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강해[종합]/성막·성전

★강문호 목사님-성막론에 관한 자료

영국신사77 2008. 12. 2. 23:55
                                             강문호 목사님-성막론에 관한 자료

 

 

                                                                                       다드림   http://cafe.daum.net/hthccm/NK6Y/14  08.10.1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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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으로 성경을 말한다

(성막의 최대 권위자 강 문호 목사)

 

Ⅰ. 성막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은 쾌쾌 묵은 성막을 현대인이 왜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막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심지어 성막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조차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꼭 알아야만 합니다. 성막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이유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아닙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정비공을 만나야 하듯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행복만이 깃들어 있었고 죄가 무엇인가를 몰랐고 저주와 관계가 없었고 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인간은 마귀의 식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같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고쳐질 수가 있습니다.

 

   아담은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3:21)

  가인과 아벨은 제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4:1~4)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돌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창 8:20~22 15:12~21 46:1~3)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에서 사람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완성시키던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성막”이란 본래 단어 “미쉬칸”이란 뜻으로, 거처한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에, 성막공부를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중심은 오실 예수, 신약의 중심은 “다시 오실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미국 흑인들에게 “사람의 담요” 보내기 운동을 하고 계시는 헨리 홈 선교사가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어린 딸에게 성경을 매일 읽으라는 명령을 내셨습니다. 성경을 읽던 딸이 “아빠 너무 두꺼우니 요약 좀 해줘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약 한달간 요약 해보니 결국은 “예수” 2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4:46~47)


 모세의 글을 믿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모세 5경이 예수 이해의 첫 단추가 됩니다.

 그런데 모세 5경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막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성막을 모르고는 결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학자는 “구약의 성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신약의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성막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막 전체는 예수의 사건이요, 성막의 모두는 예수의 사실이요, 성막의 전부는 예수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실 때 성막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희 육체니이다”

                                                                                                                                (히 10:20)

 

 라고 성막과 예수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공부는 곧 예수 공부입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13장, 레위기에서 18장, 민수기에서 13장, 신명기에서 2장, 히브리서에서 4장, 모두 50장이 성막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모르면 성경에서 막대한 부분에 무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성막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천지창조가 거창한 것이지만 겨우 11장이 할애되었을 뿐입니다. 성막은 천지창조보다 4배 이상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도 겨우 14장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단일 주제로 최고로 많은 비중을 둔 것은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4. 성막은 죄인의 구원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너무나 귀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입니다.


(1)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 주시는 장소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죄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서 죄된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라고 언약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 하시는 장소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 1:18). 그리고 성막을 본 자는 예수를 본 자입니다. 성막이 곧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3)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요 성막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엡 1:1)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 29:42)

 

이같이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 같이 대화하는 너무도 흥분된 곳입니다.

 

(4)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주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을 안 만나주십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급살 맞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막에서는 죄인을 만나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지니 그리하면 열랍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으시는 모습이요 방법입니다.

 

(5)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성막에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았다는 영수증입니다. 제단에서 불이 타오를 때 이는 바로 용서의 표징입니다.

 

 이같이 성막은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5.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 철저한 성령의 인도, 가장 분명한 성령의 인도는 성막의 인도입니다. 성막 완성 후 바로 성막에 구름기둥이 임하였습니다. (출 40:33)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화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 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것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4~38)

 

 성막 시대의 구름기동과 불기동의 역사는 오늘날 성령의 역사와 동일합니다. 구름기동과 불기둥처럼 성령은 다음과 같이 7가지 신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출발 신호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 하였으며”(출 40:36~37)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자 이제는 그만 가자! 여기서 오래 머물렀으니”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약 2,000명 되는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자를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12명의 족장회의에서 타협을 본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민주화되면 안됩니다.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좀 더 쉬고 싶어도 구름기동이 떠오르면 가야했습니다. 좀 더 가고 싶어도 구름기둥이 머물면 멈추어야 했습니다. 과거는 구름기둥이 출발 신호 소리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출발 신호를 주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성령님은 바울과 바나바로 해외 선교를 이루라는 출발 신호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종하였습니다.(행 13:1~3)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출발 신호를 주셨습니다. 성막 시대에는 구름기둥이 출발 신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7교회에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시며 늘 성령께서 출발 신호를 주셨습니다.

 

 (2) 방향 신호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갈까 저리갈까 도무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디로 갈까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름기둥이 가는 곳으로 방향을 잡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안 좋은 길 같았어도, 나중에 지나놓고 보면 가장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홍해쪽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먼길 같았으나 너무도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그리로 갔기에 애굽 군대는 다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 살게 된 것입니다. 만약 가자는 길로 직접 갔더라면 애굽 군대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 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방향을 주십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 전도가는 것을 막았습니다.(행 16:6) 그리고 빌립보로 방향을 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잠 16:1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 16:3)

 

 하나님께 전적 복종이 완전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소련에서 완전 자유가 보장된 미국으로 망명온 솔제니친이 미국에 와서 한 말은 “자유가 많아 고민이 생겼다. 시키는 대로만 사니 선택의 고민이 없어 오히려 자유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방향대로만 살면 고민이 없습니다.

