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기스골짜기(Lachish Valley)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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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펠라(Shephelah) (출처- http://www.holylandphotos.org/browse.asp?s=1,2,6,27)
쉐펠라(Shephelah) (출처- http://bibleatlas.org/full/shephelah.htm)
북쪽으로 게셀(Gezer) 오른쪽(동쪽) 옆 아얄론 골짜기부터 남쪽 헤브론(Hebron)까지 이어진다. 셰펠라 왼쪽(서쪽)은 가사(Gaza), 아스글론(Ashqelon), 아스돗(Ashdod)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블레셋 성읍들이다, 셰펠라 오른쪽(동쪽)에는 예루살렘(Jerusalem), 베들레헴(Bethlehem), 헤브론(Hebron) 등이 있는데, 이는 유다 지파 성읍으로 유다 산지에 있다. 성읍들의 위치를 볼 때 셰펠라가 유다 지파와 블레셋 족속의 완충지대이며 접촉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쉐펠라 Shephelah (글- http://blog.naver.com/hesed414/150155263297)
‘저지대’(lowland)라는 뜻으로 개역개정에서는 “평지”(신 1:7; 수 9:1; 10:40; 11:2, 16; 12:8; 15:33; 삿 1:9; 왕상 10:27; 대하 1:15; 9:27; 26:10; 28:18; 렘 17:26; 33:13; 옵 1:19), “평야”(대상 27:28), “저지대”(렘 32:44), “평원”(슥 7:7)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셰펠라는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유다 산지의 서쪽 언덕을 가리키며, 셰펠라를 지나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블레셋 평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셰펠라는 블레셋 족속과 유다 지파의 완충지대라 할 수 있다. 셰펠라의 높이는 150-300m 정도로서 완만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다. 셰펠라의 땅은 이회토로 뒤덮인 부드러운 백악(백색 연토질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우 비옥하다. 우기(겨울)에는 계절성 습지를 형성한다. 또한 남쪽은 매우 비옥한 퇴적성 황토로, 북쪽은 점토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온난한 지중해성 반건조 기후이다.
셰펠라는 다섯 개의 골짜기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에서 남쪽 순서로 나열하면 아얄론 골짜기(Ajalon Valley), 소렉 골짜기(Sorek Valley), 엘라 골짜기(Elah Valley), 구브린 골짜기(Guvrin Valley), 라기스 골짜기(Lachish Valley) 등이다.
1) 아얄론 골짜기는 북쪽(위쪽) 벧호론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거나 남쪽(아래쪽) 기럇여아림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기럇여아림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블레셋 족속과 언약궤를 떠올리게 한다. 사무엘 선지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들은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 출전했다가 패해서 언약궤를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다. 하나님의 역사로 고통을 당한 블레셋은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되돌려 보내는데, 이때 언약궤가 도착한 지역이 바로 기럇여아림이었다(삼상 4:2-7:2). 나중에 다윗이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옮기려다가 율법대로 하지 않음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대상 13:5-14).
2) 소렉 골짜기는 주로 삼손 사사와 관련이 있다(삿 14-16장). 삼손과 관련이 있던 성읍, 딤나(삿 14장)와 소라(삿 13:25; 16:31) 등은 바로 이 소렉 골짜기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3) 엘라 골짜기 주변에는 소고와 아세가와 에베드담밈 등의 성읍이 있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족속과 사울의 군대는 바로 이 엘라 골짜기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잘 알고 있듯이 어린 다윗은 이곳에서 두려움에 떠는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골리앗을 물리쳤다(삼상 17장). 또한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해 도피처로 삼았던 아둘람 굴 역시 엘라 골짜기 근처에 있다(삼상 22:1).
4) 구브린 골짜기- 여호수아의 공격을 피해 도망쳤던 다섯 명의 아모리 족속 왕들이 숨었던 막게다 굴이 구브린 골짜기 북쪽에 있으며(수 10장), 구스 사람 세라가 유다 왕 아사를 공격하기 위해서 군사 백만 명과 병거 삼백 대를 끌고 온 곳인 마레사도 구브린 골짜기 남쪽에 있다.
5) 마지막으로 라기스 골짜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라기스 성읍과 연결된다. 라기스는 여호수아와 그 군대를 공격했던 아모리 족속의 다섯 성읍 중 하나이며(수 10장), 앗수르는 히스기야 때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했다(왕하 18-19장). 라기스는 동쪽 헤브론 성읍과 연결된다.
