길에 돌더미가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작은 돌을 쌓아 놓은 듯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선생님께 여쭸다.

“저 돌더미는 안창호 선생님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산책 나올 때마다 하나씩 세워 놓으신 거란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을 세워 놓으신 거지.”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조선의 독립이라니.’ 그동안 누구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대적 상황들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 조선장로교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님이 출교됐다. 학교에선 선교사이자 교장인 헐버트 선생님이 앞장서 가시면 학생들은 모두 뒤따라 가 신사참배를 하곤 했다. 학교 내에선 일본 말만 해야 했고 일본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들었다. 일본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거나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하면 한국말을 하다가도 입을 닫아야 했다.

‘도산 선생은 얼마나 조선 독립의 열망이 대단하셨기에 이처럼 크고 작은 돌을 하나하나 산책길에 세워 놓았을까. 그래! 나는 조선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식민지 백성이다. 나도 내 나라 독립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다.’ 처음으로 신념이란 게 생겼다. 가슴에 ‘조선인 주선애’를 확실히 새기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그 신념이 소녀 주선애의 마음에 뿌리내린 민족애였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5) 평소 어머니가 점찍어둔 주일학교 선생님과 결혼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 서둘러 정해

입력 : 2019-06-14 00:01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지향하게 해 준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 책 표지.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유치원 보모가 됐다. 요즘 말로 유치원 교사였다. 백부님은 당시 동평양교회의 회계를 담당하면서 동평양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백부님의 추천으로 보모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깜냥이 안 되는 사회 초년생에게 보모 역할이 쉬울 리 없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아이들을 돌보고 동화책 하나 읽어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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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쯤 지났을까. 흐릿하게만 보이던 아이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고 표현이 부족한 아이들의 말도 제법 능숙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보모가 될 수 있었다. 정의여자보통학교 시절 비싼 레슨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배우게 해주셨던 피아노 연주는 아이들과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두렵게만 느껴졌던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길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보모로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 교육과 삶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 돌아보면 평생 유치원에서 일하다 나이가 들면 유치원 원장을 맡으며 동심 천국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으니 그 행복함의 크기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생각지 못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최기호 목사는 당시 평양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였다. 어머니는 그를 훌륭하게 보고 계셨고 내 신랑감으로 점찍어 뒀다고 하셨다.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였기에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고 서둘러 정하셨던 것 같다. 최 목사가 여러 차례 나에 대한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결혼이어서 덜컥 겁이 났지만,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목회지였던 동광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며 살게 됐다.

최 목사는 신앙 열정을 가진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기도가 삶의 중심이었고 검소했다. 유치원 보모를 처음 맡을 때처럼 두려움으로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고 남편으로서 최 목사를 존경하게 됐다. 교인들은 앳되고 어린 날 사모라는 이름으로 불러줬다.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 전역을 침략해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예배 때마다 전 교인이 일어나 동방요배(천황을 향해 절하는 것)와 황국신민서사(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평양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방으로 가라는 일본 정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우리 가족은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이란 곳에서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

농촌 생활의 행복 중 하나는 최 목사가 모아 놓은 책꽂이의 책들을 여유 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권의 책 중 내 생애의 틀을 잡아 줬던 책 하나를 붙들게 됐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였다. 저자는 고난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고뇌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장 낮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뤄 살았다.

그는 자신의 학식과 재능, 부를 모두 버리고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며 공동생활을 했다. ‘사선을 넘어서’는 그런 자신의 삶을 묘사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그 책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이 마음에 부딪히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됐다. 책 한 권에도 생의 길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다.

하나님의 손길은 하나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이 무의촌(無醫村)에서 당장 봉사할 일이 무엇일까.’ 의사는 아니라도 산파(産婆) 공부를 해서 동네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6) 산파 면허증 받고 주님과 약속한 무료봉사 실천

무의촌 의료봉사하기 위해 교사생활 틈틈이 산파공부… 매일 새벽기도로 봉사 다짐

입력 : 2019-06-17 00:00/수정 : 2019-06-17 00:12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앞줄 가운데)가 1951년 무렵 경북 영덕군 영해교회 교인들과 교회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산파(産婆)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마침 남편 최기호 목사가 중국 봉천(현 선양)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게 됐다. 당시 중국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책이 많다는 얘길 들었던 터였다.

