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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1)-(14)

영국신사77 2012. 9. 17. 20:20

후학에게 주는 미국 유학 60년의 교훈과 지혜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1) 연재에 앞서
2012년 03월 13일 (화) 16:32:04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editor@kyosu.net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외교연구원 교수 등 미국내 연구자들을 지도, 후원하기도 했다. 국내 학자로는 김동성 중앙대 교수, 김동수 서울시립대 교수, 남정휴 경기대 교수, 기기정 연세대 교수, 홍욱헌 포스텍 교수, 김병일 경희대 교수 등이 그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교수신문>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 '미국 유학 60년'을 이번 호부터 소개한다. 김일평 교수 회고록은 <교수신문> 인터넷판에 매주 연재될 예정이다. 김 교수의 회고록은 미국 내 한국학 연구 1세대의 형성과 그 과정에서의 자긍심, 그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국내 학계의 지적 교류 풍경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1953년 9월 이였으니 벌서 반세기가 지나고 60년도 넘은 세월이 흘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도 많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했다. 물론 한국도 변하고, 세계도 천지개벽을 했다고 할 만큼 변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는 미국에 유학생으로 와서 공부하면서 또 대학에서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교수생활을 하면서 미국도 변하고, 한국도 변하고 그리고 세계가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미국유학 반세기 동안에 배운 것과 나의 인생경험을 나의 회고록에 기록해 놓기로 했다. 한국에서 미국유학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유학지망생과 그리고 우리 후세들에게 나의 회고록은 '미래에 대한 그들의 예측'이 될 수도 있고, 또 미래를 향한 역사적인 교훈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지난 해 타계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Paul Samuelson)은 그해 6월 “역사야 말로 어떤 가설이나 실험보다 더 좋은 자료"라고 말하면서 역사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나는 한국 유학생으로 1950년대에 미국에 와서 미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공부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실질적으로 경험했던, 살아있는 역사를 여기에 기록해 놓고자 한다. 나의 회고록은 격동기의 반세기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930년 5월 5일 (경오년 말띠)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영월은 우리 조선역사의 6대조 단종왕의 묘가 있는 곳이 아닌가. 그리고 만주사변 (1931), 중일중전쟁 (일본과 중국의 전쟁, 1937~1945), 그리고 대동아 전쟁(제2차 세계대전, 1941~1945) 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차분하게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하면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 (Korean War. 최근 한국언론에서는 6·25 전쟁이라고 통일함) 와중에서 나는 20대의 나이에 한국 육군 연락장교로 전쟁에 참전했다. 한국군에서 3년간의 육군 연락장교의 임무를 끝마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다. 6·25전쟁 중 나는 연락 장교로서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내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초반 25년간은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 속에서 흘러갔으며, 곧이어 6·25전쟁 중 일선에 나가서 전투에 참가하는 경험도 해 보았다. 그리고 남은 반세기는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또 미국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한국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도 있었다. 6·25전쟁 당시 잿더미로 변한 한국 땅에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꿈을 품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속을 거치고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23세의 나는 그해 9월에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유학은 한국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 같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나는 미국에서 유학생의 생활도 해보았고, 또 미국 대학교에서 교수로 오래 생활하기도 했다. 그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웠던가? 또 내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의 유학 60년을 돌아보면서 유학생으로서의 생활과 미국대학의 교수로서의 생활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한국 학계에 다소나마 쓸모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이 소소한 회고에 담긴 한국 지식인의 미국 유학 과정과 지식의 습득이 우리 후배들에게 하나의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보람 있는 '회고'일 것이며, 응당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유학생활 과 미국대학에서 교수로 생활하면서 목격한 미국의 현대 역사도 이 회고록의 풍경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미국유학을 떠나게 됐으며, 낯선 미국사회에서 유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미국 역사를 배워왔는지, 그리고 미국 현대사에 대한 나의 느낀 바를 가능한 한 복기해내며 기록하고자 한다. 미국 유학생의 생활은 1950년대나 2000년대의 오늘까지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의 회고록에는 특히 미국에서 겪는 한국 유학생들의 고충, 그들의 의미 있는 학위취득 과정도 기록될 것이다. 역시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을 한국의 후학들에게 내밀한 미국 대학가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선택을 돕고자 하는 뜻에서다. 나의 회고록이 그들에게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국으로 유학하는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미국의 역사와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또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조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살아왔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이 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이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나는 '배우면 알고, 알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경구를 등불처럼 밝혀 집필 동기를 잃지 않고자 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반세기(25년) 동안 살았다. 또 미국에 와서는 반세기 넘게 살았으니 동양과 서양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는 지혜와 철학도 얼추 생겼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어떻게 미래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은 회고록이 그런 문제를 환기한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또 나의 회고록을 통해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비교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접목 할 수 있을지 비전과 방법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인류의 희망사항인 세계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 이 노구의 회고록을 통해 우리가 다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계속>

 

한국인과 미국인, 역사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2)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
2012년 04월 04일 (수) 17:47:18 김일평 미 코넷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나는 무엇 때문에 나의 회고록을 쓰게 됐는가? 20여 년 전(1980년대)에 서울에서 개최된 어느 학술회의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토론시간에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 차이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국가이익의 상충, 한국전쟁 후 한·미관계 50년의 역사상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매우 다양한 토론을 전개 하면서 한국과 미국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매우 심각한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반세기가 넘게 살았다. 대학부터 대학원에 이르기 까지 10여 년을 공부하면서 또 대학교의 교수생활을 40여 년 동안 하면서 미국에 60년 가까이 살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에만 집중하고 학문세계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미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축적됐고 또 미국을 보는 새로운 관점도 생겼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에 유학 오는 유학생들에게 미국사회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방법도 자연히 가르치게 됐다. 미국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이며 또 슬기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각종 분야에 걸쳐 상담하기도 했다. 미국생활의 지혜도 생겼을 뿐만 아니라 또 미국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얻게 됐다. 이런 점에서 앞선 글에서 나는 '한국에서 미국유학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나의 회고록이 도움이 되고 또 미국유학을 떠나는 유학생과 미국으로 유학 오는 한국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 또는 참고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거니와, 이것이 내가 회고록을 쓰는 동기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미국에 관한 지식과 미국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 정도는 미국사람의 한국에 대한 지식과 이해 정도와는 차이점이 많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왜 우리나라에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미군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가?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 대해 무엇을 배우고 또 미국의 미래에 대해 무엇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미국에 대해 축적한 나의 지식은 미국을 이해하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이해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것이 또 다른 집필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학생과 젊은 세대가 품고 있는 반미감정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한국인과 미국인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상호간의 이해가 증진 된다면 반미감정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일선에서 복무하면서 미군장교와 장성들 그리고 한국군 장성과 장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통역한 경험도 있다. 또 각계 각층의 한국군 참모들의 생각과 작전 계획을 미군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노력한 경험도 있다. 또 미국 측의 생각과 작전계획을 한국군 장성들에게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가교역할도 했다. 따라서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과 미국 쌍방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제2군단본부에서 벤프리대장 통역-좌로 부터 요재흥 군단장,백선엽참모총장,필자, 벤플리트 대장.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매우 심각했고, 한미 간의 가치관의 차이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맹국 사이에도 마찰이 많이 생기고 또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미 간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여건도 많이 있었다.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 차이와 사고방식의 다른 점은 정책결정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상호간의 갈등요소가 된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고 미군 제8군사령부가 1950년 한국전쟁 후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도 서울에 주둔하고 있다. 한미 간의 견해 차이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견해차이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지 검토해 본 후 상호간에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한미 간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고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문화와 역사는 물론 미국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의 유학생활에서 얻은 일상생활의 경험은 미국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또 내가 미국에서 배우고 축적한 많은 지식과 지혜를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와 지식층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또 우리 조국의 젊은 세대, 즉 신세대의 애국심과 독립정신 그리고 민족주의를 미국사람들이 깊이 이해하고 납득 할 수 있게끔 내가 설명하고 교육할 수 있다면 한미관계의 새로운 미래상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동시에 또한 바람직한 결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면, 한미관계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세기가 넘게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했다. 또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교수생활을 하면서 미국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도 생겼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미국사람들이 경험한 개척정신과 현대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와 비교하고 미래를 연구 할 수 있다면 나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비교연구는 한미상호간의 이해도 증진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의 차이로 생기는 두 나라 간의 마찰과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나의 회고록이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좁히고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하며 서로 협조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비교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미국인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한미관계의 갈등과 마찰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의 회고록은 학술적인 논문도 아니고 또 정치평론은 더욱 아니다. 나는 다만 미국유학 반세기동안 나 자신이 얻은 지식과 경험을 평범한 글로 써서 미국에 유학을 꿈꾸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어떻게 변했으며,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어떻게 변했으며,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는지 이해하고 상호교류하며 지내는 데 작지만 도움 되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韓人들은 미국에 살면서 미국사람들 최상의 가치관인 '인간의 존엄성'을 잘 이해하고 미국 내에 형성된 한인사회(Korean Community)에도 인권의 존엄성이 신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미국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나의 회고록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계속>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3) 8·15 해방과 나의 영어공부
2012년 04월 18일 (수) 18:06:56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이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다. 내 나이가 15세였을 때다. 한국이 해방된 후 6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방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일본 식민지 통치 36년 동안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은 해방된 조국을 찾아왔다. 그들은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우리 중학생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식민지 통치 밑에서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식민지 통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 청년 학생들은 일본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군수공장에서 일했으며 또는 농장에서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됐었을 때 우리 청년학생 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갈구했다. 우리 중학생들 중 한사람도 빠짐없이 조국해방의 감격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것이 어제만 같은데 벌서 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선으로 남북으로 분단했다.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완전히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한반도 분단이 정착되기 시작했고, 남북 간의 분단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됐다.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소산물이다. 주한 미군은 6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해방 전후의 우리들의 역사를 어떻게 한권의 회고록에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국이 해방된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깊숙이, 또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을 뿐이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시 원주에 돌아와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1946년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에서는 영어의 알파벳 정도만 공부했는데 일본 선생들의 영어 발음은 웃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홋도 이즈 잣또” (What is that?) “잣도 이즈 캿도” (That is a Cat) 식의 일본식 영어 발음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였다.

