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시대 다리오 왕 칭송 비문 비헤스툰(Bisotun)
자동차 여행의 장점은 누가 뭐라해도 자유로움과 기동력이다. 이란처럼 기름값이 싸고 도로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 자동차 여행은 한마디로 여행광인 필자에게 행운 중에 행운이다.
차를 몰고 비포장도로를 일부 따라 암벽 비문이 있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낯선 이방인인 필자가 차에서 내리자 구경거리가 되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치니, 자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첫 마디에 코레 쥬누비하고 묻는 사람은 열에 한 명 될까 말까 한다. 하도 말을 걸고 귀찮게 하면 ‘이놈들아 양곰 나라 사람이다’ 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다. 작년에 11월 초에 끝난 대장금의 장금이를 이곳 사람들은 양곰이라고 부른다.
3월 30일(일) 이란 공휴일을 기해 검은 차도르를 두른 여인들이 수도 없이 많이 보인다. 이 비헤스툰 유적이 유명하기는 유명한 모양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니.. 작년 1월 말에 이곳을 한 번 탐방한 적이 있었으나 그저 근성으로 둘러보았던 터이라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탐방에 나섰다.
1년이 약간 더 지난 지금 이곳은 완전 변신 중에 있었다. Imformation Desk를 곳곳에 세우고 각 유적지 앞에 자세한 설명서를 세워놓았다. 이렇게 이름 난 유적 관광지에 외국인이라고 나 혼자 뿐이다. 아직 관광 개방 정책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란에서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이곳 제일 먼저 만난 유적은 입구에서 걷다보면 오른쪽 낮은 곳에 기원 전 2세기의 헤라클레스 조각(culpture of Hercules)이 근엄하게 드러누워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몹시 훼손이 된 상태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는데 머리 팔을 몰라보게 재생 시켜놓았다.
그 뒤쪽 위로 조금 올라가면 비헤스툰의 하이라이트인 다리우스 대왕(다리우스1세)의 비문이 절벽에 새겨져있다.
비문에 다리우스 대왕 자기 아버지 캄비시스를 둘러싼 정치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오 왕은 캄비시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Bardiya: 그리스어로는 스메르디스 Smerdis)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그 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자산이 바르디야라고 속여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기에 이른다. 그 때에 캄비시스는 이집트 정벌 중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오 왕은 자기가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이 베히스툰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시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불길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다리오 대제는 그의 즉위 1년 동안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첫해 그는 9번의 전쟁을 치루고 9명의 반란군 대장들을 처형하였다. 이들 반란군들의 이름과 그들의 나라명이 베히스툰 부조물의 하단에 세 가지 쇄기문자들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체포하여 처형한 마지막 반란군 대장은 이 부조물의 맨 뒤에 서 있는 스쿤카이다.
그는 이란의 북동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대장이었는데, 그는 비문에서 고깔모자를 쓴 모습을 한 사람으로 판단된다.
비문 부조 왼쪽에 다리오 왕은 뒤를 따르는 2명의 신하가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브리야스(Gobryas)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페르네스(Intaphernes)로 활을 들고 있다. 다리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하필이면 이 비문을 왜 여기에 새겼을까 하는 이유는 당시 바빌론 제국, 페르시아 여름 궁전이 있었던 하메단, 겨울궁전이 있었던 수사를 이으면서,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와 통하고 서쪽으로는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비단길(Silk Road)’의 원형이 되었던 ‘왕의대로(Royal Road)' 였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쉽게 발견하고 다리오왕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즉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비헤스툰 산은 매우 평평한 절벽을 많이 지닌 산이었다. 산 아래에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형 샘터가 하나 있었다.
이 ‘왕의대로’를 오갔던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기에 이곳이 더 각광을 받은 셈이다. 비헤스툰산은 다리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이처럼 실제적,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장소에 다리오 왕은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비헤스툰 석비’를 새기게 되었는데, 후일에 이 비문이 ‘고대 근동 비문의 여왕(Empress of Oriental Inscriptions)'이라 불리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설형문자로 조각된 비문과 부조가 아스라이 보였다. 세계적인 유적인 이 비문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쳐놓았다.
암벽의 비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에 쓰이고 있던 3개 언어로 쓰여 있어 인류 최초의 문자라고 부르는 설형문자(쐐기문자)인 수메르어를 해독하는 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카드어, 엘람어 및 고대 페르시아어의 3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내(다리우스)위 족보로 8명이 왕이었다. 나는 아홉 번째 왕이다. 나는 양쪽으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로써 왕위의 정통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더 이상 자신의 등극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 듯 하다.
비헤스툰 비문은 폭 5.5m, 높이3.0m로서 다리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한지 6년인 기원전 48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비문에 새겨진 페르시아어는 영국의 한 장교에 의해 처음으로 해독되었다. 이 페르시아어가 해독되고 다음으로 엘람어가 해독되고 다음으로 아카드어가 해독되어 마침내 인류의 최초 사전인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에 의해 수메르어가 해독되어 수많은 수메르의 점토판으로부터 고대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베일을 벗게 되었다고 하는 기념비적인 유적이다.
또 비문의 중앙 상단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밑에 다리우스 왕이 오른 손을 아후라마즈다 신을 향해 들고 있고 한쪽 발은 반역의 괴수인 가우마타(Gaumata)를 짓밟고 서 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다리우스 대왕의 유적은 이란 시라즈 왕들의 무덤인 낙쉐 로스탐과 하메단의 ‘간자네메’절벽에도 이와 비슷한 글귀가 있어 이들 모두가 구약 시대의 진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자동차 여행의 장점은 누가 뭐라해도 자유로움과 기동력이다. 이란처럼 기름값이 싸고 도로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 자동차 여행은 한마디로 여행광인 필자에게 행운 중에 행운이다.
