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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의 삶… 신앙의 향기]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영국신사77 2009. 9. 27. 00:24

     [등불의 삶… 신앙의 향기]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2009.05.03 18:58:01 국민일보

 

 "난 주님의 청지기" 아낌없이 주고 가다

 아홉 살 어린 나이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성장했다. 한국의 아버지는 밤낮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타국에서 삼켜내며 '일한(一韓)'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일형(一馨). 하나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도 되고 세계 제1의 대한제국이라는 뜻도 됐다.

 

 단 한 번도 조국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제약산업을 이 땅에 일궈낸 유일한 박사. 1971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남긴 유산이라곤 손녀(당시 7세)에게 들어갈 학자금 1만달러뿐이었다. 그의 곁엔 성경책이 놓였다. 관에 담긴 육신이 땅 아래로 내려갈 때 사람들이 불러준 찬송은 '다시 만날 때까지.' 생전에 그가 가장 즐겨 부르고 듣던 찬송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문경영인제를 도입하고 기업을 공개했으며, 자신이 소유한 주식 전부를 사회에 내놓았던 유 박사는 정직과 성실, 청빈한 삶을 실천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고인이 영면한 지 37년이 지났다. 그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봤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청지기=유 박사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후임 사장 조권순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난 사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네. 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로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좀 더 세상에 있는 것뿐일세."

 1922년 미국에서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을 운영하다 26년 영구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하기 전의 일이다. 사업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이렇게 설득했다. "독립운동가가 되어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조국을 돕는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민족 기업을 세워 경제 자립을 통해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한양행은 일본기업 독주 체제였던 제약업계에서 정직과 성실, 신용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고수하며 일어섰고, 철저한 세금 납부 등 투명 경영으로 어떤 위기도 극복해냈다. 벌어들인 수익은 유한공고 설립 등 교육사업을 통해 인재 양성에 재투자됐다. 유한양행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응급환자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품을 전달했고, 드링크제는 알약에 물을 타 값만 높인 것이라 해서 판매하지 않았다.

 유 박사는 남을 돕되 자립심을 키울 수 있게 도왔다. 일정 기간에 거쳐 상환을 약속받았던 이유다. 그는 교회엔 나가지 않았다. 30년대 중반 신사참배를 하게 한 일본 당국에 교회들이 동조하면서부터 교회와 일정한 거리를 뒀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켰다.

 ◇무릎으로 기도한 아버지=그에겐 매일 밤낮으로 '무릎 기도'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유기연은 일찌감치 기독교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했고 민족지도자들의 강연을 들으면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기 전 장남인 일형을 선교사 편에 먼 미국 땅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배워서 민족을 세우라는 뜻에서였다. 만류하는 부인에게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테니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뒤에서 기도합시다"라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무릎 기도가 시작됐다. 일형이 초등학교 3학년일 무렵, 1907년 1월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도들이 모인 대사경회가 열렸다. 길선주 목사의 불 같은 설교로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와 미국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 장로인 아버지는 철저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등불의 삶… 신앙의 향기] 연만희 유한양행 고문이 본 유일한 박사
                                                                        2009.05.03 19:03:50 국민일보

 

 
양화대교 건설 때 “회사 땅 내주라” 불호령

"지나보니 그 분 삶의 행적 모두 기독교 신앙서 비롯"


"제 인생의 이정표 같은 분입니다."

연만희(79·사진) 유한양행 고문이 잠시 상념에 잠겼다 말문을 열었다. 고문실엔 유일한 박사의 생전 사진이 걸려 있다. 연 고문의 책상 위엔 코팅된 '유일한 어록'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연 고문은 현직에 몸담고 있는 유 박사의 유일한 측근. 1400여명의 직원 가운데 유 박사의 친인척이 없으니 그럴 만하다. 연 고문은 1962년 총무부장 시절부터 유 박사와 함께 일했다. 그는 88년 유한양행 사장, 93년 대표이사 회장, 95년 재단이사장까지 역임했다. 에피소드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정부에서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건설한다며 주변 땅을 주민들에게 매입할 때의 일이다. 유한양행 소유의 땅도 일부 있었다. 정부에선 매입단가를 평당 4000원으로 제시했다. 주민들은 1만2000원을 달라고 했다. 함께 버티던 연 고문(당시 총무부장)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임자는 평당 3원에 산 것을 4000원에 가져가겠다는데 1300배의 이익을 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라에서 필요하다는데 당장 서울시에 내주지 못하겠는가'라고 호통을 치시더군요." 공익을 우선시했던 유 박사다.

 검소했다. 반찬 수는 다섯 가지를 넘기지 않았다. 장거리 출장 때도 이코노미석만 고집했다. 공사가 분명해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손을 잡지 않았다.

 유 박사는 서울 대방동 자택에서 회사를 내려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다. "외롭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시더군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도 하셨고요."

 한국어가 서툴러 한글 성경보다 영어 성경을 즐겨 읽었다는 유 박사. 연 고문은 "지나보니 삶의 행적이 모두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돌이켰다.타국에서 고학으로 힘들게 공부한 그가 가장 강조했던 일은 교육사업. 숨지기 전 유일하게 섰던 무대가 유한공고 졸업식장이었다.

                                                                                                           이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