강원도 원주의 일산동에는 벽돌 양옥집이 3채가 있었다. 6?25전쟁 중 원주시내에 있던 모든 건물은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했을 때 미군 항공기의 폭탄세례를 받고 다 파괴됐지만 일산동에 세운 양옥 벽돌집 세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오른편의 붉은 벽돌 양옥집 한 채는 미국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그의 한국명은 羅 愛施德이다)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 다른 한 채는 켄터키 주의 애스베리대학(Asbury Collge)(200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듀크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찰스 스토크스(Charles Stokes) 박사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세번째 양옥집 역시 미국 켄터키주 의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한국에 파견된 감리교 선교사 벅크홀더(Buckholder) 부부가 입주하고 있었다.

스토크스 박사 부부와 버크홀더 선교사 부부는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해외파견 선교사로 자원한 인물들이다. 1945년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던 그들은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겨울 방학에는 영어회화반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원주농업고등학교 선생들 중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송동수 선생 등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이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느끼고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 몇 명을 선발해 레어드 선교사(나 애시덕)가 겨울방학동안에 이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주 주일날 오후 2시에는 레어드 선교사 자택에 선생님들과 학생들 10여 명이 모여서 영어예배(English Worship Service)도 보기 시작했다. 영어회화반에 다니던 우리 고등학교 학생도 초대됐는데, 영어회화를 실제로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0여 년 가까이 지난 오늘 그 당시의 영어공부 하던 시절의 일들은 내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실용적이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선교사의 헌신적인 영어교육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한국전쟁 당시에 육군 연락장교로서 미국군과 한국군 지휘관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영어로 공부하고, 또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터 레어드 선교사를 비롯해 앞서 말한 이들, 그리고 세디 모어 (Sadie Moore)선교사, 단기 선교사로 파견된 젊은 스핀드로우(Spindlow) 선교사의 덕택이었다. 나는 늘 이들에게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헌신적인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영어교육을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개척정신과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 나를 영어 성경반에 인도해 주신 고등학교 은사님 정태시 선생 (대한교련 사무총창을 거처 공주사범대학 총장 역임), 장재용 선생 (한국 외무부에서 주 뉴욕 총영사, 스페인 대사 역임), 그리고 김기순 선생 (한국외국어 대학 영어교수 역임)의 지도와 편달에 항상 깊은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ster Laird (羅愛施德)선생, 그는 누구인가?

 

   
  Ester Laird(나애시덕) 선교사(1960)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훗날 김일평 교수가 있게 만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은 나의 은사이며 잊을 수 없는 미국 사람(Unforgettable American) 이기 때문에 나의 운명적인 선생으로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생시절 겨울방학 동안 나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 나 선생 때문에 성경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며, 한국동란 때는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임관해 연락장교로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애시덕 (Ester Laird) 선생은 누구인가?

 

레어드 선생은 1901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고 딕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종교교육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모닝 선 스쿨(Morning Sun School)에서 교편을 잡은 경험도 있다. 1926년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1930년부터 기독교여자사회관, 영아원, 결핵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부녀자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끈질긴 선교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녀는 안식년인 1927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1930년까지 3년간 고향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해 1931년 원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원주 기독교 여성회관 관장의 책임을 맡아서 10여 년 동안 봉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 일본제국주의 군부지도자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식민지 조선에서 추방했다. 레어드 선교사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있는 베데스타 병원 부속 간호대학에서 간호사 전문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그녀의 삶은 봉사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관됐다. 그녀는 이후 병원에서 일하며 전문 간호사를 교육할 수 있는 간호사교육 자격증도 받았다.

레어드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된 후 1947년에 원주로 다시 돌아와서 6·25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 기독교 사회사업을 계속하면서 기독교 청년 지도자를 많이 육성했다. 그녀는 원주의 사회봉사회관에 유아원을 설치하고 어린아이가 출생했을 때 모유가 부족한 어린 영아들을 모아 우유를 공급해서 새로 출산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주는 구명사업도 원주 기독교 사회사업관에서 함께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의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해(그 당시 원주에는 여성이 승용차를 스스로 운전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몇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달려가서 모유가 부족한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분유를 먹였다. 당시 시골의 어머니들은 외국인 여성에게 자기의 갓난아이를 선뜻 외국인에게 맡길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유를 먹이는 것도 반대하는 전통적인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레어드 선교사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성어린 사업에 감복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강원도 원주의 여러 동리에서 레어드 선교사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원주 시민들 사이에는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 원주 사람들은 그녀를 '羅 부인' 또는 '羅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에스터 레어드'였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羅 愛施德'이라고 지어 주었다. 사랑을 널리 베풀고 덕이 많은 羅 선생이라는 말이다.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들은 羅愛施德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더 훌륭한 영어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한국동란 후에는 외교관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또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전기는『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최종수 지음,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를 참조하기 바란다. <계속>

 

한 사람의 삶이 밝혀준 등불 … 인생의 초석을 다지다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4) 영어공부반의 재원들
2012년 04월 25일 (수) 17:18:27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레어드 선교사는 1948년 겨울방학 동안 기독교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원주시내의 고등학생들을 위해 영어 회화 반을 열었다. 그것은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이 '羅 선생'에게 겨울 방학동안 영어 회화를 가르치도록 설득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영어회화 선생님이 됐던 것이다. 이 인연은 내가 나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엄청난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반은 20여명의 학생이 모여서 시작했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뒤 학생 수는 7~8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 당시 '羅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운 우리 영어반에는 훗날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조성규 박사,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거쳐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UNESCO) 본부 교육담당 전문가가 된 원창훈 선생,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사회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10년간 가르친 후 다시 보스턴대로 돌아와서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정재식 박사,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된 이상훈 박사,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사회사업박사를 받고 세계아동복지기구(UNICEF) 에서 봉사한 후 경남 김해의 인제대 총장이 된 이윤구 박사, 앨라바마 주립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코네티컷州에 있는 사립대학 브리지포트 대(Bridgeport University)의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최규언 박사 등이 있었다.

또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에는 대한교육총연합회(교총) 사무총장을 역임한 후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하신 정태시 박사,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은 후 뉴저지주립대, 럿트거스대(Rutgers State University)의 교수를 거쳐 美 교육부의 국장급 간부로 봉사한 송동수 박사, 뉴욕 총영사관의 3대 총영사로 있다가 에티오피아 대사와 스페인 대사를 역임한 장재용 선생, 그리고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교수를 역임한 김기순 선생 등이 있었다.

레어드 선생의 한국봉사 50여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기『기독교의 여인- 미스 레어드 (Miss Esther Laird, A Christian Lady)』(2000)에 수록된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한 정태시 박사의 헌시는 레어드 선생의 한 평생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114번지 '원주 제일감리교회' 앞뜰에 세운 '미스 레어드를 위한 기념비'에는 "1983년 추수감사절에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님을 사랑한 친우 일동"이라고 쓰여 있다. 필자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것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나애시덕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작은 마음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주의 한 친구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나 선생님의 기념비는 나 선생님이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깊은 사랑의 표시다. 레어드 선생의 기념비 뒷면에는 1946년 강원도 원주의 나 선생님 댁에서 영어회화를 배운 정태시 박사, 신숙철 여사, 장재용 선생 내외, 김기순 선생,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 영어회화반의 조성규 박사와 홍순범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1926년 이 땅에 오신 나 선생님을 기림

젖 없는 아이 찾아서 밤새며 키우시고

깊은 병 앓는 이들 몸소 간호하셨고

길 잃은 젊은이들 꿈도 펴게 하시고

고달픈 이 쉴 집도 여럿 세우셨으니

크고도 따뜻하였어라 당신의 손길 당신

 

스스로는 병도 나이도 잊으신 채

한결같이 일에만 열중 하시더니

아아, 이 곳 다시 못 오시고 끝내 가셨고녀

주님의 십자가를 늘 지신 당신의 뜻

사랑의 밀알 되어 이 땅을 채우리라.

-정태시, 「헌시」

 

   
 

앞줄 왼편에서 이창호 장로, 두번째가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사모, 뒷줄 오른편에서 신숙철, 정태시 선생 사모님, 함재영, 조성규 선생 부인, 홍순범 선생, 장재용 선생, 김기순 선생, 채호석 선생, 맨 끝의 8번째가 조성규 선생

 
 

레어드 선생과 까까머리 우리 고등학생의 인연은 매우 작은 것이었지만, 우리들은'羅 선생'을 통해 해방직후부터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후 매우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에서 우리 청소년이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하겠다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레어드 선생의 영어교육 덕택이었다.

