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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생명력을] (1)<1> 개혁주의 생명신학 선포하기까지-(10)

영국신사77 2018. 7. 26. 23:55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교회 위기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생명 빠진 메마른 신학”

<1> 개혁주의 생명신학 선포하기까지

입력 : 2018-05-21 00:16/수정 : 2018-05-21 00:20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교회 위기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생명 빠진 메마른 신학” 기사의 사진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한국교회가 아무리 개혁주의 신학을 철저히 따른다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자기 의와 교만에 빠질 수 있다’는 생명신앙 관점에서 출발했다. 사진은 안톤 폰 베르너의 1877년 작품.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항변하고 있는 루터. 그는 황제 앞에서 종교개혁을 외치며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교회 위기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생명 빠진 메마른 신학” 기사의 사진
장종현 백석대 총장이 2010년 ‘제3회 개혁주의 생명신학 포럼’에서 신학의 사변화가 가져오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교회 위기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생명 빠진 메마른 신학” 기사의 사진
백석대 총장 장종현 목사


한국교회는 복음이 전해진 후 130여년 만에 세계교회사에 남을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가 교회 안으로 물밀 듯 밀려들어오면서 영적 생명력이 약화됐고 성장 둔화는 물론 사회적 비난까지 받는 상황이 됐다. 이 같은 현상은 그리스도의 생명은 빠진 채 학문적 측면만 강조하는 ‘메마른’ 신학, 즉 신학의 사변화(思辨化)에서 기인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일보는 백석대와 공동으로 장종현 백석대 설립자가 주창한 ‘개혁주의 생명신학’을 소개하고 신학의 생명력 회복 방안과 건강한 교회의 방향을 제시한다.

모두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한국교회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안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은 많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현상만을 진단할 뿐, 근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도가 줄어들고 교회가 문을 닫고 나아가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은 위기의 증상일 뿐이다.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제도적 문제, 잘못된 문화는 모두 현상일 뿐이다. 그런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국교회가 생명력을 회복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 생명력 회복은 신학교부터

오랜 시간 고민하던 중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이 영적 생명을 상실한 신학교육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교회의 문제는 사실 목회자의 문제였다. 더 깊이 들어가니 목회자의 문제는 신학자의 문제였고 신학자의 문제는 나와 같은 신학교 운영자의 문제였다.

과거 한국교회의 선배 목회자들은 성경 중심의 신학교육을 받고 기도에 전념했다. 그렇게 열심을 내서 성령 충만해 영혼 구원에 힘쓰니 당연히 교회가 부흥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신학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교회가 약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신학을 학문으로만 가르치는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1980년 처음으로 국내에 정규 신학대학원 과정이 개설됐다. 해외 박사들이 신학교 강단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이들은 서구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신학 커리큘럼과 교수법을 한국 신학교에 그대로 적용했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지만 성경 교육과 경건훈련이 약화되는 역반응이 나타났다. 이러다 보니 한국교회 강단은 자연스럽게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영혼이 메마른 신학생, 메말라가는 강단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는 실천운동이다. 신학교를 운영하는 나도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좋은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개혁주의 신학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주의 생명신학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새로운 신학이 아니다.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과 동일하다. 개혁주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처럼 성경에 비춰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올바른 것은 계승하는 신학이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다소 생소한 관점에서 시작됐다. 2003년 10월 전 세계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참여한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2차 국제학술대회 폐회 예배 때였다.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숨 쉬지 않고 신학이 바로 서지 않으면 신학생들에게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신학생들의 영혼이 메말라 있다면 어떻게 한국교회 강단을 살릴 수 있으며, 어떻게 성도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외쳤다. 신학교육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신가?”

개혁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5대 솔라(sola)로 요약할 수 있다.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를 강조했다. 칼뱅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강조했다.

개혁주의 신학이 아무리 좋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빠진 학문적 노력뿐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신학이 되지 못한다. ‘오직 성경’을 외친다 해도 성경을 인간 이성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신앙은 생명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성령 안에서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 ‘오직 은혜’를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 자기 부인과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와 교만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외치면서도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자기 자랑과 헛된 영광일 뿐이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을 주창한 이유

개혁주의 신학의 5대 솔라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 기도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말씀대로 살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2010년 5월 5대 솔라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생명신학 7대 실천운동을 한국교회 앞에 선포했다.

