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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밝혀준 등불 … 인생의 초석을 다지다 | ||||||||||||||||||||||||||||||||||||||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4) 영어공부반의 재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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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어드 선교사는 1948년 겨울방학 동안 기독교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원주시내의 고등학생들을 위해 영어 회화 반을 열었다. 그것은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이 '羅 선생'에게 겨울 방학동안 영어 회화를 가르치도록 설득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영어회화 선생님이 됐던 것이다. 이 인연은 내가 나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엄청난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반은 20여명의 학생이 모여서 시작했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뒤 학생 수는 7~8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 당시 '羅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운 우리 영어반에는 훗날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조성규 박사,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거쳐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UNESCO) 본부 교육담당 전문가가 된 원창훈 선생,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사회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10년간 가르친 후 다시 보스턴대로 돌아와서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정재식 박사,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된 이상훈 박사,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사회사업박사를 받고 세계아동복지기구(UNICEF) 에서 봉사한 후 경남 김해의 인제대 총장이 된 이윤구 박사, 앨라바마 주립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코네티컷州에 있는 사립대학 브리지포트 대(Bridgeport University)의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최규언 박사 등이 있었다. 또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에는 대한교육총연합회(교총) 사무총장을 역임한 후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하신 정태시 박사,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은 후 뉴저지주립대, 럿트거스대(Rutgers State University)의 교수를 거쳐 美 교육부의 국장급 간부로 봉사한 송동수 박사, 뉴욕 총영사관의 3대 총영사로 있다가 에티오피아 대사와 스페인 대사를 역임한 장재용 선생, 그리고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교수를 역임한 김기순 선생 등이 있었다. 레어드 선생의 한국봉사 50여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기『기독교의 여인- 미스 레어드 (Miss Esther Laird, A Christian Lady)』(2000)에 수록된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한 정태시 박사의 헌시는 레어드 선생의 한 평생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114번지 '원주 제일감리교회' 앞뜰에 세운 '미스 레어드를 위한 기념비'에는 "1983년 추수감사절에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님을 사랑한 친우 일동"이라고 쓰여 있다. 필자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것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나애시덕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작은 마음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주의 한 친구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나 선생님의 기념비는 나 선생님이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깊은 사랑의 표시다. 레어드 선생의 기념비 뒷면에는 1946년 강원도 원주의 나 선생님 댁에서 영어회화를 배운 정태시 박사, 신숙철 여사, 장재용 선생 내외, 김기순 선생,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 영어회화반의 조성규 박사와 홍순범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1926년 이 땅에 오신 나 선생님을 기림 젖 없는 아이 찾아서 밤새며 키우시고 깊은 병 앓는 이들 몸소 간호하셨고 길 잃은 젊은이들 꿈도 펴게 하시고 고달픈 이 쉴 집도 여럿 세우셨으니 크고도 따뜻하였어라 당신의 손길 당신
스스로는 병도 나이도 잊으신 채 한결같이 일에만 열중 하시더니 아아, 이 곳 다시 못 오시고 끝내 가셨고녀 주님의 십자가를 늘 지신 당신의 뜻 사랑의 밀알 되어 이 땅을 채우리라. -정태시, 「헌시」
레어드 선생과 까까머리 우리 고등학생의 인연은 매우 작은 것이었지만, 우리들은'羅 선생'을 통해 해방직후부터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후 매우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에서 우리 청소년이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하겠다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레어드 선생의 영어교육 덕택이었다. 나는 1947년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8년 겨울 방학동안 레어드 선생은 원주 기독교사회관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셨다. 우리 영어회화 반에서는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에서 뽑은 이야기(Tales from the Shakespeares, by Charles Lamb)』를 교재로 사용했다. 그것은 레어드 선생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이 결정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영어 교과서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그 교재를 매일 한 장씩 읽고 오전 8시에 영어회화를 시작했다. 그 책을 우리의 교재로 선택한 것은 해방 직후 유행처럼 많이 사용되고 있는 책이기도 했지만, 한국학생들은 셰익스피어를 읽어야만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羅 선생은 "고전을 무조건 외우는 식의 공부는 영어 회화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어려운 책을 외우기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영어 단어를 많이 기억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은 집에서 읽기로 하고, 질문할 내용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이 있으면 회화반에서 영어로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실용적인 회화반으로 바꾸었다. 羅 선생님은 미국의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미국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 교과서를 구해서 우리 영어회화의 교재로 사용했다. 미국의 고등하교에서 사용하는 텍스트를 매일 한 장씩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머리 속에 요약해 두었다가 다음 날 회화반에서 회화체로 바꾸어서 그 내용을 자신의 영어로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요사이 말 하는 이른바 회화식 잉글리쉬(Conversational English)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에 대한 전기는 두 종이 출판되었다. 