차를 몰고 비포장도로를 일부 따라 암벽 비문이 있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낯선 이방인인 필자가 차에서 내리자 구경거리가 되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치니, 자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첫 마디에 코레 쥬누비하고 묻는 사람은 열에 한 명 될까 말까 한다. 하도 말을 걸고 귀찮게 하면 ‘이놈들아 양곰 나라 사람이다’ 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다. 작년에 11월 초에 끝난 대장금의 장금이를 이곳 사람들은 양곰이라고 부른다.
3월 30일(일) 이란 공휴일을 기해 검은 차도르를 두른 여인들이 수도 없이 많이 보인다. 이 비헤스툰 유적이 유명하기는 유명한 모양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니.. 작년 1월 말에 이곳을 한 번 탐방한 적이 있었으나 그저 근성으로 둘러보았던 터이라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탐방에 나섰다.
1년이 약간 더 지난 지금 이곳은 완전 변신 중에 있었다. Imformation Desk를 곳곳에 세우고 각 유적지 앞에 자세한 설명서를 세워놓았다. 이렇게 이름 난 유적 관광지에 외국인이라고 나 혼자 뿐이다. 아직 관광 개방 정책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란에서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이곳 제일 먼저 만난 유적은 입구에서 걷다보면 오른쪽 낮은 곳에 기원 전 2세기의 헤라클레스 조각(culpture of Hercules)이 근엄하게 드러누워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몹시 훼손이 된 상태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는데 머리 팔을 몰라보게 재생 시켜놓았다.
그 뒤쪽 위로 조금 올라가면 비헤스툰의 하이라이트인 다리우스 대왕(다리우스1세)의 비문이 절벽에 새겨져있다.
비문에 다리우스 대왕 자기 아버지 캄비시스를 둘러싼 정치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오 왕은 캄비시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Bardiya: 그리스어로는 스메르디스 Smerdis)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그 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자산이 바르디야라고 속여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기에 이른다. 그 때에 캄비시스는 이집트 정벌 중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오 왕은 자기가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이 베히스툰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시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불길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다리오 대제는 그의 즉위 1년 동안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첫해 그는 9번의 전쟁을 치루고 9명의 반란군 대장들을 처형하였다. 이들 반란군들의 이름과 그들의 나라명이 베히스툰 부조물의 하단에 세 가지 쇄기문자들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체포하여 처형한 마지막 반란군 대장은 이 부조물의 맨 뒤에 서 있는 스쿤카이다.
그는 이란의 북동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대장이었는데, 그는 비문에서 고깔모자를 쓴 모습을 한 사람으로 판단된다.
비문 부조 왼쪽에 다리오 왕은 뒤를 따르는 2명의 신하가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브리야스(Gobryas)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페르네스(Intaphernes)로 활을 들고 있다. 다리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하필이면 이 비문을 왜 여기에 새겼을까 하는 이유는 당시 바빌론 제국, 페르시아 여름 궁전이 있었던 하메단, 겨울궁전이 있었던 수사를 이으면서,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와 통하고 서쪽으로는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비단길(Silk Road)’의 원형이 되었던 ‘왕의대로(Royal Road)' 였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쉽게 발견하고 다리오왕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즉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비헤스툰 산은 매우 평평한 절벽을 많이 지닌 산이었다. 산 아래에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형 샘터가 하나 있었다.
이 ‘왕의대로’를 오갔던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기에 이곳이 더 각광을 받은 셈이다. 비헤스툰산은 다리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이처럼 실제적,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장소에 다리오 왕은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비헤스툰 석비’를 새기게 되었는데, 후일에 이 비문이 ‘고대 근동 비문의 여왕(Empress of Oriental Inscriptions)'이라 불리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설형문자로 조각된 비문과 부조가 아스라이 보였다. 세계적인 유적인 이 비문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쳐놓았다.
암벽의 비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에 쓰이고 있던 3개 언어로 쓰여 있어 인류 최초의 문자라고 부르는 설형문자(쐐기문자)인 수메르어를 해독하는 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카드어, 엘람어 및 고대 페르시아어의 3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내(다리우스)위 족보로 8명이 왕이었다. 나는 아홉 번째 왕이다. 나는 양쪽으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로써 왕위의 정통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더 이상 자신의 등극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 듯 하다.
비헤스툰 비문은 폭 5.5m, 높이3.0m로서 다리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한지 6년인 기원전 48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비문에 새겨진 페르시아어는 영국의 한 장교에 의해 처음으로 해독되었다. 이 페르시아어가 해독되고 다음으로 엘람어가 해독되고 다음으로 아카드어가 해독되어 마침내 인류의 최초 사전인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에 의해 수메르어가 해독되어 수많은 수메르의 점토판으로부터 고대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베일을 벗게 되었다고 하는 기념비적인 유적이다.
또 비문의 중앙 상단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밑에 다리우스 왕이 오른 손을 아후라마즈다 신을 향해 들고 있고 한쪽 발은 반역의 괴수인 가우마타(Gaumata)를 짓밟고 서 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다리우스 대왕의 유적은 이란 시라즈 왕들의 무덤인 낙쉐 로스탐과 하메단의 ‘간자네메’절벽에도 이와 비슷한 글귀가 있어 이들 모두가 구약 시대의 진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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