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4)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2012.06.07 18:18
각지의 택함 받은 자들에 보낸 베드로 편지 역시 마가가 대필한듯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로마 교회는
베드로를 로마 교회의 수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베드로의 행적을 로마와 연관시키려 했고,
베드로 전서를 쓴 곳도 역시 로마라고 해석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벧전 5:12∼13)
로마 교회는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세상 권력을 바벨론으로 비유한 것처럼(계 18:2)
베드로도 로마를 바벨론으로 썼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것은 AD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고,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AD 63년[약32년전] 네로 황제 때였다.
복음이 로마에 들어갈 때부터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
헬라처럼 로마 역시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의 나라였고,
헬라처럼 로마 역시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의 나라였고,
명분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로마에는 로마의 신들 외에도
헬라, 애굽, 소아시아의 여러 신들이 들어와
신들의 백화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로마에 유대의 한 신이 더 들어온다고 하여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고,
유대인의 회당도 허용되었다.
유대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유대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유대의 전통을 잘 모르는 왕이나 총독이
그들의 성전에 신상을 세우려 하여 백성의 반발이 있었을 뿐,
로마가 그들의 신앙 자체를 탄압한 적은 없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로마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총독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눅 23:4).
그는 다만 산헤드린 공회가 그를 반역죄로 고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황제에게 고소하겠다고 위협하여
그를 반역죄로 처형했을 뿐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모든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에도
로마의 박해는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그들을 박해한 세력은 유대인뿐이었고,
사도 바울을 고발한 것도 유대인들이었다.
사도 바울을 심문한 총독 베스도 역시
그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행 25:25)
유대 왕 아그립바 Ⅱ세도 그와 의견이 같았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행 25:25)
유대 왕 아그립바 Ⅱ세도 그와 의견이 같았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행 26:32)
AD 61년 바울이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도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일반 가옥에 연금되었으며,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났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행 28:18∼19)
바울은 결국 AD 63년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직후 석방되었다.
바울은 결국 AD 63년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직후 석방되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핍박하는 로마를 두려워하여
바벨론이라고 써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 AD 64년까지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전혀 없었다.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가 바벨론에서 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
이 서한의 대필자는
이 서한의 대필자는
AD 50년 경 바벨론을 방문하여
베드로의 구술을 따라 마가복음을 받아 쓴 마가였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벧전 5:12)
그는 바울과 동행했던 그 실라가 아니라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벧전 5:12)
그는 바울과 동행했던 그 실라가 아니라
베드로가 자기 서한을 수신 지역에 전달하도록 부탁한 형제였다.
베드로가 바벨론을 터키 동북방과 파르티아 지역의 선교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도성이었고,
유대인의 조상들이 끌려가 노역에 시달렸던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바벨론에 끌려온 조상들이 주저앉아 울었던 그 유브라데 강변에서(시 137:1)
베드로가 불러주는 대로 마가는 그의 편지를 받아쓴 것이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벧전 5:13)
베드로 전서를 쓸 때에
베드로 전서를 쓸 때에
마가 역시 그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헬라어 문장에 능통한 마가가 곁에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서신을 대필시켜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 전서에 나오는 ‘고난’의 주제를 지적하며
그것을 로마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이 ‘여러 가지 시험’은
이 ‘여러 가지 시험’은
로마의 큰 화재 이후 도미티아누스에 이르는 혹독한 박해가 아니라
‘잠깐’ 근심하게 되었던 사건들이다.
