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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대준 전 KAIST 부총장, 누가선교회 회장 (1)-(11)

영국신사77 2016. 9. 13. 19:26

[역경의 열매] 주대준 (1) 내 삶의 키워드는 ‘예수님 안에서… 왜 내가 못해’

아버지 사업실패로 궁핍한 유년시절 ‘주예수를 믿으라’ 내 눈을 사로잡아

입력 : 2014-10-06 02:51/수정 : 2014-10-06 14:06

 

[역경의 열매] 주대준 (1) 내 삶의 키워드는 ‘예수님 안에서… 왜 내가 못해’ 기사의 사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2011년 5월 KAIST를 방문해 주대준 교수(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주 교수는 이 대통령의 경호차장을 지냈다.

 

1953년 7월, 6·25전쟁이 끝날 무렵 지리산 자락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중반에 아버지의 동생을 부산 사범학교로 유학 보낼 정도로 집안은 유복했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어느 날, 사업 실패로 빚에 시달리던 부모님과 경남 거제도로 떠났다.

거제도에 온 이후 나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던 중 거제도 지세포리 예배당에 눈이 멈췄다. 난생처음 본 예배당이었다. 기독교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을 때였다. 교회 정문에 붙어 있던 ‘주예수를 믿으라’를 보고 ‘주예수’가 나와 같은 주씨 성을 가진 예수라는 이름의 아저씨 집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연이어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친척집을 전전했다.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산장교가 됐다.

1980년 당시 육군 대위인 전산장교 신분으로 내무부(안전행정부)에서 운영하는 정부전자계산소에서 프로그램 보수교육을 받았다.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거닐던 어느 날 사복 경찰관의 제지를 받았다. 그때서야 앞에 보이는 건물이 청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생처음 청와대를 바라본 순간 마음속으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하나님, 청와대에도 언젠가는 전산실이 만들어질 텐데, 그때 제가 저 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제게 능력을 주시면 제가 반드시 청와대에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기도가 나를 변화시켰다. 교육 당시 꼴찌 수준의 프로그래머인 나는, 불과 3년 만에 국방부에서 시행하는 국비 유학시험에 합격했다. 

청와대를 처음 바라보고 꿈을 품은 지 거의 10년 만인 1989년 청와대 전산실이 창설됐다. 전산프로그램 개발팀장을 공모했다. 난 수십 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청와대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전산직능 공무원이 승진할 수 있는 한계인 전산실장을 넘어 통신처장, 행정본부장, 경호차장으로 승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의 경호차장으로 근무하다가, 2008년 12월 30일 경호공무원 최초로 정년퇴직을 했다. 전산팀장이 경호차장까지 승진해 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시며 근무한 20년은 경호실 창설 5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청와대를 나온 후에는 KAIST 교수로 부임했다. 7개월 만에 부총장으로 임명됐고, KAIST 개교 40년 만에 최초로 사이버보안연구센터를 설립해 해킹탐지 신기술을 개발했다. 지금은 정보보호대학원을 설립해 석·박사 인재를 양성하며 대한민국 사이버안보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이 복음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임을 느낀다. 청와대에 근무할 때는 ‘청와대기독신우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섬기며 국가 지도자와 국가안보를 위해 기도의 단을 쌓았다. 또 대한민국 100만 공직자선교를 위해 입법·사법·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아우르는 ‘한국기독공직자 선교연합회’ 창립을 주도했다. 현재는 전국 8000여개 직장선교회의 80만 회원으로 구성된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대표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지도 않았고 두뇌가 썩 좋은 편도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와 지성의 집단 카이스트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기적 같은 기록을 세웠다. 이 기적은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우기 위함임을 고백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왜 내가 못해’는 지난 50여년 동안 내 삶을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약력=△1953년 경남 산청 출생 △미국 Cal. NPS 석사, KAIST 박사

△청와대 전산실장, 정보통신처장, 대통령경호실 경호차장, KAIST 부총장 역임

△현 KAIST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및 사이버보안연구센터 소장,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대표회장(32, 33, 34대) 역임,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누가(의료)선교회 회장, 월드비전 이사

 

 

 

[역경의 열매] 주대준 (2) 고아원 시절 내 인생의 등불이 된 ‘요셉의 꿈’

우리 가문 시조는 주자학 태두인 주자 거제도 교회서 하나님을 처음 영접해

입력 : 2014-10-07 02:25/수정 : 2014-10-07 13:00

 

[역경의 열매] 주대준 (2) 고아원 시절 내 인생의 등불이 된 ‘요셉의 꿈’ 기사의 사진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의 주대준 교수. 주 교수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어릴 적 사진이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우리 가문의 시조다.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면 우리 집안은 유교를 숭상하며 조상을 엄격히 섬기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석가탄신일에는 어김없이 절에 가 가족들의 이름을 올렸다. 수시로 가까운 암자에 가서 불공을 드렸고, 급할 때는 무당을 불러 굿도 하는 집안이기도 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유·불교와 조상교, 무속신앙이 혼합된 종교를 섬기는 집안이었다. 
 