7대 실천운동의 핵심은 ‘기도·성령운동’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뜨겁게 일어나야 5대 솔라를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과 무릎으로 내려와야 한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슴의 신학,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무릎의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교회에는 영적 생명이 없으며, 그런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제대로 전파할 수 없다.

이처럼 기도와 성령운동이 신학의 생명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 될 때,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강단마다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이 힘 있게 흘러나와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다시 살리는 성경적 방법이 무엇인지 그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 백석대 총장 장종현 목사

장종현(69·사진) 백석대 총장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단국대 영어영문학과와 대한신학교(현 안양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와 미국 아주사퍼시픽대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선교사가 되어 세계선교에 앞장서겠다’고 서원했던 그는 ‘복음의 사명자를 양성하는 것도 선교일 수 있다’는 신학교육의 사명을 받고 1976년 서울 동자동에 대한복음신학교를 설립했다. 83년엔 학교법인 총신학원을, 93년에는 학교법인 백석학원을 설립했다.

백석학원에는 백석대와 백석문화대, 백석예술대가 소속돼 있다. 서울과 천안캠퍼스에 총 3만여명이 재학 중이다. 78년 예장복음총회(구 예장백석)를 설립했으며,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에 힘쓰고 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51898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말씀보다 신학을 앞세우면서 생명 잃어가는 현대교회

<2>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다

입력 : 2018-05-28 00:01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말씀보다 신학을 앞세우면서 생명 잃어가는 현대교회 기사의 사진
마르틴 루터는 중세교회가 수행과 고행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잘못된 관행에 맞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선포했다. 독일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초상화(1582년).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말씀보다 신학을 앞세우면서 생명 잃어가는 현대교회 기사의 사진
루터는 1519년 독일 플라이센부르크성에서 열린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로마교황청을 향해 “오직 성경만이 신앙생활의 규범이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500년 전 ‘오직 성경’을 외쳤던 그 자리엔 라이프치히 시청이 들어섰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말씀보다 신학을 앞세우면서 생명 잃어가는 현대교회 기사의 사진
라이프치히 토론을 주관했던 라이프치히대 전경.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말씀보다 신학을 앞세우면서 생명 잃어가는 현대교회 기사의 사진
장종현 목사



생명을 살리는 복음적 설교가 한국교회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는 것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운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는다. 신학교라고 해서 별반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신학이론을 가르친다면서 유명 신학자들의 이름을 줄줄 나열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를 알고 닮아가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경보다 신학을 앞세우는 교회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성경은 인간 구원과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답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도 함께 일하신다. 그곳엔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웠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갔다. 그 결과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역사가 사라졌다. 이는 교회의 타락을 야기했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고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절대적 기준으로 고백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처럼 성경을 중시하고 가르칠 때 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회복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받은 현대교회는 신학 체계와 교리를 새로운 전통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보다 앞세우면서 중세교회와 유사한 잘못을 범하게 됐다. 중세교회가 성경보다 전통을 우위에 둔 것이 문제였다. 현대교회도 성경보다 국내외 신학대와 신대원에서 배운 신학과 교리를 우위에 두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전통으로 성경을 강단에서 밀어낸 것이다.

이처럼 말씀보다 신학을 먼저 붙드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잃게 됐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건전한 신학 전통을 익히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강단에선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해야 한다. 생명의 복음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 말씀을 인간 기준으로 판단 말아야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계시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진리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 1:20)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왜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에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선포하면서 “모세가,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세가, 다윗이, 바울이 이 부분을 썼다”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만일 성경 저자가 단지 인간 모세, 인간 다윗, 인간 바울이라면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나. 어떻게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무슨 말인가.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다윗의 입은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일 뿐이다.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인간의 학문

그런데도 신학교 교수들은 오늘도 “모세가, 다윗이, 바울이 말했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똑바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학자들 밑에서 신학을 배운 신학생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이 훗날 목회자가 되면 과연 성경을 100% 하나님의 계시로 선포할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이 반복되다 보니 강단에서 아무리 말씀을 선포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과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그들의 교만은 한국교회 강단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성도들의 영혼을 메마르게 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온전히 믿을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성경에서 시작됐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사경회로 모였다. 성경을 읽을 때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다. 신앙 선배들은 오직 성경 한 권만 부여잡았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몸부림쳤다. 주석이나 변변한 신학서적도 없던 시절에는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수십 번씩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몸부림쳤다.