하나는 『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인데 최종수 목사가 저술하고, 한국기독교연구소가 2000년에 출판했다. 영어로는 Life and Works of Ester J. Laird(by Rev. Asbury Jongsoo Choe, D. Min., Korean Institute of the Christian Studies, 2000)이다. 그리고 또 한 권은 『그리스도인의 여인- 미스 에스터 레어드(Miss Esther Laird, A Christlike Lady)』이다. 전자는 좀 더 학술적인 책이고 후자는 대전 기독교종합 사회복지관 48년 역사로 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대전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의 48년의 역사이다. 해방된 한국에는 1945년부터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도했다.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와 장로교(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합하여) 선교사만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수십 개의 종파와 다른 종교를 합하여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각각 여러 종파를 대표하여 한국에 선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는 수십 개 종파가 공존하며 선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에는 서양의 천주교가 조선조 말인 1860년대에 들어와서 일찍 선교 사업을 시작했고, 이어 1903년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들어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연희전문학교 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또 세브란스병원 같은 현대적인 병원을 설립한 것이 기독교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우리 한국의 영어교육이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는 소식을 최근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나 60여년 전 우리가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 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 단어 몇 마디를 사용해 대화 즉 컨버세이션(Conversarion)을 나누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羅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실용영어는 우리 각자의 일생에 매우 긴요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중위로 임관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 주신 영어회화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나 선생님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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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레어드의 영어수업 … 고전보다 실용 강조 |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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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에는 일본 통치시대인 1926년부터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교사가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일제는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선교사를 모두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선교사도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원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사회봉사회관을 회수하고 수리해 기독교선교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羅愛施德 선생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다.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도 능률 있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연재 앞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1 947년 레어드 선교사는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은 물론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은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도 운용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 반을 시작해 영어회화를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작은 인연이었지만, 이것이 훗날 내 인생의 길목을 안내한 동력이 됐으니, 대단한 인연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우리 고등학교 영어선생님 가운데 송동수 선생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서울 상업전문학교(해방 후에는 서울대 상과대학)를 다녔던 인텔리다. 송동수 선생은 일본군의 징집명령을 받고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해 태평양전쟁(1941~1945)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렇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1945년에 해방된 한국에 돌아왔다.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부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자기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로 돌아가는 기차에 승차했다. 기차간에서 미국병사를 몇 사람 만났다. 그 병사는 영어로 “두 유 해부 어 잽 후래그” (Do you have a Japanese flag?)라고 물었다. 송 선생은 미군병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상업전문학교에서 일본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니…… 한탄과 자괴심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이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영어를 극복할 필요를 느꼈다. 영어회화를 좀 더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원주 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을 자원했다는 에피소드다. 송 선생님은 친척이 살고 있는 원주에 와서 원주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송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운 기억이 있다. 레어드 선교사는1948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원주 기독교사회봉사회관에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을 위한 영어 회화반 (클라스)을 설치하고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 했다.