 

 (3) 사랑 신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2가지 사랑입니다.

 

 <알맞는 사랑>

 밤에는 추운 광야이니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낮에는 더운 광야이니 시원한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알맞는 사랑입니까! 만일 반대로 낮에는 불기둥으로, 밤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했다고 봅시다. 얼마나 고역이었을까요 또 밤에는 어두워 구름기둥이 안 보일테니 잘 보이라고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낮에는 불기둥이 밝은 해 때문에 안 보일테니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알맞은 사랑인가요? 너무나 놀라운 사랑이요 너무나 기가 막힌 사랑이요 너무나 신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26, 35~37)

 

 <언제나 사랑>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밤낮으로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지금은 성령이 우리와 늘 같이 계십니다.

 

 

 (4) 생활 신호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발도 도착도 출발과 도착 사이의 생활도 모두 구름기둥 불기둥에 의존하였습니다. 두 기둥이 머무는 기간이 생활 기간이요 머무는 공간이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한치도 벗어나면 추워서 죽고 더워서 멸망되었습니다.

 

 풀가에 매어 놓은 소가 그 끈을 반경으로 풀을 뜯는 것과 같습니다. 두 기둥을 이스라엘이 벗어날 수 없듯이 지금은 성령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슬려도 안되고 성령을 훼방해도 안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유 20, 엡 6:18, 롬 8:28) 성령 안에서 찬송해야 하고 성령으로 말씀도 전해야 합니다.(행 1:18)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만 붙잡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에만 의지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5) 하나님 신호

 

 200만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이 두기둥을 친히 다 보았습니다.(38절) 두 기둥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친히 보고 따라 다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하나님이 주신 신호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6) 영광 신호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기둥이 나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두 기둥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 천사가 루시퍼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 남자가 아담이요 여자가 하와였습니다.

 

 그 때는 두 기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나, 이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성령 충만만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간절한 명령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7) 선교 신호

 

 “온 족속이” 친히 보았습니다. 온 족속이 이를 보게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누구도 빠져서는 안됩니다. 다 보아야 합니다. 다 동참해야 합니다. 두 기둥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 족속이 구원받도록 성령은 지금도 맹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셩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4~8)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십니다. 그때 두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제는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막 공부를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떠한지를 알아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6. 신앙 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수 있습니다

 

 문에서 구원론을, 번제단에서 죄론과 보혈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등대에서 사명론을, 떡상에서 축복론과 헌신의 생활을, 분향단에서 기도론을, 법궤에서 부활론· 천국론· 계시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 전체요 성경의 전체입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의 완벽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균형잡힌 신앙 생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7.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한 것은 예수의 모형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3~4)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한 홍해는 세례의 모형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 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 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아담이 입었던 가죽옷은 구원의 모형이고, 촛대(등대)는 하나님의 임재의 모형입니다. 구리뱀은 십자가의 모형이고,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지고 올라간 장작도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멋진 모형은 바로 성막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8. 복받는 길을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 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십니다(신 5:2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아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2~27)

 

 하나님의 뜻은 축복입니다.

 

 (1)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첫 선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번째 선포는 축복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2:27~28)

 

 (2) 노아에게 주신 말씀

 

 온 인류가 홍수로 다 멸망당하였습니다. 노아의 가정만 남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말씀도 축복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3)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아브라함을 메시야의 첫 조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자 마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

 

 고 말씀하셨습니다.

 

 (4) 이삭에게 주신 말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처음 하신 말씀도 축복이었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26:3)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시고는 꼭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복되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하게 되면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 복을 찾는 비결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용서받는 길이 번제단 안에 숨어 있고, 은총을 얻는 길이 물두멍에 들어 있고, 축복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 분향단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9.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육의 고장은 병원에서 진단하여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고장은 성막에서 말씀으로 고치게 됩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성막을 문부터 법궤까지 공부하면 영이 어디가 고장나 있는지 영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 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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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2) 번제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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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죄는 무엇인가 나의 죄를 예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 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3) 물두멍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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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죄를 버린 후 성결 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중생하고 지은 죄의 사슬을 끊었는가? 버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죄는 없는가?

 

 (4) 촛대(등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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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빛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가?

 

 (5) 떡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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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6) 분향단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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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가?

 

 (7) 법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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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주님을 통하여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나는 말씀속에서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죽은 나무에게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가?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나와 같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는가?

 

 이같이 성막 공부를 하면 영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막 공부를 해야 합니다.

 

 

                                            10.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진정으로 알면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막을 공부하면 성경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이 자동적으로 됩니다.

 

 어설프게 예수를 알았던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예수를 분명히 안 다음부터 베드로는 예수께 모두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아가야 파트리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때까지 그는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성막은 예수를 너무도 분명히 조각하여 주기에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합니다.

 

 이같이 성막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10가지입니다. 성막은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2.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이야기입니다.

