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3년 7월) |
항우 | |
서초의 패왕 | |
재위 |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
---|---|
전임자 | 초 의제 |
후임자 | 한신(초나라 왕으로서) |
별칭 | |
휘(諱) | 항적 |
신상정보 | |
출생일 | 기원전 232년 |
사망일 | 기원전 202년 |
배우자 | 우희 |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02년)는 중국 진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초한전쟁 때 초나라의 황제로, 우는 자이며, 이름은 적(籍)이다.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숙부 항량을 따르며 진왕 자영을 폐위시켜 주살한 후로 서초 패왕(西楚 覇王)에 즉위함으로써 왕이 되었고, 초 의제를 섭정으로 도와 통치했으나, 그를 암살했다.
뒷날 유방의 도전으로 초한의 끝없는 싸움을 싸우다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문학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원나라 이후 희극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하였으며, 고려시대 이후의 문학에도 등장한다. 또한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도 숭배된다. 장기에서 초나라의 왕은 항우를 상징하는 기물이다.
생애[원본 편집]
마지막까지 진나라에 항거한 초나라 명장 항연의 손자로 조부가 죽고 초나라가 멸망하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의 오중으로 숨어, 숙부 항량의 손에 자랐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수 은통을 참살한 뒤, 8천여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주변 세력을 병합하였다.
후에 양부나 다름없던 숙부 항량이 진의 장한의 계책에 죽자 격분하여 스스로 상장군이라 칭한 뒤 하북(河北)에서 장한(章邯)을 항복시키고 도처에서 진나라군을 무찔러 진의 세력을 소탕하였다.
허나 이 기간동안 패현의 유방(劉邦)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함양왕이 되려하자 서둘러 함곡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유방이 함곡관에서 자신을 막고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유방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방이 지레 겁을 먹어 함곡관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에 항우는 유방을 홍문에 불려내 범증의 말처럼 죽이려 하였으나, 장량의 계책에 빠져 결국 죽이지 못하고 유방의 항복을 받은 후 유방을 풀어줬다.
이후 항우는 함양성에 입궁하여 진왕 자영(秦王 子嬰)을 죽이고 도성 함양에 아방궁과 일부 건물을 불사른 뒤에 금의환향(錦衣還鄕: 금의환향의 고사도 항우에게서 태어났다)의 명목으로 팽성(彭城)에 도읍한 후 서초 패왕이라 칭하였다.
본래 자신이 숙부 항량과 함께 세웠던 초나라의 의제를 기원전 206년에 암살했다. 이는 뒷날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모델이 되었고, 한편 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파촉을 제외한 전통적인 진나라 지역은 셋으로 나누어 장한, 사마흔, 동예를 왕으로 삼고 지키게 했을 뿐이었다. 이에 소하의 천거로 대장이 된 한신은 삼진을 속전속결로 격파하고 패왕이 미처 원군을 보내기도 전에 함양성을 점령한다.
패왕은 그제서야 한왕 유방을 치려 했으나, 다시 한번 장량(張良)의 농간에 빠져 한을 치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대나라 왕을 일컫는 진여와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 이는 한왕으로 하여금 중원으로 더욱 더 진출을 할 수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것이다.
패왕은 제나라의 반란을 단숨에 제압하지 못하였고, 이에 한신과 장량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진한 한왕에 의해 수도 팽성을 빼앗겼다. 이에 패왕은 종리매 등에게 주력군을 내려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게 하고 자신은 단 3만의 정예부대로 팽성을 수복하러 간다.
이에 한왕은 자신의 군과 천하의 여러 제후들이 보낸 원군이 보낸 총 병력 60만 대군을 이끌고 팽성에서 패왕와 맞섰는데 이가 팽성 전투이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지만, 패왕은 그 특유의 용맹과 무예로 한왕의 60만 대군을 격파해, 수십만의 제후연합군이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었다.
패왕은 팽성을 수복하였으나, 끝내 유방을 잡지는 못하였다.