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면서 실용적인 영어회화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낀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레어드 선교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미국선교사가 우수한 고등학생들에게도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한국인 선생들이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레어드 선교사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 결실로 1948년 겨울방학부터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은 영어회화반을 조직하고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20~30명이 참석해 배우기 시작했으나 2주일 후에는 7~8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영어회화가 배우기 힘들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은 일본교육의 영향으로 고전을 읽고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만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미국의 교육은 그와 정반대로 실용적인 영어를 공부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를 배우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의 기본용어를 배워야 미국사람들과 회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회화는 미국사회의 문화와 생활습관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선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부터 많이 배우고 그와 같은 단어를 매일 사용해 생활화 할 수 있다면 영어공부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해방 직후 이른바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인텔리들은 어려운 한문과 고전영어를 쓰는 사람, 고전적인 셰익스피어식 영어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진짜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인텔리들로부터 받은 영향이기도 했다. 해방직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美軍이나 또 일반 미국사람을 만나게 되면 셰익스피어의 어려운 고전영어를 인용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방인 미국사람은 한국 지성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인과 한국 신사 사이의 대화는 이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은 미국사람들은 무식하다고 속단하고 대화를 계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대화가 끊겨 버린다. 우리가 북한과 미국사이의 대화나 협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로 '동문서답' 식의 그 모습과 똑 같은 현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영어의 고전인 Tales from Shakespeare 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우리는 그 책을 텍스트로 채택했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레어드 선교사는 그 책은 집에서 읽어보고 질문이 있으면 회화 반에 와서 현대영어로 질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읽은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영어회화를 습관화 할 수 있는 묘법이라고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영어회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즉 텍스트 북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중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구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레어드 선생은 미국친지에게 연락해 교재들을 구해 주었다. 미국고등학교 교과서를 매일 한 장(Chapter)씩 읽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요약하는 것으로 회화 수업이 진행됐다. 영어문장을 암기해서 영작문을 짓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레어드 선생은 암기식 영어회화 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는 것이 영어를 배우는 첫발을 딛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미국의 생활습관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어회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영어를 배우는데 기초단계는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의 영어교육은 장족의 발전이라할까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60여 년 전 우리가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단어를 몇 마디 사용해 회화연습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8·15 해방 후 우리가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배운 영어회화는 우리 일생에 참으로 중요한 도구가 됐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육군 장교로 임관 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준 영어회화 덕택이다. 그리고 또 미국유학시험을 볼 때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 질문하는 영어회화 테스트에도 무난히 합격해서 미국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의 새로운 영어교육과 희생적인 노력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어드 선생은 영어회화를 가르치면서 그 어떤 보상도 보수도 받지 않았다. 그런 보수는 일체 없었다. 영어교육도 기독교 선교사업의 봉사정신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계속> |
우연하게 '육군연락장교' 시험… 3개월 훈련 받고 전방 배치 |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7) 한국전쟁과 연락장교시절-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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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중 나는 대구에 피난 와 미 제8군 사령부에서 민간인 군속(Civilian Employee)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앞에서 말했다. 나는 휴일이 되면 대구 시내에 종종 나갈 수 있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육군본부 앞을 지나가다 눈길이 자연스레 게시판을 향했다. 그야말로 무심하게 바라봤을 뿐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운명을 다시한번 바꿔놓을 줄은 그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육군본부 게시판에는 연락장교 제 7기생을 모집한다는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으며, 영어회화에 능통한 대학생이나 20세 이상의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날 나는 연락장교 지원서를 받아 갖고 대봉동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 육군연락장교 시험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열기와는 달리 길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대학 재학 증명서와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갖춰야 하는데, 어떻게 대구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대학 대구분교에 문의 했더니 우선 등록금을 지불하고 등록을 해야만 재학증명서를 하나 떼어줄 수 있다는 회답이 왔다. 그리고 경찰서의 신원보증서도 함께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대학증명서는 학생 신분증을 복사해서 대체하고 대구 달성경찰서의 신원보증서는 대구의 동료친구에게 부탁해 형사를 만나서 인터뷰한 후에 가까스로 만들 수 있었다. 레어드 선교사가 원주에서 해방 후 1940년대에 가르친 영어회화 공부 덕분에 나는 6·25전쟁 당시 제7기 연락장교 후보생 선발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연락장교 선발에는 영어회화 시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와 영문 번역 시험도 포함돼 있었다. 