나는 1947년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8년 겨울 방학동안 레어드 선생은 원주 기독교사회관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셨다. 우리 영어회화 반에서는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에서 뽑은 이야기(Tales from the Shakespeares, by Charles Lamb)』를 교재로 사용했다. 그것은 레어드 선생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이 결정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영어 교과서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그 교재를 매일 한 장씩 읽고 오전 8시에 영어회화를 시작했다. 그 책을 우리의 교재로 선택한 것은 해방 직후 유행처럼 많이 사용되고 있는 책이기도 했지만, 한국학생들은 셰익스피어를 읽어야만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羅 선생은 "고전을 무조건 외우는 식의 공부는 영어 회화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어려운 책을 외우기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영어 단어를 많이 기억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은 집에서 읽기로 하고, 질문할 내용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이 있으면 회화반에서 영어로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실용적인 회화반으로 바꾸었다. 羅 선생님은 미국의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미국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 교과서를 구해서 우리 영어회화의 교재로 사용했다. 미국의 고등하교에서 사용하는 텍스트를 매일 한 장씩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머리 속에 요약해 두었다가 다음 날 회화반에서 회화체로 바꾸어서 그 내용을 자신의 영어로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요사이 말 하는 이른바 회화식 잉글리쉬(Conversational English)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에 대한 전기는 두 종이 출판되었다. 하나는 『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인데 최종수 목사가 저술하고, 한국기독교연구소가 2000년에 출판했다. 영어로는 Life and Works of Ester J. Laird(by Rev. Asbury Jongsoo Choe, D. Min., Korean Institute of the Christian Studies, 2000)이다. 그리고 또 한 권은 『그리스도인의 여인- 미스 에스터 레어드(Miss Esther Laird, A Christlike Lady)』이다. 전자는 좀 더 학술적인 책이고 후자는 대전 기독교종합 사회복지관 48년 역사로 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대전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의 48년의 역사이다.

해방된 한국에는 1945년부터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도했다.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와 장로교(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합하여) 선교사만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수십 개의 종파와 다른 종교를 합하여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각각 여러 종파를 대표하여 한국에 선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는 수십 개 종파가 공존하며 선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에는 서양의 천주교가 조선조 말인 1860년대에 들어와서 일찍 선교 사업을 시작했고, 이어 1903년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들어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연희전문학교 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또 세브란스병원 같은 현대적인 병원을 설립한 것이 기독교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우리 한국의 영어교육이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는 소식을 최근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나 60여년 전 우리가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 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 단어 몇 마디를 사용해 대화 즉 컨버세이션(Conversarion)을 나누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羅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실용영어는 우리 각자의 일생에 매우 긴요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중위로 임관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 주신 영어회화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나 선생님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계속>

 

해방 직전 원주농업중학교로 내려간 사연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5)
2012년 05월 02일 (수) 17:17:10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내가 미국 대사관에서 시행하는 유학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고 또 미국유학을 떠나서 미국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레어드 선생으로 부터 배운 영어회화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은 우리 고등학생들로부터 한 푼의 代價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공헌했으며, 영어를 가르치는 데 모든 노력을 충실히 잘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나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레어드 선생이 그 당시 열정적으로 가르친 영어교육의 효율성이다. 그녀의 희생적인 봉사생활을 생각하면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으며 존경의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온다.

   
  김일평 교수는 자신의 미국 유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미스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여사)의 '실용영어' 교육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펴낸 레어드 선교사 전기 겉표지.  
 
영어회화를 배운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한 한국 유학생을 여러 명 만나보고 또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토플시험에 응시해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둬 미국대학 혹은 미국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고 온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뛰어난 토플 성적과 GRE (Graduate Record Examination) 점수를 미국 대학원 입학원서에 첨부해 보낸다. 나는 함께 한국 유학생들의 입학원서를 심사했던 동료 교수들은 나에게 "한국 학생들은 다른 나라 어느 외국학생들보다 토플 성적이 매우 우수하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수한 대학교 성적과 500점이 넘는 토플시험 점수, 그리고 뛰어난 GRE 성적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지만, 대학원 세미나에서 영어를 자유롭게 말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대학원 세미나에서 영어회화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대학원 세미나에서 한국학생들에게 "자기 자신 의견을 얘기해 보라"고 말하면 그들은 대부분 머리속에 암기 해 두었던지 아니면 마치 답장을 써서 암기한 영어문장을 암송하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옆에서 듣기에도 너무도 답답하고 또 민망할 때도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 토플시험과 GRE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해 영어학원에서 공부하는 영어는 암기식 영어 교육이기 때문에 실제로 영어회화를 잘 할 수 있는 보장은 없다. 물론 30여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외국학생의 영어교육 문제를 인식한 미국의 대학들은 한국 학생들의 영어평가기준을 바꾸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게끔 교육방법을 빠른 시일 내에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내가 강원도 원주에서 미국선교사로부터 배운 영어의 발음과 회화방법은 60년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영어교육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로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 동료 교수들은 한국 유학생들의 딜레마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나의 동료 교수들은 "한국 학생들은 매우 우수한데 한국의 영어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동정심도 생겼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한국의 영어교육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유학생들의 영어'를 통해 눈치 챈 것이다. 최근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에서도 미국의 일상생활 영어를 중심으로 영어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영어교육은 미국식으로 많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됐다. 한국의 영어교육도 반세기전 우리가 영어교육을 받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 교육

내가 中·日戰爭 시대(1937-1945)에 일본이 중국을 침투공격하고, 1941년 12월 8일에는 진주만 공격을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한 1940년대에 서울에서 K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다. 미군 B-29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으며, 곧 서울을 폭격할 것이라고 일본정부는 선전하면서 서울 시민 대부분을 지방으로 소개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강원도 원주에 단 하나밖에 없었던 원주 농업중학교로 전학했다. 가정 형편도 서울유학을 더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완전히 패망하고 조선(한국)은 해방됐다. 36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와 함께 일본식 교육이 종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내가 받은 교육은 문자 그대로 군사교육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일정시대에 국민학교와 중학교 과정 일부를 일본선생으로부터 배웠다. 때문에 나는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또 일본 소설책과 신문 잡지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중일전쟁은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리고 10년 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중일전쟁은 1940년대에는 美?日전쟁으로 확대됐고, 이윽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됐을 때, 우리 중학생은 공부는 모두 집어치우다시피 뒷날로 미루고, 근로봉사에 참여했다. 우리 중학생은 일본이 운영하는 병기공장에서 일했다. 또 시골 농촌에 가서 고구마를 심고 또 쌀을 생산하는 모심기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젊은 학생들의 노력 동원이었다. 우리들은 때로는 부평에 있는 병기공장에 배치돼 총과 총탄 그리고 포탄을 만드는데도 동참했다. 일부 중학생들은 농촌에 내려가서 군량미를 생산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서 하숙하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원주의 집으로 내려가서 원주농업중학교(일제시대에는 4년제, 해방 후에는 고등학교를 포함해서 6년제)에 다니기로 했다. 그 당시 강원도에는 춘천사범학교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사범학교 5년간의 학업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선생으로 임명되고, 월급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범학교는 집안이 가난하고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망해 초등학교 선생이 되기를 희망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조선의 각 도청 소재지에는 사범학교가 하나씩 설립됐다. 사범학교 제도는 소학교(국민학교) 교사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었다. 한반도의 13개 도청 소재지에는 13개의 사범학교가 설립돼 경쟁이 매우 심했다. 일제 시대의 사범학교에서는 수업료와 학비, 기숙사비와 학생들의 제복을 포함해 모든 비용은 관비로 지급됐기 때문에 무료였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한국과 같은 식민지의 국민을 일본화 시키는데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그외 직업학교가 있었는데 공업중학교를 직업학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농업중학교, 상업중학교, 인문중학교의 경우 강원도에는 춘천중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부잣집에서는 아들을 춘천중학교에 보내고, 중학교 5년제(대동아전쟁 때는 4년제로 단축함)를 졸업한 후 일본 본토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의 외사촌 형은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메이지 다이가꾸(明治大學)'에 진학했다. 1941년 大東亞戰爭이 나기 직전의 일이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대학제도가 전시체제로 변했다. 그리고 중학교제도에도 변화가 생겨서 5년제 중학교를 1년 단축해 4년제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국의 청소년들을 일본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에 처해 원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학비조달이 문제였다. 결국 나는 더 이상 학비와 하숙비를 조달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름과 좌절 속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던 원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원주에서 8?15 해방을 맞이한 나의 감격을 어찌 다 펜으로 쓸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때 그 감격과 삶의 순간들은 반세기가 훨씬 넘은 오늘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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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레어드의 영어수업 … 고전보다 실용 강조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6)
2012년 05월 09일 (수) 17:08:25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강원도 원주에는 일본 통치시대인 1926년부터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교사가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일제는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선교사를 모두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선교사도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원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사회봉사회관을 회수하고 수리해 기독교선교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羅愛施德 선생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다.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도 능률 있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연재 앞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1

947년 레어드 선교사는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은 물론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은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도 운용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 반을 시작해 영어회화를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작은 인연이었지만, 이것이 훗날 내 인생의 길목을 안내한 동력이 됐으니, 대단한 인연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우리 고등학교 영어선생님 가운데 송동수 선생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서울 상업전문학교(해방 후에는 서울대 상과대학)를 다녔던 인텔리다. 송동수 선생은 일본군의 징집명령을 받고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해 태평양전쟁(1941~1945)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렇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1945년에 해방된 한국에 돌아왔다.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부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자기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로 돌아가는 기차에 승차했다. 기차간에서 미국병사를 몇 사람 만났다. 그 병사는 영어로 “두 유 해부 어 잽 후래그” (Do you have a Japanese flag?)라고 물었다. 송 선생은 미군병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상업전문학교에서 일본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니…… 한탄과 자괴심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이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영어를 극복할 필요를 느꼈다. 영어회화를 좀 더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원주 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을 자원했다는 에피소드다. 송 선생님은 친척이 살고 있는 원주에 와서 원주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송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운 기억이 있다.