“책을 좀 사다 주실 수 있겠어요? 산파 공부를 하고 싶은데 자격시험 준비를 위한 교재가 필요해요.”

남편은 내게 일본어로 된 책 6~7권을 선물해 줬다. 책을 보고 나니 용기가 샘솟았다.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한 듯 눈이 번쩍 뜨였다. 늘 책상 위에 뒀던 성경을 폈다. 딱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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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산파 공부를 하는 동안 남을 돕고 섬기며 사는 게 가장 보람된 삶인 것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뒤 초등학교 교사직을 맡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배우며 섬기는 길을 걷게 하도록 예비하셨던 것이라 생각했다.

학교 사무실 책상 서랍에 책을 넣어 두고는 남자 선생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공부를 했다. 책에 그려진 그림들이 대부분 여성의 신체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마음에 다짐하고 새기게 되는 기도제목이 있었다. 산파 공부를 하는 동안 매일 새벽기도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는 이 일을 해서 결코 돈 버는 데 쓰지 않겠습니다. 꼭 봉사만 하겠습니다.’

황해도 해주에 가서 산파 자격시험을 치렀다. 산파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응시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떨어져도 낙심은 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고 시험을 봤다. 그런데 웬일인가. 전체 3등으로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나니 도청에서 발급한 산파 면허증이 커다란 봉투에 담겨 집으로 도착했다. 생애 첫 자격증을 품에 안은 것이다.

마을에선 “우리 동네에 의사가 나왔다”며 연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내 몸이 고달파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아픈 사람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한번은 난산으로 아이가 거꾸로 나오게 된 상황에 봉착했다. ‘내가 이 일을 왜 시작했나’ 싶을 정도로 두려운 순간이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려면 소달구지나 손수레에 산모를 태워가야 할 판인데 그러다간 이동 중에 산모가 숨을 거둘 것 같았다. 고통스럽게 소릴 지르며 무서워하는 산모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며 안정을 시켰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태아의 몸을 조금씩 돌렸다. 가장 힘겨웠던 건 아기의 머리를 뺄 때였다. 산모도 애를 쓰고 있었지만 좀처럼 머리가 빠지질 않았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이와 산모를 살려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기도를 한 뒤 아기 입에 손가락을 넣은 뒤 조심히 잡아당겼다. 순간 쑤욱 하며 아기가 빠져나왔다. 산모도 죽을 힘을 다 썼지만 나도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주저앉았다. 그 일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며 마을에서 찾아오는 환자가 더 많아졌다. 어쩔 수 없이 간이병원 원장처럼 갖가지 약을 사다 두고 한밤중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소화제와 해열제를 주거나 직접 찾아가 주사를 놓아주곤 했다. 물론 하나님과 약속한 것처럼 무료 봉사였다. 착한 시골 사람들은 신세를 갚는다며 별별 것을 다 가져다 줬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7) 폭압정치와 기독교 박해 심해진 평양 떠나 서울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평양, 박해 심하고 기독교인들 저항 거세

입력 : 2019-06-18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의 은인들 사진이다. 1945년쯤 촬영했다. 왼쪽부터 친구 명선성, 은사 임종호 선생님, 친구 이필숙.

1946년 7월 북한 땅에는 변화의 폭풍이 불어 닥쳤다. 소련에서 나온 김일성이 집권한 뒤 폭압정치가 시작됐다.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애국자들을 모두 잡아가는 등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정치인들뿐 아니라 지주와 기업가, 특히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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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김일성정권의 박해도 심했고 기독교인들의 저항도 거셌다. 끊임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허가 없이는 어떤 집회도 할 수 없게 됐고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통제됐다. 남편 최기호 목사도 허가 없이 집회를 열었다가 잡혀 들어가 동평양경찰서에 수개월 동안 수감됐다. 최 목사는 쇠약해진 몸으로 석방됐고 우리 식구들은 연금 상태에 처해졌다. 목사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동 세력으로 찍힌 것이다. 집 밖에는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늘 서성이며 감시하고 있었다.