영어회화 능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영어책도 읽고서 영미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말로 잘 번역할 수 있는지 등 어학 능력을 종합적으로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도 잘 쓰고 표현력도 갖춰야만 한다는 방침이었던 듯하다. 사실 번역과 동시통역은 매우 힘든 어학분야로 전문적인 직업에 속한다.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한 우리는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은 후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할 수 있었다. 우리 7기생은 대구의 보충대대 본부에서 3개월간의 훈련을 받았다. 대구보충대대 본부 안에는 야전 천막을 치고 미군이 사용하는 야전침대 (영어로는 캇트라고 함)를 두 줄로 18개를 펴고 잤다. 내가 야전 천막생활을 해 본 것은 6·25 전쟁이 나기전인 1948년에 진해 해군 사관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 훈련을 받을 때 처음 경험했으니 두 번째였던 셈이다. 새벽 7시에 기상해 30분 이내에 세수하고 야전군복으로 갈아입고 연병장에 나가서 새벽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천막으로 된 군인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한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식기에 밥 한 그릇, 배추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 한 공기를 트레이에 올려놓고 숟갈과 젓가락을 들고 식탁에 가서 식사를 한다. 이와 같은 한국식 식사생활은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최전방에서도 3년간 더 계속됐다. 훈련은 매우 힘들었고 또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1948년 전국의 각 고등학교에서 2명씩 선발해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훈련을 받을 때 이미 기초훈련을 겪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난 후 나는 미 제8군 사령부에 근무할 때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몸이 상당히 무거워져 있었다. 녹이 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군사훈련을 무난하게 잘 해 낼 수 있었다. 원주 판부면 단계리에 살면서 원주농고를 다닐 때 나는 매일 매일을 3시간 이상을 걸어서 통학했기 때문에 근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됐던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자란 동료 훈련생들은 거센 군사훈련을 참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아우성들이었다. 육군 장교 후보생의 훈련은 강도도 매우 높아서 체력적으로 견뎌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는 이 훈련이 실제 전투에서 겪게 될 갖가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치밀한 인내심을 길러 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아침저녁으로 추운 11월에 맨발로 물속에 뛰어들었던 고통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에는 인내심이 강해서 참을 수가 있었지만, 기초훈련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38선을 넘어 북한강 이북에 있는 제 2군단 본부에 배치돼 전방근무를 할 때 왜 그와 같이 힘든 군사훈련을 거쳐야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3개월의 보병장교 훈련을 무난히 끝마치고 우리 육군 연락장교 7기생은 각기 여러 부처로 배속됐다. 육군본부에 배속된 동료도 있었고, 또 육군대학에 근무하게 된 3 명의 동료도 있었다. 그리나 대부분의 우리 7기생은 지리산 공비토벌을 하기 위해 새로 창립된 제100부대 (후에 육군 제 2군단으로 재편됨)로 배치됐다. <계속> |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9)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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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락장교 7기생의 대부분은 임관 직후 육군 「제 100부대」에 배속 받았다. 육군 제1군단장이었던 白善燁 장군이 사령관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야전 전투사령부'를 100부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백장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내가 겪은 6·25전쟁과 한국군」에 의하면 6·25 전쟁 이전에 한국군 제2군단이 창설돼 있었는데 6·25 전쟁의 와중에서 거의 해체되다시피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제1군단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3군단을 새로 조직하기 전에 제2군단을 다시 창설하고 제2군단장으로 역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194-197)은 <중앙일보> 2010년 10월 18일 부터 27일에 연재된 내용인데, 이 내용에 거론된 시기는 내가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6·25전쟁에 참여해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할 때 참여한 나의 경험과 똑 같은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배속된 '100부대'는 대구를 출발해 대전에 도착했다. 자동차길 2km 정도는 지프차와 스리코터, 트럭에 실려 갔다. 대전에서는 기차 편으로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역에 내렸을 때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철도역 직원이 지리산 토벌에 참전하는 우리 장교들을 겁에 질리게끔 말을 했다. 그 사내는 "전주와 남원부근에는 빨치산들이 아직도 우글우글해서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고, 낮에는 대한민국의 세상이 된다.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니 당신들 주의하시라"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전주 북중학교(전주고등학교의 전신) 校舍의 교실에 짐을 풀고 5~6일 밤을 지낸 뒤 남원으로 떠났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100부대는 남원국민학교 校舍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남원은 우리나라의 고전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가 나온 곳이 아니었던가? 나는 기억해 보았다(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 회고록(190), <중앙일보>, 2010.10.11. 참조). 1951년에 릿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일본 동경의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후임으로 떠난 후 그의 후임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가 바로 제임스 벤플리트 장군이다.