4. 죄인의 구원 장소입니다.

5.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6.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7.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8. 복 받는 길을 가장 정확히 알려 줍니다.

9. 영혼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10.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Ⅱ.성막의 명칭 (출 25:8, 26:30)

 

 성경에서 성막에는 10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다른 명칭 같지만 모두 “성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장막

 

 “모텔”이라는 원어는“텐트”라는 뜻입니다. 성막의 겉모양은 텐트이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성경에 130회 가량 나오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찌니라”(출 25:9)

 

 2. 성막

 

 원어 “미쉬칸”은 “거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가장 신성한 곳이요, 최대로 거룩한 곳이요, 최고로 엄숙한 곳입니다. 성경에 성막이란 말은 100여회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찌니라”(출 26:30)

 

 3. 회막

 

 회막은 “모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회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3지파씩 12지파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일 때에는 늘 성막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일 때는 늘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1) 회개하였습니다. 2) 제사드렸습니다. 3) 재판하였습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 29:42)

 

 이 회막에서, 1)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3) 사람들끼리 만났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자리 회막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4. 증거막

 

 회막에 모여 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3가지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1) 현재 어떤 사건에 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증거해 주었습니다.

2) 과거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늘 잊지 않도록 증거하였습니다.

3) 재판할 때 증인들이 와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때로는 증거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찌니라”(민 1:53)

 

 5. 성소

 

 성막을 “거룩하게 구별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성소”라 불렀습니다. 거룩한 분이 계시니 거룩하였고 그러하기에 성소입니다. 성막이 있던 땅이 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소입니다.


 “내가 그 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시되”(출 25:8)

 

 6. 법막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그곳에 보관되어 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바로 그곳에 있기에 “법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이 대제사장인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 하였느냐”(대하 24:6)

 

 7. 하나님의 집

 

 장막은 하나님과 관계된 집이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집입니다.

3) 하나님께 제사하는 집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집입니다.

5) 하나님을 섬기는 집입니다.

 

 이같이 성막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삿 18:31)

 

 8.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여호와”이시기에 하나님의 집이나 여호와의 집은 동일합니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 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 1:7)

 

 9. 세상에 속한 성소

 

 본래의 성소는 하늘 나라에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성소가 참 모습입니다. 성막은 단지 이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모형이 세워진 곳이 세상이기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히 9:1)

 

 10.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성막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불렀습니다.


 “다읫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하니”(행 7:46)

 

 

 

 이같이 성경에서 성막은 여러 명칭을 때에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성막의 다른 이름”입니다.

 

장막, 성막, 회막, 증거막, 성소, 법막, 하나님의 집, 여호와의 집, 세상에 속한 성소, 하나님의 처소.

 

 

 


    Ⅲ.성막의 변천사 (수 3:8, 4:19, 18:1)

 

 성막은 모세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받았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수차례 변화되었습니다. 본 장에서는 성막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1. 광야 성막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던 모세가 율법을 받았고 성막을 받았습니다. 이때가 대개 BC 1220년경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2년째 되는 1월 1일 성막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자 마자 착공하여 약 10개월 남짓 동안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1월 1일에 낙성식을 하려고 부지런히 서둘렀는지도 모릅니다. 성막이 완성되던 날 구름기둥이 떠올랐고 그 날 밤 불기둥이 이스라엘 진영을 덮었습니다.(민 9:15)

 

 그후 50일 정도가 지난 2월 20일 성막을 덮었던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다시 걷여져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막 최초의 이동이었습니다.

 

(1) 성막 운반인

 

그러나 이동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아무나 성막을 걷거나 만지거나 나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한 사람만이 가능하였습니다.


게르손 자손 (민 3:21~31)

성막, 장막 덮개, 회막 문장, 뜰 휘장, 4면의 문장 축, 등은 게르손 자손이 운반 책임을 지었습니다.


고핫 자손(민 3:31)

가장 중요한 것들을 고핫 자손이 맡았습니다. 증거궤, 상, 등대, 단, 그리고 각종 기구들을 날랐습니다.

 

(2) 성막 운반법

 

증거궤 운반법(민 4:4~6)

칸 막은 장으로 증거궤를 덮고 그 위에 해달 가죽으로 씌우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어 날랐습니다.

 

떡상 운반법(민 4:5~8)

위에 청색 보자기를 덮고 그 위에 대접, 숟가락, 주발, 붓는 잔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떡을 놓고 그 위에 홍색 보자기로 씌운 다음 해달 가죽을 덮어 운반하였습니다.

 

등대 운반법(민 4:9~10)

청색 보자기로 등대, 불집게, 불똥 그릇, 쓰는 기름 그릇을 덮고, 해달 가죽으로 덮어 날랐습니다.

 

분향단 운반법(민 4:11)

청색 보자기로 덮어 해달 가죽으로 씌워 날랐습니다.

 

기타 모든 기물 운반법(민 4:12~14)

역시 청색 보자기로 싸서 해달 가죽을 덮어 날랐습니다.

