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역경의 열매] 오성삼 (1)-(8) 오늘의 내가 나 되었음은 다 하나님 은혜라!

영국신사77 2013. 2. 26. 17:05

 

[역경의 열매] 오성삼 (1) 오늘의 내가 나 되었음은 다 하나님 은혜라!

2013.02.14 16:35

 


내 인생의 전반부는 아이들과 노는 것이 좋았던 철부지 어린시절을 빼면 내내 비가 내렸다.

물에 젖은 성경책과 찬송가 한 권을 남긴 아버지, 재봉틀에 의지해 아들 셋을 홀로 키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시던 어머니. 그분들이 가난과 함께 주신 것은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한 힘이었다.

120명을 뽑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응시생 122명 가운데 121등을 한 내가 선생님이 될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겪은 어려움이 어디 한두 가지였을까. 하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이고 내가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대학시절 대학 건물에서 새우잠을 자고 배를 곯아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추운 겨울날 교문 앞에서 입학시험 문제지를 팔 때 수위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대학 교수의 꿈을 키웠다. 병마로 ROTC 임관을 못했을 때도 흔들렸을지언정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등병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원 준비를 했다. 유학생활 중 겪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장학금을 타지 못하면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어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 가난도 감사했고, 대학시절부터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준 월드비전과 정수장학회 장학금도 큰 선물이었다.

나는 결국 대학교수가 되었고 교육대학원장 일을 맡아보며 전국 134개 교육대학원장협의회 회장도 되었다. 정수장학회 총동창회 회장과 서울 시내 가난한 집안의 고등학생들에게 연간 90억여원을 지급하는 하이서울장학위원회 위원장 역할도 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받았던 도움을 조금씩이나마 갚기 시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갚아도 마음의 빚이 날마다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든 생각이 보잘것없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겪고 느낀 것들을 모으고 마무리할 시기가 다가오는 시점에, 교육학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누군가에게 작은 깨달음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장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비는 끝이 났고 지금 나는 힘들게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싶다.

“일요일 예배를 끝내고 교회를 나오던 두 친구가 있었다. 교회에 나오자마자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두 친구는 교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도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 친구가 조바심을 내며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비가 그치기는 할까?’ 다른 친구가 말했다. ‘자넨 그치지 않는 비를 본 적이 있나?’”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도 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비가 없듯이 인생에서 끝나지 않는 시련은 없다.

인생을 살아오며 내가 남에게 감동을 주기보다는 남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선물을 받아왔다. 고백하건대 오늘의 내가 나 되었음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주변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도움 때문이었다.

◇약력: 1947년 경기도 출생,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대학원 교육학 박사,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건국대학교 농업교육학사, 건국대 교수, 건국대 교육대학원원장, 전국교육대학원장협의회회장,
국제교육진흥원원장, 건국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장, 현재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장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오성삼 (2) 내 유년의 8할은 아버지가 일하던 보육원 종소리

 

2013.02.17 16:48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리 38번지. 경원선을 타고 가다 동두천역에 내리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육원이 하나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 보육원은 오래전 문을 닫았지만 그곳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흔적들은 아직도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 5월, 우리 가족은 보육원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그곳으로 이사했다. 안흥리에 대한 첫 인상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교회 옆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 정차했을 때 교회 옆으로 흘러내리는 냇가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무거운 해머로 냇가의 큰 돌을 내리치면 그 밑에 있던 물고기들이 기절해 떠오르고 애들은 그 물고기를 건져내곤 했다.

신앙심이 깊으셨던 아버지는 보육원 일을 하시며 그곳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교회를 증축하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다. 나와 내 동생은 보육원에서 살면서 원생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끔찍한 종소리의 시그널이다. 내가 종소리에 대한 낭만을 잃어버린 것은 어린시절 보육원의 종소리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보육원 사무실 앞 왼쪽에 미군 탱크의 톱니바퀴를 쇠사슬로 매달아 붉은 페인트칠을 해놓은 육중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통솔하는 수단은 종소리였다.

