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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사업 '주바일 항만 공사'를 어떻게 따냈나… 홍순길 前 사우디 주재 건설관 / "박정희가 밀어붙이고 정주영이 돈키호테처럼 도전…

영국신사77 2019. 7. 29. 13:40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정희가 밀어붙이고 정주영이 돈키호테처럼 도전… '中東 신화' 만들어"

입력 2019.07.29 03:13 | 수정 2019.07.29 10:15

초대형 사업 '주바일 항만 공사'를 어떻게 따냈나… 홍순길 前 사우디 주재 건설관

정말 위대한 일이 벌어졌지만 역사가 제대로 평가를 못 하는 경우가 있다. 홍순길(89) 선생은 '45년 전의 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유양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정주영 회장 등 당시 직접 관계된 인물은 다 돌아가셨다. 주위에서 제게 책으로 남기라고 권유했지만 게으르고 글 솜씨가 없어 그걸 못했다"며 입을 열었다.

1974년 그는 월남 대사관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건설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전쟁 중인 월남에서 4년 근무를 마친 그는 귀국해서 본부 국장을 맡아야 했다. 그런 그에게 사우디 대사관으로 전보 발령이 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동 건설 시장 개척을 위해 중량급 건설 공무원을 배치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홍순길 선생은 '사우디 정부의 차관이 현대건설 사람도 아닌 내게 입찰 초청장을 줬다'고 말했다.
홍순길 선생은 "사우디 정부의 차관이 현대건설 사람도 아닌 내게 입찰 초청장을 줬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중동 진출이 막 시작될 때였어요. 어느 날 사우디에 출장 온 정주영 회장을 집으로 초대했어요. 제 나름대로 한식을 준비했으나 정 회장은 찬물에 밥 말아 오이지로만 식사했어요. 식사 내내 시시껄렁한 여성 편력 얘기를 늘어놓다가, 끝날 때쯤 '우리나라는 유가(油價) 인상으로 재정 형편이 어려워 부도 직전이고 부총리와 재무장관은 외채를 빌리러 다닌다. 왜 그런 구걸 행각을 해야 하느냐. 사우디 정부는 이번 공사 수주 업체에 공사비 10억달러의 25%를 선수금으로 주겠다고 한다. 그걸 받으면 1억달러는 외환은행에 예치해주고 1억5000달러만 공사 준비에 사용하겠다'고 했어요."

1973년과 74년 중동발(發) '오일 쇼크'가 터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이 석유 1배럴당 2달러80센트를 18달러로 전격 인상했다. 사우디로부터 60만배럴씩 수입해온 우리나라는 급등한 원유 대금을 지불하기 어려웠다. 국제 경기 침체에 수출까지 줄면서 최악의 외환 위기를 맞았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우리 외환은행 수표가 부도 처리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부 관리들이 뉴욕 금융시장을 돌면서 100만달러, 200만달러씩 긁어모으는 구제 금융을 교섭하고 다녔다.

"우리나라가 부도나느냐 마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산유국들은 넘쳐나는 '오일 머니'로 도로, 항만, 공항 건설 등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어요.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아 한국 정부는 원유 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중동으로 빠져나간 달러를 건설 시장에 진출해 되찾아 오자는 역발상을 했습니다. 당시 국내 건설 회사들은 대형 공사를 수주하기에는 재정과 기술 능력이 뒤처져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중동 진출'을 밀어붙였습니다."

―미국과 유럽 업체들이 이미 진출해 공사를 독점하는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것이지요?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요. 박 대통령이 정부 승인을 받은 해외 진출 건설업체에 국내 주거래은행이 무조건 지불 보증을 해주도록 '해외건설촉진법'을 제정하라고 했어요. 남덕우 부총리와 김용환 재무장관이 '그러다가 그 업체들이 부도나면 나라가 정말 어려워진다'며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건설업체가 맡은 공사를 성실하게만 하면 돈을 벌어 올 수 있다'며 밀어붙였어요. 보증 한도를 늘릴 수 있게 이 업체들이 함께 '해외건설주식회사'를 만들도록 했어요. 중동 거점인 사우디와 이란에 직통 텔렉스를 설치하고 출국 절차도 간소화하게 했습니다."

그 무렵 사우디 정부는 아랍만(灣)에 인접한 도시 주바일의 초대형 항만 건설을 입찰에 부쳤다. 해상에 철제 구조물의 부두를 만들어 30만t급 대형 유조선 두 대가 동시 접안할 수 있게 하는 사업이었다. 사업비는 당시 한국 세수 총액의 5분의 1에 해당됐다.

"정주영 회장이 이 공사 입찰 참여를 밝혔지만 실적 미흡으로 불가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대조선소도 있고 항만 건설의 경험과 실적이 풍부한데 단지 작은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입찰 참여를 막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반발했지요. 그날 우리 집에서 정 회장은 '오늘의 현대를 만들면서 무수한 난관과 시련을 극복했는데 나는 어려운 고비마다 아버지 꿈을 꾼다. 이번에 사우디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아버지 꿈을 꿨다. 정부가 외교 교섭으로 현대가 입찰할 자격만 받도록 해주면 나는 공사 입찰을 따낼 자신이 있다'고 했어요."

―정부가 나서서 입찰에 응할 자격을 딸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건가요?