설교는 하지만 목회는 못하는 신학자

그런데 신학이 발달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목회자들이 성경보다 인간의 지식을 더 의지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기보다 자신이 배운 신학 지식을 전달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한국교회 강단이 힘을 잃고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신학자들은 설교는 할 줄 안다. 그런데 대다수가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목회는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목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며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학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학문을 우선시하고 그걸 지식으로 가르친다. 그렇다 보니 생명력 있는 목회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학자 중 다수가 성경을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하나의 역사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모세나 다윗, 바울이 썼다고만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쓰신 것이고, 바울을 통해 쓰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다윗, 바울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쓴 역사책이나 문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다. 목회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온전히 믿고 선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삶과 교회, 사회, 민족, 국가 위에 예수 생명이 넘친다.

장종현 목사(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55223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성령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

<3>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

입력 : 2018-06-04 00:01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성령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 기사의 사진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도는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찾으려고 해야 한다.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성령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 기사의 사진
루터가 1521년부터 2년간 성경을 번역했던 바르트부르크성의 방과 책상. 루터는 이곳에서 그리스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성령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 기사의 사진
루터의 성경 번역에 도움을 줬던 필리프 멜란히톤.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성령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 기사의 사진
위제 알라드의 ‘성경의 무게’(1562년). 성경의 무게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기록한 책의 권위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뒤쪽에 서 있다. 국민일보DB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핵심은 간단하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게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로 믿을 것을 강조한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1권 9장에서 성령과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이 성령을 통해 우리 가슴에 와닿으며 그것이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빌 2:16)이요, 이 생명의 말씀은 영혼을 회개시키며 소자들에게 지혜를 준다(시 19:7)… 말씀은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조명을 베풀어주시는 도구다.”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초자연적 역사를 믿어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그렇기 때문에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해야 한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자기 생각과 경험을 말하지 않았다. 성령께서 증언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령에 힘입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일부 신학자는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 역사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영감으로 쓰였고, 어느 부분이 영감으로 쓰이지 않았는지 피조물에 불과한 신학자가 결정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해와 달을 멈추게 하셨다.(수 10:12∼14) 문제는 신학자 중 일부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양이 멈춘다는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말씀인데도 믿지 않는다.

생명력 있는 신학 회복을 위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자기 마음대로 가르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인간의 지식만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이해할 수 없다. 진정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학설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신학자가 아무리 탁월한 신학이론을 제기해 인정받고 ‘지적 동의’를 얻는다 해도 생명이 없다면 헛수고다. 신학자가 십자가와 부활, 재림과 영생의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말을 해도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문헌에만 관심을 갖는다.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사복음서, 바울서신 같이 자신이 전공한 성경을 중점적으로 읽는다. 또 성경을 연구할 때 저자, 저술동기, 기록연대, 역사적 상황과 같은 학문적 배경에 집착한다.

물론 이는 신학 연구에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학문적 입장을 견지하다 보면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보다 도구에 불과한 서구 유명 신학자와 방법론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선행 연구와 학설, 논문을 참조해야지 의존해선 안 된다. 이런 신학연구 풍토에서는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이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됐다. ‘영감’이란 단어에는 하나님의 숨결과 호흡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 있다는 건 성경 저자가 인간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욥 32:8)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전능자의 숨결인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께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조명하신다는 뜻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깨달아 알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성령께서 풀어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하나님의 영으로만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주여,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성령 충만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 기도해야 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신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설교자의 책임과 의무다. 설교자가 먼저 성경의 권위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믿어야 한다.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능력 있게 증거할 수 있다. 이렇게 전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하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설교자가 되려면 1시간 책을 읽을 때 2시간 성경을 읽어야 하고, 2시간 성경을 읽을 때, 3시간 기도해야 한다.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까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 충만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할 때,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난다. 교회의 생명력이 회복된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59209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예수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4> 오직 예수 부활만 전하라

