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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이란) | 신전(이란,바벨론,시리아,요르

영국신사77 2008. 4. 25. 01:32

페르세폴리스 지도          ( 블로그 > 그냥 이웃)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출처- 블로그 > 너에게로 가는 길)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에 짓기 시작했다. 5대인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기원전 469년께)거의 완성되었으니, 약 60년 동안 지은 셈이다. 나지막한 라흐마트(‘자비’란 뜻)산을 등지고, 대지를 돋우어 만든 높이 12m의 인공 테라스 위에 터를 잡았다. 총면적은 약 12만 8천㎡(460×280m)에 달한다. 정면에 수림 우거진 마르브 다슈 평야가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지에 터를 닦아 계단식 건물을 짓는 것은 바빌로니아식 건축법이다. 일세를 풍미한 이 거대하고 화려한 왕도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동정군이 불을 질러 하룻밤 사이 잿더미로 변했다. 영존(永存)을 꿈꾸던 철옹성은 18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유적은 무상한 역사 속에 2260년 동안 숨죽이고 파묻혔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대 동방 연구소팀이 6년간 발굴하면서 비로소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었다. 비록 일그러지고 빛바랜 재현이지만, 세인을 그 영화의 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유적지 전경

 

유적지 전경

 

유적지 전경

 

유적지 전경

 

유적지 전경

 

유적지 전경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입구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문 양쪽에는 돌로 만든 목우상(牧牛像)과 사람 얼굴에 날개 돋친 짐승 몸뚱이를 한 유익 인면수신상이 나타난다. 이런 수인상(獸人像)은 아시리아 미술에서 발원한 것이다. 짐승의 한 날개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명문이 3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문은 곧바로 의장대 사열로와 연결되며, 그 길 왼편에는 쌍두 독수리상이 이악스레 노려보고 있다.  

다리우스 1세 궁전 (기원전 6∼5세기)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대기단의 높이를 맞추어서 다리우스 1세 궁전은 지상에서 18m인 곳에 있어서 밑의 마르브· 다슈 평야(사진의 왼쪽)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측벽에는 왕의 향연에 바치는 동물, 술이 담긴 가죽부대, 식기와 잔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부조되어 있다. 소를 덮치는 사자의 주제는 계단측벽의 삼각형에 사용되었다. 그 우측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이다

 

궁전 복원 추정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왕궁 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왕궁 비

 

다리우스왕이시여,,왕중의 왕이며  온세상의 왕이시며  이 왕궁을 지으신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아카에메니드(고대페르샤왕조) 대왕이시여!!

 

왕궁 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아파타나(Apatana)궁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아파다나 궁전은 다리우스 1세 때 짓기 시작해 아들 대에 완공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장이나 노루즈(신년) 때 제사장으로 쓰였다. 레바논 삼나무로 지은 천장을 받치던 높이 20m의 72개 기둥 가운데 남은 13개만 봐도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공간을 석조 기둥으로 떠받치는 공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초석에 수련(睡蓮)으로 보이는 이집트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북쪽과 동쪽에 독특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조공자 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가 생생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23개국 조공자(사신)들의 옷차림이나 헌상물은 각양각색이다. 아르메니아는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인도는 향수병,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헌상했다. 이렇듯 각국 문명은 앞다투어 여기로 모여들고 있다.

 

아파다나 궁전으로 오르는 111개의 돌계단

 

입구 계단으로 오르는 벽엔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전세계국가들의 조공행렬이 새겨져있다. 그 어제와의 만남은 입구 왼쪽에서 111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데서 시작한다. 통상 돌 한 덩어리로 한 계단씩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쪼아 다섯 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계단 높이는 말을 타고도 불편함 없이 오르도록 10㎝ 정도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면 4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 (다르바제 멜라)이 나타난다. 지금은 높이 10m 가량의 원주 몇 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파다나입구로 오르는 두개의 계단중 동쪽계단인데 계단으로 오르는 벽에는 전세계에서 조공을 받치러 온 사람들의 조각이 새겨져있다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아파다나. 알현실 부조  

