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rael 성지순례[성화사랑]/중부산악·쉐펠라 ·광야

구브린 (스바다)골짜기 (벧 구브린, 마레사, Bet Gubrin-Maresha)

영국신사77 2015. 4. 17. 21:37

구브린 (스바다)골짜기 (벧 구브린, 마레사, Bet Gubrin-Maresha)

성화사랑예수사랑 2014.03.14 18:06

 

아얄론, 소렉, 엘라, 구브린, 라기스 골짜기   (출처- http://blog.naver.com/shema222/150168247731)

 

벧 구브린-마레사 (Bet Gubrin-Maresha)            (출처- http://bibleatlas.org/full/mareshah.htm)

 

벧 구브린는 쉐펠라의 골짜기 중에서 남쪽으로 네 번째에 위치한 구브린 골짜기(스바다 골짜기)(대하14:10)에 위치한다. 해안 평야에서 구부린 골짜기를 지나서 헤브론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 로마 시대에는 쉐펠라의 중심 도시가 벧 구부린 이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벧 구부린’이라는 의미는 히브리어로 ‘자유인들의 도시(City of Free Men)’라는 뜻이다. 벧 구부린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마레사가 위치한다. 현재는 벧 구부린과 마레사 지역을 합하여 벧 구부린-마레사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마레사는 유다 지파의 영토였으며(수15:44), 르호보암이 요새 성을 만들었고(대하11:8), 선지자 엘리에셀의 고향 이었는데(대하20:37) 그는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동맹한 것을 책망한 선지자이다. 또한 구스(에디오피아)사람 세라가 남 유다의 아사 왕을 치려하여 군사 백만 명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렀다. 아사 왕에 마주나가 마레사의 스바다(구브린) 골짜기에 진치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삼십 만 명이 있었고 베냐민 중에서 이십 팔 만 명의 군사가 있었다. 이때 아사는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어 구하였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대하14:11) 아사는 남 왕국 유다 왕들 중에서 선한 왕에 속하며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며,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였다. 이렇게 선을 행하며 율법과 명령을 지키므로 여호와께서 아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적들이 도망을 치게 된다. 그러므로 유다 군사들이 추격하여 그랄까지 이르렀고 구스 사람 중에 살아남은 자가 없었고 심히 많은 물건을 노략하였다(대하14:8-15).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후에 에돔(이두메아) 사람들이 마레사와 남부 온 유다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특히 마레사는 에돔의 중심지 이었다. BC 3세기 프톨레미 왕조는 마레사를 시돈의 식민지로 삼고, 시돈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헬라 문화를 가지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이곳은 중요한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이집트와의 무역 센터가 되었다.

 

벧 구브린의 성 안나교회             (글- http://blog.naver.com/syyoon1776/80174943646)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마레사는 파르티안 군대에 의해서 BC 40년에 파괴되었다. 마레사가 멸망하고 로마 시대에 쉐펠라의 행정 중심은 마레사에서 벧 구부린으로 옮기게 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AD 68년에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고 한다. AD 200년에 로마 황제 셉티무스세베루스가 벧 구부린의 이름을 엘류쎄로폴리스(Eleutheropolis)라고 바꾸었는데 그 의미는 ‘자유의 도시’라는 뜻이다. 비잔틴 시대 동안에 벧 구부린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고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벧 구부린은 작은 요새화된 도시였다. 성 안나 교회는 이 기간에 재건된 것이 분명하다. 아랍 마을이 이스라엘 독립 전쟁 때(1948년)까지 이곳을 점령하였고, 1948년 10월 27일에 이스라엘 군대가 이 지역을 수복하고 1949년 5월에 벧 구부린 키부츠가 이곳에 설립 되었다.

 

벧 구브린의 성 안나교회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벧 구부린의 십자군 시대의 교회             (출처- http://blog.naver.com/syyoon1776/80174943646)

 

쉐펠라의 중심 지역이 고대에는 라기스였으며 솔로몬 성전 파괴 이후에는 마레사이었고, 로마 시대에는 벧 구브린으로 이동하였다. 시대에 따라 그 지역이 멸망하고 중심 되는 지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스바다 골짜기에서 아사 왕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구스 군대를 바라보면서 온 맘을 다해서 부르짖었던 기도를 기억할 수 있다.