내가 경남 거제도로 오기 전에는 예수님이나 하나님, 성경 등 기독교에 관한 말을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거제도에서 난생처음 교회를 봤다. 주일학교에서 요셉과 다윗의 이야기를 들으며 흥미를 갖게 됐다. 특히 요셉에 마음이 끌렸다. 남의 나라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감옥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국무총리가 됐다는 역전 드라마는 어린 나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요셉의 이야기만 나오면 몰입했다.
 
거제도 생활은 비참했다. 재기에 온갖 애를 쓰던 아버지는 심한 스트레스에 일본 식민통치 시절 고문을 당했던 후유증까지 재발해 결국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외운 요절을 종이에 적어 아버지가 누워 있는 벽에 붙여 놓고 큰소리로 읽으며, 아버지 허리를 밟고 안마를 했다. 놀랍게도 내가 성경 말씀을 크게 읽을 때는 아버지 통증이 멈췄다. 그 이후로 통증이 심할 때마다 나를 불러 성경 말씀을 크게 읽어 달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거제도에서 지낸 2년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요셉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께 의지하는 영성 수련 기간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연이어 먼저 보내고, 손자들을 한집에서 키우던 할머니는 한 맺힌 여인 그 자체였다. 이른 아침과 저녁마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손이 닿도록 빌며 “천지신명이여 우리 손자, 손녀 잘 거두어 주세요”라고 애걸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울 수 없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나는 더 이상 과거 무속신앙 집안의 아들, 손자가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경남 하동군 옥종면에 살고 있는 큰아버지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주소만 갖고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걸어 한밤중에 도착했다. 신작로를 걷다가 산을 넘어 지름길로 가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강을 건널 땐 강물에 빠질 뻔한 위험도 있었다. 그래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를 회상하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철저히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지켜 주신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큰아버지 집에서 한 달도 못 버텼다. 결국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할머니한테 의지할 수 없었기에 앞길은 막막했다. 친척들은 우리 형제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경남 거창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거창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정말 견딜 수 없었다. 열흘도 못 견디고 거창 고아원을 몰래 빠져나와 고향으로 도망쳤다. 이번에는 고향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이곳은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고, 시설도 좋았다. 그러나 고아원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왜 우리 밥 축내러 왔느냐’는 것 같았다. 우리 형제들 때문에 자기 밥그릇이 작아진다는 투정이 시작됐다. 마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기득권의 생리를 난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뼈저리게 체험했다.

고아원 생활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고통과 슬픔, 어려움이 가득했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나는 요셉의 형편보다 낫다는 우월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어떤 환경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희망, 용기가 나의 마음속으로부터 솟아올랐다.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남의 나라에서도 국무총리를 하는데,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내가 ‘뭘 못해!’라고 생각했다. 주씨 아저씨의 집 같았던 거제도 지세포교회에서 만난 예수님은 이미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3) 고아원 새벽을 깨운 통성기도 “공부하고 싶어요”

고아원 2층 교회서 매일 목놓아 간구 “하나님, 아브람처럼 저를 인도하소서”

입력 : 2014-10-08 03:28

 

[역경의 열매] 주대준 (3) 고아원 새벽을 깨운 통성기도 “공부하고 싶어요” 기사의 사진
2012년 8월 강원도 정선군 하이원길 하이원호텔에서 열린 ‘예장 통합 남선교회 전국대회’에서 곽병철 장로(오른쪽 두 번째)와 기념사진을 찍은 주대준 교수(오른쪽). 곽 장로는 주 교수의 고아원 시절 스승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1960년대에는 중학교 진학률이 절반이 되지 않던 시절이다. 오히려 공부만 잘하면 고아원생은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중학교 진학이 가능했다. 그 덕에 중학교는 진학했지만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의 기득권과 텃세에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고아원 친구들은 자기들의 밥을 뺏으러 온 이방인처럼 따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들과 어울리며 고아원에서의 생존법칙을 터득했다. 훗날 카이스트 교수로 부임해 7개월 만에 부총장이 됐을 때도 기득권의 텃세는 만만치 않았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의 경험이 이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고아원은 생활관 건물 2층을 교회로 사용했다. 교회 이름이 단성교회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새벽마다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손이 창대케 되는 꿈을 꾸었던 아브람처럼 장차 나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벅찬 감격의 기도로 하루를 열었다. 

당시 고아원(단성 애육원) 훈육은 원장(故 곽말수 장로)의 셋째 아들인 곽병철 장로가 맡았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꿈과 희망을 주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그를 2012년 8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남선교회 전국대회에서 만났다. 그와 팔순이 된 나의 삼촌(주문옥 장로), 단성교회 장로들이 참석했다. 고아원에서 나를 가르친 스승 같은 형, 삼촌 앞에서 초대형 집회의 강사로 초빙돼 간증집회를 했다. 