 

111개의 돌계단 조공행렬 부조

 

북쪽 계단에 새겨진 부조들.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교사절들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계속되는 공물의 행렬.. 세계 최초 통일대제국 페르시아의 위용을 보여준다 

 

111개의 돌계단 조공행렬 부조

 

부조, 조공 사신들

 

부조, 조공 사신들

 

부조, 조공 사신들

 

다리우스왕에게 신년 인사온 사신들         (출처-  http://tong.nate.com/travel )

 


왕실 근위병들

 


조공행렬

 


조공행렬

 

악마와 왕의 투쟁상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서쪽에 있는, 왕이 단검으로 짐승을 찌르는 ‘악마와 왕의 투쟁상’은 왕이 악을 제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쪽 ‘옥좌의 왕상’은 28개 속주 신민들이 옥좌를 받든 모습인데, 왕 머리 위에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그려져 신과 왕, 신민 간의 상하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사자와 목우 투쟁도

다리우스 1세가 지은 아파다나 궁전 출입문에 새겨져 있다. 동서미술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으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도상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궁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르세폴리스의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 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놀라운 것은 동남쪽 보물창고다. 알렉산더가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를 끌어 창고 보물들을 엑바타나(오늘날 함단)로 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부속 박물관에는 당대 문명들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항아리, 동전, 타다 남은 천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물궁

 

백주의 방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르세폴리스의 주두 부분


이란 테헤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페르세폴리스 기둥. 페르세폴리스는 페르시아어로 '타흐트 잠쉬드'로서 '타흐트'는 '왕좌'라는 뜻이고, '잠쉬드'는 페르시아의 한 전설적 영웅의 이름이다. 이 고도는 아케메네스조 다리우스 대왕이 기원전 520년경에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동정군에게 소진될 때까지 약 200년간 아케메네스조의 수도였다가 그후 약 2천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 '씰크로드학' 中에서 , 기원전 520~500년경. 페르시아 건축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있었던 이오니아 문명전파 때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542년부터 이오니아의 왕들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실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페르시아 왕실의 요청으로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함께 파견되어 터키 지방의 발달한 문명을 전파했다. 건축은 이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아케메네스 궁(페르세폴리스)은 이런 내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근동지역의 강자였던 페르시아의 왕실은 이 궁궐을 짓기 위해 인근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것들을 모았다. 목재는 레바논에서 바빌론과 이오니아 지방을 거쳐 이곳까지 운반되었다. 석재는 페르시아 북쪽의 엘람지역에 있는 아피타루스에서 조달되었다. 건축 설계와 시공 및 장식을 이오니아인들이 맡았다.

 

페르세폴리스 만국의 문과 라마수


페르세폴리스궁전을 들어가기 위해 처음 거쳐야 하는 문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알렉산더왕에 의해 파괴되었다.

 

만국의 문 라마수

 

만국의 문

 

라마수                          (출처- 블로그 > 너에게로 가는 길)

 

이란 테헤란에 있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에서 찍은 라마수, 라마수는 얼굴은 사람. 새의 날개. 소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인두유익우체상이다. 석회석. 고대에 이 왕궁을 찾아온 사람들은 라마수(Lamasu)를 보면, 그것이 처음엔 서 있다가 다음에는 마치 걸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라마수는 왕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눈을 부릅뜨고는 방문객을 지켜보다가 뒤를 쫓아다닐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돌로 만든 목우상

 

돌로 만든 목우상

 

돌로 만든 목우상

 


황소 상

 


황소 조각

 

왕궁 초입을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 이란과 이란 에어의 상징 'HOMA' 

 


이란과 이란 에어의 상징 'HOMA' 

 

이란과 이란 에어의 상징 'HOMA' 

 

독수리상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다리우스1세 조각위에 조로아스터교 상징이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국교로 유명하다. 조로아스터교가 페리시아의 국교였음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는데 사진 위쪽에 보면 커다란 새가 양쪽으로 날개를 쫙 펴고 있는데 그 새가 조로아스터교를 상징한다

