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성
어떤 성서학자들은 성벽중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이 어디인지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성경 여호수아서(6장)에 의하면, 일곱째 날 성벽을 일곱 바퀴 돌면서 뿔나팔을 불고 큰 소리로 외치자, 그만 그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기적적으로 파괴시켰다는 여리고의 성벽은, 성서고고학 발굴사에서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다. 광활한 요단평원에 24m의 높이로 우뚝 솟은 여리고는, 약 4만㎡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였지만,19세기 후반에 처음 발굴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였다.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엘리사 샘가에 자리잡은 여리고는 광야 한가운데 위치한 비옥한 오아시스로,로마시대에는 비싼 값에 팔리는 향유의 생산지로 클레오파트라의 영지가 되었고,헤롯의 궁전과 별장이 위치한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워렌(C.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수십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란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약 한달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까지 도달하는 수직 갱을 팠다.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 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당시에는 돌로 만든 석조 건축물만을 가치 있는 유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발굴을 지속할 수 없었다.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워렌의 수직 갱은 1만년전에 건설된 신석기시대의 성벽과 망대를 1m 정도 벗어났다.
두번째의 여리고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이미 1902년부터 3년동안 이즈르엘 평원의 타아낙을 발굴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젤린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발굴 당사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쳤다.결국 그들은 기원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성벽을 선택했고,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같은 시대로 보았다.이 연대를 기준으로 광야생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사건도 기원전 1500년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여리고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신봉하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주장되는 초기 출애굽설을 낳게 된다.
1868년부터 1백여년동안, 유럽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네차례에 걸쳐 샅샅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리고의 주거 역사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여호수아의 성벽이 아직도 흙속에 파묻혀 있다는 낙관론과, 오랜 세월 빗물에 씻겨 내려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비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으로 선포된 여리고는 지금도 새로운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김성 교수(협성대학·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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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리 고
여리고는 450Km되는 요르단 계곡 안에 위치한다. 이 계곡은 헬몬산으로부터 남쪽의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이다. 이 계곡은 케냐, 탄자니야를 거쳐 모잠비크까지 이어진다. 계곡의 가장 낮은 바닥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해저 396m인 사해 부근이다. 40Km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해발760m)으로부터 약 1,200m를 내려와, 덥고 무성한 요르단 계곡에 이른다.
여리고는 요르단 계곡 주변의 황량한 사막 정 가운데 펼쳐진 녹색 카페트와 같다. 여리고는 오래 전부터 기름진 토질과 오렌지, 바나나, 대추로 유명했다. 옛날에는 대추의 도시라 불리었다. 여름에는 메마르고 아주 더우나, 겨울과 봄에는 수 많은 꽃의 향기로 덮여 아름다운 기후를 만든다.
비옥한 여리고는 주전 7000~10000년 전부터 형성된 문명의 중심지였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번 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처음 발굴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였다.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워렌(C.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수십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란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약 한달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까지 도달하는 수직 갱을 팠다.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당시에는 돌로 만든 석조 건축물만을 가치 있는 유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발굴을 지속할 수 없었다.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워렌의 수직 갱은 1만년전에 건설된 신석기시대의 성벽과 망대를 1m 정도 벗어났다.
두번째의 여리고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이미 1902년부터 3년동안 이즈르엘 평원의 타아낙을 발굴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젤린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발굴당사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쳤다.
결국 그들은 기원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성벽을 선택했고,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같은 시대로 보았다.이 연대를 기준으로 광야생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사건도 기원전 1500년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여리고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신봉하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주장되는 초기 출애굽설을 낳게 된다.
1차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거느린 영국이 이 위대한 발굴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젤린의 발굴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리버풀대학의 가르스탕(J.Garstang)은, 1930년부터 새로운 성벽을 찾기 위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특히 그는 처음으로 여리고에서 기원전 3,000년~1,500년 사이의 무덤들을 발굴했다.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부장품들,특히 잘 보존된 토기들을 통해 여리고의 주거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7년동안의 발굴결과 가르스탕이 내린 결론은, 젤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단지 연대를 1백여년 늦추어서,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 성의 파괴가 기원전 15세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여리고 발굴은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케년(K.M.Kenyon)이,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지속한 것이다.그녀는 이 발굴에서 가장 발전된 발굴기술을 적용,토기 분석을 통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한 결과, 여호수아 성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곳에는 이미 1만년전부터 거대한 성벽과 망대가 건설됐기 때문에, 여리고가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것이다.도시문명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기원전 4천년경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결과였다.