입력 : 2018-06-11 00:01
  •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예수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기사의 사진
마르틴 루터가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한 독일 비텐베르크 시립(市立) 성모 마리아교회 설교강단. 이 교회는 1535년 개신교 목사의 성직 수여식이 최초로 거행된 곳으로 종교개혁의 모태교회로 불린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예수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기사의 사진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1571년). 비텐베르크의 루터하우스에 전시돼 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예수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기사의 사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쳤던 마르틴 루터.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예수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기사의 사진
독일 아이스레벤에 있는 루터의 생가. 국민일보DB



어떤 사람들은 한국교회 문제점을 윤리적 실천의 부재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거룩과 세속을 구별하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중심되신 그리스도,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둔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며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는 뜻이다. 즉 예수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고백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종교개혁

중세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여러 중보자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래서 성인의 능력을 믿고 교회의 성례를 남용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한다는 절대 진리를 흐렸다. 자연히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라면서 주님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회복시켰다. 루터는 1521년 종려주일 설교에서 “회중은 설교자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설교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가 참된 설교자인지 아닌지 평가한다”고 말했다. 주현절 설교에선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더 이상 성경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예수가 핵심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지 않으셨다.(행 4:12) 철학 종교 과학 문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종교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는 많이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났다. 모든 사람은 범죄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의 마음은 어두워져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비워 두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셨으며, 부활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롬 4:25)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복음을 전하고 믿을 때, 영혼이 살아나고 교회의 영적 생명력이 회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세의 오류를 반복하는 현대교회

중세교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마리아와 성인, 사제들을 추가했다. 예수님 외에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상대적이고 다원적인 사상 아래 구원의 길을 개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 이것이 진리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전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강단 위기는 흐릿한 부활복음 때문

앞서 살펴봤듯이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고난주간과 부활절 절기 설교로 끝낸다. 설교한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을 똑바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인지를 전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저 헌신적인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인간의 상식으로 볼 때 본받을 만한 존재인 것처럼 십자가 복음을 약화시키고 있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사망에 종노릇하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지식을 적당히 섞어야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감동받는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와 부활복음 대신, 윤리적 교훈과 인간적 열심이 강단을 채우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생명력이 약화되고 있다. 위기 중의 위기인 것이다.

십자가 부활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

목회자를 길러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와 부활이 가진 신학적 의미를 심오하게 가르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을 통해 과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신학자들은 학생들에게 영혼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영혼구원 사역은 인간의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복음을 성경대로 선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참된 회개가 일어난다. 영혼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난다. 그런데 교회가 십자가와 부활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십자가와 부활복음이 가진 능력을 철저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란한 수사가 아닌 예수생명의 복음을

한국교회는 영적인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이 설교 속에서 되살아나야 한다. 사람들은 세상 지식이나 윤리, 도덕을 듣기 위해 교회에 오지 않는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은 현란한 수사로 가득 찬 설교가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 강단에서 회복되도록 강력한 신앙운동을 벌일 때다. 이런 분명한 고백을 해보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 2:5)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만 영혼이 구원받고 교회가 영적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기독인 삶은 자기부정…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 산다”

입력 2018-06-17 08:05:01

<5> 십자가 부활의 삶을 살라

입력 : 2018-06-18 00:00/수정 : 2018-06-18 17:05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기독인 삶은 자기부정…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 산다” 기사의 사진
십자가 신앙을 강조한 종교개혁자 장 칼뱅.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기독인 삶은 자기부정…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 산다” 기사의 사진
교회 개혁은 성도 개개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시작된다. 미국 순수예술가 존 싱글턴 코플리의 ‘예수님의 승천’(1775).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기독인 삶은 자기부정…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 산다” 기사의 사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1602). 독일 포츠담 상수시 미술관에 있다. 국민일보DB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가 강단 회복의 시작이라면 성도 개개인이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교회 개혁의 시작이다. 인본주의적 요소를 십자가와 부활보다 더 강조하다 보니 교회와 교단이 분열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려는 노력이 없다 보니 교회가 점점 세속화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자기부정,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삶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는 기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모범이 되셨다. 그 삶이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3권 6∼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기부정’으로 요약했다. 자기부정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말씀을 지키지도 않고 그의 성품을 본받지도 않고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것은 잘못이다.