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파면하고 퇴역 조치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후 그의 기세가 등등함에 따라 미군부대를 38선을 넘어서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이 약세에 몰리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주저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이 북한군을 추적하는 작전을 38선으로 제한하고, 6·25전쟁 이전의 영토에 한해서만 원상회복하는 범위에서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트루먼 대통령과 안보담당 보좌관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반면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트루먼 정부의 한국전쟁 전략은 전쟁을 국지전(Limited War)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생겨도 미군은 중공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한이 있을지라도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고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무력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전략을 주장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악관 안보담당 참모들은 한국전쟁에서 중공이나 쏘련이 북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전에 개입하게 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을 확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과의 전략적 견해 차이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제한된 전쟁 (Limited War)'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하극상의 죄목을 씌워 파면했다(6·25전쟁 중 트루먼-맥아더 사이의 의견 차이와 논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1951년 미공군 전투기로 하여금 중국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으로 발생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공군 전투기가 중국본토를 포격하게 되면 중공의 맹방인 소련이 참전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기 위해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해임한 것이다(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d the Korean War by John W. Spanier, 1965). 나는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디애나 대학(Indiana University) 에서 국제정치개론을 학부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반드시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논쟁을 강의했다. 국제정치 개론 교과서에도 깊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8일 서울이 수복되고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北進할 당시 미 육군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방을 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매듀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해 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돼 동경으로 떠나게 됐다.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왜 해임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증가했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됐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군 총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하극상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전쟁을 확대해 중공과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입장과, 그 반면에 한국전쟁을 확대하고 중공군과 전쟁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라며 반대하는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 그리고 이러한 팽팽한 두 입장간의 견해 충돌과 논쟁은 미국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 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by David Halberstam, 2007 참조). 그러나 논쟁은 상당히 장기간 계속됐다. 내가 1957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대학원 강의에 등록했을 때 리처드 뉴스태트 (Richard Newstadt) 교수의 '대통령의 권력' (Presidential Power)라는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트루먼-맥아더 논쟁을 케이스 스터디로 매우 심도 있게 다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육군본부에 가서 임명장을 받고 지리산의 100부대 전투 사령부에 배속을 받았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한국육군 100 부대는 남원국민학교 교사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서 먹고 잤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軍과 나』라는 6·25전쟁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원의 야전전투사령부 시대를 회고했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8군 작전참모 메제트 대령이 남원의 사령부에 은밀히 나타났다. 메제트는 나에게 ‘벤픓리트 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에 제2군단을 창설하겠다는 內命을 받고’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231쪽) 한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하기 위해 한국군 100 부대는 1951년 3월 남원을 출발해 미육군 제9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천군 북방의 泉田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미군이 벌써 천막을 치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다.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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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야전천막 얻어다 군인교회 만들어 … 삶을 바꾼 기회들 | ||||||||||||||||||
김일평 교수 회고록(12)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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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군목제도 6·25전쟁 당시 한국군에는 군목제도가 새로 생겨서 박 목사가 1952년 육군본부 군목실의 파견을 받았다. 박 목사님은 군복차림으로 십자가를 목에 걸고(그 당시 군목제도가 시작 될 때는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 육군 제2군단 본부에 부임했다. 박 목사님은 군단본부의 인사과에 가서 우선 장교들 중 기독교신자를 찾았다. 인사과의 최 대위, 정보처의 김일평 중위, 방첩대 포로심문반의 김철우 중위(중국어 통역장교, 후에 서울 영락교회 장로 역임) 등을 찾아서 연락을 했다. 나는 박 목사님의 연락을 받고 만나기로 했다. 우선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천막 교회가 필요했는데 전방에서는 야전 천막을 구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 몇 사람은 박 목사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천막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천막교회 위에는 십자가를 세우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천막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소속돼 있는 정보처의 참모 육근수 중령에게 말해 정보처에 배속된 지프차를 하나 빌려서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 군단본부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군 공병대를 찾아갔다. 미군 공병대는 미9군단 산하에 있는 부대이다. 