평양 시내에는 커다란 사진과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다. ‘위대한 수령님’이라 칭송하는 김일성의 사진과 미군들이 공산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흉측한 모습을 담은 포스터였다. 평양 거리는 억센 함경도 억양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거리에는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가 감돌았다. 교인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고 남은 교인들은 쑥덕쑥덕 남쪽으로 피난 간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눴다.

우리 식구는 감시원들 때문에 다 같이 집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남한으로 가면 어머니는 최 목사와 함께 황해도로 휴양을 가는 척 위장하고 내려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살았던 황해도로 가서 수소문해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 서울에서 다시 모이는 것으로 세부적인 전략을 짰다. 만남의 장소는 서울 남산이었다.

나는 38선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몰래 수소문해 한 팀을 만나 합류하기로 하고 강원도로 가는 안내자를 만났다. 혹시 보안원에게 들킬까 봐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어 여벌 옷도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내 짐은 성경책과 산파 도구가 전부였다. ‘남한에 가면 생활 대책이 없을 테니 산파 도구라도 갖고 가야지’ 싶은 마음이었다.

옷이 너무 깨끗하면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당목 적삼에 일부러 재를 묻혀 노동자로 보이게 위장을 했다. 우리 일행은 강원도로 가는 기차를 타고 여러 시간을 가서 어느 산골 역에 내렸다. 출구엔 이미 총을 멘 보안원이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세워 검문을 하는데 갑자기 나를 지목하더니 보안서로 따라오라고 외쳤다.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화장실 좀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요청을 한 뒤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아!’하고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순간 회개해야 할 죄목이 떠올랐다. 산파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게 영화필름처럼 선명하게 펼쳐졌다.

‘제가 취득할 산파 자격증으로 돈벌이를 하지 않겠습니다. 꼭 봉사를 위해서만 쓰겠습니다.’

그렇게 단단히 약속해놓고는 남한에서 굶게 될까 봐 산파 노릇을 할 생각으로 도구를 숨겨가는 모습을 하나님께선 분명히 보셨을 것이다.

‘하나님 자복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회개 기도를 하고 보따리에 숨겨 놓은 산파 도구를 똥통에 내던져 버렸다. 가벼워진 봇짐을 들고 보안원을 따라 일행 몇 사람과 함께 한 줄로 섰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맨 뒤에 따라가던 중 마음에 결단이 섰다. 바로 산 쪽으로 도망을 쳤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8) 보안소 수감 중 소장 아내 치료… 큰 위기 벗어나

월남하다 하룻밤 만에 돌아와 자수… 산파 면허 있는 내게 아내 치료 부탁

입력 : 2019-06-19 00:0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가운데)가 1950년 장로회신학교 재학 때 동기들과 남산에서 산기도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가 저물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마음속에선 소리 없는 외침이 그치지 않았다. ‘주여, 주여. 이 가엾은 종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칠흑 같은 밤이 됐고 산속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나무에 찔리고 가지에 걸려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이렇게 혼자서 방향도 모른 채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도망 하룻밤 만에 발걸음을 돌려 보안소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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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틀 때쯤 보안소 비슷한 건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날 봤던 보안원 얼굴을 보니 맞게 찾아온 듯했다. 솔직하게 말했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어서 자수하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보안원은 나를 감방에 넣고는 저녁때까지 내버려 뒀다.

‘주님, 그냥 끌려온 것도 아니고 도망갔다가 자수했으니 얼마나 혹독한 일을 겪게 될까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처럼 저를 구해 주세요.’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우던 중 보안원 한 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공산주의자들의 포악성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보안원은 사상 검증을 하듯 이것저것 캐물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남편이 병이 있어서 서울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유치원 교사를 했고 평양신학교 학생이라는 것도 밝혔다. 산파 면허를 취득해 봉사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들의 질문 중 잊히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미국 교회와 러시아 교회를 비교해 보라.”

“가보지 못해서 잘 모릅니다.”

“신학교에 다녔다면서 그것도 모르나.”

“러시아에 교회가 있다면 정말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조금 있을 것이고, 미국에는 교인 수가 많지만 진정한 교인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안원은 그냥 들어가 자라며 다시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이튿날 밤 보안소장이 나를 불렀다. 또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보안소장 방에 도착한 내게 그는 뜻밖의 얘길 꺼냈다.