한편 그녀의 `여호수아 성벽'에 대한 연대추정 결과는 이전의 발굴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됩니다. 그때서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입니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여리고에 선지자 학교가 있어서 이들이 방문한 적이 있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왕하2:15-19) 그런데 여리고는 성읍의 자연은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해서 토산물이 잘 익지 못하고 떨어졌다고 한다. 이 사정을 들은 엘리사가 물샘에 소금을 넣어 물을 고쳤다고 한다.(왕하2:19-20) 그래서 이샘을 '엘리사의 샘'이라고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이 샘은 옛 여리고의 길 건너편에 있고, 당시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셨을 뿐만 아니라 ,여리고를 지나시며 전도사역을 행하셨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마셨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후, 즉시 시험을 받았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자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서 이끌리시며 (눅1:1-13, 막1:12-13).
성경은 예수께서 금식하고 시험 받은 정확한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후에 전통적으로 구 여리고의 뒷쪽에 위치한 카란텔 산을, 예수의 첫째와 셋째의 시험 장소라 한다. 산 꼭대기가 마귀가 예수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시험한 장소이다.
6세기에 예수께서 머물렀다는 산의 동쪽 동굴에 교회가 세워졌다.
13세기에 교회는 폐허가 되고, 1874년에 희랍 정교회가 이곳에 수도원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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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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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으로 여리고는 이스라엘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Walled City)이다.
이곳은 1908년에 처음으로 오스트리아의 셀린 박사가 여리고의 텔 엘 술탄 발굴을 시작하였다. |
1930~1936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죤카스팅(John Garstang)이 발굴 했고, 1952~1958년에는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더린 캐년(Kathleen kenyon)이 정밀 발굴 하였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스트라타(지층)가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적은, 탄소 14방법으로 주전 7000년경이 측정되었다. 바닥에서는 흥미로운 신석기 시대의 탑이 발견 되었다. 탑은 돌과 진흙을 지었는데, 위에서 아래로 구멍을 내, 22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성을 발굴하고, 성벽과 둥근 망 대(Round Tower)를 발굴 하였다. 즉, 주전 7,000년경에 이미 성울 쌓은 여리고성은, 지형적으로 가파른 바위 산(약 35도 경사) 위에 축성된 고대 도시다. 성벽은 2중 벽으로 되어 아주 견고했으며, 외벽 두께가 1.8 m, 내벽이 4~5 m 가량 되었고, 성벽 높이도 9 m정도 되었다.
오랜 동안 폐허로 된 도시 위에 계속 지어진 도시들로 인해 만들어진 tel 언덕은, 10에이커 면적에 높이가 약 24m가 된다. 이처럼 여리고성은 국방력이 강하고, 쌍벽을 쌓을만큼 경제력이 풍부한 성이었으며, 도시 생활을 시작한 고대 도시유물인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집안의 벽을 그림으로 장식하였고, 죽은 사람의 두개골은 방바닥에 매장하였다. 또한 진흙으로 만든 여자의 형상, 동물 형상도 발굴 되었다. 이 시대에 속하는 주거 층에서, 터어키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오석(Turquoise)으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 되었다. 이것은 이미 이 시대에, 여리고가 여러 먼 곳의 지역과 ,왕래와 교류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된다. 그때가서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만.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됐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탐사 팀에 의해서, 여리고성은 B.C1,400년경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다. BC1,400년경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들어간 시기이다.
또한 여리고성은 예수가 여리고의 삭개오를 만났을 때도 등장한다.
여리고성은 지금도 계속 발굴중이다. 7번이나 폐허가 되고, 그 폐허된 도시에 다시 도시를 건설하고 하여, 앞으로 이 성터를 발굴할려면 약 200년이 필요하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도시 '여리고'
http://blog.naver.com/doctorlsj/80019247703 |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 최초의 도시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근처에 있는 '기름진 초생달 지대'라는 도시였다. 이 도시는 수메르 인들이 세운 도시로 지금부터 약 5,000여년 전에 세워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우르, 우르크, 에리두, 라가시, 니푸르와 그밖의 수메르의 부유한 도시들에서 최초로 인류의 문명이 발생했다고 학자들은 믿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문자의 기록이 없는 시대, 즉 선사 시대의 공허가 있을 뿐이라고 학자들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은 또다른 고고학자들의 노력과 발굴에 의해 수정이 되어야만 했다. 즉 성서 속에 나오는 '여리고'라는 도시를 고고학자들이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제6장'에 실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사막을 나와 강을 건넜던 사람은 강을 건너기 전에 죽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그들은 가던 길의 서쪽에 있던 첫번째 도시 여리고를 포위했다. 7일 동안의 싸움 끝에 튼튼한 성벽은 무너졌고, 주민들은 칼날에 쓰러졌으며, 도시는 불타 잿더미가 되고 그 터에는 저주가 내렸다. 이것이 여리고의 옛 도시에 대한 성서 속의 기록이다.