영적 생명, 십자가 복음으로만 가능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자아가 날마다 죽어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영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내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영적 생명의 역사는 십자가 복음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어떤 고난을 감당하셨는지 가슴 깊이 체험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야 내가 죽는다. 내가 죽어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산다.

화평을 이루신 예수님을 모셔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면 명예와 영광보다 예수님을 더 높이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다수 성도와 한국교회는 예수님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 겉으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론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추구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분열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미워하고, 교단들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하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더 나아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막힌 담을 헐어 버릴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뿐이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도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화평을 이루는 분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 될 수 있다. 한국교회가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회복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살아야 한다. 그래야 미움과 분열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 되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영적 생명의 역사는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은 ‘자기희생’이다. 자기의 욕심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눅 9:23)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삶은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자기 부인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갈 5:16) 성령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삶, 그것이 성령충만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말과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도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슥 4:6) 성령을 받아야만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성령충만으로 교회에 생명력을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받아야 하나.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눅 11:13)

당연히 목회자와 신학자는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 돼야 한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해야 영적인 말씀의 지배를 받아 생명력 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그래야 교회를 살리는 영적 지도자를 길러 낼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전해야 한국교회가 영적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있다.

나는 과연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은 열매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이 나로 인해 화목과 평안이 이뤄지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만약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아직도 분란과 불화로 가득 차 있다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보혈공동체로서 십자가와 부활이 증거되는 곳이다. 우리가 십자가와 상관없는 길을 갈 때 교회는 세상 모임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65878&code=23111213&cp=zu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오직 믿음’은 예수만이 구원자임을 믿는 것

입력 : 2018-06-24 08:05:01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자이자 중보자이다. 이탈리아 화가 팔마 일 지오바네의 ‘그리스도의 베데스다 연못 치료’(1592년). 국민일보DB
 
도소 도시의 ‘돌에 맞아죽는 스데반’(1525년). 스데반은 ‘오직 믿음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파하다가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국민일보DB
 
십자가 복음을 외친 종교개혁 전통을 지닌 스위스 빌트하우스 전경. 국민일보DB
 
장종현 목사


‘오직 믿음(sola fide)’은 구원교리의 핵심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선행도 필요하다’는 중세 교회의 주장에 맞섰다.

우려되는 현상은 최근 일부 신학자들이 ‘이신칭의 교리가 인간을 도덕적으로 나태하게 만든다’며 이 교리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신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 서신의 중요 이슈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없애는 문제였다’는 논리로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 이신칭의를 외침으로써 참된 교회를 지켰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과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이신칭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희생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도에 맞서 ‘오직 믿음’을 더욱 힘 있게 외쳐야 한다.

오직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을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서 부패했다. 모든 사람은 타락해 무능한 죄인이 됐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아래 있다. 스스로 의와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며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5장 12절은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한다.

앞서 봤듯 인간은 타락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영생을 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한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가 죄와 죽음,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류를 화목하게 할 유일한 중보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라는 고백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인류에 주신 유일한 구원자이며 중보자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분만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의와 구원에 이르려는 신실한 자세이다.

의인으로 선언하시는 하나님 은혜

칼뱅의 지적처럼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다. 자신의 노력으론 죄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와 구원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칼뱅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는 것이 칭의라고 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람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행위의 의를 배제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인이 아닌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칭의를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받으심, 곧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영접하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의 심판 아래 있다. 따라서 사람 편에서의 문제 해결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에게 사람들의 죄를 전가시켜 대신 죽음을 당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과 희생을 통해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불순종하고 거역했던 모든 법을 우리 대신 온전하게 지키심으로 우리를 위한 의의 가능성을 마련하셨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이 성취한 의를 우리에게 돌리신다. 그리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하신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칼뱅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여겼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이신칭의,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라

의의 근거는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돌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질 때만 구원이 이뤄진다. 루터는 “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우리 안에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것은 우리 밖, 하나님 안에 있다”고 답했다.