레어드 선교사는1948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원주 기독교사회봉사회관에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을 위한 영어 회화반 (클라스)을 설치하고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 했다.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면서 실용적인 영어회화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낀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레어드 선교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미국선교사가 우수한 고등학생들에게도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한국인 선생들이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레어드 선교사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 결실로 1948년 겨울방학부터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은 영어회화반을 조직하고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20~30명이 참석해 배우기 시작했으나 2주일 후에는 7~8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영어회화가 배우기 힘들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은 일본교육의 영향으로 고전을 읽고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만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미국의 교육은 그와 정반대로 실용적인 영어를 공부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를 배우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의 기본용어를 배워야 미국사람들과 회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회화는 미국사회의 문화와 생활습관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선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부터 많이 배우고 그와 같은 단어를 매일 사용해 생활화 할 수 있다면 영어공부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해방 직후 이른바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인텔리들은 어려운 한문과 고전영어를 쓰는 사람, 고전적인 셰익스피어식 영어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진짜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인텔리들로부터 받은 영향이기도 했다. 해방직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美軍이나 또 일반 미국사람을 만나게 되면 셰익스피어의 어려운 고전영어를 인용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방인 미국사람은 한국 지성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인과 한국 신사 사이의 대화는 이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은 미국사람들은 무식하다고 속단하고 대화를 계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대화가 끊겨 버린다. 우리가 북한과 미국사이의 대화나 협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로 '동문서답' 식의 그 모습과 똑 같은 현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영어의 고전인 Tales from Shakespeare 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우리는 그 책을 텍스트로 채택했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레어드 선교사는 그 책은 집에서 읽어보고 질문이 있으면 회화 반에 와서 현대영어로 질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읽은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영어회화를 습관화 할 수 있는 묘법이라고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영어회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즉 텍스트 북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중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구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레어드 선생은 미국친지에게 연락해 교재들을 구해 주었다. 미국고등학교 교과서를 매일 한 장(Chapter)씩 읽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요약하는 것으로 회화 수업이 진행됐다. 영어문장을 암기해서 영작문을 짓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레어드 선생은 암기식 영어회화 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는 것이 영어를 배우는 첫발을 딛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미국의 생활습관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어회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영어를 배우는데 기초단계는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의 영어교육은 장족의 발전이라할까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60여 년 전 우리가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단어를 몇 마디 사용해 회화연습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8·15 해방 후 우리가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배운 영어회화는 우리 일생에 참으로 중요한 도구가 됐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육군 장교로 임관 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준 영어회화 덕택이다. 그리고 또 미국유학시험을 볼 때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 질문하는 영어회화 테스트에도 무난히 합격해서 미국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의 새로운 영어교육과 희생적인 노력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어드 선생은 영어회화를 가르치면서 그 어떤 보상도 보수도 받지 않았다. 그런 보수는 일체 없었다. 영어교육도 기독교 선교사업의 봉사정신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계속>

 

 

우연하게 '육군연락장교' 시험… 3개월 훈련 받고 전방 배치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7) 한국전쟁과 연락장교시절-2
2012년 06월 09일 (토) 00:32:41 김일평 ilpyongkim31@gmail.com

한국전쟁중 나는 대구에 피난 와 미 제8군 사령부에서 민간인 군속(Civilian Employee)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앞에서 말했다. 나는 휴일이 되면 대구 시내에 종종 나갈 수 있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육군본부 앞을 지나가다 눈길이 자연스레 게시판을 향했다. 그야말로 무심하게 바라봤을 뿐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운명을 다시한번 바꿔놓을 줄은 그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육군본부 게시판에는 연락장교 제 7기생을 모집한다는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으며, 영어회화에 능통한 대학생이나 20세 이상의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날 나는 연락장교 지원서를 받아 갖고 대봉동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 육군연락장교 시험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열기와는 달리 길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대학 재학 증명서와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갖춰야 하는데, 어떻게 대구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대학 대구분교에 문의 했더니 우선 등록금을 지불하고 등록을 해야만 재학증명서를 하나 떼어줄 수 있다는 회답이 왔다. 그리고 경찰서의 신원보증서도 함께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대학증명서는 학생 신분증을 복사해서 대체하고 대구 달성경찰서의 신원보증서는 대구의 동료친구에게 부탁해 형사를 만나서 인터뷰한 후에 가까스로 만들 수 있었다.

레어드 선교사가 원주에서 해방 후 1940년대에 가르친 영어회화 공부 덕분에 나는 6·25전쟁 당시 제7기 연락장교 후보생 선발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연락장교 선발에는 영어회화 시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와 영문 번역 시험도 포함돼 있었다. 영어회화 능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영어책도 읽고서 영미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말로 잘 번역할 수 있는지 등 어학 능력을 종합적으로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도 잘 쓰고 표현력도 갖춰야만 한다는 방침이었던 듯하다. 사실 번역과 동시통역은 매우 힘든 어학분야로 전문적인 직업에 속한다.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한 우리는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은 후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할 수 있었다.

우리 7기생은 대구의 보충대대 본부에서 3개월간의 훈련을 받았다. 대구보충대대 본부 안에는 야전 천막을 치고 미군이 사용하는 야전침대 (영어로는 캇트라고 함)를 두 줄로 18개를 펴고 잤다. 내가 야전 천막생활을 해 본 것은 6·25 전쟁이 나기전인 1948년에 진해 해군 사관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 훈련을 받을 때 처음 경험했으니 두 번째였던 셈이다. 새벽 7시에 기상해 30분 이내에 세수하고 야전군복으로 갈아입고 연병장에 나가서 새벽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천막으로 된 군인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한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식기에 밥 한 그릇, 배추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 한 공기를 트레이에 올려놓고 숟갈과 젓가락을 들고 식탁에 가서 식사를 한다. 이와 같은 한국식 식사생활은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최전방에서도 3년간 더 계속됐다.

 훈련은 매우 힘들었고 또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1948년 전국의 각 고등학교에서 2명씩 선발해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훈련을 받을 때 이미 기초훈련을 겪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난 후 나는 미 제8군 사령부에 근무할 때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몸이 상당히 무거워져 있었다. 녹이 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군사훈련을 무난하게 잘 해 낼 수 있었다. 원주 판부면 단계리에 살면서 원주농고를 다닐 때 나는 매일 매일을 3시간 이상을 걸어서 통학했기 때문에 근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됐던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자란 동료 훈련생들은 거센 군사훈련을 참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아우성들이었다.

 육군 장교 후보생의 훈련은 강도도 매우 높아서 체력적으로 견뎌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는 이 훈련이 실제 전투에서 겪게 될 갖가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치밀한 인내심을 길러 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아침저녁으로 추운 11월에 맨발로 물속에 뛰어들었던 고통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에는 인내심이 강해서 참을 수가 있었지만, 기초훈련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38선을 넘어 북한강 이북에 있는 제 2군단 본부에 배치돼 전방근무를 할 때 왜 그와 같이 힘든 군사훈련을 거쳐야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3개월의 보병장교 훈련을 무난히 끝마치고 우리 육군 연락장교 7기생은 각기 여러 부처로 배속됐다. 육군본부에 배속된 동료도 있었고, 또 육군대학에 근무하게 된 3 명의 동료도 있었다. 그리나 대부분의 우리 7기생은 지리산 공비토벌을 하기 위해 새로 창립된 제100부대 (후에 육군 제 2군단으로 재편됨)로 배치됐다.

<계속>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9)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2012년 06월 21일 (목) 21:10:36 김일평 ilpyongkim31@gmail.com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의 대부분은 임관 직후 육군 「제 100부대」에 배속 받았다. 육군 제1군단장이었던 白善燁 장군이 사령관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야전 전투사령부'를 100부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백장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내가 겪은 6·25전쟁과 한국군」에 의하면 6·25 전쟁 이전에 한국군 제2군단이 창설돼 있었는데 6·25 전쟁의 와중에서 거의 해체되다시피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제1군단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3군단을 새로 조직하기 전에 제2군단을 다시 창설하고 제2군단장으로 역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194-197)은 <중앙일보> 2010년 10월 18일 부터 27일에 연재된 내용인데, 이 내용에 거론된 시기는 내가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6·25전쟁에 참여해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할 때 참여한 나의 경험과 똑 같은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제1사단장 시절의 백선엽 준장.  김일평 교수는 바로 그와 관련된 '제100부대'에 배속돼 연락장교로서 군생활을 보냈다.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회고록은 자화자찬이 매우 심한 부분도 있다. 백 장군의 통역장교를 역임한 임석두 중위의 통역이 없었다면 미군 고문관 사이의 의사소통은 전혀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 참전했던 장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가 통역장교의 역할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궁금하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대구 육군본부에서 100부대에 배치됐다. 이 무렵 송요찬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과 최영희 장군의 8사단이 지리산의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배속된 '100부대'는 대구를 출발해 대전에 도착했다. 자동차길 2km 정도는 지프차와 스리코터, 트럭에 실려 갔다. 대전에서는 기차 편으로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역에 내렸을 때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철도역 직원이 지리산 토벌에 참전하는 우리 장교들을 겁에 질리게끔 말을 했다. 그 사내는 "전주와 남원부근에는 빨치산들이 아직도 우글우글해서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고, 낮에는 대한민국의 세상이 된다.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니 당신들 주의하시라"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전주 북중학교(전주고등학교의 전신) 校舍의 교실에 짐을 풀고 5~6일 밤을 지낸 뒤 남원으로 떠났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100부대는 남원국민학교 校舍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남원은 우리나라의 고전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가 나온 곳이 아니었던가? 나는 기억해 보았다(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 회고록(190), <중앙일보>, 2010.10.11. 참조).