셰펠라에 있는 골짜기들과 관련된 성경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셰펠라는 무엇보다 유다 지파와 블레셋 족속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셰펠라를 빼앗기면 유다 지파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셰펠라 지역을 고수해야만 했다. 또한 다섯 개의 골짜기는 서쪽(지중해쪽)에서 동쪽(예루살렘과 요단강과 사해와 요단강 동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들이었기에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되면 무역을 통한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옥한 땅, 유다 지파와 블레셋 족속의 완충지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무역로와 그 이익 등을 볼 때 셰펠라는 시대를 불문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텔 라기스, 라기스 골짜기 (출처- http://cafe.daum.net/naorira/GH3h/)
평지(쉐펠라)에 위치한 다섯 개의 골짜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드넓은 남방지역과 해안 평야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라기스 골짜기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며 산악지역으로 올라간다. 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해발 1,000m의 헤브론 산지에 이른다. 라기스 골짜기 또한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통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골짜기에 들어선 후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는 골짜기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우뚝 서 있는 산과 같이 거대한 '텔 라기스'와 가깝다. 유다의 가장 큰 병거성이자 남쪽 쉐펠라 입구에 위치하여 유다 산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성읍이다. 그리고 이 성은 가나안 시대에도, 그리고 유다의 열왕들 시대에도 이스라엘 남쪽의 중심지적 도시였다. 이 텔과 가까운 곳에서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중기 청동기 후반(주전 2000년기)에는 라기스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가나안 도시들 중의 하나였다.
텔 라기스 (글- http://cafe.daum.net/logos/AAT9/)
라기스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는 1932년에 시작이 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왔다. 라기스에 관한 수많은 고고학적 자료들, 유적, 유물들은 성경의 기록과 어느정도 부합되고 있는가? 성경에는 라기스에 관하여 10차례 이상 언급을 해주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라기스에 관한 기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이야기, 혹은 문학작품에 해당되는 것인가? 텔 라기스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2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1878년 Conder 라는 학자는 고대의 라기스가 텔 el-Hesi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라기스에서 보내진 텔 아마르나 시대의 쐐기 문자를 발굴함으로 지지되었다. 텔 라기스의 위치에 대한 두번째 견해는 1929년 Albright 에 의해서 제안되었는데 그는 고대의 라기스가 텔 el-Deweir 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유세비우스의 언급에 근거한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라기스가 Eleutheropolis(벧 구브린)에서 가사를 향하는 도로 7마일 지점에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텔 라기스를 발굴한 모든 고고학 자료는 Albright의 제안을 지지하며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기스는 성경에 언급된 쉐펠라의 중심도시이다. 쉐펠라에는 중요한 골짜기가 다섯개 존해하고 있다. 북쪽에서부터 아얄론 골짜기, 소렉 골짜기, 엘라 골짜기, 구브린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라기스는 쉐펠라 중에서도 하부 쉐펠라에 해당이 된다. 서쪽으로는 해안평야 - 특히 블레셋 평야 - 가 있으며, 동쪽에는 중앙 산악 지역 중에서 유다 산지, 특히 그중에서도 헤브론 산지가 있다. 북쪽에는 앞에 언급한 쉐펠라의 중요한 골짜기들이 있으며 남쪽에는 네게브 산지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라기스는 해안평야 지역에서 헤브론 산지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라기스 성의 크기는 약 72 두남이었으며 그 성의 북동쪽에는 우물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라기스 성을 중심으로 한 지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성 자체는 깊은 골짜기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남서쪽의 성벽은 높이가 23m 였으며 북동쪽은 비탈에서 36m, 남동쪽은 40m, 북서쪽은 약 42m 였다. 즉, 그 성은 남서쪽 비탈이 가장 낮은 지역이었는데 이는 남서쪽 모서리에만 지형학적인 안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서쪽에 있는 언덕과 함께 그 성은 지어진 것이다.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성벽 맞은편의 언덕은 해발 260-265m 였다. 이러한 지형학적 조건은 외부인이 공격해 올때 공격의 지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 것인가를 쉽게 결정하도록 만들어준다. 이처럼 라기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라기스는 남부 유다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1) 유다 지파의 성읍 (수 15:1-62)
여호수아 15장에는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유다 지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에 분배가 되었는데 쉐펠라 지역과 유다 산지 그리고 사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분배받았다. 라기스는 쉐펠라에 분배된 14 성읍 중 하나였다(수 15:39).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였다. 여부스 족속이 거하던 예루살렘은 후에 다윗 시대에 이르러 다윗에 의해 점령되어 다윗성이라 명명하였다(삼하 5:7).