 

(3) 성물 운반 법칙(민 4:15~20)

 

싸는 작업은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메는 것은 고핫 자손에게만 가능하였습니다.

메더라도 만지면 죽었습니다.

지성소의 물건은 누구든지 접근만 해도 죽었습니다.(민 4:19)

지성소는 대제사장 외에 들어가면 죽었습니다.(민 4:20)

 

이같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을 맡아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8580명이었습니다.(민 4:48) 그러나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정식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암 5:25)

 

그 이유는 추측건대 가는 곳마다 대적들과 전쟁 중이라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가나안 성막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능한 한 사람들이 적고 무덤들이 없는 곳을 성지로 골랐습니다. 법궤를 앞장 세워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넜기에 성막에 대한 애착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수 3:8) 길갈에서 그동안 광야 생활에서 지키지 못한 율법 할례를 행하고 그곳에 성막을 세웠습니다.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수 4:19, 5:10, 9:6, 10:6, 10:43)

 

그들은 진 치기 전에 꼭 먼저 진 가운데 성막을 만든 것이 순서였습니다. 그 후 길갈에서 32km 떨어진 실로로 성막을 옮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서 회막을 세웠으니”(수 18:1)

 

그 후 여호수아가 어느 정도 땅을 점령하였을 때 성막에 모여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실로 성막에서 생긴 일들이었습니다.(수 19:51) 얼마 후 실로의 성막은 텐트형이 아닌 건물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다니던 광야 생활에서 안정된 생활로 바뀌자 성막의 모습도 이동형에서 고정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하나님의 전”이라고 이름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삼상 1:9)

 

또 (삼상 3:3)을 보면 어린 사무엘이 궤 옆에서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법궤에는 대제사장만 1년에 1차례씩 들어갈 수 있는데 사무엘이 늘 그 옆에서 잔 것을 보면 성막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3. 빼앗긴 법궤


실로 성막의 관리자는 엘리 제사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그는 3가지 관리에 실패하였습니다.

 

(1) 자녀 관리 실패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 2:1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삼상 2:22)


(2) 성전 사환 관리 실패

제사장의 사환들이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론 드릴 제물까지 가져다가 먹는 큰 죄악을 범하였습니다.(삼상 2:13~17)

 

(3) 자신의 영 관리 실패

엘리의 당시 나이가 98세라(삼상 4:15) 기도하기에 기력이 쇠하였고 일하기에 나약하였습니다. 그래서 영력은 약화될 때로 나약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 나가 죽었습니다. 법궤도 불레셋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가 의자에 앉았다가 거꾸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실로의 성막은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법궤없는 성막은 엔진없는 자동차와 같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긴 후 잠시 성막 부재 시대가 되었습니다.

 

 

 4. 다시 찾은 법궤

 

불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쳐박아 놓았습니다. 섬김과 경외가 전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법궤는 경외의 대상이지 보관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1) 아스돗의 법궤

불레셋은 실로의 법궤를 에벤에셀에서 다시 아스돗으로 가지고 왔습니다.(삼상 5:7) 그들의 다곤 신 옆에 법궤를 두었습니다. 이튿날 보니 다곤 신이 앞으로 엎드려져 넘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세웠습니다. 이튿날 다시 가보니 다곤 신이 목이 잘리고 두 손목이 끊어진 채 다시 엎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는 독종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회의를 거듭한 결과 가드로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2) 가드의 법궤(삼상 5:18)

법궤가 가드로 오자 가드에서도 큰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아스돗보다 더 심하게 전 주민이 다 독종에 결렸습니다. 다시 법궤는 에그론으로 보내졌습니다.

 

(3) 에그론의 법궤(삼상 5:10)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에그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망의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복이지만 불레셋 사람들에게는 화와 저주의 씨앗이었습니다. 신나게 빼앗았는데 처치 곤란이었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스스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새수레에 실려 2마리의 소에 끌려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졌습니다.

 

(4) 기럇여아림의 법궤

불레셋에서 보내온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 보존되었습니다. 엘르아살이 정성껏 보관하였습니다. 이같이 성막과 법궤의 분리 시대가 장기간 계속이 되었습니다.

 

 

5. 법궤 운반 사고

 

 다윗이 왕이 되자 가장 먼저 추진한 정책은 “법궤 운반 정책”이었습니다.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궁중 곁으로 나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3만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도 조직하였습니다. 웃사와 아히오 두 사람이 직접 법궤를 나르는 책임자로 임명 되었습니다.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 법궤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갑자기 소들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웃사는 떨어지려는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웃사를 쳐서 그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온 백성의 흥분이 홀연히 무서움으로 변했습니다. 잔치가 장례로 바뀌었습니다. 충성스런 웃사가 즉사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볍궤 운반을 편리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힘들여 반드시 어깨에 메고 날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 운반은 잠시 중단되어 임시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방치해 두게 되었습니다.(대상 13:1~14)

 

 

6. 두개가 된 성막

 

 얼마 후 다윗은 자기의 궁 옆에 성막을 세우고 법궤를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해 놓고야 마는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가로되 레위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섬기게 하셨음이니라”(대상 15:1~2)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성막이었습니다. 궤를 옮겨 두던 날 다윗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정성껏 드렸습니다.(대상 18:1~3) 그러나 성막이 하나 더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기브온 성막이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로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앞에 모시게 하여”(대상 16:39)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대상 21:29)

 

분명히 다윗은 모세가 지은 성막을 두 성막으로 분리시켰습니다. 법궤는 예루살렘에 기타 다른 성막 성물은 기브온에 두었습니다.