이것이 바로 전가이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그리스도의 의라는 옷이 우리에게 입혀진 것이다. 이 옷은 믿는 자의 모든 죄와 부끄러움을 가리는 옷이다. 예수님의 혼인잔치 비유에서 준비되지 않은 자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예복이다. 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복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왕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이렇게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오직 믿음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라는 진리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고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sh100@kmib.co.kr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은 ‘의로움’보다 ‘오직 믿음’ 통해 주어지는 것

<7> ‘오직 믿음’은 순종의 삶이다

입력 : 2018-07-02 00:01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은 ‘의로움’보다 ‘오직 믿음’ 통해 주어지는 것 기사의 사진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진정한 성도는 그 은혜를 남용하지 않는다. 독일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율법과 은혜’(1529년). 가운데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율법에 따른 정죄, 죽음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예수 십자가를 통한 은혜, 복음을 의미한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은 ‘의로움’보다 ‘오직 믿음’ 통해 주어지는 것 기사의 사진
조지프 노엘 페이튼의 ‘새벽: 에르푸르트의 루터’(1861년). 마르틴 루터는 로마 교황의 박해 때문에 번뇌하다가 수도원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통해 이신칭의의 교리에 도달한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 안에는 윤리 의식을 회복하고 성도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이신칭의’ 교리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줘야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엔 ‘이신칭의를 강조하다 보면 윤리 의식이 약화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도 순종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어떤 죄를 지어도 된다’는 일종의 면죄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죄라는 것을 안다면 ‘오직 믿음으로’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믿음과 순종의 긴밀한 상관성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오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은혜 앞에서 방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3권 16장 1절에서 선행으로 표현되는 순종이 이신칭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선행 없는 신앙이나 선행 없는 이신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신앙과 선행이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칭의는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신앙에 달린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우리가 믿음만이 아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의와 구원을 얻는 데 행함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과 야고보를 통해 주신 말씀은 과연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 말씀은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지 않는다. 바울서신, 특별히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도 행함을 믿음의 필수 요소라고 강조한다.

참된 믿음, 행함의 동기로 작용

믿음은 행함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의 동기로 작용한다. 다만 믿음 없는 행함과 믿음 있는 행함만 있을 뿐이다.

성경은 전자를 가짜 선행이라고 말한다. 참된 믿음은 작은 선행으로라도 나타나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선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감격하며 그 은혜를 붙잡는 믿음이 없는 것은 참된 선행이 아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선행이 아니다.

순종과 행위, 제자도가 결여된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거짓 믿음에 불과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죄인이 칭의를 받는 것은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믿는 자가 죄의 종으로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그러기에 은혜를 핑계로 삼아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 불순종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믿는 자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순종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됐다. 과거에는 몸을 부정과 불법의 종으로 만들어 불법에 이른 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몸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리고 거룩함에 이르러 열매를 맺어야 한다.

구원받은 후 성령의 능력 받아야

구원은 우리의 어떤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순종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말과 행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함이 구원의 그 어떤 근거나 자격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참된 믿음을 나타내려는 실천운동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영적 생명을 회복할 때 가능한 일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변화된 삶도 믿음과 성령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할 것이다.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자라야 한다. 육체가 성장하는 것처럼 믿음도 계속 성장하고 더 깊어진다. 특히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갈 3:3)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실천의 주된 동력은 우리 자신이 아닌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에서 나와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덧입기 위해 우리는 기도와 성령운동에 힘써야 한다.

믿음은 사랑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

오직 믿음은 구원의 방편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부여한다. 구원의 은혜를 붙들 때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주어진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로 알고 고백해야 한다.(요일 5:1)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머리와 지식만으로 참되게 알 수 없다. 지식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닐 수 없다. 그것으론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

믿음은 말과 혀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죄 없는 아들을 육체로 보내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를 다 쏟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아들의 희생을 통해 나타내셨다. 우리의 믿음도 사랑과 희생, 섬김과 봉사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자아를 복종시키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님의 사랑처럼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살게 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나’라는 육의 존재를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시도록 내 육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며 십자가 승리를 맛보고 세상을 이기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와 구원을 얻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병 고침과 기적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세상을 이기게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 11:1)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리라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73403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은혜

입력 : 2018-07-08 08:05:01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만나의 기적’(1577년). 국민일보DB
 
용서와 화해의 복음은 사랑과 섬김이라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오스트리아 화가 조셉 이그나 밀도르퍼의 ‘오순절’(1750년). 국민일보DB
 
장종현 목사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에서 “죄인이란 구원의 길을 제공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행위에 기초한 로마 가톨릭의 구원 체계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정했기 때문에 면죄부와 순례여행 고행 금식 연옥과 성모 마리아 숭배 체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베르나르도 인간의 공로가 칭의를 얻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했다.

