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양화진묘원· 선교사

※ 5.양화진 외국인 묘지 공원※[F 묘역]: 에비슨, 언더우드 가족, 베어드

영국신사77 2009. 10. 18. 22:51

          <제 F 묘 역>

 

                                                                          F 묘역 안내 표지판-1

  

                                                                               F 묘역 안내 표지판-2

 

                                                                                  <베어드>

                               숭실대학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 부부 묘비(좌)와 W.M.베어드2세와 R.H.베어드 묘비(우)-1

 

                               숭실대학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 부부 묘비(좌)와 W.M.베어드2세와 R.H.베어드 묘비(우)-2            

 

                                                                           <언더우드 가족묘>

 

                                                                      언더우드 가족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홀튼(好敦) 의료선교사의 묘비.

 위의 묘비는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묘'의 제일 중앙 앞쪽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언더우드 선교사의 묘비로 착각하기 쉬우며, 또한 대부분의 다른 인터넷 · 서적 사진 자료에도  언더우드 선교사의 묘비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언더우드 선교사에 관한 소개는 이 묘비 뒷면에 있다. 

 

                                    양화진과 한국장로교 최초 언더우드 선교사 4대 가문 묘역


  양화진은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수륙 교통의 거점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풍치 절경(風致絶景)의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여 언더우드는 F.S.밀러, O.R.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미화 75달러에 땅을 사서 방갈로를 지어 놓고 많은 일꾼들을 접견하고, 여름 내내 새벽 일찍 일어나 오후 4~5시까지 성경번역 등의 일을 한곳이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언더우드는 이곳을 외국인 묘지로 쓰이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며, 이곳을 왕래하면서 서교동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한 곳이기도 하다.

 언더우드 가문 4대가 안장된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라는 비문이 있다.

                                        ◇ 한국장로교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1859-1916)

 호레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 元杜尤)는 1859년 7월 19일 런던에서 출생하여 1872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뉴욕대학(1881)과 뉴 브른슨 신학교를 졸업(1884)하고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19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했다.

 1886년 고아원을 설립하여 경신학교로 발전시키고, 1887년 장로교 최초의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97년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고 1889년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1890년 성서공회를 설립하고 성서번역위원으로 활약했다.

 민비가 시해된 뒤 고종임금을 극진히 보살폈으며, 1915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사람이 일을 아니하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57세로 별세하여 Union hill에 묻혔다가, 1999년 5월 20일 유해를 양화진 제2묘역 다-11 자리에 이장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 이장이 이처럼 늦어진 데는 그럴  사연이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원일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뉴욕근처 작은 교회에 묻혀 있던 시신을 한국으로 옮기자는 친지들의 의견이 많았어요.할아버지의 한국 사랑의 정신을 기리자는 것이었죠.하지만 할머니는 그 이장 비용으로, 차라리 한국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반대의견을 내셨어요”
 
 결국 언더우드목사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였던 릴리아스의 뜻에 따라, 한국에 유치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그 후 이장문제는 오랫동안 거론되지 않다가, 연세대학교의 배려로 1999년 5월 이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의 부인이며, 민비의 시의(侍醫) 릴리어스 홀튼(1851-1921)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S. 홀튼(Lillias Stirling Horton, 한국명 : 好敦)은 1851년 6월 21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1888년 3월 독신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광혜원 제2대 부인과장과 민비의 시의로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

 1889년 3월 언더우드와 결혼했다. 신혼 여행은 선교여행을 겸하여 평양 의주 등 북한을 다녀왔다. 저서로는 "한국의 언더우드" 등이 있다.

 1921년 10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 다-10자리에 안장되고, 비문은 1923년 5월 31일 원한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 언더우드 2세(1890-1951) 원한경 
 언더우드 2세(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元漢慶)는 1890년 9월 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6년 한국을 떠나 1912년 뉴욕대학을 졸업했다. 1912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3·1운동 때에 제암리교회 사건을 세계에 폭로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1934년 연희전문 교장에 취임하고, 1942년 추방되었다. 1945년 목사안수를 받고 10월 다시 내한하여 미 군정청 하지장군의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1946년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에 추대되었다.

