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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들

영국신사77 2008. 9. 2. 12:23

성전들

                                                              알란 밀라드(ALAN MILLARD)


  솔로몬의 성전은 석재와 레바논에서 가져온 백향목 자재로 지어졌다. 이 백향목 숲은 오늘날 레바논에 남아 있는 몇 개 안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광야 여행 중 장막에 거주할 때에, 이스라엘은 회막이라 불리우는 이동식 "천막"성전을 갖고 있었다. 그 이동식 성전의 기본 개념은 B.C. 2,000년 이전의 애굽에서도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보전되어 온 예들은 귀금속을 입힌 나무 들보와 기둥들로 이루어진 구조물로 갖고 있는데, 쉽게 세우기 위한 연결구멍과 고리들이 부착되어 있다. 고대의 그림들은 그것들이 전에 휘장을 어떻게 드리우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P.167을 보라).

 

 애굽에서 경력을 쌓은 이스라엘의 기술자들은 그러한 구조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은 시내 반도에서 얻을 수 있었거나 아니면 이미 그들이 갖고 있던 것들(예를 들면,금과 은)이었을 것이다.

 

 회막은 단순한 설계로 만들어졌다. 회막뜰 안에는 방이 둘로 된 성막과 제물을 드릴 번제라 정결케 하는 의식을 위한 물두멍이 있었다. 성막의 두 방은 너비가 15피트 정도였다. 내부의 방 곧 '지성소'는 정방형이었고 입구쪽의 방 곧 "성소'는 길이가 30피트 정도의 장방형이었다.

 

 가나안땅 정복 이후에 회막은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에 세워진 고정된 성전이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것은 다윗의 큰 포부였다. 하지만 그 포부를 실현한사람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었다. 강한 왕이 이처럼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그때까지 보전되어 온 회막은 하나의 단순한 중앙 성전을 위한 기본 설계도를 제공하여 주었다.

 

 다윗이 값주고 산 예루살렘의 성전터는 지금 "마람 에스쉐리프."(the Mosque of Omar,회교사원)에 덮여 있다. 한가운데의 바위로 된 표면은 아마도 번제단을 두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열왕기상 6-7장과 역대하 3-4장에 나오는 상세한 서술은 아주 완전한 성전의 모습을 제시해준다.이것은 고고학적 발견에서 얻어진 증거에 의해서 보충된다.

 

 성전은 회막의 설계도에 입구의 현관이 덧붙여져 방이 세 개로 되어 있는데 몇몇 가나안의 신전들(예를 들면 하솔과 라스 사마라에 있는 신전들(예를들면 하솔과 라스 사마라에 있는 신전들) 과 비슷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이 활용한 베니게 건축자들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3층으로 된 일련의 다락들이 지성소와 중간방("성소") 밖으로 돌아가며 덧붙여 지어졌다. 입구 좌우편에는 별도로 큰 놋기둥이 서 있었는데 그 기능은 분명치가 않다.

솔로몬의 기능공들은 성전을 장식할 때 여기 보이는 그 당시의 상아 조각상 비슷한 고안에 따라 일했다.

 

 솔로몬의 성전을 에스겔의 성전과 비교한 결과는, 그 전체의 건물이 성전뜰의 평면보다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직무를 맡은 제사장은 성전뜰을 지나 놋으로 써서 만든 큰 번제단(대략 33평방피트에 높이 10피트)를 거쳐서 열두 놋황소가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놋바다(물두멍) 앞으로 해서 성전의 계단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분명히 현관에는 문들이 없었다.대문들이 그 통로를 막고 있었을 것이나 "성소" 입구에는 한 쌍의 접는 출입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문들은 꽃들과 종려나무와 그룹들의 모양이 새겨진 잣나무로 되어 있었고 모든 나무제품들과 같이 다 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이 방에서 제사장은 금으로 된 분향단과 다섯 쌍의 정금 등대들을 보았을 것이다. 벽 상단의 창을 통해서도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바닥의 마루는 금이 입혀져 있었다. 또 만일 '지성소'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 방 전체는 입구쪽에서 들어온 빛으로 희미한 금빛이 감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출입문들은 일년에 한 차례씩 돌아오는 속죄일 외에는 열리는 법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장식의 특징들은 솔로몬 시대 전후의 베니게 놋작품과 상아조각품들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또 애굽과 바벨론 왕들은 그들의 신전 바닥을 금으로 깔고 문과 여러 기구들을 정금으로 만들었던 사실을 자랑하고 있다.

 

 솔로몬의 성전은 B.C. 587년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그 영광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고 보물의 대부분은 외국의 정복자들이 유다를 위협할 때 예물 혹은 조공으로 바쳐진 뒤였다.

 

 아무 위안이 없던 바벨론 포로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준 새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겔 40-43장)은 상세히 서술되고 있는데, 솔로몬의 성전공사에 대한 기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성전뜰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환상에서 본 성전은 건축된 바 없으나 B.C. 537년에 포로생활에서 풀려 고국에 돌아온 백성은 다소 지체한 뒤 B.C. 515년에 이르러 비로소 옛 성전의 재건을 마무리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지식은 그것이 옛 설계도에 따라 지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옛 것만 못하였다. 첫 성전에 있었던 것 중에 보전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성전터 동편의 기드론 골짜기 위에 길게 축조된 석벽은 제 2성전(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 지대의 일부요 또 헤롯이 연하여 벽을 쌓았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포로시대 이후 예루살렘의 세계주의적인 성격은 느헤미야에게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신성한 성전지역 안에 비유대인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느13:4-9). 이 일은 필시 성전뜰을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는 안뜰과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뜰(이방인의 뜰)로 구분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헤롯의 성전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더이상 안으로 들아갈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비유대인에 대한 경고문이 새겨진 두 돌판(제3부 복음서 부분에 나오는 사진을 보라)이 발간되었다(또한 행 27:17이하도 역시 보라).

 

 헤롯의 성전은 유대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이두매인의 헤롯왕의 시도였다. 대부분의 공정은 B.C. 19년-9년 어간에 마쳤으나, 나머지 공사는 A.D 64년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 헤롯성전은 A.D. 70년 로마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그 거대한 건축물의 부분들은 서편('통곡의 벽')과 동편에서 아직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벽의 난간에서 떨어져 나온 돌 몇 개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서술들과 랍비 문헌들의 특주들과 그 밖의 자료들은 우리에게 이 화려한 건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큰 규모의 성전뜰은 가르치는 일과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행각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었다(요10:23.눅19:47,요2:14-16).위에서 언급한 담(이방인 뜰) 너머에는 연보궤들이 마련된 여인의 뜰(막 12:41-44)이요. 그 다음은 이스라엘의 뜰이요, 그 다음은 번제단과 성전의 본건물이 있는 제사장의 뜰이었다. 이 제사장의 뜰은 솔로몬 성전 설계도의 확대판이었다.

 

 하지만 제 2 성전의 경우에서와 같이 "지성소"는 비어 있었다. 언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던 법궤와, 하나님이 나타나시던 법궤 위의 "속죄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새 언약과 새 이스라엘의 확립과 더불어 이 헤롯성전 역시 사라진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전의 모든 의의가 온전히 성취된 이상, 예루살렘 성전(현재는 그 터 위에 회교사원-오마르의 모스크-이 서 있다)은 영구히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복구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