 


다리우스1세

 


다리우스1세

 


다리우스1세 조각

 


다리우스1세

 

페르세폴리스에서 6km 밖에있는 낙쉐 로스탐

 

Naqsh-e Rostam에는 총 7개의 이야기가 있는 내용을 벽면에 새기고 무덤이 있으며 무덤 앞쪽에는 조로아스터교 상징물이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국교로 유명하다. 조로아스터교가 페리시아의 국교였음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는데 사진 위쪽에 보면 커다란 새가 양쪽으로 날개를 쫙 펴고 있는데 그 새가 조로아스터교를 상징한다. 이 사진은 Naqsh-e Rostam에 있는 조각 7개의 정 중앙에 위치한 조각이다. 로스탐은 고대 페르시아의 영웅을 이야기 하는데 이 그림들은 고대 페르시아 왕인 Shapur의 전쟁승리를 기록하였다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낙쉐 로스탐

 

 

페르세폴리스


이란 남서부 팔스지방에 있는 아케메네스왕조의 수도였다.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를 의미한다. 페르시아인들은 '파르사(Parsa)'라고 부른다. 파르사는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파르스 지방 또는 파르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파르스에서 시작되어, 파르사는 제국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수도로 사용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으로,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18년에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위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어졌고, 손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기원전 4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다. 인공의 테라스 위에 조영된 왕궁은 세 방향을 벽돌 성벽이 둘러싸고, 북쪽과 동쪽은 구릉을 등지고 있다. 테라스 전체는 약 460×280m이고 높이는 12m였다고 한다. 북서쪽의 거대한 테라스를 계단처럼 오르면 ‘크세르크세스의 문(만국의 문)’이 나온다. 이 문이 유일한 성문이며, 날개와 사람의 머리를 지닌 황소의 상이 입구의 양쪽을 지키고 있다. 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장대한 ‘아파타나’에 압도되고, 조금 직진하면 미완성의 문을 지나 화려한 ‘백주의 방’으로 빨려 들게 된다. 아파타나의 안쪽에는 중앙 궁전을 비롯하여 역대의 왕들이 살던 궁전이나 하렘(왕의 거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왕궁의 가장 안쪽에는 엄중하게 경호된 보물 창고가 놓여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신년제 등의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하며, 동시대의 행정 수도인 수사와는 다른 역할이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인공의 테라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벽,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등을 맞댄 기둥 머리 등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궁전 건축 양식에, 포르티코와 플루트(세로 홈)가 나 있는 기둥 등 그리스의 새로운 건축 양식이 훌륭하게 융합하여 아케메네스 특유의 양식이 표현되어 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7세기 무렵(신아시리아 시대)에 고대 오리엔트를 지배하였던 제국이다. 또한 그리스풍의 육감적인 부조가 호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때 소실되었다(BC 330).  또한 기록보존소에서 출토한 점토판(粘土板) 문서 약 2만 장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경제가 밝혀졌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페르세폴리스


