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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지역 민족운동의 근원지 공주 ‘영명학교’/교회연합신문

영국신사77 2010. 10. 7. 23:47
충청지역 민족운동의 근원지 공주 ‘영명학교’

1906년 감리교 선교사 윌리암스에 의해 출발


유관순 조병옥 임영신 등 많은 민족 지도자 배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국제적 인재양성 주력

 

 

 

  ▲ 영명고등학교에 세운 ‘영명학교 100주년 기념탑’



 충청남도 공주는 교육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제의 옛 도읍지인 이 곳 공주에, 내년이면 개교 100돌을 맞는 역사적인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있는데 바로 영명학교다.

 지금은 영명고등학교와 영명중학교로 운영되고 있지만, 100여년전에는 공주 영명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영명학교는 충남 공주시 중동 318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국립 공주박물관을 가까이 하고 있는 영명학교는 공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 공주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는 100년이 넘었다.

1903년 의료선교사 맥길과 이용주전도사에 의해 공주읍교회(현 공주제일교회) 설립 

 1903년 의료선교사 맥길(W. B. Mcgill)과 이용주 전도사에 의해 공주읍교회(현 공주제일교회)가 설립된 것이 출발점이다. 1903년 7월1일 미감리회 한국연회로부터 초대 공주 선교사로 파송받은 맥길은 공주 하리동 초가집에서 더위와 싸우면서 활자를 돌보며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1904년 선교사 샤프 ·하몬드 선교사 부부에 의해 55개 신앙공동체 조직

 다음해인 1904년, 한국연회는 공주와 진천을 중심으로 한 북충청권과 청주지역을 묶어 하나의 교구로 설정하고, 한국에 온 지 1년밖에 안되는 선교사 샤프(R. A. Sharp)에게 맡겼다. 그의 부인은 자신보다 2년 먼저 한국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있던 선교사 하몬드(Alice J. Hammod)였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받아와 부부가 된 특별한 케이스다. 하몬드는 결혼후 사애리시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워졌다. 이들 부부는 서울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충청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1년을 보냈다. 1년동안 샤프부부가 관할한 충청권 지역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 6개의 작은 순회 구역안에 55개의 신앙공동체가 조직됐다.

 

 이러한 선교 여정에서 당시 보수적인 문화가 팽배했던 이곳 공주지역에서는 교육사업이 복음을 전하는데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린 샤프부인은, 영명여학교 설립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남편 순교후 홀로  영명여학당 초대학당장으로 봉사한 하몬드선교사

 1906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하몬드는 남편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공주에 남아 무엇보다 여성교육에 헌신했다. 영명여학당 초대학당장으로 봉사했던 하몬드는 1940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논산의 영명여학교와 강경의 만동여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순교한 사프 선교사 후임인 선교사 윌리암스가 1906년 영명학교 설립

 19806년 샤프 선교사에 이어 공주에 파송된 선교사 윌리암스(F. E. C. Williams)는 샤프부인의 기초 위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영명학교는 농촌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농촌지도자 배출에 주력했다. 이를위해 영명학교는 교명을 영명실수(永明實修)학교로 개명했다.

 

 1932년 4월부터 영명실수학교로 운영되어 오던 영명학교는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됐고, 1951년 영명중·고등학교로 복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교 이후 지금까지 20,000명이 넘는 인재를 배출한 감리교영명학원의 영명중·고등학교(교장 오대현)는 1921년 붉은 벽돌건물로 교사를 지었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였던 이 벽돌 교사는 건물의 노후로 인한 붕괴위험을 이유로 2002년 6월30일 철거할 때까지 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이었다.


 

 철거 당시 건물 머릿돌에 묻혀있던 함에는 개교 1회부터 11회까지의 동창 명단과 학교 족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설립 허가증, 당시 사용하던 성경과 찬송가, 교직원 명단 등 소중한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지금은 교내에 세워져 있는 윌리암스 선교사의 흉상과 샤프선교사의 기념비, 그리고 ‘신학문 발상지’라고 쓰여진 자연석 기념비 등이 영명학교의 오랜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유관순 조병옥 임영신 등 많은 민족 지도자 배출

 영명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공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의 근원지로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운 민족학교다. 고 유관순열사를 비롯해 영명학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영명학교에서 나왔다. 유석 조병옥박사와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등은 영명이 배출한 대표적인 민족 지도자들이다.

 

 개교 100주년을 앞둔 영명학교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해 진행하면서 내실있는 명문사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영명은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을 토대로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세계화·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인재양성에 온 힘을 쏟고있는 것이다.

 

 

                                                                                                                                      출처: 2005. 2. 3. 교회연합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