 


7. 성전이 된 성막

 

 기브온 성막에서 1000번제의 복을 받은 솔로몬은 성전건축에 임하였습니다. (대하 1:1~13) 모리아산에 (대하 3:1) 아버지 다윗이 모아 놓은 금 은 기타 수많은 재료를 사용하여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막형 성전을 지었습니다. 물두멍은 10개나 만들었습니다.(대하 4:6) 등대도 10개였습니다(.대하 4:7) 떡상도 10개였습니다. (대하 4:8) 법궤 안에는 두 돌판만 남았을 뿐입니다.(대하 5:10) 이제 성막은 크기도 모양도 모세의 성막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법궤 안에 있던 것은 없어지고 10배의 기물들이 여기저기 자리잡았습니다. 성전의 물량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듯 하였습니다. 7년간 지었습니다.(대하 8:1) 담군 7만명, 산에서 나무를 작벌하는 이가 8만명, 감독 3,600명 등 모두 153,60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대단한 공사가 끝났습니다. 성막이 성전화된 후 낙성식도 대단하였습니다. 소를 22,000마리 양은 120,000마리 잡았습니다. 7일간 계속된 장엄한 낙성식이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 나타나 그 성전에서 다음과 같은 축복을 주는 자리가 될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대하 7:12~16)

 

1) 기도응답의 자리(12)

2) 죄 용서의 자리(12)

3) 재앙 제거의 자리(13)

4) 병 고침의 자리(13)

5) 땅을 고치는 자리(14)

6) 하나님이 사시는 자리(16)

 

그래서 그 날부터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그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8. 불가시화된 성막

 

 솔로몬 이후 텐트 같은 성막은 없어지고, 세계 도처에 솔로몬형 성전형 성막이 여기 저기에 세워졌고, 또 세워지고 있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후에는 장소에 그렇게 강조점을 두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이때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대하여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할지니라”(요 4:21~24)

 

 그래서 예수 이후 보혜사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후 예배 장소는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시적 성전은 불가시적 성전으로, 땅의 장소는 마음이란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땅 위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 책을 북경에서 쓰고 있습니다. 북경에서도 제일 연합 교회인 충문교회에서 1,700여명이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이 교회 의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5명의 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집사님이 설교하였습니다. “네 마음에 천국을 이루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966년 6월 25일 문화대혁명으로 성경을 다 불태우고 온 교회 건물을 헐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온 노인들이 80%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익을 포기하고, 출세를 포기하고, 예수만 붙잡고 살아온 이들입니다. 건물 교회는 없어도 마음의 성전을 지켜온 이들이었습니다.

 

 이같이 모세가 받은 성막은 오늘날 불가시 성전이 마음의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마음이 천국이요 성막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마음에 주님은 영원토록 같이 계실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Ⅳ. 성막 뜰 울타리 (출 27:9~19)

  

 9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1    그 북쪽에도 너비가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2    뜰의 옆 곧 서쪽에 너비 쉰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13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14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15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17    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8    뜰의 길이는 백 규빗이요 너비는 쉰 규빗이요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9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

 

 

 

1. 울타리의 모양

 

 성막을 밖에서 보면 울타리만 보게 됩니다. 동쪽이나 서쪽에서 보면 10개씩의 기둥이 보이고 남쪽이나 북쪽에서 보면 20개씩 보입니다. 기둥의 높이는 2,5m 정도(5 규빗)가 되어 사람의 키보다 좀 높습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문 외에는 모두 세마포로 둘러 쳐져 있습니다.

 

 

2.울타리의 기둥

 

 울타리의 60개 기둥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놋받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 고리가 달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놋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들어 들었을 때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다 고침받았습니다. 그후 놋은 십자가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과 은은 변함이 없는 금속으로 언제나 믿음을 의미합니다. 세마포는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울타리는 십자가에서 만이 믿음으로 성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울타리의 높이

 

 이미 언급한대로 울타리의 높이는 2,5m 가량입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안을 절대로 들여다 볼 수 없었습니다. 성막은 예수의 모습인데 울타리안에 들어가야만이 예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불신자가 목사님에게 “예수를 보여 주십시요 믿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목사님께서 “믿으십시요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믿고 보는 것이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4. 울타리의 의미

 

(1) 보호

울타리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안은 보호를 받지만 밖은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식구들은 모두 보호를 받았고 방주 밖에 있는 이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교회만 보호 받으며 들림 받게 될 것입니다.