1951년에 릿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일본 동경의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후임으로 떠난 후 그의 후임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가 바로 제임스 벤플리트 장군이다.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파면하고 퇴역 조치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후 그의 기세가 등등함에 따라 미군부대를 38선을 넘어서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이 약세에 몰리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주저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이 북한군을 추적하는 작전을 38선으로 제한하고, 6·25전쟁 이전의 영토에 한해서만 원상회복하는 범위에서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트루먼 대통령과 안보담당 보좌관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반면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트루먼 정부의 한국전쟁 전략은 전쟁을 국지전(Limited War)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생겨도 미군은 중공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한이 있을지라도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고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무력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전략을 주장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악관 안보담당 참모들은 한국전쟁에서 중공이나 쏘련이 북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전에 개입하게 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을 확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과의 전략적 견해 차이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제한된 전쟁 (Limited War)'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하극상의 죄목을 씌워 파면했다(6·25전쟁 중 트루먼-맥아더 사이의 의견 차이와 논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1951년 미공군 전투기로 하여금 중국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으로 발생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공군 전투기가 중국본토를 포격하게 되면 중공의 맹방인 소련이 참전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기 위해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해임한 것이다(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d the Korean War by John W. Spanier, 1965). 나는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디애나 대학(Indiana University) 에서 국제정치개론을 학부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반드시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논쟁을 강의했다. 국제정치 개론 교과서에도 깊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8일 서울이 수복되고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北進할 당시 미 육군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방을 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매듀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해 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돼 동경으로 떠나게 됐다.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왜 해임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증가했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됐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군 총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하극상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전쟁을 확대해 중공과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입장과, 그 반면에 한국전쟁을 확대하고 중공군과 전쟁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라며 반대하는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 그리고 이러한 팽팽한 두 입장간의 견해 충돌과 논쟁은 미국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 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by David Halberstam, 2007 참조). 그러나 논쟁은 상당히 장기간 계속됐다. 내가 1957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대학원 강의에 등록했을 때 리처드 뉴스태트 (Richard Newstadt) 교수의 '대통령의 권력' (Presidential Power)라는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트루먼-맥아더 논쟁을 케이스 스터디로 매우 심도 있게 다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1951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훈련장을 찾아 제임스 벤플리트 미 8군사령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당시 <라이프>지에 실렸던 사진이다.

 
 
이런 와중에 릿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벤플리트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왔던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희랍)의 군사지원단장으로 그리스군을 도와서 그리스의 공산게릴라를 토벌하는데 공헌이 많은 게릴라 전문장군으로 이름이 알려진 장군이다. 벤플리트 장군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그리스를 거쳐 미 8군사렁관으로 부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전선의 전방에서 싸우던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도망친 부대도 있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싸우든 인민군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산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남한 출신 의용군과 합류해 게릴라 작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때문에 민가의 피해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유엔군에게는 아주 큰 위협이 됐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육군본부에 가서 임명장을 받고 지리산의 100부대 전투 사령부에 배속을 받았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한국육군 100 부대는 남원국민학교 교사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서 먹고 잤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軍과 나』라는 6·25전쟁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원의 야전전투사령부 시대를 회고했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8군 작전참모 메제트 대령이 남원의 사령부에 은밀히 나타났다. 메제트는 나에게 ‘벤픓리트 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에 제2군단을 창설하겠다는 內命을 받고’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231쪽) 한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하기 위해 한국군 100 부대는 1951년 3월 남원을 출발해 미육군 제9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천군 북방의 泉田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미군이 벌써 천막을 치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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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한국군 의사소통의 가교 역할 톡톡히
김일평 교수 회고록(10)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2
2012년 07월 10일 (화) 14:22:07 김일평 ilpyongkim31@gmail.com

우리는 미군 제9군단으로부터 군단의 조직과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백선엽 군단장을 비롯해 김점곤 참모장, 인사(김길수 중령), 정보(육근수 중령), 작전(김사열중령), 군수(황 중령)의 군단 참모 등 각 부처의 참모는 물론 부참모 등 50여 명이 넘는 군단요원 장교들은 미군 제9군단 사령부에서 미군참모와 여러 전문분야의 요원들로부터 강의를 듣고 군단의 조직과 그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우리 연락장교들은 미군 제9군단의 각 부처에 배속돼 미군참모들로부터 교육재료를 받은 후 밤을 새워 가면서 공부하고, 번역을 했다. 나는 정보참모의 전투정보 편람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영어는 서양 언어이기 때문에 한국말과는 감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때문에 영어를 우리말로 통역하고 또 번역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과 통역은 창작이나 다름없는 작업이다. 첫째는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동문서답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연락장교는 해방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 영어를 책으로만 배웠으나 미국사람들과 접촉하고 미국사람들과 영어회화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군장교들이 사용하는 실용영어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만일 미국장교들이 한국군 지휘관에게 지시하는 사항을 잘못 통역한다면 수십 수백명의 사병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전선에서는 정확한 통역이 필요했다.

한국군 장성들 자부심 컸지만 영어에 약해

한국군의 장성들은 해방직후 군사영어학교 혹은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자랑하지만 영어를 알아듣고 정확히 이해하는 장교는 드물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일본군 출신 장교를 재교육시키는 단기훈련소나 다름 없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영어를 배우는 곳이 아니었으며, 새로 조직되는 한국 국방경비대 장교를 훈련하고 교육하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전신 이었다. 우리 연락장교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영어로 된 군사교재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한국군 장교들에게 미리 건네줬지만, 그들은 읽어보고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장교도 많이 있었다.

   
  훗날 군사영어학교가 되는 조선 국방경비대의 행진 모습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도 많았지만 한국군 창설당시의 한국군 장교의 교육수준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장교는 4년제 육군사관교(대학교의 수준)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10년이 지나 영관급으로 진급한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장교와 장군은 일본군의 사병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또 미국군과 한국군의 생활습관도 매우 다르고 우리의 사고방식도 매우 달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東西文化의 비교연구가 아직 발달되지 못한 1950년대에는 한국군과 미국군 사이의 의사소통은 잘 되지 않는 시대였다. 우리는 한국의 군사문화와 미국의 군사문화의 차이가 너무도 다르고 그 폭이 너무도 넓었기 때문에 같은 군인이면서도 상호간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고 동문서답 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는 것을 회고하면서 웃음을 금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영문을 한국말로 번역하고 미국사람의 말을 한국말로 통역한다는 것은 하나의 창작이나 다름이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통역이나 번역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된 것은 미군 제 9군단에서 미군 참모들의 강의를 한국말로 정확하게 통역할 때였다. 정확한 통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연락장교는 제2군단 창설에 희생적으로 봉사했으며 또 한국전쟁에서 세운 공훈도 많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동료들도 있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통역장교의 역할에 대하여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그는 연락장교의 통역에 의지했고 또 연락장교의 통역에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는 마치 자신이 영어를 잘 알아듣고, 또 미국 군사고문관들과 영어로 대화를 잘했던 것처럼 '카모프라지(camouflage: 군복 느낌의 위장용 얼굴무늬를 말함)' 한다면 과연 한국군의 장성으로서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자서전에는 통역장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없다.

