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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북 위협 속 현장근무 자청하고, 인도 전통 옷 입어 환심 사고

영국신사77 2017. 1. 8. 19:49

[사람 속으로] 북 위협 속 현장근무 자청하고, 인도 전통 옷 입어 환심 사고




해오외교관상’ 받은 두 여성 외교관
말끔한 슈트 차림의 중년 남성. 외교관이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이지만 이제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외교관 전체를 상징하지 못한다. 2000년 외무고시 합격자의 5분의 1에 불과했던 여성의 비율은 2005년 처음으로 역전됐고, 이후로 거의 매해 여성이 열 명에 여섯 명꼴로 입부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여성이 근무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을 험지에도 여성 외교관이 다수 배치돼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백윤정(48)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 박은진(34) 주인도 대사관 1등서기관이 해오외교관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이 같은 이유였다. 고(故)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가족들이 설립한 해오재단은 국익을 위해 소임을 다한 외교관들에게 2013년부터 매해 이 상을 주고 있다. 백 영사와 박 서기관으로부터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여성 외교관으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연중 계속되는 위협
백윤정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
북·중 접경지역 관할하는 곳서 근무
북한인으로 보이는 남성들이 감시
“아이 귀가 조금만 늦어도 가슴 철렁”
백윤정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는 북한 문제 등을 다루는 게 임무다. 신변 위협도 받지만 “현장에서 부딪치며 배우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백윤정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는 북한 문제 등을 다루는 게 임무다. 신변 위협도 받지만 “현장에서 부딪치며 배우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백윤정 영사는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다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치고 2006년 경력공채로 외교부에 입부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 통상 업무를 주로 다뤘다. 지금 하는 정무 업무는 경력과는 다소 무관하지만 현장에서 뛰고 싶은 마음에 본인이 희망했다. 북한 문제, 동북공정 문제 등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뤄야 하는 게 오히려 더 끌렸다고 한다.

그가 근무하는 선양 총영사관은 북·중 접경지역을 관할한다. 항상 안전이 가장 신경 쓰인다. 지난가을 단둥에 대북관계 일 처리를 위해 갔을 때의 일이다. 호텔 로비에서 중국 기업인을 만나는데 건장한 남성 4명이 주변을 둘러싸고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를 엿들으려 했다. 눈매며 턱선, 얼굴색 등을 볼 때 영락없는 북한인들이었다. “의도적으로 압박하려고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제 얼굴을 익히려는 것처럼 계속 눈을 마주치더군요.”

숙소 침실 창문이 깨지는 일도 있었다. 백 영사는 대북 업무를 중단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계속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일에 겁먹고 일을 그만두면 그게 바로 북한이 의도했던 대로 되는 것이었다. 그건 싫었다”고 말했다.
2015년 단둥의 중국동포 민속놀이 행사에 참석한 모습.

2015년 단둥의 중국동포 민속놀이 행사에 참석한 모습.

연중 위협에 시달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업무가 바빠 중학생 아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 많다는 것이다. 관내 출장을 가면서 사흘치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놨는데, 중간에 음식이 떨어져 아들이 난감해하며 전화를 한 적도 있다. 귀가하는 스쿨버스가 조금이라도 늦을 때는 가슴이 철렁한다. 누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아이를 해코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들어서다. 백 영사는 “아들이 외교관은 몹쓸 직업이라며 나처럼은 안 살겠다고 한다”며 가슴 아파했다.

힘든 환경이지만 외교 최일선에서 태극 마크를 달고 뛰는 일은 그에게 여전히 매력적이다. 현지의 중국동포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자리에서 주는 대로 백주를 다 받아 마셨다가 기절한 적도 서너 차례 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중국동포들이 꿀까지 보내며 안부를 챙겨줘 친해지기도 했다”며 웃었다.
 
전통 복장에 길거리 음식도 섭렵
박은진 주인도 대사관 서기관
인도 옷 입고 길거리 도시락 먹으며
현지 공무원과 친해져 양국협상 성공
“외교관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직업”
박은진 주인도 대사관 서기관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울인 작은 노력들이 응답받을 때만큼 짜릿한 순간은 없다”고 말했다.

박은진 주인도 대사관 서기관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울인 작은 노력들이 응답받을 때만큼 짜릿한 순간은 없다”고 말했다.

외시 41회로 2007년 입부한 박은진 서기관은 2년 전 인사과로부터 인도 부임 통보를 받았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는 버스 내 여대생 집단성폭행 사건 등 흉흉한 인도발 뉴스가 다수 보도될 때였다. “아직 결혼도 안 한 꿈 많은 여성을 이런 곳에 보내다니, 외교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이라고 생각했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생각이었다. 근거도 없는 선입견과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현지에서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스스로 그런 선입견에 도전하기도 했다. 인도에 있는 한국 여성들에겐 인도 옷을 입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 여성이 인도 복장을 하면 생김새가 비슷한 인도 동북부 출신 가사도우미로 오해받고 무시당한다는 이유다.