 

(2) 울타리 안은 안전하지만 밖은 언제나 화가 미치는 곳입니다

울타리의 60개 기둥은 40년간 단 한번도 고장난 기록이 없이 안전하였습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시 91:10)

 

말세에는 3대 화가 있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계 8:13)

 

<화 화 화 3번 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는 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성전 밖 마당만 밟은 자에 임하는 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자들을 척량하되 성전밖 마당은 척랴?지 말고 그냥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불신자에게 오는 화

“죽음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 찌어다”(계 13:8~9)

 

이들은 다 울타리 밖에 있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울타리안만이 안전합니다.

 

(3) 소유

울타리는 소유를 의미합니다. 울타리 친 안은 주인의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땅에 울타리를 두르게 됩니다. 주인의 것과 주인의 것이 아닌 것의 경계가 바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울타리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밖에 있으면 마귀의 식구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3)

 

“내가 너를 구속했다”는 말은 성막 안의 번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울타리 안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4) 공급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두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안에 있는 이는 연결되어 있는 이요, 연결되어 있는 이는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이입니다. 말씀이 공급됩니다. 빛이 공급됩니다. 복이 공급됩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공급됩니다. 구름 우산으로 시원함이 공급되고 불 우산으로 밤에는 따뜻함이 공급됩니다. 울타리 안은 공급을 의미합니다.

 

(5) 울타리안과 밖은 양과 염소의 구별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구별입니다.

 

복과 죄의 구별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구별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소입니다.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일입니다.

물건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물입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도입니다.

 

울타리 안은 울타리 밖과 무엇이나 구별됩니다. 이같이 울타리는 보호요 안전이요 소유요 공급이요 구별을 의미합니다.

 

 

 

Ⅴ.성막문 (출 27:13~16)


성막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동을 향하여 뜰 동편의 광도 오십 규빗이 될지며 (13) 문 이편을 위하여 포장이 십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14) 문 저편을 위하여도 포장이 십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15)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16)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자! 이제부터 문으로 들어가며 문의 특징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1. 오직 하나의 문

 

 성막 사방에는 12지파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한 쪽에 3지파씩입니다. 그러므로 한 쪽에 문 하나씩 내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그러나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성소에 들어가는 데는 오직 한 문으로 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소가 아무리 좋아도 문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성격을 7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1) 나는 선한 목자다.

2) 나는 생명의 떡이다.

3) 나는 빛이다.

4) 나는 길이다.

5) 나는 진리다.

6) 나는 생명이다.

7) 나는 문이다.

 

 

 

2. 큰 문

 

오직 하나의 문은 작은 문이 아니라 큰 문입니다. 동쪽 25m(50규빗) 중에 10m(20규빗)가 문입니다. 우리는 좀체로 10m나 되는 통문을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구라는 고기가 앞에서 보면 입만 있는 것처럼 성막의 동쪽은 거의가 문입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그렇게 큰 문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감격스럽습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든지 들어와야 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명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예루살렘 사람도 들어 와야 합니다.

온 유다 사람도 들어 와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들어 와야 합니다.

땅 끝까지의 사람들도 들어 와야 합니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다 들어와야 하기에 모두에게 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 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릅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3. 동쪽 문

 

동쪽의 첫 인상은 해 뜨는 곳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햇살이 비취는 곳입니다. 마귀의 세력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밝은 곳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더구나 문 앞에는 유다지파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메시야 주님은 유다지파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 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에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동쪽 문은 유지파가 위치한 문이며 소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두가 들어 있기에 동쪽 문은 소망입니다.

 

 

4. 4색의 문

 

성막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짜여 있습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깔입니다. 그래서 청색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문입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왕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홍색은 피 색깔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백색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는 베실은 백색인데 이는 “성결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여론 조사에서는 참으로 다양하게 타나났습니다.(마 16:13~20)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그러나 이는 잘못 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성막 문으로 대답하면 아주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막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100점짜리 대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5. 문턱이 없는 문

 

이 문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누구나 들어 갈 수 있으며 누구나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예수 믿기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영접하면 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6. 개인 구원의 문

 

들어가는 사람마다 자기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남이 열어 주지 않습니다. 각자 예수를 영접하고 들어와야 합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까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7. 열리고 닫히는 문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이 아닙니다. 열고 들어가면 곧 닫히고 맙니다.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문은 아닙니다.

 

 

 

Ⅵ.번제단(출 27:1~8)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1)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2)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3)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5)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6)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7)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8)”

 

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1. 번제단의 뜻

 

단은 “미쯔바하”란 말로서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의 뜻입니다. 번제는 “오라”란 말로 올라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동물을 죽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사람이 긴급한 문제로 왕을 만나고 싶어 궁궐 앞에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관리가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가 “왕을 만나고 싶어요” 물었습니다. “네가 왕을 만나게 할 수 있니 ”비웃으며 물었습니다. “따라오세요”하며 어린아이가 앞장섰습니다. 알고 보니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왕을 만나듯 번제단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는 유일한 문으로 들어가 피로 죄를 닦는 번제단을 통하여 하나, 하나 가까워지게 됩니다.