자력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없다.(엡 2:7∼9)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이 누리는 자연적 생명이 선물이듯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자력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이 세운 공로의 결과가 아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양심으론 구원을 얻지 못한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기록하신 법일 뿐이다. 양심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파손되고 흐려지고 어두워졌다. 하지만 마음에 기록된 율법은 역할을 한다.

인간이 양심에 따라 아무리 선하게 산다 해도 그 양심의 행위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큼 완벽한 의를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들이 보기에 착하게 산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유일한 길로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때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천국에 간다. 악인이라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면 천국에 들어간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존재

오늘날 성도들의 윤리의식이 땅에 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의 윤리적 행위를 독려하기 위해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며 성도의 악행이 구원을 취소한다’는 행위 구원론적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성도의 선한 행실은 구원의 열매이지 조건이 아니다. 선한 행실이 거듭난 영적 생명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영적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과 짝을 이룬다.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타락하고 훼손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전체가 죄로 오염됐고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 인간은 영적 측면과 지적 측면, 의지적 측면, 정서적 측면 등 모든 면에서 타락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더 귀중한 은혜의 선물 ‘구원’

인간은 태어나서 스스로 죄를 짓기 전부터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와 사망,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 심판이 확정된 것이다.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바요,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내거나 얻어 낼 수 없다. 구원받을 만한 의를 잃어버렸으며 죽음에 종노릇할 뿐 아니라 그 지성은 어두워졌다. 감성은 왜곡됐으며 의지는 선을 행할 수 없게 됐다. 외부의 돕는 손길이 없다면 스스로 의롭게 되거나 영적 생명을 얻거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비참한 존재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은 오직 삼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의 구원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계획하신 뜻의 결과다. 성부께서 뜻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만큼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선택하셔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불공평하시지는 않다. 하나님이 정하고 행하시는 것이 공평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다. 심판주도 아니다. 인간은 율법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하는 존재다.

인간의 관점에서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은 당연하며 오히려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일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망이 선고된 죄인에게 구원이란 은혜의 선물을 주셨다. 그래서 구원은 더욱 귀중한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사역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삯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과 긍휼의 결과다.

구원 앞에 그 어떤 자랑이나 공로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정하셨고 성자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셨다. 죄 없으신 그 아들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음의 형벌을 받아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아버지 뜻에 순종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취해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복종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행과 순종은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신 죄 없으신 성자 하나님의 순종과는 비교될 수 없다. 성도의 순종은 그 아들의 순종을 통해 구원을 얻은 결과이지 구원을 낳는 원인이 아니다.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은혜를 이웃을 향해 흘려보내야 한다.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용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됐듯이, 우리의 희생 속에서 우리 이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돼야 한다.

우리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용서받았고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구원받았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만났고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조건적 사랑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가 돼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성령의 열매로 풍성히 나타날 것이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와 용서, 우리 이웃과 나눠야

입력 : 2018-07-15 08:05:01

렘브란트 판레인의 ‘돌아온 탕자’(1663∼1665년). 가산을 탕진하고 욕망을 좇아 제멋대로 살다가 돌아온 탕자라 할지라도 아버지에겐 여전히 소중한 아들이었다. 이처럼 죄 많은 인간일지라도 좋으신 하나님께는 소중한 자녀다. 국민일보DB
 
페르디난드 볼의 ‘야곱의 꿈’(1642년). 속임수로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형의 복수를 피해 도망친다. 이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위로해준다. 국민일보DB
 
장종현 목사


교회 역사상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오해하거나 악용할 위험성은 항상 있어 왔다. 대표적인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오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므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오히려 은혜를 더하게 하는 것’이라는 궤변도 있다.

오늘날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결국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칭의의 복음을 오해하고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 한번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칭의를 통해 형벌을 면제받았어도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회개를 통해 계속 죄와 싸워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도 평생 죄와 싸웠다.