미군 공병대에는 미국군목이 미9군단 군목실에서 파견돼 있었는데 피터 홈스(Peter N. Holmes) 목사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홈스 군목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나와 박 목사님을 맞이했다. 그는 자기가 공병대 대대장에게 부탁해 야전 천막을 하나 보급 받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약속대 야전 천막을 쓰리 코터(중형 트럭)에 실어서 우리 군단본부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야전 천막 교회를 세운 뒤 박 목사님이 설교할 수 있는 강단도 만들어 주었다. 또 교인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간이식 의자도 만들었다. 간이식 의자는 송판 밑에 다리를 달고 땅에 박은 것이었다. 그런대로 땅바닥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송판의자에라도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편리했다. 박 목사님의 거처는 교회천막 뒤쪽에 칸을 막고 접이식 침대를 하나 넣어 만들었다. 땅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미군이 사용하는 커트 침대에서 자는 게 그나마 모양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은 천막 안에서 혼자 쓸쓸하게 있는 것은 너무 외롭고 적적하니 나보고 그곳에 와서 함께 지나며 예배드리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 정보처 장교들의 숙소에서 합숙을 하고 있으니 한번 물어보고 오겠다고 대답했다. 정보처의 부참모인 최재방 소령과 상의했더니 목사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박 목사님과 함께 천막교회에 칸막이를 하고 야전침대를 두 개 넣고 그곳에서 자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자연 박 목사님의 신상에 대하여서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은 평양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서 장로교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이 해방되기 직전이라고 하니 박 목사는 50세 가까이 되신 분이다. 그리고 해방 후에 북한에서 목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월남했다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월남했는지 아니면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이 평양에 입성했을 무렵 남하했는지는 확실하게 이야기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과 가깝게 지냈다. 군인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10명 내지 20여명의 군인 신자들이 군인교회에 예배드리러 왔다. 장교도 있었지만 사병들이 더 많았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있는 한 대위가 매우 적극적으로 예배에 나왔다. 그는 전주에서 장로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목사님을 많이 도왔다. 이렇게 해서 육군 제2군단 군인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장교식당에 가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우리는 교회부근의 야외에 나가서 찬송가도 부르면서 야외예배를 종종 드렸다. 어느 날 박 목사님은 최 대위, 김철우 중위, 그리고 나를 군인교회의 장로로 안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1952년 가을 어느 주일날 아침예배를 드릴 때 우리 세 사람은 육군 제2군단 군인교회의 장로안수를 받았다. 우리가 장로 안수를 받은 날 점심식사 후에는 야외예배를 드렸다. 감사기도는 내가 인도했다. 다음 사진은 우리가 야외 예배를 드릴 때 찍은 60년 전의 사진이다. 그리고 군인교회 앞에서 박 목사님과 필자가 함께 찍은 사진(1952년 강원도 화천군 천정리 제2군단 사령부 군인교회 천막 앞에서)은 비록 색이 바래긴 했지만, 내겐 그 시절을 증거 하는 뜻 깊은 자료다.
나는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국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고 또 원주감리교회의 주일학교에도 다녔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연락장교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나의 군 복무 기간은 매우 짧은 3년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은 나의 일생을 통해서 기억에 간직하고 싶은 매우 귀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나는 3년간 연락장교로 복무할 때 한국주둔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의 통역을 할 수 있는기회도 얻었으며, 또 나의 미국유학을 주선해 준 종군목사 피터 홈스(Peter N. Holmes) 소령을 만나서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결정적인 삶의 기회를 만날 수 있었다. 6·25전쟁이 시작된 직후 미군 8군사령부에서 잠시 민간인 통역관으로 근무한 후 제7기 연락장교시험에 합격하고 한국군 제100부대(제2군단)에 파견을 받고 나의 육군복무는 시작됐다. 우리 100부대는 지리산 야전사령부의 토벌작전을 끝마치고 제2군단으로 개편됐다. 우리가 전방의 철원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제9군단에서 훈련을 받고 한국군 제2군단을 창립했을 때, 나는 미군 제9군단 군목으로 있는 피터 홈스 (Peter N. Holmes)를 만날 수 있게 됐다. 피터 홈스 소령은 내가 미국유학의 장학금(Full Scholarship)을 받아 도미유학을 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은인이다. 따라서 나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캔터키 주에 있는 애스베리 칼리지(201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로 종합대학교로 승격)에서 4년간 학비 전액을 장학금(Full Scholarship)으로 받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 때문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했는데 홈스 군목 덕택으로 미국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으니, 홈스 군목의 厚意에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 계속>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은 매주 수요일 업데이트됩니다. |
김웅수 장군과 미 육군 동성 훈장 받게 된 사연 | |||||||||||||||||||||||||||
김일평 교수 회고록(14)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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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군중위 시절 제2군단에서 1953년에 미국 銅星 무공훈장을 받을 때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육군 제2군단에 金雄洙 장군이 참모장으로 새로 부임해 왔다. 나는 정보처(G-2)의 브리핑 장교로서 새벽 6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구두도 반짝 반짝 하게 닦고, 단정한 장교복 차림으로 군단본부의 상황실로 나갔다. 그리고 미국 군사고문단을 위해 영어로 브리핑을 매우 유창하게 했다(그와 같은 나의 단정한 모습을 지켜본 김웅수 장군은 4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어느 만찬회에서 재일동포 최서면 한국학연구원장에게 나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 말한 바 있다고 최 원장이 귀띔해주었다). 우리 제2군단 본부에는 한국 육사 8기생 31명이 배속돼 함께 근무했다(<중앙일보>에 연재한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의 ‘지리산의 숨은 적들’[151회]에도 한국 육사 8기생 31명이 남원의 100부대 전투사령부에 배치됐다고 기술돼 있다). 그중 4~5명은 화천의 제2군단 정보처에 나와 함께 근무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석정선 대위였다. 그는 훗날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창설된 중앙정보부(KCIA)의 김종필 부장의 차장으로 임명돼 활약했다는 신문 기사를 미국에서 읽은 바 있다.