 

 

2. 번제단의 특징

 

(1) 재료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뜻합니다. 놋은 물론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버림받은 조각목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미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사가 간청해도 죽여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그 사형수에게 미국 국기를 씌웠습니다. “죽일테면 죽이라” 외쳤습니다. 차마 미국 국기를 쏠 수가 없었습니다. 국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기로 씌웠기에 살았습니다. 버림받은 인간도 십자가로 싸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2) 크기

 

가로 세로 각각 2.5m(5규빗) 높이가 1.5m(3규빗)입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숫자입니다. 온갖 병신들이 모이는 솔로몬 행각은 5기둥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5인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의 가로도 5규빗 세로도 5규빗입니다. 죄와 이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고통의 경험입니다. 짐승이 학살되어 타는 것은 고통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피는 고통의 절정입니다.

 

3은 하나님 숫자입니다. 성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때문에 같이 고통당하는 자리가 바로 번제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스런 인간 때문에 그의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번제단은 죄사함받는 자리, 죄 버리는 쓰레기장, 마귀와 이혼하는 자리입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모양


4군데 4개의 뿔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명의 뿔”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에 반역한 아도니야가 도망가 제단뿔을 부여 잡고 있었습니다. 반역하는 즉시 사형이었습니다. 이때 병사가 아도니야를 잡으러 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니다”(왕상 1:51)

 

이 보고를 받은 솔로몬 왕은 아도니야를 살려 주었습니다. 제단뿔은 생명의 뿔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뿔이라”(시 18: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4) 의미

 

4뿔입니다. 한개로 족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 서 남 북에 한개씩 4개의 뿔이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동서남북으로 다 빠져 나가야 합니다. 북(north) 동(east) 서west) 남(south)의 첫 글자는 news입니다. 복음만큼 큰 뉴스는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큰news는 역시 생명입니다. 예수 피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예수 피는 묻어져야 합니다. 예루살렘도 온유다도 사마리아 땅 끝까지 죄인을 구원시켜 생명을 주신 예수 news가 퍼져 나가야 합니다. 나는 지금 신의주를 내려다보며 중국 단동 압록강 호텔 614호실 창가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방금 신의주 땅 30m 가까이 까지 갔다 왔습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곳, 이 생명의 뿔은 사방으로 펴져 나가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5) 불

 

번제물을 번제단에 올려놓자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불이 내린 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사랑을 말합니다. 응답을 표합니다. 만일 다른 불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지내다가 하나님이 두명을 죽여 버렸습니다.(레 10: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동쪽의 번제단과 서쪽의 속죄소는 멀었습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우며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순간입니다. 다른 불은 안됩니다. 인본주의가 섞여서는 안됩니다. 순수 복음이어야 합니다. 마귀의 식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입니다. 당당히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입는 순간입니다.

 

나폴레옹을 태운 말이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생명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나홀레옹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며 “너는 장교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장교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한 대위가 “너는 사병이니 사병 석으로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때 그는 “난 장교입니다”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누가 그러더냐?”물었습니다. “황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인정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송사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죄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는 곳이 번제단이요. 그 증거가 불이었습니다.

 

(6) 번제단의 기구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릴 때 보조기구가 5가지 있습니다.(출 27:3)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다 필요한 그릇입니다.

 

재를 담는 통
재를 담는 통은 청소 통입니다. 번제단에서 태운 나무, 제물의 재가 광야 바람에 날리는 것은 그리 반가운 것은 못됩니다. 성막 안이 더러워지고 세마포 울타리가 지저분해지고 성막 주변에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건강상 해롭습니다. 그래서 재를 담아 두었다가 진밖에 버리는 통입니다. 교회 안에 못된 요소를, 가정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꼭 안고 있다가 혼자 어디에 갔다 버리는 아름다운 교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일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고 남은 재까지 다 모았다가 진 밖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짐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가요?

 

부삽

번제단에서 탄 모든 것의 재를 긁어내는 도구가 부삽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다 생기는 찌꺼기, 공동 생활하다가 생기는 시험, 고통, 모두 긁어내고 교회 분위기, 속해 있는 곳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부삽과 같은 성도가 꼭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부삽이셨습니다. 만나는 심령 속에서 병을 긁어내고 귀신을 긁어내고 못된 것을 긁어내는 부삽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이들은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은 부삽 예수를 닮아 부삽 성도로 바뀌고 있는가요?

 

대야

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뺀 후 번제단에 올려 놓기 위하여 고기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 대야입니다. 이는 전도를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을 하는 성도는 제물을 제단까지 나르는 대야입니다. 예수님만큼 큰 대야가 어디 있습니까?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자마다 좋은 대야입니다.