그것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세력과 헬라인 세력이
장사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총회에서 있었던 할례 논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핍박과 환난보다
오히려 구원과 순종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그는 또 바울처럼(롬 13:1)
그는 또 바울처럼(롬 13:1)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4)
이런 권고는 바울이나 베드로가
만일 도미티아누스의 시대처럼
로마 권력이 그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비록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더라도
선행에 힘쓰면 오히려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그렇게 권고한 것이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믿음의 형제들은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믿음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벧전 2:9) 자부심으로 충만해야만
종의 순종을 실천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것은 유대인 특유의 분노와 폭력을 제어하라는 것이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것은 유대인 특유의 분노와 폭력을 제어하라는 것이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6∼17)
그것이 곧 진리를 지켜나가는 길이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것이 곧 진리를 지켜나가는 길이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사랑을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사랑을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바울의 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주로 헬라 쪽 교회의 지도자들이 등장하나
베드로도 역시 동북방의 선교 지역에서 활동하며
그 모든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들을 세웠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지도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지도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김성일 작가
김성일 작가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5) 마태와 누가 그리고 요한
2012.06.14 18:12
마가 사본에 마태 ‘산상에서의 말씀’, 누가 ‘치유에 관한 일화’ 등 보충
마가복음의 기록을 끝낸 후
다시 베드로가 불러주는 대로 그의 편지를 받아 쓴 마가는
아직도 갈대 펜을 놓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주님에 관한 기록 중에 보충할 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무엇을?”
“불러 주신대로라면
“왜 그러느냐?”
“주님에 관한 기록 중에 보충할 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무엇을?”
“불러 주신대로라면
예수님과 처음 만나신 장소가 갈릴리 해변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안드레님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분을 처음 만난 곳이 갈릴리 해변이 아니라
요단 강 근처였다고 하더군요.”
안드레는 베드로의 아우였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아우였다.
베드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갈릴리 해변이 처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네?”
마가는 그가 불러 준 대목을 다시 읽어 보았을 것이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갈릴리 해변이 처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네?”
마가는 그가 불러 준 대목을 다시 읽어 보았을 것이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막 1:16∼17)
마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처음 만나신 장면은 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 이유를 마가에게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장차 요한이 직접 쓰게 될 것이다.”
“파파, 한 가지가 더 있는데요.
마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처음 만나신 장면은 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 이유를 마가에게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장차 요한이 직접 쓰게 될 것이다.”
“파파, 한 가지가 더 있는데요.
제가 듣기로는 베다니의 나사로님이
죽어 장사한지 나흘만에 주님께서 다시 살려내셨고,
그 사건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가
그분과 주님을 함께 죽이기로 작정했다던데
그 중요한 사건이 빠져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 일도 역시 나중에 요한이 직접 기록하게 될 것이다.”
두 사건이 모두 사도 요한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것만 짐작될 뿐 더
베드로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 일도 역시 나중에 요한이 직접 기록하게 될 것이다.”
두 사건이 모두 사도 요한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것만 짐작될 뿐 더
이상 대답을 듣지 못한 마가는
후에 누군가가 그것을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드로와 작별한 마가는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 사본 중의 하나를 마태에게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레위 지파 사람인 마태는
세리 출신답게 세원을 뒤져내듯
자료를 찾아내는 일에도 유능하리라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일 마태가 마가복음에 빠져 있는
‘산상에서의 말씀’을 상세히 보충한
‘마태에 의한 복음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마 1:18)
그는 가버나움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마 1:18)
그는 가버나움에 있을 때
예수의 모친 마리아로부터 직접 들어두었던 내용을 정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동방 박사의 방문
그리고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으로 피신했던 일들을 보완해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도 요한이 관련되어 있을 듯한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다.
마가의 사본은
두 번째로 누가에게 전달되었다.
필자가 추정한대로 마가가 부친의 사업 복구에 나섰다면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인 빌립보에도 진출했을 것이다.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행 16:12)
누가는 그 빌립보에 머물며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행 16:12)
누가는 그 빌립보에 머물며
바울이 개척한 그 곳의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헬라의 학문을 공부한 마가가 누가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은
그가 유대인도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제자도 아니지만
의사이기 때문에(골 4:1∼4) 객관적인 기록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에게는 의학적 이론과 함께 정확한 임상 결과가 중요하다.
즉 환자의 증상과 치료 경과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정리해 놓고
연구와 진료에 응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눅 1:3)
마가가 기대한대로 누가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눅 1:3)
마가가 기대한대로 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예수께서 말씀한 비유들과
그분이 행한 많은 표적들 중
특히 ‘치유’에 관한 일화들을 수집, 정리하여 보충했다.
‘누가에 의한 복음서’의 기록 중 가장 압권은
아무래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누가가 의사였으므로 그 비유에 특별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보충한 내용 중에 또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기사로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의 관계를 밝혀 놓은 것과
그분의 유년기에 관계된 기록이다.