육군 2군단에 새로 부임한 김웅수 참모장은 매우 우수한 장군으로서 실력이 있는 智將이었다. 그는 일본 국주의 시대 말기에 일본 교토[京都] 제국대학에 재학하다가 일본군 학병으로 선발된 후 만주에 파병됐다. 그리고 만주에서 조국의 광복 즉 해방을 맞이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1952년 한국군 제2군단 참모장으로 부임한 후 1년 후에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하나 달았다. 그 분은 우리 연락장교들을 인텔리 장교(지식인)라고 생각하며 각별한 호감으로 대해주었다. 또 여러 가지로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연락장교들은 김웅수 장군을 매우 우수하고 실력 있는 지장이라고 생각하며 존경했다. 金雄洙 장군은 누구인가 김웅수 장군은 한국육군의 강영훈 장군, 장도영 장군과 함께 한국군의 智將 즉 지혜가 많은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강영훈 장군은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직후 옥고를 치르고 난후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워싱턴에 와서 ‘한국문제 연구소(Research Institutor Korean Affairs)’를 설립하고 <한국문제 저널(Journal of Korean Affairs)>을 영문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강 장군은 미국의 여러 한국인 학자를 동원해서 한국문제연구소의 자문역할과 학술지의 편집고문(Advisory Board)를 조직했다. 나는 강 장군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편집고문과 논문 집필에 참여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와 학술지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었고 또 박정희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의 참여를 적극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정권의 홍보용 연구소와 어용 학술지가 되는 것을 막고 중도적이고 객관적으로 운용되는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일역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그 반면에 강영훈 장군의 처남이며 동시에 한국의 육군 장성으로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쿠데타)에 참가하지 않았던 김웅수 장군은 쿠데타 이후 몇 달간 옥중생활을 한 후 미국 서부의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 와서 경제학을 전공해 학부(B.A.)와 석사학위(M.A.)를 끝마쳤다. 이어 워싱턴 D. C.에 있는 카토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Ph. D.) 학위를 받고 워싱턴의 모교인 카토릭 대학에서 20여 년간 경제학 교수로 70세까지 교수생활을 하다가 퇴임했다고 최근에 출판된 회고록에 기록했다.
