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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의 역사탐구-이순신 리더십[1]] 출세 늦은 초라한 武將? 선조가 알아본 救國의 재목

영국신사77 2017. 1. 4. 14:46

 

[송우혜의 역사탐구] 출세 늦은 초라한 武將? 선조가 알아본 救國의 재목

  • 송우혜 소설가

 

입력 : 2017.01.04 03:06

[이순신 리더십] [1]

'별 볼 일 없던 이순신을 천거'
징비록의 충무공 기록 때문에 초라했던 인물로 기억하지만
일본 침략에 위기 느낀 조정의 병조판서·우의정이 추천하고 선조 임금이 직접 등용해

대한민국이 정치 리더십 공백 속에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았다. 2017년 대선을 통해 등장할 새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인가. 정유재란이 나던 1597년 13척 배로 명량해전 승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은 420년이 지난 지금도 불멸의 존재감을 지니고 역사의 하늘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순신의 시대에나 오늘날의 우리 시대에나 늘 절박하게 사회 구성원들을 다그치는 물음이 있다. '참된 지도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것이 사회의 발전과 건강함을 견인하는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서 그 문제를 명쾌하게 추적해보기로 한다. ㅡ편집자

송우혜 소설가
송우혜 소설가
현재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기 이전 모습'은 매우 초라하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있는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순신은 이 밖에도 여러 숨은 공이 많았다. 하지만 조정에서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다. 이즈음 왜인의 교만스러운 태도는 날로 극성스러워만 갔다. 임금은 비변사에 명하여 제각기 장수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하였다.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소 수사(水使)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순신이 갑자기 승진한 것을 의심하는 이도 혹 있었다.'

류성룡은 선조 시대에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 극복에 전력으로 헌신했다. 징비록 또한 워낙 유명한 책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이가 위의 글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이순신 연구자 중에는 이 기록을 고증 없이 맹목적으로 믿고 악의적 해석까지 첨가해서 "이순신은 권력을 지닌 문신인 류성룡에게 아부하고 빌붙어서 출세한 무장"이라고 기술한 이까지 있다. 실제는 과연 어떠한가? 엄정하게 고증해 보면 놀랍게도 류성룡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첫째, 류성룡이 기술한 것처럼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선조 9년(1576)에 과거 급제하고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임명돼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승진과 좌천을 거듭했다. 과거 급제 4년 만인 선조 13년에 발포 만호(종4품)로 뛰어올랐다가 2년 뒤 좌천됐다. 이어 선조 19년에 조산보 만호(종4품)로 승진 임명돼 2년간 재임한 뒤 다시 좌천됐다. 선조 22년 전라도 조방장(직속 상관의 품계에 따라 정3품 또는 종3품에 임명됨)으로 승진해 재임하다가 그해 12월에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됐다.

[송우혜의 역사탐구] 출세 늦은 초라한 武將? 선조가 알아본 救國의 재목
/이철원 기자
둘째, '조정에서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서술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선조 22년 1월, 일본의 강력한 침략 조짐에 막중한 위기의식을 느낀 선조가 신하들에게 "무장을 추천하라"고 명하자, 당시 조정의 최고 실세였던 병조판서 정언신과 우의정 이산해가 이순신을 추천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월 21일). 그뿐만 아니다. 같은 해 선조 자신도 이순신을 추천했다. 그는 비변사(국방과 군사 업무를 전담했던 최고 권력기관)에 "이경록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7월 28일).

셋째,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소 수사가 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선조 24년 2월 12일에, 선조는 비변사에 "이천, 이억기, 양응지, 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2일). 네 사람이 남쪽 바다를 지키는 수사가 되도록 각자 부임할 임지를 정해주라는 명령이었다. 그에 따라 당시 우의정 겸 이조판서로서 비변사 당상관이던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배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류성룡은 징비록에 왜 사실이 아닌 글을 썼을까?

임진왜란이 종식된 뒤인 선조 31년, 류성룡은 권력투쟁에서 패해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삭탈관작까지 당했다. 뛰어났던 그의 업적에도 원통하고 악랄한 폄훼가 대대적으로 가해졌다. "나라를 망친 소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난까지 받았다. 권 력을 잃은 그는 낙향했고, 고향에 간 지 5년쯤 되었을 때 징비록을 썼다. 아마도 회고록을 쓰는 과정에서 새삼 일어난 세태에 대한 분노와 반감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과거 업적을 다소 과도하게 부풀리고 싶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징비록의 사실과 다른 기술 때문에 후세에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일정 부분 왜곡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03/20170103029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