구원의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남용하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과 탐욕거리로 변질시키는 거짓 복음이 횡행한다(유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주신 것은 다시 죄에 얽매여 죄로 인해 망하는 거짓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경건과 선한 일을 통해 참 백성을 만들기 위해 주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는 은혜를 남용하고 왜곡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말로는 오직 성경을 외치고 정통 교리를 보수한다고 하지만 탐욕과 헛된 영광을 위해 분열을 계속하고 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은 외치지만 회개와 용서, 화평의 삶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경건하고 근신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참 백성이 되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서로 다투는 이유는 교만에 있다.(잠 13:10) 남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는 ‘오직 은혜’를 외치는 데서 끝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반목과 질시, 분열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한다.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님 은혜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돼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줘야

‘오직 은혜’의 핵심은 놀라운 구원을 거저 받았다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또한 성자 하나님의 철저한 순종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거듭난 영적 생명을 스스로 얻거나 누릴 수 없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택하심과 부르심의 결과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들을 우리 이웃과 나눠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생명의 복음을 나눠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물질을 포함한 모든 것, 심지어는 생명까지 기꺼이 나눠야 한다.

거저 받은 사람은 거저 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비워 두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찾아와 주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도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어 드린다. 그 은혜 앞에서 이기적인 주장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신 그 아들을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내어 주셨다. 우리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조건 없이 드려야 한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을 받고 누리는 자의 증거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 주신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와 상관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용서와 화목을

은혜의 복음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은 용서와 화목이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자는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심판하려 하기 때문이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을 수는 없다.(약 4: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에게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누린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간구하는 주기도문의 의미다.

우리는 주인에게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금액의 빚을 탕감 받고 나오는 길에 자신에게 겨우 100데나리온의 적은 돈을 빚진 동료의 멱살을 움켜쥐는 모습이 나의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한 용서는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부패한 자아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타인을 심판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주의 자리에 올라간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주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약 4:10) 모든 심판을 주께 맡겨야 한다.(롬 12:19, 벧전 2:23) 우리가 받은 은혜와 용서를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에게도 흘려보내야 한다. 이러한 순종은 무릎 꿇는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 하나님께서 용서할 마음과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의무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이 제자 됨의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참된 사랑만이 연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우리가 그 참된 사랑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다.

온갖 이기심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부패한 인간 본성으로는 참된 연합을 이룰 수 없다. 주님은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희생을 통해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이처럼 우리도 이기심과 헛된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형제와 화목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도우심 앞에 온전히 엎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화목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다. (엡 4:3)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

<10>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입력 : 2018-07-22 08:05:01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데 있다. 네덜란드 화가 얀 브뤼겔의 ‘에덴동산’(1612년).국민일보DB
 
성도는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부활하는 예수’(1463년).국민일보DB
 
장종현 목사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하나로 묶는 성경적 원리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다. 구원이라는 전적인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라면 오직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신학, 학문이 아닌 하나님 체험하는 지혜

우리는 오직 성경만이 최종적 권위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우리 삶의 목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온 천하 만물 가운데 홀로 거룩하고 영광 받으실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 천하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고 예정해 부르셨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을 인간의 사변적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 영광의 본체를 있는 그대로 직접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루터의 생각은 달랐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이라기보다 지혜에 더 가깝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지혜란 ‘경험적 지혜’ ‘체험적 지혜’를 말한다. 그가 말했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그 체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결국 고통과 시련 슬픔 절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하는 체험적 신앙인 것이다.

인간 이성으론 하나님 영광 깨닫지 못해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알아낼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주도권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에게 있지 않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그분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가장 분명한 계시는 성경이다. 그 계시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가장 비천하게 여기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이것은 세상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복음의 신비다.

중세교회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말로 외쳤다. 하지만 인간 이성을 하나님보다 더 높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사변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상 지혜를 찾는 헬라인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은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곳인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무한히 크신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가장 빛나는 영광이신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래서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창조와 섭리를 통해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구원의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다. 그러한 역사의 정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십자가 기꺼이 지는 삶 살아야

하나님은 죄로 죽어 마땅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탄생과 성장, 공생애 사역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 사함의 은총을 주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활의 능력을 통해 온 세상에 보여주셨다. 그분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즉 주님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성화를 이루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장차 얻을 영광스러운 삶을 소망하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흔적 보여야 하나님께 영광

우리 신앙과 삶의 절대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다. 우리 자신의 불완전한 판단보다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의탁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릴 수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구해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덮을 수 없는 것을 덮어야 한다.

이런 열매를 통해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이런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