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ding/결혼(wedding)이야기

[한마당―조용래] 처가살이

영국신사77 2012. 2. 14. 12:56

[한마당―조용래] 처가살이

 

까만 대나무숲으로 유명한 강릉의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조선 시대에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본래 오죽헌은 사임당의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집이었다. 사임당의 어머니까지 그곳에서 태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사온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 딸(사임당의 어머니)을 아들 대신으로 삼아 혼인시킨 후에도 친정에 머물러 살게 했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 역시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다. 그 중에서도 신명화는 누구보다 영특한 둘째딸 사임당을 아들인 듯 대했다. 사임당이 이원수와 결혼한 후에도 사위의 동의를 얻어 친정에서 살도록 했으니.

사임당은 결혼 직후 시집인 경기도 파주의 율곡리에서도 잠깐 살았다. 하지만 38살,시집 살림을 맡아야할 상황에 직면해 서울로 올 때까지 그녀는 오죽헌을 떠나지 않았다. 이처럼 오죽헌은 율곡,그의 어머니 사임당과 외할머니,그리고 증조외할머니(사임당의 외할머니)가 살았던 곳이다.

장구한 처가살이의 계보를 보는 듯하다. 당시만 해도 처가살이혼(婚)은 흔했다. 조선왕조실록(태종조)에도 당시의 혼인풍속을 ‘남귀여가(男歸女家)한 후 아들 손자까지도 외가에서 낳아 그곳에서 키운다’고 묘사하고 있다. ‘장가든다’의 본 뜻이 장가(丈家),즉 장인 집에 들어간다는 것이니.

이후 유교문화가 강성해지면서 처가살이혼은 시집살이혼으로 바뀐다. 남자가 자기 집에서 신부를 맞는 친영례(親迎禮)가 반가의 도리로 뿌리내렸다. 다만 백성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반(半)친영제’였다. 남자가 처가에서 결혼하고 며칠 지낸 후 자기 집으로 신부를 데려오는 것이다.

 

이렇게보면 출가외인,시가(媤家) 우위 등의 시집 중시주의는 불과 400여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다.

최근 한 결혼정보회사가 20∼30대 미혼남성 504명을 대상으로 한 ‘처가살이에 대한 의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처가살이면 어때(찬성)’가 41.1%로 ‘반대’ 37.5%를 웃돌았다. 시집 중시,남존여비의 고정관념이 바뀌고 있는 셈이다.

처가살이혼이 다시 득세한 것일까,여성의 발언권이 강해진 결과일까. 아니면 육아 환경이 변변치 않은 현실에서 맞벌이혼(婚)을 지향하는 이들의 지혜일까. 분명한 것은 소자녀-고령화의 영향이 혼인관,가족관 등에 이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