고아원 생활은 오전 6시에 기상해 점호와 체력단련으로 시작됐고 오후 10시에 취침하는 등 군대 내무생활과 흡사했다. 그곳에서 나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다시 인생을 살더라도 고아원 생활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아원은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숙시킨 가치 있는 곳이었다.

당시 고아원에서 중학교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선 고등학교가 있는 경남 진주시나 다른 도시에 진출해야 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의외의 경우도 있었다. 고아원에서 함께 성장한 형 가운데 한 명은 고향에 있는 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갔다. 그 형은 후에 언론계 유명 인사가 됐고, 국회의장 비서실장(차관급)까지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형을 롤 모델로 열심히 공부했다. 등하굣길에도 손에는 늘 영어단어장을 끼고 다녔다. 심지어 방과후 배추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끔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쳐다보며 나는 ‘언젠가 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거야. 그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야지’라고 구체적인 목표와 꿈을 품고 공부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의 단을 쌓았다. 

마침 집안 삼촌 한 분이 대구 K-2비행장에 공군 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대구에서 낮에는 일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조카들 공부에 남달리 애정이 많았던 삼촌의 단칸방에 함께 살면서 대구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대구 반월동에 있는 고교입시학원이었던 영수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 공부를 준비했다. 중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 중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는 20%도 되지 않았다. 면 소재지에 고등학교가 없어 부모가 생존해 있는 정상적 가정의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마다 부르짖으며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4) 대구 성광고 야간부 입학… 그리고 3번의 취업

김진홍 목사 등 키운 명문 미션스쿨 학비·생활비 벌려고 소방서 급사로…

입력 : 2014-10-09 02:02

 

[역경의 열매] 주대준 (4) 대구 성광고 야간부 입학… 그리고 3번의 취업 기사의 사진
주대준 KAIST 교수(오른쪽)가 8일 대구 중구 서문로교회 앞에서 대구소방서 급사 시절 소방서 계장이었던 이갑선 집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69년 대구 북구 칠성동에 위치한 성광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이념으로 설립된 미션 스쿨이다. 가정은 어렵지만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인 학교였다. 특히 김진홍 고명진 김승동 박무용 목사와 같은 크리스천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입학 후 학교취업센터가 알선해준 대구 동구 신암동에 있는 ‘일흥라사’라는 양복점에서 난생처음 돈벌이를 시작했다. 잔심부름은 잘했지만 양복점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두 번째로 취업한 곳은 북구 침산동에 있는 우산(양산) 조립 하청공장이다. 하루 종일 우산을 조립하면서 허리 한번 펴는 것이 눈치가 보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일이 늦게 끝나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눈이 피곤해서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제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 목적인데 눈이 피곤하지 않고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는 직장을 주세요”라고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한 지 거의 한 달 만에 대구소방서 장비계(경리업무) 급사로 세 번째 직장을 얻었다. 소방서 급사로 취직했을 때의 기쁨은 나중에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나 늦깎이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 컸던 것 같다. 무엇보다 삼촌의 단칸방에 신세지는 게 너무나 미안했는데, 소방서에서는 사무실 옆에 직원들이 대기하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잠을 잘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공부할 시간이 모자랄 때는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공부 때문에 피곤한 몸으로 낮에는 급사 일을 해야 했지만 익숙하지도 않고 눈이 침침해지는 양복점이나 우산 공장과 비교하면 소방서는 천국 같았다. 소방관 분들도 나를 가족처럼 대해 줬다. 한밤중에 화재 신고가 들어오면 불을 끄러 같이 가기도 하고 운동이나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소방서 직원들은 무엇보다 학교 공부하는 데 늦지 않도록 퇴근시간을 배려해 줬다. 

2년 전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갔을 때 소방서 급사 시절 나를 격려해 주고, 친아들처럼 챙겨주던 이갑선 당시 장비계장을 45년 만에 극적으로 만났다. 연세가 아흔이 됐는데도 건강한 모습이었고 나를 알아보고는 크게 반가워해 줬다. 

남들의 눈에는 소방서 급사, 불쌍한 고학생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새벽마다 기도하며 미래의 비전과 꿈, 희망과 용기를 충전하며 누구보다 당당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언제나 잘 웃는 사람, 의욕과 생기가 넘치는 청년, 공손하면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당당한 청년으로 평가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위기에 몰리고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현실과 환경이 눈앞에 닥쳐와도 현실과 환경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분께 내 마음과 생각을 의탁했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소방서 급사를 그만둔 후 사회 진출을 위해 기도하던 중 가까운 친구에게서 제안이 왔다. 친구의 부모가 당시 ‘구미 전자공단 건설현장’ 인부들에게 밥해 주는 함바집을 운영했는데 여기서 막노동을 하며 사회 밑바닥부터 함께 경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추운 한겨울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허허벌판 임시천막 속에서 먹고 자는 노동자들과 함께 막노동을 시작했다. 일이 끝난 밤에는 그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울분과 애환을 나눴다. 이때의 경험은 우리 사회 사각지대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 달 넘게 ‘구미전자공단’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통을 메고 잡일을 하면서도 ‘오늘 내가 잡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사회를 선도하는 주역이 되겠다’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 정보화 사회에 대한 소박한 꿈과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 기도가 오늘날 공학박사를 만들었다.

