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Mas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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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Masada)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마사다 입구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발굴(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
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
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
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
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
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
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
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
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
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
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
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
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
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
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
(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
‘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
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유적 전시실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유적 전시실
유적 전시실
유적 전시실
마사다(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
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
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
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
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마사다
마사다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23)
케블카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케블카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3)
마사다, 앞쪽 봉우리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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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의 최후 항전과 이스라엘의 멸망(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마사다가 점령당한 후
AD 135년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민족은
1945년 5월 14일 나라를 건국할 때까지
세계의 떠돌이 민족이 되었었다.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9)
로마 군대가 쏘아올린 20-25 kg 의 돌 폭탄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9)
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
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
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
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
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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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래로 로마 군단이 쌓아올린 토담(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
로마군은 먼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비탈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
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로마군단 진영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헤롯궁전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BC 37년 헤롯은 유사시 사용할 목적으로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궁전에는 왕궁, 목욕장, 곡물창고, 파수대, 군영 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동안에는 한번도 사용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요새는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열혈당원들의 마지막 투쟁지로 사용 되었다.
로마의 10군단은 천연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다
결국 인공 토담을 쌓은 후 점령할 수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다 죽은 유대인은 967명이었다.
헤롯궁전(출처-http://blog.daum.net/imkkorea/13378723)
마사다(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헤롯궁전 바닥 모자이크(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헤롯궁전 바닥 모자이크
헤롯 궁전의 목욕탕 유적, 헤롯은 마사다를 휴양지로 사용하면서
많은 유락 시설을 만들었는데, 로마시대 사우나도 그 중 하나이다.
헤롯 궁전의 목욕탕 유적(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헤롯 궁전의 목욕탕 유적(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헤롯이 만든 사우나 복원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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