종소리가 ‘땡땡 땡땡’ 두 번씩 울리면 식사시간을 알리는 신호요, ‘땡땡땡 땡땡땡’ 세 번씩 울리면 소리를 듣는 즉시 모이라는 신호다. ‘땡땡땡땡…’ 연속적으로 울리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상황을 알리는 비상 신호다. 종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이들을 곤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식당으로 모이게 했으며 흩어져 놀던 아이들을 보육원 앞마당에 줄 서게 했다.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는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소리였다. 추석과 크리스마스, 설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외 없이 나오는 메뉴가 있었다. 아침과 저녁은 보리와 옥수수가루가 반반씩 섞인 밥에 시래깃국 김치와 새우젓이다. 점심엔 밀기울로 만든 수제비나 옥수수가루로 쑨 죽이 배급됐다.

보육원에서는 마치 생선가게 생선을 크기대로 분류하는 것처럼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나이와 덩치에 따라 소치, 중치, 대치로 나누어 배식할 때 양을 달리했다. 아무리 먹어도 늘 허기를 느끼는 아이들은 소치에서 중치로 편입되거나 중치에서 대치로 편입되는 것을 군대에서 진급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아멘.”

그 시절 이 노래를 참 지겹게도 불렀다. 식사기도인 셈이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불러야 했는데 기도하는 동안 자신의 밥이 도난당하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밥그릇을 덮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실눈을 뜨고 주변 경계를 하면서 목청만 높여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식사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손님이 방문할 때면 우리는 ‘땡땡땡 땡땡땡’ 즉시 집합 소리를 듣고 달려와 손님을 위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손님은 대부분 미군 병사들이었다. 일요일이면 미군 병사들의 예배시간에 성가를 해주기 위해 미군부대 내에 있는 교회로 갔다. 예배가 끝나면 한 주 동안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보리밥과 새우젓을 싫어하던 내게는 미군 병사들과 함께하는 그 식사야말로 한 주 동안 허기진 배를 채우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곰처럼 다음 일요일이 되기까지 영양을 비축하는 시간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오성삼 (3) 아버지, 물에 빠진 보육원생 구하다 33세에 소천

 

2013.02.18 17:42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신앙생활에 열중이시던 모습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입대해 보병 장교가 되셨다. 초등학교 1, 2학년 시절, 토요일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대에 놀러가곤 했다. 병사들은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주었고 간혹 생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나 모형 자동차와 같은 조그만 선물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병사들의 사랑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식사 시간마다 병사들의 배식이 끝나면 막사를 돌며 식사기도를 하셨다. 기도는 식사에 대한 감사 기도의 성격을 넘어 고향에 계신 병사들의 부모님과 가족을 위한 기도의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식사 후 아버지는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병사들의 식기에 일일이 물을 따라주셨다.

아버지는 동두천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분이다. 군에서 자재를 공급받고 병사들을 동원해 교회를 지은 것이다. 이제는 화재로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목조건물이던 동두천감리교회가 아버지께서 지으신 교회다. 전역 후에는 동두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동성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열정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군에서 예편한 직후 잠시 양계장을 운영했다. 아버지의 일과는 집에서 30여분 떨어진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나이 많은 걸인 한 사람과 마주쳤다. 아버지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에게 입혀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는지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 아침식사를 대접해 보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새벽기도를 갔던 아버지가 뜻밖의 손님을 모시고 왔다. 잔뜩 겁에 질린 손님은 양손에 닭 두 마리를 거머쥐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는 손님과는 대조적으로 상기된 표정이었다. “여보,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닭을 두 마리나 내려주셨어요. 어서 아침 준비하구려.”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셨다. 그즈음 우리 양계장에는 종종 밤손님이 찾아와 닭을 훔쳐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날 손님은 운이 나쁘게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던 아버지에게 덜미가 잡힌 것이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닭 도둑에게 식사를 대접해 보냈다. 속이 터지는 것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군에 복무하실 때도 집안 살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급여는 병사들이 휴가 떠날 때 부모님 선물 사라고 교통비 하라고 나눠주고, 길거리 불우한 사람들 식사하라며 주고, 교회에 헌금하느라 바닥이 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장사를 해서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5월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가시던 아버지는 100명이 넘는 고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성학이란 원생이 물에 빠진 걸 보고 물에 뛰어드셨다가 목숨을 잃으셨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아직도 기억에 남는 추도사의 한 구절이 있다.