金雄洙 장군은 우리 연락장교들이 韓美 간의 공조와 협력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文官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1953년 한국군 제2군단에 복무하고 있을 때 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미국 銅星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제2군단의 몇 명의 장교들과 함께 추천해 주셨다. 우리가 근무하고 있었던 한국군 제2군단에는 육사 8기생들이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함께 근무했다. 6·25 전쟁이 나기 직전에 5~6개월간의 훈련도 받지 못했을 때 한국전쟁이 나서 임관된 장교들이 육사 8기생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확장됨으로써 많은 수의 초급장교가 필요했던 시절이라, 사병에서 현지 임관된 8기생도 있었다. 양적으로는 많은 수의 8기생(1천200명이 넘었다고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 기록했다)들이 초급장교로 임관됐으나, 우리와 함께 복무하는 미군 위관급 장교들과 비교해 보면 질적으로는 떨어졌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 연락장교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열등감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볼 때가 많았다. 연락장교들은 6년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다가 6·25 전쟁이 나서 육군에 복무하게 됐던 이들이다. 그러나 육사 8기생 1천200명 중에는 대학교 문턱에 들어가 본 사람은 일제시대에 10여명 내외에 불과했다고 들었다. 6·25 전쟁이 발발해 현지 임관된 장교들 중 대부분은 육사 8기생으로서 훈련 도중에 장교로 임관 됐다는 것이다. 한국 육사 8기생들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는 육사 8기생들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정부 요직에 등용됐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의 차장을 역임한 석정선 대위는 육군 제 2군단 정보처에서 우리와 함께 근무한 8기생이다. 육사 8기생 중의 한 명인 최 아무개 대위는 연락장교인 김일평 중위가 미국 동성훈장을 받는 데 대해 시기심을 나타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유재흥 군단장과 김웅수 참모장은 “미군고문단이 김일평 중위의 업적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추천했으며, 또 한국측 참모들도 협조해서 추천한 것이며, 다른 분야의 장교들도 많이 동조하고 추천해서 동성훈장을 받게 됐다”라고 내가 동성훈장을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불만을 조용히 무마시켰다. 6·25 전쟁이 발생하기 직전의 한국 국방경비대는, 미국의 군사원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한국방위를 담당할 국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 장교를 대량으로 양성할 계획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따라서 육군 경비사관학교 후보생과 육군간부 후보생들을 많이 증집해 단기 군사훈련을 마친 뒤 후 초급장교로 임관했기 때문에 8기생들을 훈련시키고 교육 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육군사관학교 8기생부터는 모집인원을 대량으로 증가해 8기생은 1천200명이 넘는 간부호보생을 뽑게 된 것이다. 따라서 8기생은 한국전쟁 중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우리 제2군단 정보처 (G-2)에도 5~6명의 8기생이 배속돼 왔던 것이다. 전쟁중 현지임관된 육사 8기생들 그러나 8기생들은 양적으로는 많은 수가 임관 됐지만, 질적으로는 매우 약세였다. 그들은 위관급 중위와 대위 계급에 걸맞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학식과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것은 6·25 전쟁 때문에 사관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속성으로 임관돼 1년에 진급을 거듭해 중위와 대위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 능력은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육사에서 5~6개월 교육받았다는 8기생들 중에는 속성으로 중위와 대위가 된 장교도 있었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병출신이 현지 임관으로 소위와 중위가 된 사례들이 있었다. 우리가 연락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을 때 우리 7기생을 매우 혹독하게 훈련시킨 신 중위는 사병출신 장교였다. 그는 아무런 일자리를 찾지 못해 낭인으로 방황하다가 육군 사병모집에 지원해서 사병으로 5~6개월 복무한 후 6·25 전쟁을 맞았다. 그는 큰 공훈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현지임관된 장교라고 자랑하곤 했다. 한국 국방경비대 시절의 한국군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부터의 한국장교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미국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와 똑같이 4년간의 대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육사 11기생 이후의 한국군 장교는 미국장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매우 훌륭한 장교들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군복무를 끝마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한국육사 제11기생들과 함께 복무할 기회는 없었다. 육사 11기생으로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된 다음 진급을 거듭한 후 1960년대에 미국에 유학 온 육사출신 장교 여러 명을 만나 본 일이 있다. 때문에 나는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의 한국군의 여러 가지 변화를 그들로부터 들은 바 있으며 또 내 눈으로 직접 관찰도 했다. 후에 기록하겠지만 1990년대 한국에 학술회의 때문에 나가면 학술회의를 마친 후 육사 골프장에서 골프를 함께 치면서 육사 11기생들의 육사교육 과정과 훈련 내용을 엿볼 수 있었으며 또 관찰 할 수도 있었다. 나는 1953년 육군장교로 3년간의 일선 복무를 끝마치고 명예 제대를 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수의 육군장교 출신 유학생이 됐다. 미 육군 銅星 훈장을 받은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해서 국방부의 수속은 쉽게 잘 진행됐다. 문교부의 역사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외무부의 영어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외무부의 영어 시험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내 기억에는 아직도 남아있다. 참고삼아 부연한다면, 6·25 전쟁 (1950~1953) 당시에 미국 군인의 전사자(KIA)는 3천300명이고, 부상자는 10만3천명이라고 미국의 한국전쟁 역사책에는 기록돼 있다. <계속> |
출처: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644[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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