 

“온 세상 위하여 나 복음 전하리 주 예수 이름 힘입어 이 복음 전하자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 해도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기도 힘쓰리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되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 듣고 그 사랑 알도록”

 

고기 갈고리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 온 고기를 찍어서 제단에 넣고 타는 동안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결시키는 기구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사랑의 고리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갈고리 같은 일꾼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는 가장 크고 훌륭한 갈고리입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갈고리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이었습니다. 전선이 폭탄으로 1m 가량 끊어져 통신이 두절되었고 다 전멸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끊어진 양끝을 각각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전기가 몸으로 통하여 새카맣게 몸이 탔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전선이 연결되어 sos를 할 수 있었고 모두가 구출되었습니다. 갈고리 예수를 본받은 갈고리 교인이 꼭 필요합니다.

 

(5) 불 옮기는 그릇(화로)

 

 불은 성령의 불을 의미합니다. 교회에는 불씨가 있어야 합니다. 불같이 뜨거운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불붙이는 이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불을 가져오신 화로는 모든 것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 같이 번제단에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이 보조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이런 것들의 도움으로 모든 죄는 다 소멸되었습니다.

 

 

 

Ⅶ.물두멍 (출 30:17~21)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성막 문을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고 죄를 그 곳에서 닦고 나면 물두멍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제부터 물두멍이 무엇인지를 보십시다.

 

 

1. 물두멍의 재료

 

 여인들이 바친 놋 거울로 물두멍은 만들어졌습니다.(출 38:8) 놋은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두명은 수족을 닦는 곳으로 성결을 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놋)의 피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그 놋은 여인들이 쓰던 거울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쓰던 물건이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육을 아름답게 하던 것이 영을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2. 물두멍의 내용

 

 물두멍에 담긴 내용물은 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합니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이는 주님의 보혈은 어떠한 죄와 실수와 허물이든지 다 깨끗이 씻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결되게 하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들을 그때, 그때마다 닦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물두멍의 목적

 

 번제단에서 이미 죄를 씻었습니다. 이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형벌을 용서받았습니다.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범죄하게 됩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발을 못 닦이게 한 베드로에게 주임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너무나 강력한 단어입니다. 구원에서 낙오된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자는 구원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죄와 불신자의 죄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의 죄는 은혜 아래서의 죄이기에 사랑으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죄는 율법 아래 있기에 멸망 아래 있습니다. 지금은 물두멍의 역할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꿋하엿으니”(요 15:3)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0)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 17:17)

 


4. 물두멍의 위치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졌습니다. 일단 죄를 피로 번제단에서 용서받은 이후에 물두멍으로 올 수가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그런 사람만이 성결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5. 물두멍의 결과

 

 만일 성소에 들어갈 때 수족을 물두멍에서 씻지 않고 들어가면 죽었습니다. (출 30:20~21) 성결해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족을 물두멍에서 씻은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축복이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시 24:3_4)

 

이는 물두멍에서 손닦는 것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에 갈 수 있는 자격은 물두멍을 통하여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이는 물두멍에서 손 닦은 이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 17:9)

 

이 말씀도 물두멍을 연상하고 한 말씀입니다. 손이 깨끗한 자는 능력있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거리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만만하기 때문입니다. 큰소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 말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마귀가 도망가게 됩니다


한 마리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 속에는 귀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이 다니다가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다시 와 보니 그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들어와 전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습니다.(마 12:43:45) 귀신을 쫓은 후 성결 된 마음에는 성령이 임하여 지키게 됨으로 마귀는 다시 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을 통과한 마음은 물두멍으로 지켜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보상이 따릅니다


“내 손에 깨끗함을 쫓아 갚으셨으니” 자! 이제 죄와 이혼하였고 물두멍에서 성결되었으니 성소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셈입니다. 발걸음을 성소 안으로 옮겨 보십시다. 휘황찬란한 황금의 집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Ⅷ. 결론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러가는 약도이다. 문 (오직 하나)에서 예수 믿고, 번제단에서 죄를 버리고, 물두멍에서 성령 받고, 떡 상에서 말씀을 먹어 영적 건강을 얻고, 등대에서 빛 된 사람으로, 분양단에서 기도한 다음에,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속죄소(법궤)에서 만난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을 수 있게 하는 복음의 뿌리다. 곧 성막은 예수님이다.”

 

 

성막의 7대 기구

 

번호

기구

상징적 의미

관련성구

1

뜰  문

(성막의 문)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출27:16;39:40;요10:7,9

2

번제단

   제사장과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출27:1-8; 39:39;

히4:14-15; 9:12-14,26

3

물두멍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30:18-21; 39:39; 요7:37-44

4

진설병상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출25:23-30;39:36; 요6:48,50,55

5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출25:31-39; 39:37;

요1:9; 8:12; 9:5

6

분향단

   중보 기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30:1-10; 39:38;           

롬8:34; 계8:3-4

7

   생명의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25:10-22; 39:35;         

요1:1,2,14

 

 

 

출27: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찌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출27:40 뜰의 포장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뜰 문의 장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회막의 소용

             곧 성막의 모든 기구와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출처 :예배인도자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이현경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