 '브로큰 잉글리쉬'와 통역장교의 역할

백선엽 장군이 <중앙일보>(2010) 에 연재했던 「6·25전쟁과 한국군」이라는 회고록을 읽어보면 그는 영어를 매우 잘 알아듣고 미군 장성들과 의사소통도 문제없는 것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연락장교들이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당시에 경험한 바로는 백 장군이 영어 몇마디를 짐작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미군장교들과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의 옆에서 지켜본 한국 장교들은 누구나 다 백선엽 장군은 통역이 필요했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백선엽 장군이 한국군 제1군단장 시절 연락장교로 근무한 임석두 중위의 말에 의하면 백 장군의 영어는 그 당시 한국군 장성들의 짧은 영어와 똑 같은 '브로큰 잉글리쉬(Broken English)'로 그것도 몇 마디 인사말을 할 정도이지 전략적으로나 혹은 전술적인 용어는 소통을 할 수 없었고, 짧은 영어 '브로큰 잉글리쉬'를 사용하고 있었다. 임석두 중위는 해방 전에 함경남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제형 학구파로 백선엽 장군이 제2군단 창설을 위해 남원에 '100부대 전투사령부'를 창설했을 때 백 장군의 통역장교로 와서 그의 전속통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제 2군단이 미 9군단 산하에서 군단의 조직과 작전 훈련을 받을 때와 화천군 소도고미에 주둔한 제 2군단 시절에도 백선엽 군단장의 전속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미 제9군단 M46전차대대  
 
제 2군단 사령부에서 임석두 중위가 주축이 돼 우리 연락장교 몇 사람은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는 매주 미국 주간지 <타임>지를 공부했다. 임 중위가 <타임>지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우리들의 선배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 장성들은 누구나 다 자존심이 매우 강했고 또 중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日政시대에 사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해방된 후 한국경비대에 편입돼 한국 전쟁동안 승진한 장교들이 많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었다. 당신은 제 2차 세계대전(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함)에서 육군 '쫄병'이었다면, 한국에 나가면 장교가 됐을 것을, 그리고 해군사병으로 있었다면 한국에 나가서 해군참모장이 됐을 것을 왜 일본에 남아서 졸병이나 해군의 선원 노릇을 하고 있느냐고 비아냥대는 소리였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들은 우리 연락장교들이 해방 후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진학한 후 전쟁동안 연락장교로 복무하는 것을 보면서 열등감이 북받쳐 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를 보면 우쭐하고 무엇이든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는 것은 나도 경험한 바 있다. <계속>

 

 

미군 벙커 속에 잠들다 박격포탄 세례 받기도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11)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3
2012년 07월 28일 (토) 17:54:52 김일평 코넷티켓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우리 연락장교들은 6·25전쟁에 참전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국군에 희생적으로 공헌한 데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앞서 서술했듯, 우리는 6·25 전쟁 직전에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다가 한국전쟁이 발생했을 때 자원해서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후 연락장교로 임관된 장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한국군에 복무하는 인텔리(지식인)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과 장교들 중에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일본군에 사병으로 나가서 '대동아전쟁'(1941~1945)에 참전한 장교도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사병으로 징집됐다가 나라가 해방됐을 때 한국 국방경비대에 편입돼 장교가 되고 장군이 된 소박한 장성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전쟁 때문에 속성으로 진급의 진급을 거듭해 3개월 혹은 6개월마다 별 하나씩 달고 장성으로 승진한 장군도 있었다.

또 매년 진급해 별을 하나씩 달은 장군도 있다고 들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연락장교들을 대학을 졸업한 한국사회의 엘리트라고 보면서도, 열등감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학식이 부족한 자신을 위장해 보려고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장교로 임관된 것이 곧 대학을 졸업한 것과 동등한 학벌을 갖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교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오만불손한 행동을 하는 매우 무식한 장교도 있었다. (연재 9회분 참고) 미국 군인들이 쓴 한국전쟁에 대한 소설이나 학술서적에는 주로 미국군의 이야기가 많지만 한국군에 대한 코멘트도 더러 있다. 한국군 장성들이 너무나도 무식하고 훈련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내용들이 기록돼 있다.

전장에서 겪은 한미 장성들과 장교들의 경륜 차이

우리 연락장교들은 6·25 전쟁 당시의 미국군 장교와 한국군 장성들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한국군의 장성급 장교를 미국군 장교의 전쟁경험과 연륜으로 비교해 볼 때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 장군은 미국의 위관급 장교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언론인도 있었다. 지식과 기술뿐만 아니라 연륜이나 경륜에 있어서도 미군장교들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매우 열등한 장군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군 군단장(중장) 고문에는 미군 중령 내지 대령, 한국군 사단장 고문에는 미군 소령 정도의 연륜과 지식을 갖춘 이들이 배치됐을 정도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 한국군에도 4년제 육군사관학교(육사 제11기생부터)를 졸업한 한국 장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과 앞 세대 장교들의 교육수준은 천양지판이다. 한국의 육해공군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원에 진학해 전문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은 장교들이 한국 육해공군 사관학교에 배속돼 교관으로 교육에 참여한 이들이 많이 있다. 60년 전 6·25 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장교와 1990년대의 한국군 육사출신 장교들의 수준을 비교해 볼 때 그 수준은 천양지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군에 징집됐던 한국군 장교 혹은 일본 사병으로 복무한 군인들은 해방후 한국군 창설에 크게 공헌했다. 그 반면에 만주군 출신 중 급속도로 진급한 장교들 중에는 한국군 국방경비대 시절 장교가 되고, 한국전쟁 중 장군으로 급속 진급한 장군들 중에는 장군의 자격이 없는 장군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육군 제2군단 사령관을 역임한 유재흥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년제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창립에 크게 공헌했고 또 우리 통역장교들의 존경을 많이 받은 장군이었다.

한국 국방경비대가 1948년에 창설됐을 때부터 한국군 사령부에는 미군 고문단이 배치됐다. 다드 중령이 100부대 창립당시에 고문단장으로 임명됐다. 다드 중령은 벤플리트 장군이 그리스(희랍)에서 게릴라 토벌작전을 지휘 할 때 대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벤플리트 장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지리산 공비소탕전에서 또 한번 공훈을 세울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후 다드 중령은 벤플리트 대장의 추천으로 대령으로 승진했다.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은 그다지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공비토벌 작전은 4~5개월 이어졌다. 토벌작전을 끝낸 후 우리「육군100부대」는 제2군단 창설을 위해 1951년 3월 남원을 출발해 강원도 화천군 북방의 천전리(泉田里)로 이동했다.

미군 제9군단은 철원 후방에 있었다. 우리는 미군 9군단에서 군단의 조직과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백선엽(白善燁) 군단장을 비롯해 김점곤(金點坤) 참모장, 인사, 정보, 작전, 군수 참모 등 각 부처의 참모는 물론 副참모 등 50여명 이상의 제2군단요원들이 미군 제9군단사령부의 참모들과 요원들의 강의를 듣고, 군단참모들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미국참모들이 각 부처의 기능과 역할을 설명했는데, 이들이 영어로 강의를 하면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어로 통역을 했다. 한국군의 영관급 참모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듣고 회화는 더욱 어려워했기 때문에 동시통역이 필요했다.

연락장교들, 육군2군단 창설에 공헌하기도

그리고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육군 제2군단을 창설하는데 동참해 공훈도 많이 세웠다.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나는 한국군 제2군단에 복무했다. 이 시절의 경험은 우리 한국군대와 미국군대를 비교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미군 제9군단에서 미군 참모들이 각 부처의 역할을 영어로 설명하면 우리 연락장교는 그들의 강의 노트를 미리 받아서 밤새도록 번역하고 다음날 미군참모의 카운터 파트와 같이 한국어로 한국군 참모들에게 통역을 하곤 했다.

한국의 문필가들 중에는 외국어 작품번역이 창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또 창의력이 풍부해야만 훌륭한 번역작품이 나온다고 역설하는 작가도 있다. 다시 말하면 번역은 창작과 똑 같으니 창조적인 능력이 필요하며, 정신 차리고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작고한 리영희 교수(한양대)도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육군 소령에 진급하고 퇴역한 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의 교수로 재직했던 '연락장굑' 출신이다. 미군 제9군단 참모들의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한국군 제2군단은 강원도 화천 북방에 있는 천전리 소도고미에다 제2군단 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는 제2군단 정보처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적정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분석한 후 매일 아침 브리핑을 하는 정보처 (G-2)의 브리핑 장교로 복무했다.

우리 한국군 제2군단 산하부대인 6사단, 8사단, 수도사단 등 3개 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전방을 교대하기 시작했다. 우리 연락장교는 최전방에 배치돼 미군 중대본부에서 적정상황을 브리핑 받은 후 임무를 교대했다. 나는 미군 제45사단의 최전방의 중대장 벙커(참호)에서 하룻밤을 미국 중대장과 함께 지내면서 미군과 한국군의 교대를 도운 일이 있다. 미군 제45사단의 중대본부에는 대위가 참호 속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대장의 참호에서 함께 지낸 것이다. 마침 야전 침대가 있었기 때문에 잠은 잘 수 있었다. 나는 군복은 벗어놓고 내복만 입은 채로 침대에 들어갔다. 내가 잠이 들 무렵, 새로 배치될 중대의 중대장이 찾아와서 미군 중대장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리노이 주의 시골 고등학교 선생 출신들로 예비역 장교로 있다가 한국전쟁이 나서 소집명령을 받고 현역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전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와이담(섹스에 관한 일본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잠이 들까 말까 하던 중에 나는 귀를 기울이며 그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그렇게 얼마동안 두 중대장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느닷없이 적군이 쏜 포탄이 벙커 옆에서 폭발했다는 급전이 날아들었다.

최전방 벙커에서 한밤중에 포탄 공격 받아

두 미군 중대장은 기겁을 하고 전투모를 뒤집어쓰고 뛰쳐나가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중대의 모든 대원은 완전 무장을 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나도 일어나서 전투복을 입고 전투 준비를 했다. 다행히 북쪽의 박격포 포격은 잠시 뒤 멈췄다. 다시 조용한 밤이 됐다. 그리고 미군 대위는 옆의 침대에서 자고 나는 다른 야전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미군들이 먹는 C레이션으로 벙커 속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또 물을 끓이고 봉투에 든 가루 커피도 타 마셨다. 한국군 중대가 미군 중대를 교체한 후, 한국군 중대장이 미군 중대장의 참호(벙커)에서 임무 교대해 지휘하는 것을 지켜 본 뒤, 나는 다시 제2군단 본부로 돌아 왔다. 이것이 내가 휴전협정 직전에 최전방에서 겪은 아슬아슬한 전쟁 경험의 하나라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남북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이 대구의 낙동강 전선까지 처내려왔지만, 미군과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해 38선 이북까지 진격하는 전세의 변동이 이어졌다. 1950년 가을 국군과 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평북 초산까지 전진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1951년 10월 중공군(중국에서는 중국인민의용군이라고 함)이 개입해 한국군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강원도 원주까지 점령했다. 내가 살던 원주는 잿더미로 변했다.