(2) 기브온을 치기 위한 동맹에 가담함 (수 1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와 아이를 점령하였으며 기브온 백성과 화친을 하였는데 이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및 기브온을 치기 위한 5 동맹국이 형성되는데 라기스는 그 중 하나였다. 이 다섯 동맹국을 형성한 사람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이었는데 이로 보건대 당시 예루살렘은 세력이 강했으며 라기스도 예루살렘에 못지 않는 강한 성읍이었음을 보여준다.
(3) 여호수아가 진멸함 (수 10:6-33, 12:11)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과 연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치려했던 라기스 왕은 후에 막게다 굴에 숨었다가 여호수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나무에 달렸다. 그 후 여호수아의 군대는 라기스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다. 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왔으나 그는 라기스 백성과 함께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4) 르호보암에 의해 견고한 성읍으로 건축됨 (대하 11:5,9)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한 라기스 성은 르호보암(주전 928-911)이 그곳을 요새로 만들기까지 폐허로 남아있었다. 르호보암은 유다 왕국의 서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곳에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 르호보암이 이 모든 성읍을 더욱 견고케 하고 장관을 그 가운데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각 성읍에 방패와 창을 두어 심히 강하게 하니라(수 11: 11-12)"
(5) 죄의 도성 (미 1:13)
선지자 미가는 라기스 거민의 죄를 꾸짖는데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며 이스라엘의 허물이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라는 표현은 이미 라기스 성에 병거가 있었음을 시사해 주며 이는 고고학적 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6) 아마샤가 살해당한 곳 (왕하 14:19, 대하 25:27)
유다 왕 아마샤(주전 798-769)가 반역자들에게 피하여 예루살렘에서 라기스로 도망갔을때 그곳에서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것은 당시 라기스가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음을 시사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7) 히스기야 왕때 산헤립이 취한 곳 (왕하 18:13-17, 대하 32:9, 사 36:1-3, 사 37:8)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였는데 라기스도 그 중 하나이다.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였을때 라기스를 포위하여 히스기야에게 랍사게를 보내어 항복하도록 위협을 했다. 산헤립은 후에 니느웨에 있는그의 궁전에 있는 한 왕실에 공격장면을 포함하는 벽화를 그림으로 그의 라기스 정복을 기념하였다.
(8)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음 (렘 34:1,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 유다의 모든 성읍을 쳤는데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마지막 까지 남아 있었던 성읍은 라기스와 아세가였다.
(9) 바벨론 유수 후의 유다 사람의 거주지 (느 11:30)
느헤미야의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유다인들이 돌아온 후 여러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라기스는 특히 멸망 전과 마찬가지로 유다인의 거주지였다.
고고학적 접근
Starkey 의 발굴은 Starkey 감독, L. Harding 과 O. Tufnell 의 협조로영국 원정단에 의해 1932년 시작되어 Starkey 가 산적에게 살해됨으로 1938년에 끝이 났다. 이 발굴은 주로 북서쪽 모서리에서 실행되었으며 그곳에서 성문들과 외부 지탱벽, 주거지 및 태양 신전, 거대한 수갱, 유다 궁전 요새, 그리고 북서쪽 바닥에서 발견된 해자 신전 등은 중요한 유적들이다.
특히 1935년 성문에서 발견된 '라기스 편지'는 그의 발견물 증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외부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것을 포함한 여러 시대의 수많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그의 발굴은 고고학자들의 인정을 받을만큼 뛰어난 것이었다고 평가가 된다.
1966-1968년에 태양 신전에서 아하로니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다. 그 당시 아하로니는 아라드를 발굴하고 있었는데 아라드에서 발견된 유다 신전의 기본 구조가 라기스의 태양 신전과 흡사한 것으로 믿고 이러한 목적으로 라기스를 발굴한 것이다.