이란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유적을 꼽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페르세 폴리스를 꼽을 수 밖에 없디. 물론 무슬림들은 호메이니 옹의 묘 혹은 12시야파 이맘 중 유일하게 이란에서 죽은 이맘 레자의 묘 등을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무슬림들의 견해이고 역사적 가치로 볼 때나 혹은 그 규모를 볼 때나 혹은 그 섬세한 예술적 가치로 볼 때도 페르세폴리스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페르세폴리스는 서양 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서 페르샤의 도시라는 뜻인데 이란 사람들은 타크테 잠쉿(Takhte Jamshid)이라고 부른다. 이는 "잠쉿의 보좌" 라는 뜻인데 잠쉿의 이란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이다. 이 페르세 폴리스는 건축학적으로도 가히 세계적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 사람들이 로마를 방문하면 로마의 석조 건물들과 조각품들을 보고 놀라는데 로마의 석조건물은 바로 페르시아에서 건너간 것이고, 연대적으로 볼 때도 페르샤의 석조건물들은 BC 5세기의 것이며 로마의 것은 예수님 이후의 것들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신빙성이 있는 설이라고 본다. 실제로 페르세폴리스에 가보면 그 엄청난 규모에 먼저 놀라게 되는데 이집트의 룩소에 있는 카르낙신전을 가 본 사람은 규모가 엄청나게 큰 고대 석조 건물에 놀라게 되는데 페르세 폴리스 역시 그를 능가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카르낙 신전은 규모는 큰데 비해 섬세함은 미약하다. 그러나 페르세 폴리스는 엄청난 규모와 함께 섬세함 면에서도 조각품들의 곱슬머리 머리털까지 표현할 정도로 섬세하다. 고대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제국)는 성경에 고레스 왕에서부터 등장을 하여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왕까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 왕들이 실제로 통치했던 흔적들이 바로 페르세폴리스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는 날씨가 따뜻한 아와즈(Ahwaz)에 있는 수산성에서 다스리고, 여름에는 지대가 놓아 여름에도 항상 날씨가 서늘한 하마단(Hamasan, 성경에는 에스라 6:2절에 악메다 궁으로 소개되고 있다.)에서 다스렸다. 그리고 페르세 폴리스는 때로는 여름을 지내는 궁으로 쓰기도 했지만 주로 신년 행사용 궁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해마다 신년이 시작되면 여기서 그 유명한 노루즈(Noruz)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 때 전 세계의 피정복 국가 사절단들이 선물을 운반해 와서 페르시아의 대왕께 바치는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왕의 보좌가 있는 아파다나(APADANA)로 오르는 계단의 경사면에는 각국의사절단들의 모습이 부조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사절단들의 복장과 특산물들이 그 당시 최고로 고급 돌이었던 흑석에 생생하게 표현되었는데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에 보면 그들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절단들이며 무슨 예물을 가져왔는지가 새겨져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에티오피아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걸쳐서 인도까지 정말 엄청난 넓은 지역의 수십개 국가를 다스렸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0년경에 와서 이 세계적 건축물에 불을 질러 지금은 그 웅장했던 원형을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13개 정도의 기둘이 우뚝 솟아 있어서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궁전은 다리오 왕이 건축을 시작해서 역대 페르시아의 왕들이 계속 지어 나갔으며 완공까지는 15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왕궁을 보고야 이 엄청난 건축사업을 시작했던 고대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오의 위대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케메네스(Achaemenians)의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중반경에서 7세기까지 이란 즉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B.C. 549?-331) 왕조, 파르티아 제국(B.C. 2C-A.D.224), 사산 왕조(224-642)의 국가종교였다. 약 100여년간 전성기에 있던 이란지역왕조의 국가종교였기 때문에, 당시 가장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종교 중 하나였다. 이란의 페르시아족은 인도인들과 같이 아리아인의 한 갈래로서, 매우 종교적인 민족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현재 이란은 신정일치의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이 이슬람왕국에 의해 패망하자, 이슬람에 의해 박해받게 된다. 그러나 조로아스터신자들의 신앙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속적인 탄압가운데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비록 소수신앙공동체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후 팔라비 왕조가 박해를 완화시킬 때까지 약 1000여년간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간다. 이란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 이교도라는 의미에서 조로아스터신자들을 '자르두슈티(Zardushti)' 또는 '가브르(gabr)'라고 불렀고, 신자들 자신은 스스로를 '마즈다의 숭배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섬기는 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10세기경 이들 신자 중 일부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인도북서부로 이동했다.  인도에 가면 '파르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조로아스터신자들이다. 그들은 936년경에 인도에 정착, 인도현지의 힌두교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1297년과 1465년 사이 이슬람의 침입으로 공포에 떨긴 했지만, 17세기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게 되면서, 상업도시인 뭄바이로 이동해 19세기경에는 엄청난 부와 힘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했다. 현재 인도의 파르시공동체는 약 10만명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또한 영국과 교역하게되면서 파르시들은 외국의 여러나라로 이주할 기회를 갖게 되어, 이들 지역에 조로아스터교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현재 마즈다의 숭배자들은 인도와 이란 뿐 아니라 파키스탄,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 퍼져있다. 다만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야즈드 조르아스터교 신전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야즈드가 유명한 이유는 이곳이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발원지이며 아직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지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짜라투스투라"는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Zoroaster)의 페르시아어 발음이다. 조로아스터(Zoroaster)는 영어 발음이다. 그러나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그 이름만을 빌려왔을 뿐이지 조로아스터교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 상징 아후라 마즈다