하지만 박 서기관은 공식 면담에도 인도 옷을 입고 나갔다. 인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 트렌드대로 두파타(스카프), 쿠르타(상의), 파자마(하의)에 색을 맞춘 귀고리까지 했다. 이렇게 입고 나간 항공협정 개정 협상에서 냉랭하기로 외교가에 소문난 인도 민간항공부의 담당 여성 과장이 “당신처럼 제대로 갖춰 입은 외국인은 처음 본다”고 호감을 표했다.
인도 복장을 한 박 서기관이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인도 복장을 한 박 서기관이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박 서기관은 여기서 섬세한 노력을 좀 더 했다. 해당 과장의 아버지가 홍삼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비로 홍삼 진액을 사서 선물했다. 그와는 언제든 편하게 문자메시지로 속내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까지 친해졌고 항공협정은 성공적으로 개정됐다. 서울~델리 직항 편은 주 3회에서 주 19회까지 늘었다. 박 서기관은 “외교란 사람의 마음을 사는 직업이란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인도 철도부와의 협상에서도 빛을 발했다. 논의가 길어지자 인도 측 공무원이 직원을 시켜 노점에서 도시락을 포장해 왔다. 인도의 열악한 위생 상태 때문에 외국인들은 통상 길거리 음식은 먹지 않는다. 한국 측 대표단은 당황하며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박 서기관이 설득했다.

“우리 쪽 대표는 과장급인데 인도 측은 차관보급이 나와 성의껏 대해 줬어요. 우리가 사업 수주만 할 수 있다면 헛것을 보면서 일주일간 설사를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도시락을 다 먹고 토론을 계속했습니다.” 배앓이를 각오한 끝장토론 덕에 이날 협의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박 서기관은 “외교관은 속도로는 기자를 이길 수 없고, 전문성으로는 해당부처 담당 사무관을 이길 수 없다”며 “하지만 인도 사람들과 수많은 차이(인도에서 많이 먹는 밀크티)를 나눠 마시면서 맺어 놓은 인맥은 외교관만의 무기”라고 말했다.
 
아이 데리고 대사관 출근
여성 외교관의 고민도 직장에서 일하는 다른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에서 경쟁을 이겨내야 하고, 워킹맘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여성 외교관들은 여기에 해외 공관 근무라는 특수한 조건이 더해진다.
과거 남성 직원이 대부분일 때는 전업주부인 부인이 함께 임지에서 생활하며 양육을 담당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여성 외교관은 남편은 한국에 남고 자녀만 데리고 공관에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녀와 함께 나가도 제대로 챙겨 주기 힘든 여건이다. 주재국과의 업무 만찬도 잦고,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 임무를 맡으면 말 그대로 24시간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근무했던 한 여성 외교관은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베이비시터가 일찍 퇴근해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두세 시간 늦게 갔더니 선생님이 아동 방임으로 경찰에 신고를 해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에 아예 방과 후에 아이를 공관에 데리고 와서 근무하는 엄마 외교관도 적지 않다. 그런 경험이 있다는 한 인사는 “아이까지 눈치를 보는 상황이 돼 마음이 아팠다. 그것도 공관장이 이해해 줬기에 가능했지 프로답지 못하다고 나쁘게 보는 상사도 많다”고 귀띔했다.
한 여성 외교관은 “복무규정 자체가 전업주부를 부인으로 둔 남성 외교관을 전제로 돼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관 부임이나 본부 복귀 시 곧바로 업무에 착수해야 하는데, 아이와 같이 움직이는 경우 학교나 베이비시터를 알아볼 물리적인 시간이 전혀 없다. 다만 1주일이라도 휴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기적인 해외 근무와 출장 때문에 연애나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미혼 여성 외교관도 많다. 한 여성 외교관은 “갑작스럽게 해외 출장이 잡혀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하니 ‘너 혼자 나라라도 구하러 다니냐’며 화를 냈다. 외교관 업무를 잘 모르는 이들은 이해가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열차로 대륙을 횡단하는 한 달짜리 출장에 참여했던 한 직원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S BOX] 외교부 거센 여풍…작년 5·7급 공채 70명 중 44명이 여성
외교부에서의 여풍(女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6년 입부한 70명(5급·7급 공채 합계) 중 여성이 44명이다. 입부 외교관 중 여성이 수석이란 사실은 더 뉴스도 아니다.

본부에는 요직을 맡고 있는 선구자 격의 여성들이 있다. 백지아(54·외시 18회) 기획조정실장은 올 3월 여성 외교관 최초로 외교부 실장급 간부가 됐다. 국장급으로는 국립외교원 유혜란(51·외시 23회) 기획부장이, 심의관(부국장)급에는 남아시아태평양국의 김은영(47·외시 28회) 심의관이 있다. 김효은(50·외시 26회) 주세네갈 대사는 현 정부 첫 여성 대사다. 여성 사무관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시절 입부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여성 외교관들이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남성들이 강세였던 부서들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북미국 북미2과장은 강수연(43·외시 33회) 과장이 맡고 있고, 동북아국의 동북아협력팀장도 여성(나용욱 팀장·41·외시 35회)이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된 외교정책 수립 업무를 맡는 북핵외교기획단의 북핵협상과는 과장을 제외한 전 직원이 여성이다.

이런 현상은 점차 가속화할 전망이다. 현재 과장 이상의 간부급 여성은 약 50명이지만, 과장급 이상으로 승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여성 외교관은 향후 5년 내에 약 10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북 위협 속 현장근무 자청하고, 인도 전통 옷 입어 환심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