“오종섭 집사님은 서른 세 살의 나이, 꼭 예수님만큼만 세상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처럼 그는 고아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가셨지만 그가 남긴 많은 일들과 거룩한 죽음은 우리의 가슴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진 동산에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생겼다. 하나는 아버지의 무덤, 다른 하나는 그 고아의 무덤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오성삼 (4) 가난·질곡의 시절 극복하게 해준 유산은 ‘믿음’

 

2013.02.19 18:19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겨준 것은 교회에 들고 가시던 성경책과 찬송가뿐이었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와 장남인 나 그리고 어린 남동생 둘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날들을 생각하면 뜯어 먹고 살 수도 없는 성경책과 찬송가는 너무 초라한 유산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역경을 만날 때마다 믿음의 유산이야말로 가장 값진 유산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5년제 ‘고등공민학교’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학령기를 놓친 학생들이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운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고등공민학교 5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6학년 과정을 배우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5년 과정조차 엉망으로 보낸 채 졸업을 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골중학교의 모집 정원은 2개 학급 120명이었다. 입학원서 마감 결과 122명이 지원했다. 결국 두명만 떨어지는 입학시험을 응시생 122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러야 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미술 등 과목별 필기시험을 치렀고 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팔굽혀 펴기와 같은 체력장도 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명을 탈락시키기 위해 상당히 비효율적인 입학시험을 치른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합격자 발표였다. 불합격자 두 명만 개별적으로 통보해주면 될 일을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에게 다음주 월요일 오전 9시에 발표한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수험생 일부와 학부모들이 건물 앞으로 모였다. 120명의 합격자 명단이 벽에 붙었다.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환호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와야 할 이름이었기에 모든 이들의 관심사는 불합격자 두 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무심히 합격자 명단을 훑어보던 난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낙방하는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단 말인가?’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여기서 내 인생 종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중에 합격자 명단 끝에 자투리 종이가 붙었다. 보결생 명단이었다. 두 학생의 이름이 붙었는데 첫 번째 이름이 내 이름이었다. ‘보결생’이란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 ‘장학생’으로 착각한 나머지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결로 합격했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더 큰 문제는 수석 보결생의 타이틀을 얻어 입학한 시골 중학교에서 내가 점점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이 지나갔다. 학년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어머니는 용단을 내리셨다. 나의 교육을 위해 안흥보육원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는 모자 가정을 위한 시설에 방을 얻고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보내준 재봉틀을 얻어 의류수선을 시작하셨다. 수년 동안 놀아 노는 것이 지루해질 무렵 시작된 새로운 생활은 나의 학교생활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그 시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가난과 고통의 빗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기도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비로소 바느질을 끝내고 잠자리에 누우시던 어머니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를 하셨다. 그 시절 어머니의 처절한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라기보다 좌절하지 않도록 자신을 격려하는 기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오성삼 (5) 대입시험문제지 복사해 팔며 ‘교수의 꿈’ 키워

 

2013.02.20 17:16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다가왔다. 취업을 한다 해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머지않아 군대에 가야 하는 문제도 있었기에 취업보다는 대학 진학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일어나 기도하는 소리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면서 차츰 철이 들었고 공부도 하느라 해서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았지만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다.