 

신전 내 영원한 불

 

아테슈카데는 페르시아어로 ‘불의 집’이란 뜻이다. 시 중심에 있는 베헤슈티 광장에서 카샤니 거리를 따라 ‘침묵의 탑’ 방향으로 5분쯤 가니 크림색 담장을 두른 사원 건물(1934년에 지음)이 나타난다. 사원이자 박물관이기도 한 이 곳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1532년 동안이나 꺼지지 않고 지펴있는 불이다. 화로에 담겨져 있는 이 불은 원래 남부 파르스의 아잘파란바흐 사원에 보존되었던 불씨를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2500여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끈질긴 생명력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다. 이 종교에서 불은 선신의 상징 중 하나로서 불을 통해 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을 뿐, 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을 숭배하는 종교인양 ‘배화교’(拜火敎)로 한역한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천교라는 한역도 있는데, 이것은 조로아스터교를 화천, 즉 ‘불의 신’을 믿는 종교로 오해한 데서 나온 오역이라고 추단된다. 입구의 맞은편 벽에는 전형적인 성화(聖畵)기법으로 그린 교조 조로아스터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조로아스터에 관해서는 17세기 말 프랑스의 앙케틸에 의해 <벤디다드> 같은 경문이 발견되면서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지금까지도 숱한 베일에 싸여있다. 본명은 페르시아어로 차(자)라투스트라인데, 영어로 조로아스터라고 불린다.

 

신전 내 영원한 불

 

불씨  

 

조르아스터 영정

 

야즈드 영안실        (블로그명 : Monde De BK-★)

 

야즈드 침묵의 탑

 

조로아스터교(배화교)는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장소(현재의 침묵의 탑)로 옮겨 토막을 내어 이를 새들이 쪼아먹도록 하는 시체매장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야즈드에서 이런 조장(鳥葬)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침묵의 탑(Towers of Silence)이다. 언덕위에는 두개의 탑이 있는데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 탑 내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파져 있는데 바로 거기에 시체를 두면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가 내려와서 시체를 뜯어 먹게 되고 시일이 지난 후에 시체뼈는 따로 수거해서 처리했다고 한다. 이런 조장의 풍습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1970년대 이후엔 위생상의 이유 등으로 금지되었으며 먹이가 떨어진 하늘의 맹금류들도 이젠 사라졌다. 바람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곳 침묵의 탑에 서면 아래로 펼쳐지는 광할한 사막과 주거지의 풍경과 그 옛날 매장지였던 침묵의 탑이 주는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

 

침묵의 탑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침묵의 탑

 

야즈드 침묵의 탑 두 봉우리(좌- 남자, 우- 여자)

 

침묵의 탑 (남자)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침묵의 탑 (여자)

 

야즈드 침묵의 탑 제단 

 

침묵의 탑 안쪽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침묵의 탑, 여자 구덩이

 

