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직격 인터뷰] 이순신 관련 허황된 내용, 지식인이 걸러야 한다

다른 핵공학도 3명과 함께 ‘난중일기’ 연구서 『이순신의 일기』를 펴낸 최희동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지난 7일 “뒤틀린 역사적 사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므로 지식인들에 의해 걸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김경빈 기자]
‘불멸의 영웅 이순신’. 2년 전 영화 ‘명량’으로 부활했던 이순신 장군의 생애가 TV 드라마로 제작돼 다시금 우리 곁에 다가왔다. 이런 가운데 그의 삶을 놀랍도록 촘촘하게 적은 ‘난중일기’를 정확하게 한글로 번역하고 그간 잘못 알려진 내용을 수정한 연구서 『이순신의 일기』가 4명의 학자, 그것도 역사와는 상관없을 법한 핵 전공 과학자들에 의해 발간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난중일기 연구서 낸 핵공학도 최희동 교수
화제의 주인공들은 2009년 타계한 박혜일 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와 그의 제자들인 같은 학과 최희동 교수,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일했던 배영덕 전 연구원(작고)과 이곳에서 근무 중인 김명섭 연구원 등 4명.
이들은 지난 1998년 ‘이순신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첫 해석서를 발간한 뒤 18년 만에 완성도 높은 인쇄본으로 평가받던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에서 140군데에 달하는 잘못을 찾아냈다. 왜 멀쩡한 과학자들이 난중일기에 매달리게 됐는지 지난 7일 세 제자의 맏형뻘인 최 교수로부터 들었다.
- 핵공학자들이 난중일기에 천착하게 된 배경은.
- “은사인 박혜일 교수의 영향이 컸다. 70년대 박 교수를 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이미 그는 거북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거북선을 제대로 알려면 이순신 장군과 난중일기를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박 교수도 제대로 훈련받은 학자이므로 1차 사료를 중시하고 2차, 3차 자료는 잘 믿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기본 사료인 난중일기 원본 연구에 빠지게 된 것이다.”
- 박 교수는 어떤 사람이었나.
-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으로 6·25전쟁이 터지자 군에 투신해 8~9년간 기상장교로 근무했다. 제대 후 연구소에서 잠시 일하다 오스트리아로 유학 가 빈대학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했다. 원자로 내에서의 중성자 측정에 대한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땄는데 전공뿐 아니라 철학·역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천재적인 분이었다.”
- 거북선 연구에 기여한 바가 있나.
- “그는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는 주장을 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전부터 거북선에 철갑이 쳐졌었다는 얘기는 구전으로 전해져 왔었다. 하지만 문헌상 증거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철갑선설을 믿었던 박 교수도 이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진해에서 열린 토론회에 갔다 서울역에 내려 귀가하던 박 교수가 남대문 대문에 얇은 철판이 둘러져 있는 걸 발견해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거북선에 사용됐던 철갑의 원형일 수 있다는 이론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박 교수는 결국 이 같은 주장을 담은 논문을 79년 당시 막 생겼던 과학사학회 학술지 창간호에 게재했다.”
- 본인은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 “당시 박 교수는 난중일기 영인본을 갖고 있었는데 상태가 무척 나빴다.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일제시대 때 8년 동안의 작업 끝에 35년 간행된 ‘난중일기초’라는 자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78~79년께였는데 오랜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 이 자료를 복사하는 일을 하게 됐다. 이때 기왕이면 여유 있게 복사해 놓자는 마음에서 몇 부 더 만들었는데 이 중 한 부를 받게 됐다. 생각지도 못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된 것이 난중일기 연구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 몇 년이나 함께 연구했는가.
- “다른 후배 동료들은 학위를 받느라, 나는 군대를 가느라 연구를 계속하지는 못하고 중간중간에 공백이 있었다. 그럼에도 80년대에 시작했으니 벌써 30년이 넘은 것 같다. 배 박사는 안타깝게도 2011년 암으로 타계했다.”
- 오래 연구하느라 힘들지 않았나.
- “핵공학자들이 난중일기를 연구한다고 하니 주변에 인문학자들을 비난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인문학자들은 뭐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난중일기를 연구하느냐’는 얘기다. 하지만 스스로 원해서 하는 작업이다. 이미 시작한 일을 중간에서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나로서는 폐암으로 타계한 스승이 임종 전날 전화를 걸어와 ‘난중일기를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그런데 어떻게 관둘 수 있겠는가.”
- 어떻게 작업했나.
- “제일 먼저 난중일기초를 글자의 위치까지 감안, 원문과 최대한 가깝게 컴퓨터에 입력했다. 이후 아산 현충사에 보관돼 있던 친필 원본의 영인본과 대조했다. 전문가도 아니고 이 일만 하는 것도 아닌지라 4~5년이 걸렸다. 해독이 잘 안 되는 글자는 사전도 찾으면서 끙끙거려서 해독했다. 명백한 글자도 틀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국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난중일기초에서 140여 개의 오류를 찾아냈다.”
- 초서로 된 자료를 보려면 고도의 한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나.
-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고 하도 들여다보니 저절로 알게 됐다. 물론 어려운 한자는 주위에 물어봤다.”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 원본, 즉 친필본은 국보 제76호로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이를 200년 후인 정조 때 활자화한 뒤 다른 이순신 관련 문서와 함께 정리한 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다. 난중일기라는 이름도 이때 붙여졌다. 다른 중요한 자료로는 일제시대인 35년 조선총독부에서 8년간의 작업 끝에 간행한 ‘난중일기초’가 있다. 비교적 오랜 작업 끝에 만든 자료여서 비교적 오류가 적은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런 자료에서 140여 개의 잘못을 최 교수팀이 발견해낸 것이다.