공사장 막노동 일을 경험한 후 나는 비장한 각오로 기도하며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결단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5) 주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노력 만큼 주신다

생활비 저렴한 사찰서 고시 준비하며 주일엔 교회 나가며 매일 아침 QT도

입력 : 2014-10-10 02:12

 

[역경의 열매] 주대준 (5) 주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노력 만큼 주신다 기사의 사진
대구 용연사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의 주대준 KAIST 교수(왼쪽 세 번째). 용연사에서 함께 공부하던 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갈림길에 섰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대구 Y대 야간부에 다닐 준비를 했는데, 내게도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구미 전자공단 건설현장에서 막노동하며 만난 노동자들의 모습이 가슴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기당한 사람,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불만을 품고 인생의 밑바닥을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판검사가 되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도 판검사를 꿈꾸며 공부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는 사법고시 합격을 그야말로 신분상승의 지름길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 ‘왜 내가 못해’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나는 대구와 가까운 달성군 옥포면 비슬산 기슭의 ‘용연사’라는 사찰에 들어갔다. 사찰에서 살며 공부하는 비용은 대구시내 하숙집들보다 30% 정도 저렴했다. 하지만 생활비를 따로 내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1년 동안 공부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인 스폰서의 지원을 받았다. 고아원에서 살 때 미국 일리노이주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를 후원했다. 고아원에서 나온 이후에도 그분에게 영어로 편지를 쓰며 교류를 했고, 내가 판검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사찰에서 고시공부를 시작하며 머리를 밀고 심지어 눈썹까지 밀며 최선을 다했다. 주일에는 사찰 아래 마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매일 아침 QT를 했다. 그런데 군 입대 영장이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온 게 문제였다. 공부에도 집중이 잘 안 되고 딴생각에 빠지곤 했다. 결국 사찰에서의 고시공부는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비록 사법고시 합격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 기간은 인생을 사는 데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당시 사찰에는 나 말고도 여러 고시생들이 있었다. 나이도 출신도 제각각인 고시생들은 때로는 사찰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일을 저질렀다. 예를 들어 밤샘 공부를 하다가 고시생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는 등의 일이었다. 고시생들은 몰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들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참견하지 않았을 뿐이다. 스님들은 수도승처럼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면서 고시생들의 고뇌와 갈급한 마음을 인정해 주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스님들의 포용하는 마음과 상대를 인정하는 열린 자세는 인생을 사는 데 큰 교훈이 됐다. 

군대와 청와대, 그리고 KAIST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많은 갈등을 겪었다. 때로는 내 의견과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직위가 올라가면서 나와 성격이 맞지 않거나 개성이 강한 직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스님들에게 배운 교훈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의사를 먼저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나와 다름, 즉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군 입대 영장을 받고 고민할 때 현역 장군이었던 친척 아저씨가 마침 3사관학교 생도 모집이 있다며 입학을 권유했다. 3사관학교에 가면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건데 ‘과연 내 인생의 진로를 군에 맡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생겼다. 친척 아저씨는 3사관학교에서 일정 기간 교육받고 장교가 되면 대학공부도 할 수 있다며 3사관학교 입학을 강력히 권했다. 아저씨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기가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결단을 해야 할 때였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전에 과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먼저 기도의 단을 쌓았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6) 3사관학교 시절 영·육 단련 ‘靑 경호실’서 빛나

야간고 시절의 체력 훈련 밑바탕돼 1000여 동기생 중 탁월함 인정받아

입력 : 2014-10-13 02:56

 

[역경의 열매] 주대준 (6) 3사관학교 시절 영·육 단련 ‘靑 경호실’서 빛나 기사의 사진
3사관학교 시절 유도 대표선수로 활약한 주대준 KAIST 교수(가운데).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진로를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많이 기도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을 송두리째 지배하며 강하게 임재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수표가 어디에 있는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앞길을 내가 계획했고, 세상적 야심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내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강권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부터 네 인생의 드라이브(운전대)를 나에게 맡겨라. 내가 친히 운행해 줄 테니 믿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1974년 7월 경북 영천에 있는 3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막상 훈련을 받다 보니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정도였다. 특히 고등학교 2년 후배들과 함께 3사관학교 동기생으로 생도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3사관학교에서 2년간의 생도교육은 국가관과 충성심, 사명감 등 나의 인격 형성의 틀을 갖추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군 장교 생활을 거쳐 대통령 경호실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3사관학교 교육이 튼튼한 기초가 된 덕이다. 힘든 생도생활 중에도 예배와 QT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생활은 큰 버팀목이었다. 

