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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임진왜란, '준비 없이 맞은 전쟁' 아니었다

영국신사77 2017. 2. 3. 13:18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임진왜란, '준비 없이 맞은 전쟁' 아니었다

  • 송우혜 소설가

입력 : 2017.01.25 03:06

[이순신 리더십] [4]

"일본은 침략한다"고 본 선조
城 신축하며 미리 대비했지만 전투력 안 키운 육군 잇단 패배… 승리 의지도 없어 달아나버려
軍備와 승전 의지 함께 갖춘 충무공은 거듭된 大捷 일궈내

송우혜 소설가
송우혜 소설가
"임진왜란은 준비 전혀 없이 맞았고, 그래서 초전에 그처럼 처참하게 박살 났던 것"이라고 많은 이가 생각한다. 선조 23년에 통신사 사절단의 부사로 일본에 갔던 동인(東人) 김성일이 돌아와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을 믿고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절박한 위기감을 갖고 전쟁에 대비했다. 유능한 무장들을 최전선에 배치하려 노력했고, 왜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남쪽 지방 성들을 신축하거나 개축하도록 강력히 조치했다. 류성룡은 당시 상황을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뒤 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변방 사정에 밝은 사람을 뽑아서 남쪽의 삼도(三道:경상·전라·충청)를 방비하게 했다. 경상감사에는 김수, 전라감사에는 이광, 충청감사에는 윤선각을 보내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했다. 삼도 중에서 경상도에 성을 가장 많이 쌓게 했다.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에는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중수하게 했다. 이때 국가는 오랫동안 승평한 세월이 흐를 때였다. 안팎이 모두 편하게 사니, 백성은 자연 노역을 꺼려서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선조실록에는 좀 더 상세한 기술이 나온다. 임진왜란 발발 2년째였던 선조 26년에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그때까지의 전쟁 상황 일체를 보고하라고 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 작성해 명나라에 보낸 보고문에 전쟁 발발 전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순찰사 김수를 경상도로, 이광을 전라도로, 윤선각을 충청도로, 순변사 신립과 이일을 경기도와 황해도로 보내 군정(軍丁)을 점열(點閱)하고, 군기(軍器)를 수조(修造)하며, 성지를 손보아 고쳐 쌓게 했습니다. 경상도는 전에도 적의 침략을 받았던 땅이므로 부산, 동래, 밀양, 김해, 다대포, 창원, 함안 등지의 성을 증축하고, 참호도 깊이 팠습니다. 내지의 성이 없는 곳들, 이를테면 대구부, 청도군, 성주목, 삼가현, 영천군, 경산현, 하양현, 안동부, 상주목 같은 곳은 모두 백성을 징발해 성을 쌓았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윤11월 14일)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임진왜란, '준비 없이 맞은 전쟁' 아니었다
/이철원 기자
그처럼 전쟁 방어용 대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백성의 삶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매우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당시 상황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료가 있다. 김성일이 임진왜란 발발 불과 5개월 전인 선조 24년 11월에 임금에게 올린 차자(箚子·간략한 서식의 상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당시 홍문관 부제학(정3품)이었는데,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 방어 준비'로 백성이 막심한 고통을 겪는 걸 멈추게 하겠다는 소신으로 '청정축성잉진시폐차(請停築城仍陳時弊箚·성 쌓는 걸 멈추기를 청하고 시폐를 아뢰는 차자)라는 제목의 차자를 선조에게 올렸다. 그 차자에 당시 상황이 생생히 담겨 있다.

"지금 국경에 있는 성에 설치하는 망루를 내지의 성에까지 설치하고 있어서 인심이 요동치고(…) 부역은 연이어도 완공이 어려워서(…) 백성이 병들고 재력이 모두 허비되고 있어(…) 이 역사를 시작할 때 백성이 전지 1결당 베 17~18필을 냈으며 하루 역사에 보상하는 쌀이 4~5곡에 이른다고 합니다.(…) 규정된 세금 외에 덧붙여 거두는 것도 있는 데다 다시 이렇게 많이 거둬들이니, 백성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한 과부가 밭을 팔아 세금으로 바쳤는데도 부족해서 숲속에 들어가 목을 매 죽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관동지방은 더구나 땅이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여 성을 쌓는 역사를 지탱하기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도망한 백성이 영남의 산골 마을로 잇달아 들어가고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하는바, 신들은 몹시 걱정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백성이 들판에서 원망해도 주상께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김성일, 학봉선생문집)

그처럼 국력을 모두 기울여 전쟁을 대비했는데도 어째서 전쟁 초기 그토록 지리멸렬한 패전을 거듭했는가? 답은 명확하다. 선조는 일본의 침공을 확신하고 거국적인 전쟁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하필 왜군이 상륙한 영남 지방은 김성일 같은 영남 출신의 견해를 따라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임금의 명에 따라 성을 쌓고 무기를 준비했지만 전투력은 제대로 키우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거나 싸우는 족족 패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확신한 이순신이 거북선 등 특수 전함까지 보강하고 군사 훈련을 철저히 시키면서 대비해 해전 초기부터 승리를 거듭한 것과 비교된다.

이야기가 이에 미치면, 전쟁 초기 선조가 그처럼 빠르게 궁궐을 버리고 도망친 이유가 새롭게 조명된다. 선조가 어리석어서 전혀 전쟁 대비 없이 지내다가 도망친 것이 아니다. 온갖 원망을 들어가며 힘껏 전쟁에 대비했는데도 막상 전쟁이 터지자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육지의 아군이 참담한 패전을 거듭하자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경악과 격심한 공포를 느껴 황망히 달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