 서울에서 부인과 사별한 뒤, 귀국하였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이 돌발하여 10월에 전쟁터로 다시 나왔다. 1951년 2월 20일 부산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양화진 제2묘역 라-9 자리에 안장되었다. 



                                        ◇ 와그너(1888-1949) 언더우드 2세 부인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부인 에델 V. 와그너(Ethel Van Wagoner 한국명 : 태요한)는 1888년 4월 11일 미국 미시칸에서 출생하여 교육학을 전공했다. 1912년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16년 12월 6일 원한경과 뉴욕에서 결혼했다.

 연희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서울에서 1949년 3월 17일 공산당 청년들의 총에 피살되어, 양화진 제2묘역 다-9자리에 안장되었다. 1949년 11월에 세운 비문에 "활발하고 아기차고 다정하고 의로웠다"고 기록했다. 



                                              ◇ 언더우드 3세(1917-2004) 원일한 
 언더우드 3세(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 元一漢)는 191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 해밀턴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1939년 8월,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연세대에서 교수, 도서관장, 총장서리와 재단 이사로서 한국교육의 발전과 한·미 우호증진에 이바지했다.

 새문안교회 장로, 성서공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6·25 한국 전쟁 때 해군대위로 참전하고 정전 협정 시 UN측 수석 통역장교였다. 2004년 1월 15일 87세로 별세하여 19일 양화진 제2묘역 라-11 자리에 안장되었다. 



                                   ◇ 데이비슨 (1915-1976) 언더우드 3세 부인 
 언더우드 3세의 첫 부인 죠안 비다 데이비슨(Joan Vida Davidson)은 1915년 9월 19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과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6년 2월 2일 뉴용에서 별세하였으며, 유해는 양화진 제2묘역 라-10에 안장되었다. 비문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기록이 있다. 



                                   ◇ 게일 클락 (1955-2000) 언더우드 4세 부인 
 게일 클락(Gale Clarke)은 1955년 3월 25일 출생하여 언더우드 4세 피터(Peter A. Underwood, 원일한의 셋째 아들)와 결혼했다. 교사로 헌신하였으며, 2000년 6월 15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 라-12 자리에 안장되었다. 

 

   좌측은 언더우드의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묘비의 뒷면이고, 우측은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부인 에델 V. 와그너(Ethel Van Wagoner 한국명 : 태요한)의 묘비이다.

 

                와그너 부인은 연희대 교수로 재직시, 서울에서 1949년 3월 17일 공산당 청년들의 총에 피살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의 묘비의 뒷면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묘비.  

 뜻밖에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역은 그의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묘비의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묘가 1999년에 가서야  미국에서 이곳 양화진으로 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1916년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소천하자 당연히 그의 자녀들이 한국 땅에 그의 묘를 이장할려고 하였으나,  그의 부인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였던 릴리아스 홀튼이 나서서 이장하는 비용으로 가난한 한국에  학교를 세우는 것이 더 고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반대의견을 냄으로써, 그 비용으로 한국에 유치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묘비 맨 아래  1999년 5월 20일에 이곳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아스 홀튼 의료선교사의 묘비 뒷면의 맨 아랫쪽.  

                           묘비 맨 아래  1999년 5월 20일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이곳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언더우드 일가 묘역 소개

 

 

 


                                        언더우드1세 소개.

(1916년 미국에서 별세한 후, 1999년 5월 20일에 양화진으로 이장됐다는 내용이 보인다..)

  

                                                             <에  비   슨>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한 초대 원장 올리버 R. 에비슨의 아들 더글러스 B. 에비슨과 부인 캐들린 로슨의 묘비-1

 

                                          세브란스 병원장 더글러스 B. 에비슨과 부인 캐들린 로슨의 묘비-2

 

                           

                                               세브란스 병원장 더글러스 B. 에비슨과 부인 캐들린 로슨의 묘비-3

 

                                                                  더글러스 B. 에비슨 가족 기념비(연세대학교 의료원)

          더글러스 B. 에비슨, 캐들린 로슨 및 올리버 R. 에비슨의 사역이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다.  

                                                                                                          

                                  

                                                     세브란스 병원 초대 원장 올리버 R. 에비슨의  소개 표지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