한국동란때 피난가지 못하고 원주에 남아서 원주에 진격한 중공군을 보고 또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미군(UN군)이 원주에 들어온 것을 볼 수 있었다는, 전쟁의 참상을 진술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원주에서 치른 전쟁 경험을 책으로 낸 콜먼 중사는 미군 187 연대에 소속돼 있었으며 미군이 원주에서 중공군에 공격당한 경험을 『원주(Wonju: 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by J. D. Coleman, 2003)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한국전쟁에 관한 미국학자와 지식층의 역사적 인식에 관한 책으로는『한국전쟁에 관한 미국의 인식』을 참조하기 바란다.

나는 대구에서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하고 군사훈련을 마친 후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지리산 공비소탕 전투 사령부에 배치돼 군수참모실에서 복무했다. 이후 100부대에 배속돼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저수지 북방의 소도고미에 주둔했을 때 나는 100부대의 정보처 (G-2)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적정상황을 분석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조회후 브리핑을 담당했다. 6·25 전쟁 중 매일 아침 조회에는 브리핑 시간이 따로 있었다. 나는 조회시간 한시간 전에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정보처 상황실에 가서 정보처의 야간근무 장교와 상의한 후 그날 군단조회 때 적정상황을 보고 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미군의 고문당장을 비롯해 각 부처에 배속된 미군 고문단도 다 함께 조회 브리핑에 참석한다. 우리 정보처(G-2)의 미군고문은 윌리엄 이너스(William F. Enos) 소령이 고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미군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이다. 미군장교들 사이에서도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는 엘리트라고 존경받는다. 6·25 전쟁 당시 한국에 파견된 미군 장교들의 대부분은 예비역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엘리트 장교로 명성이 매우 높았던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도 대거 참전했다. <계속>

 

 

미군 야전천막 얻어다 군인교회 만들어 … 삶을 바꾼 기회들
김일평 교수 회고록(12)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4
2012년 08월 25일 (토) 16:40:18 김일평 코넷티켓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한국군의 군목제도

6·25전쟁 당시 한국군에는 군목제도가 새로 생겨서 박 목사가 1952년 육군본부 군목실의 파견을 받았다. 박 목사님은 군복차림으로 십자가를 목에 걸고(그 당시 군목제도가 시작 될 때는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 육군 제2군단 본부에 부임했다. 박 목사님은 군단본부의 인사과에 가서 우선 장교들 중 기독교신자를 찾았다. 인사과의 최 대위, 정보처의 김일평 중위, 방첩대 포로심문반의 김철우 중위(중국어 통역장교, 후에 서울 영락교회 장로 역임) 등을 찾아서 연락을 했다.

나는 박 목사님의 연락을 받고 만나기로 했다. 우선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천막 교회가 필요했는데 전방에서는 야전 천막을 구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 몇 사람은 박 목사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천막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천막교회 위에는 십자가를 세우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천막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소속돼 있는 정보처의 참모 육근수 중령에게 말해 정보처에 배속된 지프차를 하나 빌려서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 군단본부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군 공병대를 찾아갔다.

미군 공병대는 미9군단 산하에 있는 부대이다. 미군 공병대에는 미국군목이 미9군단 군목실에서 파견돼 있었는데 피터 홈스(Peter N. Holmes) 목사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홈스 군목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나와 박 목사님을 맞이했다. 그는 자기가 공병대 대대장에게 부탁해 야전 천막을 하나 보급 받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약속대 야전 천막을 쓰리 코터(중형 트럭)에 실어서 우리 군단본부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야전 천막 교회를 세운 뒤 박 목사님이 설교할 수 있는 강단도 만들어 주었다. 또 교인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간이식 의자도 만들었다. 간이식 의자는 송판 밑에 다리를 달고 땅에 박은 것이었다. 그런대로 땅바닥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송판의자에라도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편리했다.

박 목사님의 거처는 교회천막 뒤쪽에 칸을 막고 접이식 침대를 하나 넣어 만들었다. 땅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미군이 사용하는 커트 침대에서 자는 게 그나마 모양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은 천막 안에서 혼자 쓸쓸하게 있는 것은 너무 외롭고 적적하니 나보고 그곳에 와서 함께 지나며 예배드리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 정보처 장교들의 숙소에서 합숙을 하고 있으니 한번 물어보고 오겠다고 대답했다. 정보처의 부참모인 최재방 소령과 상의했더니 목사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박 목사님과 함께 천막교회에 칸막이를 하고 야전침대를 두 개 넣고 그곳에서 자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자연 박 목사님의 신상에 대하여서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은 평양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서 장로교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이 해방되기 직전이라고 하니 박 목사는 50세 가까이 되신 분이다. 그리고 해방 후에 북한에서 목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월남했다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월남했는지 아니면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이 평양에 입성했을 무렵 남하했는지는 확실하게 이야기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과 가깝게 지냈다.

군인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10명 내지 20여명의 군인 신자들이 군인교회에 예배드리러 왔다. 장교도 있었지만 사병들이 더 많았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있는 한 대위가 매우 적극적으로 예배에 나왔다. 그는 전주에서 장로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목사님을 많이 도왔다. 이렇게 해서 육군 제2군단 군인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장교식당에 가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우리는 교회부근의 야외에 나가서 찬송가도 부르면서 야외예배를 종종 드렸다.

어느 날 박 목사님은 최 대위, 김철우 중위, 그리고 나를 군인교회의 장로로 안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1952년 가을 어느 주일날 아침예배를 드릴 때 우리 세 사람은 육군 제2군단 군인교회의 장로안수를 받았다. 우리가 장로 안수를 받은 날 점심식사 후에는 야외예배를 드렸다. 감사기도는 내가 인도했다. 다음 사진은 우리가 야외 예배를 드릴 때 찍은 60년 전의 사진이다. 그리고 군인교회 앞에서 박 목사님과 필자가 함께 찍은 사진(1952년 강원도 화천군 천정리 제2군단 사령부 군인교회 천막 앞에서)은 비록 색이 바래긴 했지만, 내겐 그 시절을 증거 하는 뜻 깊은 자료다.

   
  필자와 박 목사님(오른쪽). 장로안수를 받고 천막으로 된 군인교회 앞에서  
 

나는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국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고 또 원주감리교회의 주일학교에도 다녔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연락장교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나의 군 복무 기간은 매우 짧은 3년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은 나의 일생을 통해서 기억에 간직하고 싶은 매우 귀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뒷줄 왼편부터 김일평 중위, 박 목사님, 김철우 중위, 최 대위, 앞줄의 김 상사와 이 문관. 장로 안수를 받은 후 야외예배. 1952년 가을 강원도 화천 육군 제2군단 본부에서 찍은 사진  
 

나는 3년간 연락장교로 복무할 때 한국주둔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의 통역을 할 수 있는기회도 얻었으며, 또 나의 미국유학을 주선해 준 종군목사 피터 홈스(Peter N. Holmes) 소령을 만나서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결정적인 삶의 기회를 만날 수 있었다. 6·25전쟁이 시작된 직후 미군 8군사령부에서 잠시 민간인 통역관으로 근무한 후 제7기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하고 한국군 제100부대(제2군단)에 파견을 받고 나의 육군복무는 시작됐다. 우리 100부대는 지리산 야전사령부의 토벌작전을 끝마치고 제2군단으로 개편됐다. 우리가 전방의 철원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제9군단에서 훈련을 받고 한국군 제2군단을 창립했을 때, 나는 미군 제9군단 군목으로 있는 피터 홈스 (Peter N. Holmes)를 만날 수 있게 됐다.

피터 홈스 소령은 내가 미국유학의 장학금(Full Scholarship)을 받아 도미유학을 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은인이다. 따라서 나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캔터키 주에 있는 애스베리 칼리지(201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로 종합대학교로 승격)에서 4년간 학비 전액을 장학금(Full Scholarship)으로 받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 때문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했는데 홈스 군목 덕택으로 미국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으니, 홈스 군목의 厚意에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 계속>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은 매주 수요일 업데이트됩니다.

 

 

김웅수 장군과 미 육군 동성 훈장 받게 된 사연
김일평 교수 회고록(14)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6
2012년 09월 06일 (목) 14:10:01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나의 육군중위 시절 제2군단에서 1953년에 미국 銅星 무공훈장을 받을 때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육군 제2군단에 金雄洙 장군이 참모장으로 새로 부임해 왔다. 나는 정보처(G-2)의 브리핑 장교로서 새벽 6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구두도 반짝 반짝 하게 닦고, 단정한 장교복 차림으로 군단본부의 상황실로 나갔다. 그리고 미국 군사고문단을 위해 영어로 브리핑을 매우 유창하게 했다(그와 같은 나의 단정한 모습을 지켜본 김웅수 장군은 4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어느 만찬회에서 재일동포 최서면 한국학연구원장에게 나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 말한 바 있다고 최 원장이 귀띔해주었다). 우리 제2군단 본부에는 한국 육사 8기생 31명이 배속돼 함께 근무했다(<중앙일보>에 연재한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의 ‘지리산의 숨은 적들’[151회]에도 한국 육사 8기생 31명이 남원의 100부대 전투사령부에 배치됐다고 기술돼 있다). 그중 4~5명은 화천의 제2군단 정보처에 나와 함께 근무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석정선 대위였다. 그는 훗날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창설된 중앙정보부(KCIA)의 김종필 부장의 차장으로 임명돼 활약했다는 신문 기사를 미국에서 읽은 바 있다.