“우리 집사람이 몹시 아픈데 산골이라 어디 병원에 데리고 갈 수가 없소. 산파 공부를 했다던데 우리 집에 가서 좀 봐주시오.”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내주시려는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보안소장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내는 열이 높고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심한 몸살처럼 보였다. 보안소장은 몇 가지 주사약과 약통을 보여줬다. 다행히 내가 아는 약들이었다. 주사를 놓고 머리에 찬물 찜질을 해주며 밤새 정성껏 간호했다.

밤샘 간호를 마치니 피로가 몰려왔다. 잠시 졸고 있던 사이 보안소장의 아내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고마워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태가 좀 나아진 걸 보니 뭐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엌으로 향했다. 밥과 찬을 만들어 상을 차리고 보안소장과 아내가 먹을 수 있게 했다. 졸지에 간호사에 식모 역할까지 하게 됐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간호한 지 사흘째가 되자 보안소장의 아내는 회복세가 두드러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도 나처럼 남한에 가다가 붙들려 그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이윽고 결단을 내리고 그에게 말했다.

“사모님도 내 사정을 잘 아시겠네요. 소장님에게 얘기해 나를 좀 놓아주도록 하실 수 없을까요. 간곡히 부탁합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다른 보안소로 끌려가 더 큰 처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튿날 아침 소장이 말했다. “고생했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남한으로는 가지 말아야 하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9) “이제 넘어왔습니다” 안내자 말에 “만세” “할렐루야”

풀려난 뒤 남쪽으로 향해 걷던 중 같은 처지의 안내자 일행과 합류… 추위와 배고픔 속에 필사의 탈출

입력 : 2019-06-20 00:0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월남한 후 만난 백부와 백모님이 1955년쯤 회갑연을 갖는 모습.

보안소에서 풀려난 뒤 남쪽을 향해 무조건 걸었다. 한참을 걷다 20여명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순간 멈칫했지만 행색을 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인 듯했다. 얘길 나눠보니 한 명의 안내자와 함께 남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얼마나 고달픈 길을 가는지 알기에 자연스레 나를 그 무리에 들어가게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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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를 필두로 긴장감 속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이 이어졌다. 안내자가 20m쯤 앞장서 가보고 돌아와서 오라는 지시를 내리면 가고, 조금이라도 낌새가 불안하면 자리에 멈추길 반복했다.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도 남쪽을 향한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안내자는 “빗소리는 이동하는 소리를 묻히게 해 매복한 군인들에게 들킬 확률이 낮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온몸이 젖은 옷에 감싸여 점점 더 추워졌다. 미끄러운 산길을 지나다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질 뻔했다. 나는 그 와중에 신발 한 짝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한 발은 맨발이 된 채 걸어야 했다. 칡넝쿨에 걸리기 일쑤라 다리와 발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종일 굶으며 이동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안내자가 아는 어느 산골 집에 들를 땐 그나마 감자와 고구마를 먹으며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가장 위험한 관문인 38선에 가까워질수록 경비가 삼엄했다. “피차 말하지 마시오. 낮엔 꼼짝말고 기다리시오. 행진하는 밤에는 안내자를 소리 없이 따라오시오.” 안내자는 거듭 주의를 줬다. 목숨이 걸린 모험이니 극도의 긴장감에 입술이 연신 떨렸다. 그래도 서울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넘어지고 미끄러져도 말없이 따라갔다. 행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안내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넘어왔습니다.”

우리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라고 외쳤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연신 “할렐루야”를 부르짖었다. 산 밑에선 남쪽 사람들이 피난민을 위한 주먹밥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 짓는 아주머니들의 손길과 마음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남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무일푼이었던 나는 백부 주요남 장로님 댁을 찾아 청량리에서 을지로까지 걸었다. 겨우 집을 찾아 현관문을 열자 백부님과 육촌 형제들이 반겨줬다. 평양을 떠난 지 12일 만에 만난 혈육이었다. 이제 염려는 어머니와 남편이었다. 바다로 오기로 했는데 풍랑을 만나진 않았는지, 보안원에게 붙잡히진 않았는지 걱정됐다.