"그렇지요. 외교적으로 푸시해달라는 것이었죠. 그는 '귀국하면 박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는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지만 우리는 가당치 않게 여겼어요. 당시 현대건설이 미국·유럽 업체와 경쟁하기에는 한참 뒤떨어졌으니까요. 게다가 기업인이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귀국해서 박 대통령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얼마 안 돼 '모든 경제 각료와 사우디 대사는 현대건설이 10억달러 주바일 항만 공사 입찰에 참가할 수 있도록 사우디 정부와 교섭을 다하라'는 이례적인 훈령이 떨어졌으니까요. 부총리와 건설부 장관이 사우디까지 날아와서 사우디 정부와 교섭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입찰 자격 기준 미달이라 설득이 안 됐습니다."

주바일 항만 공사 현장의 정주영 회장(오른쪽).
주바일 항만 공사 현장의 정주영 회장(오른쪽). /조선일보DB
―정부가 나서서 특정 민간 기업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현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오늘의 현대는 우리 국민과 정부에 많은 빚이 있는 겁니다. 저도 한낱 건설관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월남 근무 시절 저와 친했던 미국의 마틴 대사가 먼저 사우디 주재 대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사우디의 담당 장관을 소개받았지요."

사우디 장관이 '회교를 믿느냐? 회교를 믿으면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는 즉시 '믿겠다'고 답했다. 이는 빈말이 됐지만, 어쨌든 장관은 미국 대사와 친분 있는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저는 장관에게 '비록 미국과 유럽 업체들이 먼저 진출해 있지만 한국은 월남전에서 미국식 공사 수행 방식을 익혔다. 훨씬 낮은 단가로 똑같은 기준과 품질의 공사를 해낼 수 있다'고 설득했지요. 그를 한국으로 초청해 새마을 사업 현장과 여의도 아파트 단지 등을 보여줬습니다. 깊은 인상을 줬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 사우디 왕자와 다른 장관들도 한국에 다녀갔어요. 몇 달 전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일행의 방한(訪韓)도 따지고 보면 1970년대 맺어진 관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지요."

여섯 달 동안 거의 매주 한 번꼴로 그는 담당 장관을 만났다. 대사관이 있는 제다에서 비행기로 수도인 리야드로 날아가야 했다. 본국에서는 텔렉스로 '홍순길이 장관을 만나 무슨 말을 나눴느냐? 사우디 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는 식의 전문이 내려왔다.

"시간이 갈수록 본국에서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제게 매달렸어요. 어느 날 장관이 제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이번 입찰에 응한 미국 브라운루트사가 몇 년 전 부산항 확장 공사를 맡았을 때 하청받은 현대건설이 트럭 두 대로 돌을 실어 나르는 장면이다. 어떻게 이런 회사가 대형 공사 입찰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몇 차례 회의를 했지만 다들 부정적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어요."

최후 불가 통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본국에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장관실에 가서 드러눕더라도 꼭 해야 한다'는 식으로 지시가 내려왔다.

―현지 사정을 모르는 상부의 지시에 불만이 있었겠군요.

"박 대통령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대통령이 주재하는 경제장관회의에서 그분이 말없이 연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건설부 주택과장이었던 저는 경제기획원 물가과장과 함께 말석으로 회의에 참석해왔습니다. 당시 경제 측정 지표가 물가 동향과 주택 허가 면적 추이였기 때문이었지요. 경제 개발은 해야 하는데 돈은 없으니 대통령의 고심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연필로 톡톡 두드리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최후통첩을 받고도 다시 찾아갔다는 뜻이군요.

"다시 찾아가니 경비원이 아예 출입을 막았어요. 때마침 청사에 들어오는 장관이 이 장면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같이 들어가자고 했어요. 그는 사무실로 차관을 부른 뒤 '어차피 능력이 안 돼 떨어질 건데 입찰 자격까지 못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어요. 며칠 뒤 차관이 사무실로 불러 현대건설 사람도 아닌 내게 입찰 초청장을 줬습니다. 10개 업체가 입찰에 초청됐는데 제일 끝에 현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현대건설 사우디 지사장에게 이를 전해주면서 함께 만세를 불렀어요."

공사 입찰에서 모든 예상을 깨고 현대건설이 우선협상자가 됐다. 외국 업체들은 사업비로 13억달러를 써냈는데, 현대만 9억3600만달러를 적었던 것이다.

"문제는 해저 40m에서 용접과 콘크리트를 해서 철제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는데 현대는 그런 기술이 없었어요. 정 회장은 입찰에서 탈락한 미국 브라운루트사를 찾아가 기술자들을 돈 주고 사왔어요. 놀라운 역발상이었지요. 당시 네덜란드 회사가 아랍만(灣)에 1200t 크레인을 세워놓고 조명을 비추며 자랑했는데, 현대는 더 큰 1500t 크레인을 끌고 와 똑같이 했습니다."

현대는 이 초대형 공사를 따내면서 국내 재벌 1위로 뛰어올랐다. 본격적인 중동 진출도 이뤄졌다. 최악의 경제 위기에 몰렸던 한국은 19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 돌파와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1975년과 1980년 사이 우리가 벌어들인 달러의 85%가 중동 건설에서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정주영 회장이 돈키호테처럼 도전한 것이 '중동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시점에 제가 건설관으로 근무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묘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28/20190728014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