나는 고교 시절 매일 새벽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군화를 신고 4∼5㎞를 구보로 대구시청 뒤에 있는 무덕관에 갔다. 그곳에서 유도를 수련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공인 3단을 받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힘든 고학 시절에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구보와 유도 훈련을 잊지 않았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 야간부 학생들은 대부분 복싱 챔피언, 태권도 선수 등 유단자였다. 이들 사이에서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단련한 체력은 3사관학교 훈련 중에 더욱 빛을 발했다. 100명이 넘는 중대원 사이에서 선착순 달리기를 할 때마다 항상 1등이었다. 1000명 이상의 동기생 중에 유도선수로 발탁돼 탁월한 기량과 체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꾸준한 체력단련은 훗날 경호실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임관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인 유격을 하기 직전, 무리한 운동으로 관절 근육이 파열됐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통증이 심했다. 군의관은 유격불가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유격을 강행하기로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유격을 받지 못하고 유급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무사히 유격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10㎏ 완전군장을 메고 연병장에 모여 출발하기 직전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2주간 이어진 유격훈련을 하며 관절이 아프다는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유격 해제 신고를 위해 연병장에 다시 섰을 때야 2주 전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생각날 정도였다. 얼른 관절을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어디가 아팠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절이 말끔히 치유됐다. 그후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관절에 전혀 문제가 없다.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3사관학교의 교육은 나를 영적·육체적으로 강하게 단련시켰다. 또 지적으로도 다양하게 충전할 수 있었던, 내 삶에서 가장 유익한 기간이었다. 3사관학교 교육 중에 습득한 충성심과 사명감이 훗날 대통령경호실 5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을 창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충성의 열매를 맺게 하는 엔진은 사명감이다. 사명이 있어야 충성할 수 있다. 즉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믿어야만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3사관학교 교육 중에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곧 내가 반드시 해야 할 나의 사명을 위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7) ‘이기자부대’ 첨병 소대장에게 보여주신 기적

영하 40도 날씨에 야외훈련 중 산불 간절한 기도에 갑자기 역풍 불어 진화

입력 : 2014-10-14 02:14

 

[역경의 열매] 주대준 (7) ‘이기자부대’ 첨병 소대장에게 보여주신 기적 기사의 사진
이기자부대 소대장 시절 주대준 KAIST 교수(앞줄 가운데)가 분대장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3사관학교 입교 직전 ‘고시 공부를 끝내고 군에 가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때도 온갖 핑계로 군에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 차 있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3사관학교로 보내 완전히 개조시켰다. 

소위로 임관된 이후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충성심과 사명감으로 충만했다. 육군에서 교육·훈련으로 이름난 ‘이기자부대’의 첨병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훈련은 강하게 시키고, 내무반에 들어오면 형제처럼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소대원들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했다. 소대원들과 하나가 돼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 소대전투훈련(ATT)에서 연대 최우수 소대로 평가받았다. 

1977년 1월 영하 40도로 떨어졌던 날이었다. 당시 우리 소대는 낮에 대규모 병력 이동이 금지된 전방지역에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밤샘 야간행군으로 부대에 복귀해야 해, 오후 남은 시간에 전 부대원이 텐트 안에서 가면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대대장 이상 지휘관들은 훈련 종합강평에 참석하느라 후방지역 전투지휘소에 모여 있었다.

잠시 잠든 사이 전령이 내 텐트 안에서 난로를 만지다가 그만 불을 내고 말았다. 경계를 서던 병사가 “불이야!”라고 고함치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불은 순식간에 인접 소대와 중대 텐트를 태우고 능선 위로 급속히 번져 올라가고 있었다. 능선을 태우는 기세를 보니 여간해선 꺼지지 않을 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내 텐트에서 불이 났고 소대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지금까지 노력해 온 모든 게 한순간에 끝이 난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생한 시간들, 믿음으로 꿈을 키워 왔던 일들이 번개처럼 스쳐가면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제게 투자만 해 오셨잖아요, 그동안 저를 이만큼 키우셨는데 지금 이렇게 끝이 나면 제 인생도 망가지지만 하나님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쓰시고 싶다면 이 불을 명하여 꺼지게 해주세요. 저는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믿습니다.” 

전 부대원이 불을 끄고 있을 때 혼자 계곡 아래 얼음판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눈물범벅이 되어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어붙은 눈덩이를 떼어 얼굴을 비비며 능선 위로 뛰어올라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사이에 불은 기적처럼 완전히 진화돼 있었다. 하나님께 온갖 생떼를 부리며 제발 불을 꺼 달라고 매달렸지만 막상 기도가 현실이 된 것을 보니 어리둥절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상황을 들어 보니 정말 기가 막혔다. 불이 무서운 기세로 7∼8부 능선을 타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역풍이 불어왔다고 했다. 불은 역풍이 불면 자신의 연기로 불을 다 꺼 버리는 속성이 있다. 그 바람 때문에 순식간에 불씨만 남기고 불이 꺼져 버린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지형의 특성상 당시 그곳은 역풍이 발생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현장에서 소화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부연대장도 화마처럼 치솟던 불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순식간에 꺼졌다고 했다. 