최초의 계시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영혼은 영원하지만, 육체는 죽으면 불결한 흉물로 변해 신성한 흙이나 물, 불과 접촉할 수 없다. 그래서 토장이나 화장은 할 수 없는 터, 결국 주검은 땅과 분리된 높은 곳에 얹어놓고 독수리 같은 새가 뜯어 먹게 해 그 존재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검을 구덩이 위에 올려 놓으면 새가 와서 뜯어먹고, 살이 삭아지면 걸러진 백골만이 아래로 굴러 떨어져 마치 탑처럼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죽은 자니 침묵할 수 밖에 없고, 또 주검은 불결하니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조장 (鳥葬)의 장지를 ‘침묵의 탑’이라 일컫는가 보다. 원래 조장은 하늘과 더불어 새를 신성시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앙에 따르면 새는 인간의 영혼을 하늘로 운반하는 매개체이며 영물이다. 그런데 그 운반과정을 단축시키기 위해, 이를테면 새에게 빨리 뜯기기 위해, 별별 끔직한 짓을 불사하는 관행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미신도 엉켜있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우, 사자의 오른쪽 눈이 먼저 파먹히면 선인으로 낙원에 가고, 왼쪽 눈이면 악인으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이란은 이러한 매장법이 전근대적이란 이유로 70여년 전에 법으로 금지했다.

 

야즈드 침묵의 탑 제단 구덩이 

 

침묵의 탑 배화교 신전 

 

야즈드 [Yazd]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인구는 32만 6776명(1996)이다. 예즈드(Yezd)라고도 한다. 이스파한 남동쪽 260km 지점, 자그로스산맥 동쪽 기슭의 고원지대에 있다. 그러나 카비르사막 부근이므로 기후는 매우 건조하고, 강풍에 날린 모래 때문에 피해가 크다. 테헤란에서 인도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전에는 이스파한·시라즈·마슈하드에서 오는 대상(隊商)의 집결지였다. 7세기에 아랍이 이란을 정복한 후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주변에서 아몬드·향료 등이 생산되지만 식량은 훌라산 지방에서 들여온다. 1375년에 세워진 회교사원의 첨탑(尖塔)은 이란에서 가장 높다.

 

야즈드

 

제우스신전             (블로그명 : 도성의 블로그)

 

제우스신전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제우스신전

 

제우스신전 

 

제우스신전과 로마원형극장

 

원형극장 

 

아데미 여신전

 

아데미 여신전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아데미 여신전 

 

디오니소스신전

 

헤라클레스신전

 

헤라클레스신전 

 

시타델(Citadel) : 암몬 성터 헤라클레스신전


해발 850m의 고지에 매우 견고하게 건설된 암몬 성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엘 깔라아' 로 불리운다. 주변 사방의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성채는 로만 비잔틴 시대의 것이 남아 있으나 아래 성채는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성경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이 지역의 유적은 많이 손상되고 파괴되어 있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던 왕궁(기원후 8세기)은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6, 7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 터가 발굴되어져 있고, 로마 시대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아크로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헤라클레스 신전이 발굴되었으며, 이것은  일부가 복원 되어 있는데,이 자리는 철기 시대 암몬 족속의 신 밀곰의 성소가 있었던 곳이다

 

님프의 신전 분수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제라쉬


고대의 거라사는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후 부유한 도시의 하나로 발전했다. 129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거라사의 번영은 4∼7세기에 걸친 비잔틴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고, 약 300년 동안 거라사에도 15개가 넘는 대규모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628년 페르시아의 침공과 635년 아랍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고 말았다. 8세기 중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지진으로 인하여 웅대한 석조 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져 거라사의 영광은 모래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제라시에는 20만평이 넘는 넓은 언덕에 웅장한 석조건물 유적이 펼쳐져 있다. 성벽에는 모두 101개의 탑이 설치되었으며, 3m 두께의 성벽에는 모두 6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을 통해 한참을 걸어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들어가자 바로 앞에는 타원형 광장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직도 수많은 돌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신상을 중심으로 이 광장에서부터 도시의 중앙에 설치된 막시무스 도로가 남북으로 800m가 연결되어 있고, 동서로는 2개의 거리가 수직으로 나 있다. 광장에서 막시무스 도로에 들어서 오른쪽 경사길을 올라가면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들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눈물병도 있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계속해서 도시의 중심도로인 막시무스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자 님파윰(Nymphaeum, 분수탑)이 거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라쉬에 남아있는 이 분수탑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보아도 3층 높이 정도의 2단으로 된 대규모의 크기였다. 과연 로마는 분수의 나라라고 할만했다. 계속해서 막시무스길을 따라 북쪽문으로 향하다보면 왼쪽 멀리 언덕 위에 제우스 신전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오른쪽 언덕 위로 거라사의 수호 여신을 위한 아데미 신전이 반파된 채 남아있다. 이 외에도 막시무스 길 언덕 위에는 술과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한 신전을 교회로 전환시킨 비잔틴 시대의 대성당이 있고 성당 뒤에는 531년에 세워진 성 요한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와 신전들이 함께 발굴되어 있어 이곳의 3000년된 역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했는가를 보게된다. 언덕을 지나 다시 원추형 포럼(광장)으로 내려오다 보면 로마의 점령지에서 빠짐없이 볼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다. 목욕탕, 포장길, 야외극장은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성경에서 가다라로 언급되는 오늘날 요르단의 제라쉬가 지닌 엄청난 규모의 유적 속에서 3천년 역사의 흐름을 보게된다. 특히 수많은 교회와 신전들의 유적 속에서 교회가 그 힘을 잃을 때 그 자리에는 이방 신전이 들어서게 됨을 보면서 교회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깨달은 뜻깊은 하루였다