이 여리고의 도시를 이해 하려면 인류의 생활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학자들이 왜 성서 속의 기록만 믿고 이 도시를 찾아나섰는지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학자들은 비록 성서 속에 있는 이야기지만 성서가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을 믿고 19세기 말을 전후하여 이 전설의 도시를 찾아나섰다.
사냥으로 자신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던 구석기 인들은 3만년 전 경부터 정착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증거로 그들이 살았을 주거 형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정착 생활을 하려면 터전이 안전해야 했고, 다른 부족과의 친교와 교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식량이었다. 농사를 지어 자신들이 해결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만 한다.
기원전 8,000년 경 인류에게 하나의 혁명으로 나타난 것이 있으니, 바로 본격적인 농경 생활의 시작이다. 이것이 바로 신석기 혁명인데, 이를 계기로 수렵인들은 농민으로, 방랑자들은 정착자로 탈바꿈을 했다.
이러한 농업의 조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곳이 바로 중동 지방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고 시리아의 산기슭에서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염소와 양을 가축화한 정착지의 자취를 발견했다.
그들은 최초의 곡물 사일로와 빵을 굽는 화덕이 있는 마을들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유적이 나타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예루살렘과 암만을 연결하는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 최초의 오아시스 도시 여리고. 강물이 뱀처럼 꽈리를 틀며 그 끝이 반짝이는 사해로 들어가는 낮은 들판의 심장부에 여리고가 있다. 바다밑 250미터까지 내려간 이 도시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라 할 수 있다.
처음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수렵인들이었고, 그 도시를 점령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름아닌 팔레스타인인들이었다. 성서에서는 이 도시를 '종려나무의 도시'라 부르고 있다. 도시의 벌판 위로 20미터 가량 솟은 이 언덕에 수메르인들이 세운 도시보다 4,000년 이상이나 앞선 도시 여리고가 있다.
이곳에 성벽의 흔적이 있는데, 영국의 고고학자인 캐슬린 케년 박사가 이끄는 발굴단은 이 성벽이 기원전 7,000년에 건설되었다는 판정을 내렸다. 이 유적지는 겹겹이 포개진 도시들의 폐허로 이루어져 있고, 겹겹이 쌓인 층들은 격자 무늬의 도랑으로 잘려있고, 이렇게 다양한 층들은 수백 세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6,000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정착해 살았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잘려진 수직 단면 속에 세계 최초의 도시 흔적인 6미터의 도시 성벽을 볼 수가 있다. 여리고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길이가 대략 300미터에 너비가 약 160미터에 불과했다. 4헥타르 정도의 작은 면적이며, 인구는 2,000~3,000여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회반죽을 쓰지 않고 잘 다듬어진 돌로 쌓았으며 밑부분의 두께가 1.8미터, 높이는 도랑에서 보는 부분으로 3.5미터에 이르고, 곳에 따라서는 6미터가 되는 곳도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함 소리에 성이 무너졌다고 알려지고 있는 여리고의 성벽.
텔에시술탄이라는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적들 중에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놀라운 요새들이 몇 개 있다. 이들 요새 안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돌탑 안에는 신기할 정도의 기술이 접목된 중앙 계단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그 도시인들의 두상과 그 두상에 조각된 조개껍질, 뼈들...
놀랍도록 정교하게 쌓아진 9000년 전의 도시. 면적이나 문명이 발달된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걸음마 단계의 도시였지만, 문명이 일어나기 전으로 본다면 대단한 건축 기술이 아닐 수 없다.
문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던 시대에 이들이 건설한 도시가 발견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어떻게 이 도시를 건설했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정착 생활을 했으며, 농업에 종사를 했고, 세계 최초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 밖에는...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진 후였다. 그후 인류가 그곳에 다시 살았다는 흔적은 있으나, 옛날처럼 성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살다간 그 자리는 과연 누가 지키고 살았을까? 궁금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이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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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아시스 [Oasis]
본문 | ||||||||
천지(泉地)라고도 한다. 사막에서 샘·지하수·하천·찬정(鑽井) 등으로 언제나 물을 얻기 쉬운 비옥한 땅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인공으로 뚫은 지하수가 지표에 샘을 이룬 것을 인공 오아시스라고 부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찬정분지가 가장 대표적인 것인데, 이 인공 오아시스의 샘물로 넓은 목양지역(牧羊地域)을 형성하였다. 지금 사하라사막의 개발을 위하여 찬정을 뚫는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편 콩고 분지에 내리는 많은 빗물을 사하라사막으로 끌어들여 대규모의 인공 오아시스를 만드려는 계획도 있으나 그 지역 주변의 여러 국가간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콜로라도강의 물을 끌어다가 임피리얼 계곡의 사막에 비옥한 농토를 관개하게 된 것도 인공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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