- 그동안 발간된 난중일기 번역본과 이순신 소설 및 영화 등에는 오류가 많나.
- “소설 안에는 허황된 내용이 무척 많다. 소설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허구적 내용을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을 너무 비틀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적잖은 소설가가 난중일기를 제대로 못 본 것 같다.”
- 예를 들면.
- “몇몇 소설에서는 ‘여진’이라는 여성이 등장해 이순신과 동침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병신년 9월 12, 14일 일기에 등장하는 여진(女眞)이라는 단어가 여성의 이름인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난중일기 원본을 보면 12일 자에는 ‘무장이 도착해서 잤다’라는 문장이 끝난 뒤 많은 여백을 사이에 두고 여진이란 단어가 써져 있다. 또 여기에서는 ‘잠자다’는 의미인 ‘숙(宿)’자가 나오는 데 이는 자신이 잤다는 뜻의 자동사다. ‘여진과 동침했다’고 하려면 앞에 ‘더불어 여(與)’자와 같은 게 붙어야 한다. 잘못 해석했다고 보는 이유다. 불행히도 이런 오류는 일단 퍼지면 끝이다.”
- 다른 명백한 잘못도 있나.
- “난중일기와 조정에 보내는 보고서인 장궤를 보면 ‘당파(撞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쳐서 부순다는 뜻으로 지금까지는 배끼리 부닥치는 것을 당파로 봤다. 영화에서도 조선 배와 일본 배가 서로 부닥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본 배만 판판이 부서진다. 지금까지는 일본 배는 약하고 우리 선박은 튼튼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과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같은 목선끼리 충돌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의심스럽다. 또 조선 배가 아무리 강해도 충돌로 손상을 입으면 보수해야 한다. 영화도 그랬고, 요즘 TV 드라마에서도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자꾸 배끼리 부닥치더라. 보기는 좋지만 이럴 거라고는 믿기 힘들다. 원문을 보면 장거리포로 당파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사실 등으로 미뤄 볼 때 당시 해전은 우선 포격전을 벌이다 나중에 배끼리 부닥치는 전투를 했다고 봐야 한다.”
- 그런 오류는 밝혀야 되는 것 아닌가.
- “잘못된 내용을 지적하는 논문도 꽤 썼다. 하지만 사람들은 논문을 읽지 않는다. 왜 읽지도 않는 논문을 자꾸 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내 난중일기에도 오류가 많다는데 왜 그런가.
- “당시 규장각 소속의 학자 두 명이 3년 동안 모든 편찬 작업을 끝냈기 때문이다. 일제 때는 8년이나 걸렸는데 말이다.”
- 공학도이기에 유리했던 점은.
- “난중일기 해석 과정에서 지명 등을 찾아낼 때 과학적 시뮬레이션 모델을 써서 밝혀낸 적이 있다. 난중일기에 확인되지 않은 지명이 나오면 당시 병사들이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을지를 시뮬레이션으로 추정해 상대적으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 과학적 사고가 도움이 됐다는 의미인가.
- “그렇다. 여러 해석이 난무할 때 과학적 사고가 길잡이가 됐다. 명량해전 때 조선 배 13척이 왜선 130여 척, 심지어 300여 척을 깨부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배 한 척당 두 척 반 정도를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13척이 130여 척을 깨부쉈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기록에 나와 있는 131척은 그때 왔던 왜선 전체를 의미한다. 모든 왜선이 이순신 함대에 달려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일부러 목이 좁은 명량으로 적을 끌고 갔기 때문이다. 결국 이순신이 왜선 31척을 박살 내자 일본 함대 전체가 도망쳤다고 봐야 한다.”
- 이런 세태를 어떻게 보나.
- “이런 오류가 돌면 사회의 지식층에 의해 걸러져야 한다. 13척이 31척 정도를 격파했다고 하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만 130여 척, 300여 척을 어떻게 깨나. 외국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장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신뢰를 잃게 되면 국가적 망신이다.”
- 난중일기에 13척이 31척을 깼다고 확실히 나와 있나.
- “그렇다.”
- 난중일기로 본 이순신은 어떤 인물인가.
- “일기 곳곳에 줄이 그어져 있고 암호 같은 부호도 여럿 보인다. 일기에 나오는 인명을 세어보면 1000명이 넘는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이들 모두를 기억하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이들을 식별하기 위해 개인적 특징을 부호를 사용해 세밀하게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기를 보면 ‘아무개가 거짓말을 하기에 잡아다 곤장을 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군대를 제대로 통솔하려면 부하들이 총사령관을 함부로 대해서는 큰일 난다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부하의 거짓말에 넘어가선 안 되고 그러려면 치밀한 기록이 필요하다. 난중일기는 이런 기능을 위한 메모장 역할을 했을 것이다.”
- 이순신의 성공 배경은.
- “앞에서 지적했듯 그는 극도로 치밀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모든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순신은 군량이 들어오면 되 단위까지 재도록 시켰다. 때로는 다시 재도록 했다. 실제로 일기 여러 곳에서 ‘다시 재도록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양이 부족해도 허용할 정도의 오차가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만 말이 안 되게 축나면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팼다. 이순신의 이런 치밀함이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