약속대로 매일 남산에 올라가 두리번거리며 초조히 기다리다 기도를 하고 내려오곤 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3~4일 후에 가족들을 만났다. 서로 부둥켜안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이제 가족들이 머물 곳을 걱정해야 했다. 백부님 댁에선 우리 식구가 생활할 공간이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이런 상황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을 낯선 서울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남편이 평양 동광교회에서 사역하던 시절 그 교회에 다니던 권사님을 만난 것이다. 권사님은 서울 마포에 집을 갖고 있었는데 마당도 있고 방도 많았다.

“우리 집엔 내외만 살고 있어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가족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우리 식구는 아무 짐도 없이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기본적인 살림 도구를 사다 놓고 마포 동막교회에 나가 봉사하며 남산 장로회신학교 편입 수속을 준비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주선애 (10) 기도하다 천국 가길 원했던 남편… 영원히 가슴에 담아

회복되지 않은 간질병 증세에도 새로운 사역지 생겨 기뻐했던 남편… 새벽기도 후 쓰러져 주님 품으로

입력 : 2019-06-21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뒷줄 오른쪽 세 번째)와 신학생들이 1953년쯤 박형룡 박사와 학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편입 등록을 마쳤다. 어찌어찌 굶지 않고 세 식구가 먹고살았지만, 생활고가 해결되진 않았다. 전차표를 살 돈이 없어 마포에서 남산까지 꼬박 걸어 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다.

형편상 교과서나 참고서를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북한에서 공부하던 것보다 고될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듣는다곤 하지만 교실은 일본 신사 자리의 가장 넓은 방 다다미 위에 앉아 책이나 책가방을 엎어놓고 책상 삼아 강의를 듣고 적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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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명으로 구성된 반엔 열대여섯의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전도사나 월남자들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 모인 터라 저마다 신앙 열정이 뜨거웠다. 고려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온 신앙 동지들이 분위기를 잡고 있었고 몇몇 남학생 중엔 평양신학교를 다녀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한 학기를 마쳤을 때쯤 경북 영덕 영해교회에서 남편 최기호 목사에게 청빙을 요청해왔다. 교인 20여명이 공동체를 이룬 40년쯤 된 교회였다. 북에서 농촌교회 사역을 하던 시절 간질병 증세를 보였던 최 목사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단에서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역지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면소재지에 딱 하나 있는 교회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다. ‘이 예배당에 어떻게 사람들이 모이게 할까.’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무료 유치원 운영이었다. 교회처럼 이곳에 단 하나뿐이었던 유치원엔 면장 경찰서장 등 마을 지도자의 자제가 모였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교회학교 선생을 조수로 두고 20여명의 아이들을 보육했다.

나는 원장이자 보모 역할을 하며 도시 유치원 못지않게 기독교 교육을 정성스레 했다. 갑작스레 비가 올 때면 아이들을 업고 우비를 씌워 집에 데려다 줬다. 부모들은 그 정성을 감사히 여겼고 우리 가정을 환대해줬다. 농촌의 순박한 젊은이들도 나를 ‘사모님’이라 부르며 잘 따라줬다.

1949년 가을, 여느 때처럼 어르신과 청년들 10여명과 새벽기도회를 마쳤다. 최 목사가 여전히 강대상 밑에 엎드려 기도하는 걸 보고 집으로 내려왔다. 아침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데 좀처럼 최 목사가 오질 않았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산에서 내려온 빨갱이에게 습격을 당했나. 간질 때문에 졸도했나.’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와 교회로 내달렸다. 기도하던 강대상 밑엔 최 목사가 없었다. 남편을 발견한 곳은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쓰러진 남편을 보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마을 의사를 찾아 뛰어가셨다.

남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고 가슴에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보, 당신이 승리했군요.’ 남편은 항상 “강대상 밑에서 기도하다 천국 가야 해”라고 말했었다. 죽도록 충성하길 원했던 남편의 모습이 곧 승리자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웃 마을 목사님과 교인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위로를 전했지만,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직 주님의 영으로만 나를 위로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며칠 후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남편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지만 주 선생이 최 목사 일을 뒤이어 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분발하십시오.’

짧은 편지였지만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향점을 발견하게 해준 순간이었다. ‘일어나자. 주님 인도 따라 담대히 가보자!’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4363&code=231115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