전투지휘소에서는 첨병 소대장인 나를 표창하라는 군단장 지시가 있었다. 헬기를 타고 훈련 광경을 바라본 군단장이 우리 소대가 가장 잘했다고 극찬했다는 것이다. 부대 복귀 후 나는 우리 소대를 ‘기도온 소대’로 명명하고 더 큰 믿음으로 정진했다. 강원도의 험준한 산골을 누비며 힘든 훈련 중에도 내 주머니 속에는 소형 영어사전과 포켓용 영어성경이 항상 들어 있었다. 3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을 때부터 나는 야전 지휘관으로 성공하는 대신 정책부서에서 전문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준비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8) “국방부 정보화 발전… 제가 기여하겠습니다”

육군 중장인 3사관학교장 집 찾아가 ‘전산 위탁교육’ 응시 기회달라 간청

입력 : 2014-10-15 02:42

 

[역경의 열매] 주대준 (8) “국방부 정보화 발전… 제가 기여하겠습니다” 기사의 사진
주대준 KAIST 교수(왼쪽)가 청와대 경호차장 시절인 2007년 3월 은사인 고려대 김동기 석좌교수를 청와대로 초청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부대 내 수십 명의 소대장 중 능력을 인정받아 인사장교로 발탁됐다. 나름 부대 내 ‘스카우트’였다. 전방 근무가 2년쯤 지날 무렵 3사관학교 구대장 요원으로 차출 명령을 받고 후방인 3사관학교로 내려왔다.

3사관학교 교수부에서 근무한 2년은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두 번째 전환점이 됐다. 보병 장교에서 전산 장교로 주특기(병과)가 바뀌었고, 3사관학교에 입교할 때부터 계획했던 대학 진학을 준비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번도 순탄하게 풀린 적이 없다.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전산 장교가 되려면 먼저 ‘전산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해 전산교육을 받아야 한다. 전산 위탁교육 시험 응시지원서를 제출했으나 3사관학교장 결재과정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부결됐다. 시험에 응시할 기회조차 박탈된 것이다. 어째서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안 되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입을 다물어 알 수가 없었다.

육군본부에 원서접수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학교장은 서울로 출장을 가고 학교에 없었다. 나는 학교장을 찾아가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학교장 집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먼저 육군본부가 위치한 삼각지 인근의 다방으로 갔다. 수소문했지만 알 수가 없어 전화번호부에 적힌 학교장 이름의 동명이인, 10여명의 집에 전화를 걸어 결국 학교장 집 주소를 확보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몇 시간 동안 헤맨 끝에 초저녁이 돼서야 학교장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장 사모님께 정중하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응접실에 앉아 몇 시간을 기다렸다. 결국 자정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온 학교장을 만났다. 막 육군 대위로 승진한 새파란 청년 장교가 직속상관인 육군 중장과 한밤중에 면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덕에 결국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의 기쁨도 맛봤다.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주면 꼭 합격해 앞으로 국방부 정보화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학교장과 한 약속을 지켰다.

성균관대 학군단 소속으로 성균관대 경영행정대학원에서 ‘국비 전산 위탁교육’을 받았다. 수업이 야간에만 있어 주간에는 고려대 경영학과에서 공부했다. 마케팅원론과 소비자행동 과목을 가르치던 김동기 교수는 항상 수업 시작 전 10여분 동안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 PC도 없었던 그때 김 교수는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던 세례 요한처럼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시대에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컴퓨터·영어·타자 치는 능력 이 세 가지는 필수 요소”라고 학기 내내 열변을 토했다.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알아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늦깎이 대학 공부를 시작한 나는 김 교수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당시 경영학과 학생들이 어렵다고 기피하는 서남원 교수의 정보처리론을 두 번이나 수강하며 정보화 지식을 습득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빛낸 훌륭한 두 교수의 가르침과 도움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다. 김 교수는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비전과 구체적인 꿈을 줬고, 서 교수는 우리나라 경영정보학  1호 박사로 내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밤에는 성균관대 경영행정대학원 EDPS 과정에서 전산프로그램을 배우는 데 집중했다. 

전산 장교 위탁교육을 마친 후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소속의 정부전자계산소(GCC)에서 전 부처의 전산 직능 공직자들과 함께 ‘프로그램 실무 보수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점심 후 교육받는 동료들 몇몇과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거닐다가 먼발치에서 청와대의 모습을 봤다. 난생처음으로 청와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언젠가 저 청와대 안에 전산실이 창설되면 제가 청와대에서 근무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9) “너의 갈 길을 먼저 꿈꾸고 바라보고 감사하라”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옮긴 후 영적 성장… 청와대·미국 유학의 꿈 믿음으로 도전

입력 : 2014-10-16 02:22

 

[역경의 열매] 주대준 (9) “너의 갈 길을 먼저 꿈꾸고 바라보고 감사하라” 기사의 사진
주대준 KAIST 교수(오른쪽 두 번째)와 가족이 2007년 5월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운데)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기념촬영을 했다.