이후에도 자신의 특출난 장수로써의 실력과 참모 범증(范增)의 계책을 써
고조 유방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 하였으나, 고조에게 투항한 진평(陳平)이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아
결국 항우는 범증을 내쳤고, 이에 상심한 범증이
고향으로 내려간 후 종기에 걸려 죽고 말았다(이를 중국 제 2대 애탄이라 한다).
그 후에도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선 승리를 하는 등 용장의 기세를 보였으나,
항우가 유방과 대치하는 틈을 타 하북을 평정한 한신까지 합세하자,
결국 해하(垓下)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군의 포위망에 갇혀있게 되었고
한나라군은 장량의 계책으로 초군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항복하게 하기 위해
초나라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하게 하였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이를 빗대어
위기에 몰린 사람에게 이 계책에서 유래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를 만들어 불렀다.
항우는 허탈하고 상심하여 수백 명밖에 남지않은 자신의 진영을 둘러보았고, 이에 끝까지 자신과 함께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고향인 강남으로 향할 수있는 오강(烏江)까지 자신이 그들을 이끌도록 약속한다. 일단 진영을 에워쌌던 100만에 달하는 한군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자 남은 것은 단지 28기 뿐이었다. 항우는 참담하면서도 더욱 악에 받쳐 그 28기를 이끌며 강가로 달려갔는데, 그 와중에도 한의 관영(灌嬰)이 이끄는 정예병 5천이 추격하였지만, 항우는 그들을 단 28기로 격파하였고, 마침내 오강에 다달아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던 강남의 자제들을 모두 강남으로 향하는 배에 태웠는데, 이때 살아남은 기마의 수는 두 명만이 죽은 26기로, 몇 천 명을 상대로 싸워 두 명만이 죽고 유방과 한신의 지독한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항우는 그 26기의 강남자제와 사공의 배를 타서 강남으로 도망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권유를 거부하였는데, 처음 회계에서 거병할 때 자신을 따른 8천의 강동자제들을 모두 잃고 이제 오직 26기만 살아있으니 강동의 백성들이 용서하여도 자기 자신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가 강남으로 떠난 것을 보고 항우는 마지막에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워 수백 명을 죽이고 자신 역시 많은 부상을 입었다. 항우는 옛 부하 여마동(呂馬童)을 보고는 “유방이 내 목에 천 금과 만 호를 걸었다는데 그 은혜를 베풀겠노라!”하고는 목을 베어 자살하였다.
왕예(王翳)가 목을 취하자 남은 기병들이 서로 짓밟으며 그 시신을 다투다가 수십 명이 죽었다. 결국 여마동, 양희(楊喜), 여승(呂勝), 양무(楊武) 네 명이 하나씩 차지했고, 나중에 맞춰보니 항우가 맞았기에 봉지를 다섯으로 나누어 모두 제후가 되었다.
항우는 진나라와의 거록 전투, 유방과의 수수 전투를 통해 역대급의 무예와 통솔을 자랑하는 장수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 지은 시인 해하가(垓下歌)가 있다(《사기》의 항우본기에 기록되어 있음.). 많은 전문가들은 장수의 재능으로서는 항우를 중국 역사상 최고라고 평가한다.
해하가(垓下歌)[원본 편집]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騶不逝(시불이혜추불서)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虞兮憂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스스로에 대한 평가[원본 편집]
항우는 측근의 전략이나 힘보다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기를,
“ | 내가 군사를 일으킨지 8년 동안 70여차례 싸우면서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 모든 싸움에 이겨서 천하를 얻었으나 여기서 곤경에 빠졌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버려서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여기서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기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게 아니란 것을 알 것이다. | ” |
— 항우, 해하전투가 있기 전 |
이것을 보았을 때 항우는 자만심에 빠져서 패했다는 말과 인재를 쓰지 못함이 크다.