건국대학교 농업교육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농업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학과니 인기도 별로 없을 것 같고 그해 처음 생긴 학과여서 미달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더구나 농고에 다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서 접수 마감 결과 경쟁률이 1.3대 1이었다. 낮은 경쟁률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떨어져야 할 상황이었다. 떨어질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까지 다녀온다는 것이 무모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날 새벽 떨어질(?)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기차를 탄 것은 내 인생에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험장에 도착해 1교시 시험이 시작되면서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다. 결시생들이 발생해 경쟁률이 0.8대 1로 미달된 것이다. 합격이 보장된 행복한 시험이었다. 살아가면서 간혹 이런 상상도 해본다. ‘내가 만일 떨어질 것이 두려워 그날 아침 시험장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 날 새벽, 망설임 끝에 선택한 순간의 결정이 내 인생 행로를 극적으로 바꿔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봄철 꽃봉오리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랑의 빵’ 모금으로 잘 알려진 한국월드비전에서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주었기에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일 새벽 6시 30분, 하루 한 번뿐인 서울행 아침 열차를 타고 왕십리역에서 내려 건국대학교까지 걸어갔다. 같은 과 친구들은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하는 나를 매우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를 과대표로 뽑아주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사연을 학과장 교수가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군 고생스럽게 통학하지 말고 내 연구실에서 지내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대학건물에서 학창생활을 시작했다. 통학시간을 공부하는데 투자할 수 있었다.

대학 1년 과정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고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짐 꾸러미에서 지난해 치른 입학시험문제지를 발견했다. 전년에 출제된 문제를 과목별로 다시 적어 등사기로 밀었다. 원서를 접수하러 오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대학교문 앞에 좌판을 벌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저녁이면 양쪽 바지 주머니 속에 지폐가 가득했다.

시험지 장사는 다음 겨울방학에도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새 경쟁자가 생겨났다. 나보다 싼값으로 시험문제지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정문을 지키던 수위들이 교문 앞 잡상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까칠하게 굴던 수위아저씨가 그날따라 언짢은 일이 있었는지 단속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수위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뒤척이며 생각해낸 것이 대학 교수가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이 대학의 교수가 된다면 오늘 나를 조롱하던 그 수위는 내가 교문을 지나칠 때마다 거수경례를 하겠지. 그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당당하게 교문을 지나는 나는 얼마나 쾌감을 느낄까.’ 이런 생각이 유치하게 보이지만 약자가 되면 유치하리만큼 사소한 것들에 인생을 걸기도 한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오성삼 (6) 궁핍한 대학생활… ROTC 임관 ‘늑막염’으로 좌절

 

2013.02.21 17:03


대학교 2학년이던 1967년 7월,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더위를 피해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바캉스를 즐기던 그 여름, 나는 대학신문사 편집장이던 농화학과의 황형, 대학방송국장이던 축산대학의 윤군과 공과대학 건물에 있던 학교 방송실에서 생활했다. 그때 우리는 잠자리로 건물 옥상을 주로 이용했다.

우리는 식량이 떨어져갈 즈음이면 주머니를 털어냈고 그래도 여의치 않을 때면 닥치는 대로 일해 끼니를 장만했다. 쌀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공사판에서도 일했다. 며칠째 비가 내려 공사판 일은 중단되고 어디서 식량을 구해야 할지 막막하던 어느 날이었다. 황형과 윤군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갔고 결국 건물엔 나 혼자만 남았다. 끼니를 굶어본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때처럼 몸을 추스르기조차 힘겨운 적은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쌀자루를 탈탈 털어보니 겨우 한 줌 정도 모아졌다. 냄비에 담아 벌겋게 달아오른 전열기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냄비가 나뒹굴고 쌀은 시멘트 바닥에 쏟아졌다. 젖은 손으로 전열기에 냄비를 올려놓다가 감전이 되는 바람에 냄비를 엎은 것이다. 한동안 흩어진 쌀알들을 망연자실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흩어진 쌀을 한 알 한 알 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울컥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이 감정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치 어린시절 고향 하늘의 별을 세듯 쌀알을 세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낡거나 흐려지지 않는 나의 기억이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3학년이 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ROTC 후보생(8기)이 되었다. 대학 생활과 군사 훈련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1, 2학년 때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500명당 한 명꼴로 대학에 배정된 5·16장학금(현재의 정수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제 대학 건물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학교 주변에 월세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까칠한 수위에 대한 복수의 길이 점차 넓어지는 것 같았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라. 지금 이대로라면 내가 교수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내 인생의 빗줄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9년 12월 22일 오후. 수도육군병원에서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ROTC 임관 신체검사에서 늑막염이 발견되어 임관 불가 판정이 났다는 통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2년 전 ROTC 입단 신체검사 때 지원자들 가운데 최초로 완(完)자 판정을 받은 나였다. 꿈같아서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현실이었다. 쪼들리는 시간을 쪼개고 힘겨운 생활을 연장해가면서 지난 2년 동안 여름방학이면 병영훈련을 받고,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총을 들고 훈련에 임하던 그 수고와 노력이 날아가고 만 것이다. 함께 훈련 받았던 ROTC 후보생 가운데 낙오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영양실조에 과로까지 겹친 결과였다.