   
 

사진 1.육군 제2군단 작전상황실 앞에서 정보참모와 함께. 왼쪽이 필자

 
 
한국군 제2군단 정보처에 복무할 당시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작전상황실에 나가서 지난 24시간 동안 전선에서 일어난 모든 정보 상황을 한 시간 동안 지도를 펴놓고 파악했다. 그리고 오전 8시에는 군단장 이하 각 부처의 참모들 그리고 군단본부의 모든 장교들과 미군 고문단이 참석하는 상황실에서 조회를 하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G-1(인사처)부터 시작해 G-2(정보처), G-3(작전처), G-4(군수처)에 이르기까지 브리핑을 하는데 미군 고문단의 참모장교들 20여 명이 배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로 통역도 함께 했다. 나는 제일 먼저 북한과 중공군의 정보상황을 보고하고, 미국 고문단과 한국군 참모들의 집중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작전처와 군수처 브리핑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과였다.

육군 2군단에 새로 부임한 김웅수 참모장은 매우 우수한 장군으로서 실력이 있는 智將이었다. 그는 일본 국주의 시대 말기에 일본 교토[京都] 제국대학에 재학하다가 일본군 학병으로 선발된 후 만주에 파병됐다. 그리고 만주에서 조국의 광복 즉 해방을 맞이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1952년 한국군 제2군단 참모장으로 부임한 후 1년 후에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하나 달았다. 그 분은 우리 연락장교들을 인텔리 장교(지식인)라고 생각하며 각별한 호감으로 대해주었다. 또 여러 가지로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연락장교들은 김웅수 장군을 매우 우수하고 실력 있는 지장이라고 생각하며 존경했다.

金雄洙 장군은 누구인가

김웅수 장군은 한국육군의 강영훈 장군, 장도영 장군과 함께 한국군의 智將 즉 지혜가 많은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강영훈 장군은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직후 옥고를 치르고 난후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워싱턴에 와서 ‘한국문제 연구소(Research Institutor Korean Affairs)’를 설립하고 <한국문제 저널(Journal of Korean Affairs)>을 영문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강 장군은 미국의 여러 한국인 학자를 동원해서 한국문제연구소의 자문역할과 학술지의 편집고문(Advisory Board)를 조직했다. 나는 강 장군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편집고문과 논문 집필에 참여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와 학술지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었고 또 박정희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의 참여를 적극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정권의 홍보용 연구소와 어용 학술지가 되는 것을 막고 중도적이고 객관적으로 운용되는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일역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에 나의 학술 논문도 기고하면서 적극 참여 했다. 강영훈 장군은 매우 객관적으로 연구소를 운영했으며 또 도 매우 객관적인 논문을 실었다. 물론 몇 명의 한국문제 전문가와 학자들이 참여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 반면에 강영훈 장군의 처남이며 동시에 한국의 육군 장성으로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쿠데타)에 참가하지 않았던 김웅수 장군은 쿠데타 이후 몇 달간 옥중생활을 한 후 미국 서부의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 와서 경제학을 전공해 학부(B.A.)와 석사학위(M.A.)를 끝마쳤다. 이어 워싱턴 D. C.에 있는 카토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Ph. D.) 학위를 받고 워싱턴의 모교인 카토릭 대학에서 20여 년간 경제학 교수로 70세까지 교수생활을 하다가 퇴임했다고 최근에 출판된 회고록에 기록했다.

   
 

사진 2. 김웅수 장군의 『회고록-송화강에서 포토막강까지』표지에 나오는 군복차림의 준장 사진은 육군 제2군단에서 준장으로 진급하고 제2사단장으로 떠날 때 찍은 사진이다.

 
 

金雄洙 장군은 우리 연락장교들이 韓美 간의 공조와 협력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文官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1953년 한국군 제2군단에 복무하고 있을 때 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미국 銅星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제2군단의 몇 명의 장교들과 함께 추천해 주셨다. 우리가 근무하고 있었던 한국군 제2군단에는 육사 8기생들이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함께 근무했다. 6·25 전쟁이 나기 직전에 5~6개월간의 훈련도 받지 못했을 때 한국전쟁이 나서 임관된 장교들이 육사 8기생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확장됨으로써 많은 수의 초급장교가 필요했던 시절이라, 사병에서 현지 임관된 8기생도 있었다. 양적으로는 많은 수의 8기생(1천200명이 넘었다고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 기록했다)들이 초급장교로 임관됐으나, 우리와 함께 복무하는 미군 위관급 장교들과 비교해 보면 질적으로는 떨어졌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 연락장교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열등감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볼 때가 많았다. 연락장교들은 6년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다가 6·25 전쟁이 나서 육군에 복무하게 됐던 이들이다. 그러나 육사 8기생 1천200명 중에는 대학교 문턱에 들어가 본 사람은 일제시대에 10여명 내외에 불과했다고 들었다. 6·25 전쟁이 발발해 현지 임관된 장교들 중 대부분은 육사 8기생으로서 훈련 도중에 장교로 임관 됐다는 것이다. 한국 육사 8기생들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는 육사 8기생들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정부 요직에 등용됐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의 차장을 역임한 석정선 대위는 육군 제 2군단 정보처에서 우리와 함께 근무한 8기생이다. 육사 8기생 중의 한 명인 최 아무개 대위는 연락장교인 김일평 중위가 미국 동성훈장을 받는 데 대해 시기심을 나타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유재흥 군단장과 김웅수 참모장은 “미군고문단이 김일평 중위의 업적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추천했으며, 또 한국측 참모들도 협조해서 추천한 것이며, 다른 분야의 장교들도 많이 동조하고 추천해서 동성훈장을 받게 됐다”라고 내가 동성훈장을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불만을 조용히 무마시켰다.

6·25 전쟁이 발생하기 직전의 한국 국방경비대는, 미국의 군사원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한국방위를 담당할 국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 장교를 대량으로 양성할 계획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따라서 육군 경비사관학교 후보생과 육군간부 후보생들을 많이 증집해 단기 군사훈련을 마친 뒤 후 초급장교로 임관했기 때문에 8기생들을 훈련시키고 교육 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육군사관학교 8기생부터는 모집인원을 대량으로 증가해 8기생은 1천200명이 넘는 간부호보생을 뽑게 된 것이다. 따라서 8기생은 한국전쟁 중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우리 제2군단 정보처 (G-2)에도 5~6명의 8기생이 배속돼 왔던 것이다.

전쟁중 현지임관된 육사 8기생들

그러나 8기생들은 양적으로는 많은 수가 임관 됐지만, 질적으로는 매우 약세였다. 그들은 위관급 중위와 대위 계급에 걸맞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학식과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것은 6·25 전쟁 때문에 사관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속성으로 임관돼 1년에 진급을 거듭해 중위와 대위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 능력은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육사에서 5~6개월 교육받았다는 8기생들 중에는 속성으로 중위와 대위가 된 장교도 있었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병출신이 현지 임관으로 소위와 중위가 된 사례들이 있었다. 우리가 연락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을 때 우리 7기생을 매우 혹독하게 훈련시킨 신 중위는 사병출신 장교였다. 그는 아무런 일자리를 찾지 못해 낭인으로 방황하다가 육군 사병모집에 지원해서 사병으로 5~6개월 복무한 후 6·25 전쟁을 맞았다. 그는 큰 공훈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현지임관된 장교라고 자랑하곤 했다. 한국 국방경비대 시절의 한국군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진 3. 한국육군 면관증명서와 서울 중부경찰서장의 신원보증서가 여권수속에 필요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부터의 한국장교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미국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와 똑같이 4년간의 대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육사 11기생 이후의 한국군 장교는 미국장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매우 훌륭한 장교들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군복무를 끝마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한국육사 제11기생들과 함께 복무할 기회는 없었다. 육사 11기생으로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된 다음 진급을 거듭한 후 1960년대에 미국에 유학 온 육사출신 장교 여러 명을 만나 본 일이 있다. 때문에 나는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의 한국군의 여러 가지 변화를 그들로부터 들은 바 있으며 또 내 눈으로 직접 관찰도 했다. 후에 기록하겠지만 1990년대 한국에 학술회의 때문에 나가면 학술회의를 마친 후 육사 골프장에서 골프를 함께 치면서 육사 11기생들의 육사교육 과정과 훈련 내용을 엿볼 수 있었으며 또 관찰 할 수도 있었다.

나는 1953년 육군장교로 3년간의 일선 복무를 끝마치고 명예 제대를 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수의 육군장교 출신 유학생이 됐다. 미 육군 銅星 훈장을 받은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해서 국방부의 수속은 쉽게 잘 진행됐다. 문교부의 역사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외무부의 영어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외무부의 영어 시험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내 기억에는 아직도 남아있다.

참고삼아 부연한다면, 6·25 전쟁 (1950~1953) 당시에 미국 군인의 전사자(KIA)는 3천300명이고, 부상자는 10만3천명이라고 미국의 한국전쟁 역사책에는 기록돼 있다. <계속>

 

출처: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644[교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