이는 필시 그가 마리아와 직접 인터뷰하여 기록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
누가가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최초의 화가였다는 초대 교회의 전승도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
누가가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최초의 화가였다는 초대 교회의 전승도
그런 연유에서 온 것이다.
그가 누가복음의 사본을 데오빌로에게 보낼 때
자신이 그린 성모화를 함께 보냈다는 것이다.
호데게트리아 즉 ‘길을 인도하는 성모’로 불리우는 이 그림은
5세기 중엽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가
15세기말경 파손되었다고 하며
그 복사화가 전해져 온다.
누가는 어디서 마리아를 만날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 제자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부탁했으므로(요 19:27)
그는 AD 44년 사도 야고보가 순교한 후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안디옥에 머물렀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요한은 AD 49년 예루살렘 총회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갈 2:9)
요한은 그의 여생을 에베소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AD 64년 로마의 화재 이후 바울과 베드로가 다시 투옥되었을 때
디모데는 에베소의 책임자로 있었다.
바울은 AD 67년
그가 처형되기 전 디모데를 로마로 불렀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
디모데는 어딘가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 연락하여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
디모데는 어딘가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 연락하여
에베소 교회를 부탁해 놓고 로마로 갔을 것이다.
AD 67년에 60대 후반이었던 요한은,
이미 80을 넘긴 노구의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갔다.
그 때까지 요한은 어디서 마리아와 함께 지냈을까?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에서 필자는 ‘로도스’ 섬을 주목했다.
로도스 섬은 구브로에서 에베소로 가는 항로의 중간에 있으나
육지와 떨어져 있어 유대인의 눈을 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후일 십자군 시대에 예루살렘 회복에 실패한 ‘성전 기사단’은 말타섬에 주둔했으나,
의료 봉사에 힘쓴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 섬에 있었던 것도
요한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누가는 마리아를 인터뷰했고 요한을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는 마가가 기대한 것,
즉 베드로가 빼놓은 부분을 채워 넣지 못하고
나사로의 누이들만 소개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눅 10:38∼39)
그리고 부자와 거지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기록하면서
그리고 부자와 거지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기록하면서
그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적어 놓았다.
누가는 그의 치밀한 성품으로 보아
베드로가 빼 놓은 사건들의 전말을 다 조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누가는 그것을 밝혀놓지 않은 채 그의 복음서를 끝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적어 놓았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누가도 역시 누락된 기록의 보완을 요한에게 미루어 놓은 것이다.
누가도 역시 누락된 기록의 보완을 요한에게 미루어 놓은 것이다.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순교한 후에도 오랜 기간을 더 살았다.
그는 AD 95년 체포되어 밧모섬에 유배되었고,
AD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석방되어
에베소로 돌아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보살폈다.
요한은 이미 마가복음의 사본을
마가에게서 직접 받았거나 누가를 통해서 받았을 것이고,
마가의 기록을 토대로 기록한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 사본도 입수했을 것이다.