1973년 우시쉬킨 감독으로 조직적이고도 장기적인 연구를 위한 발굴이 Starkey의 발굴지 부근에서 시도 되었다. 이 발굴은 이갈 야딘과 함께 진행되었는데 그는 발굴 처음부터 앗수르에 의한 공격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 발굴에서 발견된 것은 유다 궁전 요새 및 청동기 시대의 기념 건물, 유다 성문, 앗수르 군대가 주전 701년 그 성으로 접근하려고 만들었던 참호 등이다. 1983 -1985년에 계속된 발굴(남서쪽)은 R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텔 라기스 (출처- http://cafe.daum.net/lord12/8IA/)
[1번: 성벽] (글- http://cafe.daum.net/israelstudies/Ch7k)
아시리아 군대가 라기스 성벽을 뚫기 위해 진흙과 돌들로 쌓아 올린 벽이다. 결국 주전 701년에 이곳을 뚫었다. 이곳은 중동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흙벽이다. 1932-1938년 사이에 있었던 영국 원정대가 이곳에서 행한 발굴에서 화살촉들과 불에 탄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이 곳에서 성을 부순 큰 전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 성의 배수로의 잔해가 성문 입구쪽으로 계속 나 있다.
[2번: 성문]
성문은 외문과 내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문은 성의 내리막에 세워졌고 그래서 경사면 능선에서 튀어 나와 있었다. 내문은 텔의 주변에 세워졌다. 이것은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 시대 이스라엘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 중에서는 가장 큰 문루인 것 같다. 이 문은 성벽 끝에 있는 두 개의 타워를 지나간다. 그리고 양쪽 편에는 길다란 세 개의 방이 각각 있었다.
[3번: "편지들의 방"]
이 성문의 방들 중 하나에서 "라기스의 편지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중요한 문서의 발견 중에 하나이다. 이들은 도기편들(אוסטרקונים)이다. 그 도기편들 위에 고대 히브리어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이 편지들은 호세아(הושעיה)라는 이름의 사람에 의해서 예우쉬(יאוש)라는 이름의 상관이나 군대 사령관에게 쓴 것이었다. 그리고 이 편지는 호세아의 행동을 그의 주인이나 왕의 눈에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편지의 정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아세가와 라기스 사이의 한 요새에 살던 호세아가 라기스 사령관에게 보낸 본래의 편지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이 도기편의 편지들은 원래의 파피루스 원본을 복사한 복사본이며 라기스에 살고 있던 호세아가 예루살렘에 있던 예우쉬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 편지들은 대부분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소수만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번: 중앙 도로]
이 길은 성문에서 성 내부와 궁전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길 양쪽에서 작은 주거용 주택들과 상가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또한 여기서 많은 도기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요리 기구, 항아리, 등잔, 많은 돌 그릇, 쇠와 목재로된 물건들.
[5번: 전망대]
헤브론 산지 쪽으로는 세펠라 남쪽, 그리고 시리욘 언덕이 보이고, 그 요새의 언덕과 그 반대쪽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6번: 궁전 뜰]
궁전으로 들어가는 중앙 입구에 흰색 점토 마루가 있는 큰 마당이 있다. 거기서 궁전 입구 쪽으로 화려한 계단이 있다. 이 잔해는 발굴후에 만들어진 계단 아래에 있다.
[7번: 궁전]
유다 왕의 편에서 이 성을 다스리던 자가 거주하던 자리이다. 이 궁전에서 해안 평야와 헤브론 산지까지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쉬웠다. 이 궁전은 그 넓이가 2.5 두남이 넘는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넓은 것이다. 그곳에는 허물어진 곳 위에 다시 세워진 세 개의 궁전 잔해가 있다. 북쪽에서 궁전 쪽을 향하여 창고들이 세워졌다. 궁전의 남서쪽 구석과 성벽 사이에 두꺼운 벽이 있었다.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부가적인 장치인 것 같다. 거기서 두 개의 페르시아 시대의 궁전 기둥 터를 볼 수 있다. 즉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8번: 신전 전망과 성벽들]
이 신전은 청동기 후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두 번에 걸처 새롭게 다시 세워졌다. 이 신전은 13세기에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이 신전은 홀과 몇 개의 방들이 있다. 제단이 홀에 만들어졌고 제단 쪽으로 제물을 놓기 위한 긴 의자와 같은 것이 있었다. 많은 그릇들이 영국 원정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장식된 도기 그릇들, 컵, 제기들, 석고와 유리로 만들어진 그릇들, 작은 조상들, 그리고 상아 제품들이 있다.