그토록 절망적이던 순간 본능적으로 지금껏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찾았다. 내 인생 행로에 직진의 파란 신호등 대신 잠시 기다리라는 노란 신호등을 켜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목적지에 이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아픔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의 여정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늑막염이 불치병에 걸려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넷이란 젊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오성삼 (8) ‘입양아’ 심부름 조건 美유학 항공권 얻어

 

2013.02.25 21:29


1974년 11월 28일. 3년 가까이 복무한 군 생활이 끝났다. 제대하는 날 곧바로 서울대학교가 있던 동숭동에 갔다. 대학원 입학원서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경제적인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3년 가까운 군 생활을 마치고 받은 제대비 5000원으로 입학원서를 산 후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 동두천으로 향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대학원 준비를 했었고 무난히 합격했다. 1975년 서울대 대학원의 입학금을 포함한 첫 학기 등록금은 8만3950원이었다. 등록금을 걱정하던 그때 정부정책으로 학자금 융자제도를 실시한다는 가뭄에 단비 같은 뉴스가 전해졌다. 같은 교회 집사님께서 보증을 서주어서 등록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인생의 수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주셨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입주 가정교사로 받은 돈으로 책을 사고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은행융자를 갚아나가기에 부족했다. 연체가 되자 나는 물론 보증인에게까지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대학원에서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 다시 한국월드비전 장학금을 받게 됐다. 대학 4년간 받아온 월드비전 장학금을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받은 것은 당시 월드비전 이윤재 회장님 덕분이다. 힘겨웠던 나의 대학 시절을 지켜보았던 그가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월드비전을 통해 치료받도록 도와주셨다.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밀어준 도움의 손길이었다.

모교인 건국대 사범대학에서 조교 자리도 얻어 다소간 생활의 여유를 찾았다. 그렇게 석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 신분이긴 하지만 대학 강단에도 섰다. 강의에 대한 설렘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고정 수입이 없었기에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때마침 정수장학회(당시 5·16장학회) 동창회의 간사를 맡으면서 고정 수입이 확보돼 미국 유학준비에 착수했다. 1년의 준비 끝에 드디어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대학교로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1980년 12월 중순이었다. 2주 뒤면 미국에서의 대학 학기가 시작되는데 생활비는커녕 비행기표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학생 비자를 받아들고 미국대사관을 나와 광화문 지하도를 힘없이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구약성서 창세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 그는 아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아버지 우리가 제사를 드리러 산에 가고 있는데 제사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지요?”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제사에 쓸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래 그거야. 내가 미국에 가서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준비해 놓으실 것이다.’ 이 믿음만 간직하면 나의 유학 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학창시절 수많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던가. 어차피 빈손으로 시작한 인생 또 한번 부딪쳐보리라.

며칠 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미국에 입양되는 아이들을 에스코트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았다. 두 아이는 하와이 공항까지, 세 아이는 로스앤젤레스(LA)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미국행 왕복 비행기표를 제공 받는 행운(?)을 잡았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