“이미 쓰여진 세 복음서가 널리 유통되었고
“이미 쓰여진 세 복음서가 널리 유통되었고
요한의 손에까지 그 사본이 입수되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베드로가 마가에게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 불러 줄 때
빼 놓은 부분을 보완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요한 역시 베드로처럼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므로
그것이 급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AD 96년 밧모섬에서 돌아온 그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신지 70년이 다 되어가자
더 이상 멈칫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성일 작가
김성일 작가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6)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2012.06.21 18:08
마가,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 장차 올 일에 대한 예수님 말씀 주목
베드로가 불러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받아 적으면서
마가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마가 자신의 집과 관련된 유월절의 식사 장면과
그 자신도 따라갔던 겟세마네의 현장은
비록 그 때로부터 20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의 기억에 선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것은
장차 올 일에 관하여 그분이 말씀한 대목이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막 8:31-32)
베드로가 그분을 붙들고 항변했다가 오히려 꾸중을 들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그분을 붙들고 항변했다가 오히려 꾸중을 들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인근의 바네아스 계곡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인근의 바네아스 계곡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다시 계곡에서 나와
제자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무리’에게
장래의 일에 관해 언급하셨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그분의 충격적인 말씀이 더 이어졌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그분의 충격적인 말씀이 더 이어졌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당시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당시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종말과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들이 다 죽은 후에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씀이 뒤이어 나오는 변화산의 영광을 가리킨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 또는 성령 강림을 가리킨다거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은 모두 ‘죽기 전에’라는 표현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곧 교회 시대가 도래하며,
“곧 교회 시대가 도래하며,
이방 가운데 교회가 확장되며,
사람들이 수천 명씩 회심하며,
많은 권능의 은사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 중
몇몇 사람들의 생전에도
일어나기 시작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최세창 ‘마가복음’)
과연 그 말씀을 하신지 엿새 후에
과연 그 말씀을 하신지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헬몬 산으로 추정되는 그 산에서
예수께서는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고,
세 명의 제자들은
전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들으셨던 음성을 직접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
그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한 사람이 그의 귀신들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파리해지는 그를
고쳐 달라는 것이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막 9:19)
예수께서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고 아이를 잡아 일으키셨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고 아이를 잡아 일으키셨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말씀하셨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또 세 번째로 같은 예고를 하셨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막 10:33-34)
베다니에 이르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베다니에 이르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그분의 말씀은 성전 안에서 계속되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실 때 한 제자가 물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 13:1)
신학자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렇게 질문한 제자가
신학자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렇게 질문한 제자가
성급한 베드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예수께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셨다.
“네가 이 건물들을 보느냐
“네가 이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성 밖으로 나가신 예수께서
성 밖으로 나가신 예수께서
감람산에 올라 그 성전을 내려다보고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4)
제자들은 부지중에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부지중에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즉 ‘이런 일’은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에 대한 것이었고,
‘이 모든 일’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의미였던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었으나
그 질문에 답하시는 예수의 말씀에도 역시 복합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다중성이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막 13:14)
그것은 BC 538 년 기록된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었다.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
그 예언대로 BC 186 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Ⅳ세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막 13:14)
그것은 BC 538 년 기록된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었다.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
그 예언대로 BC 186 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Ⅳ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모진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이 적용될 수 있는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을 철거하고
BC 20 년 새 성전의 건축을 시작한 헤롯 왕은
성전의 정문에 거대한 황금 독수리 상을 세워 백성들의 공분을 샀다.
BC 4 년 헤롯 왕이 병들자
예루살렘 청년들은 성전으로 달려가 그 독수리 상을 파괴했고,
왕은 그 주동자들을 잡아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후일 헤롯의 후계자 아켈라오 때에
성전의 폭동으로 이어져
3천 명이 학살당하는 참사로 이어졌던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탁이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탁이
한 가지 이상의 역사적 상황에 적용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최세창 ‘마가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도
그와 같은 사건은 이어졌다.
AD 39 년 칼리굴라는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AD 70 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도
로마 군대는 독수리가 그려진 휘장을 들고 성전에 난입했고,
병사들은 돌 사이에 들어 있다는 황금을 찾기 위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부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한 예언에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역사적 종말’에 관한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막 13:30)
그러므로 당시의 제자들은
그러므로 당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세대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생각했으나
마가는 베드로가 구술을 받아 쓰면서
이 ‘세대(게네아)’에 대한 것도
유대인의 세대, 제자들의 세대, 그리스도인의 세대, 전 인류의 세대 등
다중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 ‘세대’라는 어휘를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막 8:38)’
또는 ‘믿음이 없는 세대(막 9:19)’ 등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마가가 특히 주목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당장 닥쳐올 수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해서는
이미 BC 700 년경 선지자 이사야가
역시 다중적 의미의 예언을 했다.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사 29:3-4)
그 후로 예루살렘은
그 후로 예루살렘은
BC 605 년, 597 년, 586 년 세 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BC 539 년 이후 페르샤의 지배를 받았고,
다시 BC 322 년 알렉산더의 헬라군의 손에 들어갔다.
BC 186 년에는 안티오쿠스 Ⅳ세의 박해를 당했으며,
레위 지파의 하스몬 가문이 잠시 독립 왕조를 세웠으나
다시 로마의 속주가 되어
BC 37 년부터는 이두매 출신 헤롯 가문의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이다.
김성일 작가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