이 전망대에서 또한 성벽들을 볼 수 있다. 이 성은 철저하게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 싸여있었다. 외부 지지벽은 경사지의 중간 높이로 둘러 쌓았다. 그리고 그 외벽은 경사지의 가장 높은 부분을 덮고 있던 곳을 지지하였다. 이 성을 둘러 싸고 있었던 원래의 성벽은 그 위에 있었다. 이 성벽은 돌로 만들어진 기초 위에 세워졌고 그 두께는 약 6미터에 달하였다.
[9번: "악마들의 나무"]
텔 위에 남아 있는 황갈색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1948년 까지 텔 가까운 곳에 살았던 아랍 마을 코비바 주민들에게 성스러운 나무였던 것 같다. 영국 정부 요인들이 말하기를 그 주변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땔감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에 얽힌 전설이 있다. 코비바 마을 주민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서 그들의 아이들을 보내곤 했는데 그들이 빨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 황갈색 나무에 악마가 살고 있으며 그 악마가 그 물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래서 그 물을 길어 오는 것이 그 마을 아이들에게 '용감함을 시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0번: 우물]
외부 지지벽 가까운 곳에서 영국 원정대에 의해 우물이 발굴되었다. 44미터의 깊이이다. 이 우물은 이 성의 주된 물 공급원이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이 성의 주민들은 요새화하는 기간 동안에 입지를 견고히 할 수 있었다. 물은 나할 라키쉬에서 이 우물로 들어왔다.
[11번: 과수원]
과수원 안에는 자연보호 당국에서 복원한 올리브 나무, 살구 나무, 선인장이 있다.
라기스 성읍 입구, 위 사진의 (1)번 부분 (출처- http://blog.daum.net/js4bs/2370449 )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빼앗아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 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2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 3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이르되 4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5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와 기브온에 대진하고 싸우니라. (여호수아 10:1-5) 라기스 성읍 입구, 위 사진의 (1)번 부분 (출처- http://cafe.daum.net/uachurch/CGyj )
라기스 성읍 우물 터 (출처- http://blog.daum.net/js4bs/2370449 )
텔 라기스에서 본 측면 (출처- http://blog.daum.net/js4bs/2370449 )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된 B.C 701년 라기스 전투 부조 (출처- http://blog.daum.net/icebluett/17)
앗수르 왕 산헤립이 점령했던 라기스
“그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그의 온 군대를 거느리고 라기스를 치며 그의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유다 왕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대하 32:9)
라기스는 마레사 서남쪽 6㎞, 예루살렘 서남쪽 48㎞ 지점에 있는 구릉 지역으로, 팔레스틴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이 구릉 지대 밑의 계곡에는 풍부한 물이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 지도에는 성경의 지명대로 표기하는 원칙에 따라 텔 라기스(T. Lakhish)로 표기되어 있다. 팔레스틴 최대의 텔(인공 언덕) 중 하나인 라기스는 눈에 잘 띄는 작은 마을로, 구약에 이곳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수 10:3, 31~33; 대하 11:9; 미 1:13).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동굴에 거주했는데, 이 주위의 산등성이에서 구석기 시대의 부싯돌이 발견되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사면이 골짜기로 되어 있고 석회석 산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르호보암 왕 때 요새화된 남방 방어선의 요충지였다. 유다 왕 아마샤는 모반자를 피해 이곳으로 왔으나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대하 25장). 그리고 이곳은 BC 701년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 왕에 의해 점령당했다. 역대하 32장에 보면 산헤립은 이곳 라기스 성을 점령한 후, 북쪽에 있는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들에게 편지를 보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고 항복하라며 반란을 조장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꾀임을 받지 말라 그를 믿지도 말라 어떤 백성이나 어떤 나라의 신도 능히 자기의 백성을 나의 손과 나의 조상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였나니 하물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대하 32:15)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키셨다. 오늘날 라기스는 남부 이스라엘의 발전 지역이 되었고, 모샤브가 건설되었다. 라기스의 언덕은 다른 지역의 텔보다 매우 높게 유지되고 있으며, 성벽의 흔적 또한 상당히 남아 있어 요새로서의 라기스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주위에는 풍부한 물이 있어 많은 지역에서 포도가 재배되고 있다. (글- http://blog.naver.com/hinsem/80154942553)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된 B.C 701년 라기스 전투 부조 (출처- http://blog.daum.net/icebluett/17)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된 B.C 701년 라기스 전투 부조 (출처- http://blog.daum.net/icebluett/17)
이스라엘 군 처형 (출처- http://blog.daum.net/icebluett/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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