인물평[원본 편집]
항우는 평소 학문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의 일화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숙부 항량이 젊은 항우에게 처음에는 학문을 가르쳤으나 얼마 못가 학문은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면 된다며 그만 뒀고, 무술을 가르쳤으나 이 또한 얼마 못가 무술은 한 명의 적을 상대할 뿐이라 시시하다 하며 그만 두어서 항량이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항우는 이마저도 지루해 하며 제대로 공부하지 아니하여 얼마 못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항우는 자신의 부하들을 못믿고 의심을 많이했는데, 특히 자신의 중요한 장수였던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를 못믿어 영포에게 항우 자신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고 끝내 유방에게 빼앗긴 것과 중요한 신하 종리매와 참모였던 범증마저 진평의 반간계에 빠져 의심하고 결국엔 자기의 손으로 범증을 내쳐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은 항우의 의심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 반간계라는 게 아주 어이없었다. 진평은 진수성찬을 차린 뒤 항우의 사신을 맞이하면서 계속 승상 범증의 안부만 물었는데 사신이 자신은 항우의 사신이라서 범증의 사사로운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고 말하자 진평은 진수성찬을 치우고 항우의 사신이라는 이유로 면박을 주고 내쫓았다. 이를 항우에게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에 대한 질투심이 극에 달해서 범증을 꾸짖고 내쫓았다. 결국 범증은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으며 범증이 없어진 항우는 빠르게 멸망했다.
또한 그는 대체로 자신의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참모 범증의 말을 듣지않고 유방을 홍문에서 죽이지 아니한것, 함양을 떠나 금의환향을 한다면서 팽성으로 도읍하여 결국 한신에게 하여금 손쉽게 천하의 중심 관중을 차지하게 방치한것, 의제를 시해한것, 한신을 얕보아서 무작정 돌격하여 범증이 보낸 포장군(蒲將軍)이 아니였다면 한신의 계책에 죽을뻔 한 것 등 범증의 말만 들었다면 아마 유방은 한중에서 나오긴 커녕 시도조차 하지못했거나 아님 아예 홍문에서 죽었을 것이다. 참모 범증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다른 부하들의 말을 안듣는 것은 당연지사, 항우는 해하에서 부하들이 강남으로 후퇴하자는 권유를 무시하고 결국엔 사면초가의 계로 인해 싸움한번 하지않고 군사를 전부 잃고말았다.
또한 항우는 비록 자신의 부하들은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지만, 적군에겐 잔혹하였는데,
한 번은 반란의 조짐을 내비친 자신에게 항복한 진군 20만 명을 모조리 생매장시켰다.
기타[원본 편집]
-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초 의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항우를 공격하게 된다.
- 한국 조선시대의 김종직은 세조의 반정을 항우의 쿠데타에 비유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다.
- 중국의 민간 설화에는 이런 것이 전해진다. 어느 날 항우가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항우에게 "귀공깨서는 천지를 진동하는 패왕이니 이 쬐끄만 이를 죽이는 것 쯤이야 귀공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오. 한번 죽여보겠소?"라고 말하자 항우는 이를 향해 바위를 번쩍 들어서 내리쳤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살아서 멀쩡히 기어다녔다. 이에 조조는 두 개의 손가락을 움직여 손톱으로 이를 눌러 죽였다. 이를 본 항우는 조조에게 굴복했다.
가계[원본 편집]
같이 보기[원본 편집]
관련 항목[원본 편집]
전임 초 의제 미심 | 중국 초나라의 군주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 후임 없음 |
전임 초 의제 미심 | 중국 황제 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 | 후임 한 고조 유방 |
[숨기기] 초한전쟁의 주요 인물 | |||||||
---|---|---|---|---|---|---|---|
황제 | |||||||
열국 | |||||||
서초 |
| ||||||
한 |
| ||||||
제후 |
|
|
'◈◈ 海外 聖地순례 > 中國동東Asia 歷觀 & 聖地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범증/위키백과 (0) | 2017.10.08 |
---|---|
항백/위키백과 (0) | 2017.10.08 |
종리매/위키백과 (0) | 2017.10.08 |
조참/위키백과 (0) | 2017.10.08 |
초한전쟁/위키백과 (0) | 2017.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