난생처음 청와대를 보고 ‘언젠가 저곳에서 근무해야지’라고 기도드린 후 놀랍게도 내가 먼저 변화됐다. ‘청와대에 반드시 전산실이 생길 것이고 프로그래머를 뽑을 텐데 그때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전까지는 전산 프로그램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수업시간에 집중을 못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꿈을 품은 이후 나의 적성과 능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꼭 청와대에서 근무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산 전문가, 프로그래머가 돼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

1979년 3사관학교에서 근무할 때 결혼하고 첫 아이 은혜를 낳았다. 이름대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가정을 꾸려 나가려고 기도하며 노력했다. 고려대와 인접한 서울 종암동에 살며 동네 작은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태생이 지리산 자락의 시골 출신이다 보니 큰 교회는 거부감이 있어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교회를 정할 때 제일 뒤에 앉아 예배드리는 성도들 머릿수를 세어 보고 100명이 넘지 않아야 안심이 됐다.

종암동의 작은 교회에 출석하며 노방전도도 하고, 집사 직분을 받아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주일예배 때 일이 터졌다. 교회 건물 지분을 가진 한 장로가 담임목사를 강단에서 몰아낸 것이다. 이 장로는 자신과 가까운 강도사를 교회 담임으로 세우려고 했다. 장로와 담임목사 간의 싸움을 보고 큰 상처를 받았다.

교회를 옮기려고 고심할 때 아내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아내는 서울 용산(삼각지)에 살던 주일학교 시절부터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에 다녔다. 결혼 이후 내가 대형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이 유난히 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님을 비방하는 바람에 아내는 순복음교회에 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다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날, 나는 생각조차 못했던 엄청난 교회 규모와 통성기도하는 성도들의 기세에 눌려 조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장충체육관 같은 교회 건물과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씀을 전하는 조 목사님에게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자꾸 끌렸다.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조 목사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느새 조 목사님의 수제자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고학하며 힘들었던 소년 시절부터 요셉을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으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조 목사님의 설교는 내가 지금까지 기도하고 바라본 것과 매우 똑같았다. 

나는 날마다 조 목사님의 말씀을 먹으며 영적으로 성장했다. 조 목사님의 말씀은 내 삶을 지탱하는‘영적 비타민’이 됐고, 나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마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옥에 가두던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안티 순복음’ ‘안티 조용기’였던 주대준이 최고의 신봉자로 변화된 것이다.

조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나를 위한 말씀 같았다. “주대준 집사야. 너는 이미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청와대 전산실에 근무하는 네 모습을 먼저 꿈꾸고 바라보고 감사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미 청와대 전산실 직원이 되었다. 조 목사님 말씀의 키워드인 ‘바라봄의 법칙’의 전도사가 된 것이다.

바라봄의 원리는 기적 같은 놀라운 힘이 있었다. 전산 프로그램을 잘하지 못했던 내가 자신감을 갖게 됐다. 또 어릴 때 고아원 배추밭에서 일하며 ‘어른이 되면 미국 유학 가야지’라는 꿈이 실현될 날을 바라봤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꿈을 품고, 미국 유학을 꿈꾸던 당시 내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믿음으로 도전했다. 꿈은 나를 끌고 가며 현실이 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10) “키 작은 우리 집안에 185㎝ 아들을 주세요”

입력 : 2014-10-17 02:19

 

[역경의 열매] 주대준 (10) “키 작은 우리 집안에 185㎝ 아들을 주세요” 기사의 사진
주대준 KAIST 교수(왼쪽)가 2011년 2월 아들 은광씨의 졸업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은광씨는 KAIST 전산학과를 졸업했다.

전산교육과 고등군사반(OAC)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나는 국방부 직할 정보사령부 전산실로 발령받았다. 주일마다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후 설교 테이프를 구입, 수십 차례 반복해 들었다. 심지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반복해 듣기도 했다. 그리고 말씀을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1983년 여름 어느 주일 조 목사님께서 “야곱이 얼룩무늬와 점이 있는 아롱진 양 새끼를 낳도록 하기 위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가지를 얼룩지고 아롱지게 껍질을 벗겨 양떼들이 와서 물 먹는 개천의 물구유 위에 세웠다. 양떼들이 물을 먹을 때마다 얼룩지고 아롱진 그 가지들을 바라보며 물을 먹고 새끼를 배므로 얼룩지고 아롱진 양 새끼를 낳았다”고 설교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러면서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 우리 가문의 혈통을 개량할 수 있도록 ‘롱다리’ 아들을 하나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당시 우리 가문에는 175㎝가 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두 단신이었다. 마침 아내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나는 밤낮으로 185㎝의 롱다리 아들을 한 명 달라고 무려 20여년을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20년 후 우리 가문을 개량한 185㎝에 근접한 아들로 응답해 주셨다. 즉 꿈을 구체적으로 품고 믿음으로 도전하며 실천하는 사람과 그저 머리로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사람은 천양지차가 있음을 깨달았다.