 

로마식 원형경기장                   (출처- http://blog.naver.com/syyoon1776/80174943646)

 

35번 도로의 북쪽으로 벧 구부린의 북쪽 복합단지(성채, 교회, 원형극장)가 위치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로마식 원형 극장에서는 검투사, 노예, 맹수들 사이의 싸움이 이루어 졌다. 원형경기장 아래에 두 개의 십자형 터널이 있었는데 이는 동물들을 가두어 놓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원형경기장(Amphitheater)들은 모두 네 개의 지역에만 있었다. 그것은 벧산, 가이사랴, 벧 구부린, 사마리아 이다. 비잔틴 시대의 벧 구부린의 원형극장은 공공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AD 12세기에 큰(130× 180m) 십자군 성채가 해자로 둘러싸인 원형극장과 목욕탕 꼭대기에 세워졌다. 그 중심에는 내부 성채(56× 58m)가 있었다. 두 줄로 된 열주들과 세 개의 벽감을 가진 교회가 그 성채 남쪽에 붙어 있었다.

 

비둘기 양육장(콜룸바리움)            (출처- http://blog.naver.com/syyoon1776/80174943646)

 

마레사에는 많은 동굴들 중 가장 중요한 비둘기 동굴과 시돈 사람의 매장 동굴이다. 비둘기 동굴은 두 개의 십자가 형태로 만들어 졌으며 그 속에는 제의용과 식용의 목적으로 비둘기들을 길렀다. 그리고 비둘기들의 분뇨는 비료로 사용되었다. 이 비둘기장(The columbarium)은 BC 3세기 말에 저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에서 수 만개의 벽감들이 있는 85개의 시설들이 발견되었다.

 

비둘기 양육장(콜룸바리움)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시돈인의 매장 동굴                  (출처- http://blog.naver.com/syyoon1776/80174943646)

 

시돈 사람의 매장 동굴은 BC 3-2세기경에 마레사인들은 동굴의 벽감에 매장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동굴에  는 마레사의 시돈인 공동체의 지도자인 세스마이오스의 아들 아폴로파네스가 언급된 비문이 있다. 비문과 그림들을 통해서 그 시대에 에술, 신화, 동물학적 지식, 가족의 연대, 매장 관습 등을 알 수 있다. 이 동굴에서 약 97m 남쪽에는 복원된 음악가의 그림이 있다. 이 동굴은 1902년 발견되어 고고학자 티르쉬와 피터스에 의해서 1905년 출판되었다. 이 그림은 1993년 원래의 그림이 남아있던 그들의 스케치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BC 113-112년에 요한 힐카누스 1세가 마레사를 점령하고 그 도시 주민들을 개종시키고 그 주변을 유대화 시켰다. 

 

종 동굴  (Bell Cave)                      (출처- http://blog.naver.com/syyoon1776/80174943646)

 

벧 구브린 지역은 연 석회암층 이어서 많은 천연 동굴과 인공 동굴을 볼 수 있고,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의 무덤들을 볼 수 있다. 벧 구부린에는 종 모양의 동굴들이 많이 있다. 이것들은 비잔틴 시대와 초기 이슬람 시대의 것들이며 대부분이 초기 이슬람 시대의 것들이다. 이 전체 지역에는 약 800개의 종 동굴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깊은 것은 25m 정도 이었으며, 대개는 9m-12m 정도의 크기였다. 이 종 동굴의 용도는 대부분이 채석장 이었고 해안 평야와 벧 구부린에 있는 도시들의 건축 자재로 공급되었다. 10세기의 아랍 역사가 엘-무쿠아다시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부와 풍요의 땅이다. 이곳에는 많은 대리석 채석장들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채석장은 좁은 입구로 시작해서 점차 넓은 구덩이를 형성하였다. 이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⑴ 구덩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⑵ 석회석이 건조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⑶ 채석공들이 날씨의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⑷분명한 윤곽선을 유지한 채로 공급하기 위해서 ⑸ 채석의 안전과 용이성이 이롭기 때문이었다. 채석된 돌들은 로프를 통하여 동굴에서 올려졌다. 채석은 주로 AD 7-10세기 사이에 이루어 졌다. 종 동굴은 주거지와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Bell Cave. 전체적으로는 800개의 종 동굴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동굴은 높이가 25m에 이르고 대부분의 동굴은 12-15m높이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는 물 저장고나, 주거지, 벙커등으로 추정하였으나 채석을 위한 동굴로 확인되었다. AD 7-10세기 사이에 주로 채석이 이루어졌고, 현장에서 발견된 비문으로 볼때 주로 거주한 사람들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종 동굴  (Bell Cave)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종 동굴  (Bell Cave) 입구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종 동굴  (Bell Cave)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종 동굴  (Bell Cave)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종 동굴  (Bell Cave)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

 

종 동굴  (Bell Cave)                      (출처- http://blog.naver.com/lyrics_muz/30099081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