국방부에서는 1980년대부터 국방업무 자동화를 위한 인재 양성 차원에서 우수 장교를 선발해 국비로 미국 유학을 보냈다. 정보사령부 전산실에 근무하며 미국 유학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부대와 30분 거리인 출퇴근시간을 아끼려고 부대에 있는 독신장교숙소를 빌려 유학시험 준비에 집중했다. 주말이나 휴가 중에는 조용한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집을 나설 때도 항상 머리 위를 가로질러 귀를 덮는 헤드폰을 끼고 영어 테이프를 들었다. 헤드폰을 잠시라도 벗으면 내 얼굴 모양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은 ‘주대준 대위’를 떠올릴 때 헤드폰 낀 모습이 먼저 생각날 정도였다. 정보사령부 전산실에 근무하면서 ‘북한군 전투서열’ 프로그램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1983년 국비유학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얻었다.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결과 국비유학 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공부할 미국 대학원에 지원해 입학승인서만 나오면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됐다. 유학 준비기간 동안 영어교육도 집중적으로 받았고 유학 장교로서 지켜야 할 정신교육과 보안교육 등 일련의 준비 과정을 끝내고 입학승인서가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이닥쳤다. 대학교 성적도 괜찮았고 전산장교 실무 경력이 있기에 입학 승인은 당연히 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입학불가’ 통보를 받은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가 지원했던 미국 대학원(NPS·Naval Postgraduate School)에서 직접 통보받은 것이 아니라 육군본부 교육담당관으로부터 그냥 입학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만 받았다. 대체 왜 내가 떨어졌는지, 나의 부족한 점과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탈락의 정확한 이유를 알려고 NPS에 국제우편으로 직접 물었다. 얼마 후 미국에서 온 답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학교에서는 입학 승인을 거절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미적분 3학점을 이수하고 오든지, 먼저 와서 사전학기를 이수하라는 통보였다. 육군본부에 재심의 요청을 했다. 그러나 이미 심사위원회에서 결정이 난 일이고, 나 대신에 유학 갈 대상자가 확정됐다며 거절당했다. 남들은 일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풀리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장애물이 많고 고생을 해야 되는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11) 고아원 시절의 꿈 미국 유학 ‘절대 긍정’으로 이뤄

입력 : 2014-10-20 02:08

 

[역경의 열매] 주대준 (11) 고아원 시절의 꿈 미국 유학 ‘절대 긍정’으로 이뤄 기사의 사진
1985년 4월 미국 유학을 떠나던 날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주대준 KAIST 교수.

미국 대학원으로부터 받은 입학사정 심의 결과를 보면 나는 입학 불가 대상이 아니었다. 고려대(경영학과) 및 성균관대 경영행정대학원(EDPS과정) 이수과목 중 미적분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 NPS 대학원의 전산학 석사과정은 미적분 과목을 전공 시작 전에 이수해야 한다. 대학원에서 제시한 옵션은 한 학기 먼저 와서 이수하든지 한국에서 미적분 과목을 이수한 성적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육군본부에서는 일방적으로 불합격 처리를 했다. 미 대학원으로부터 확보한 자료를 갖고 육군본부에 재심의 요청을 했지만 이미 심의가 끝났고, 나 대신에 유학 갈 대상자가 확정됐다며 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고 했다. 정말 억울했지만 힘들게 1년을 기다리며 다시 준비했다. 그 기간 미적분 과목을 이수했고 이듬해 국방부 유학시험에 다시 응시해 합격했다. 두 번이나 유학 선발시험에 합격한 후 미 대학원으로부터 입학승인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남들은 하나같이 쉽게 풀리는데, 나는 전산장교로 전환할 때나 유학 선발 과정에서도 무엇 하나 그냥 되는 게 없이 장애물을 넘고 또 넘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문제를 정확하게 알면 답을 알 수 있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난관에 부딪쳐도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짚어내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 다음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문제가 되는 장애물을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해법’을 찾아 도전하면 된다. 만약 내가 감당하기 벅찬 큰 문제에 맞닥뜨리면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도록 분해하고, 단순화시켜 내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도전하면 반드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숱한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다. 

시행착오도 겪었고 때로는 나의 의지를 시험하려는 큰 장벽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이럴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규정이나 제도가 잘못됐다고 불평하거나 내 능력으로 안 된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고 포기하기보다는 ‘이 순간에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이 무엇입니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 더욱 냉철하게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내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고 포기하지 말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절대적 긍정과 절대적 희망이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때로는 아픔을 겪었던 경험은 훗날 청와대와 KAIST에서 다가올 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트레이닝하기 위한 오묘한 계획이었음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인생을 살아가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다가올 때 ‘내 능력으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것이 내 운명인데’라고 포기했다면 오늘날 주대준 전 청와대 경호차장, KAIST 부총장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내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되는 길을 찾아 노력했다.

1985년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힘들었던 소년 시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부모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시절, 고아원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힘들었던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막연하게나마 품었던 ‘어른이 되면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야지’라는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꿈을 품고 주님만 바라보고 담대한 믿음으로 정진하면 하나님께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을 주신다는 소중한 교훈을 터득했다. 이사야 40장 31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태평양을 건넜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