판(PAN)신전

 

데가볼리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중의 하나로 다메섹 남서쪽 약 80Km 되는 부분에 있다. 이곳은 깊은 계곡과 풍부한 물, 밀림과 수풀, 높은 절벽들이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지역이다. 때문에 헬라인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신인 Pan을 섬기는 신전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 주변으로 성경에 기록된 성읍들로는 바알 갓(수11:17, 12:7, 13:5)과 바알 헤르몬(삿3:3, 대상5:23)이 있다

 

판(PAN)신전

 

신전의 흔적이다. 예수님은 만신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자신의 신성과 고난,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비로서 증거하셨다

 

판(PAN)신전

 

판(PAN)신전

 

원래는 위의 동굴에서 물이 흘러 나왔었으나 지금은 막히고 아래의 근원에서 물이 흘러 나온다

 

판(PAN)신전

 

옆의  작은 돌벽을 판 곳이 만신을 모아 놓고 제사를 드리던 만신전이다

 

판(PAN)신전

 

 

가이사랴 빌립보


이스라엘의 최북단이자 요단강의 주요 원류중 하나 근처인 헤르몬산(중앙) 기슭에 위치해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요단 계곡의 상부 북쪽 끝을 감싸고 있다.이것은 아마 수11:17, 삿 3:3, 대상 5:23의 바알 갓이나 바알 헤르몬 일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 판의 이름을 따라 이것을 Paneas라고 불렀다.(‘Banias'는 아랍어로 잘못 굳어진 것이다). BC 198년에 안티오쿠스 3세는 Paneas에서 그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수 있게 해준 큰 승리를 거둔다. Paneas의 이름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헤롯대왕에 의해 가이샤랴로 바뀌었고 (눅 2:1)헤롯의 아들인 빌립에 의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바뀌었다. 마태와 마가가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 가이사랴는 600년이 넘도록 로마-비잔틴의 지방도시였다. 고대 로마 경기장의 외형도는 AD 2세기경에 만들어졌는데 1500피트로 측정된 그 길이는 오늘날 헤로디안의 동쪽 바나나필드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로마 행정관의 비문은, 본디오 빌라도, 가이사랴의 발굴 현장에서 발견되어졌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공공건물, 극장, 원형경기장, 고대 로마 경기장두 개의 수로, 가로수가 있는 거리, 은신처, 미트라의 신전, 가이사에게 헌신적이었던 성전, 그리고 광대한 오물처리 시스템 등을 발견해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위와 같은 것들은 바다의 파도로 인해서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출처- 온맘자료실  http://bible.onmam.com/faith/infoculture/hol

 

 

에살핫돈 왕궁옆에서 요나의 무덤, 느보신전, 앗술바니팔 왕의 왕실 도서관이 발견 되었다

이사야 46:1에 나오는 느보신은 바벨론이 섬기던 벨(마르둑, 바알) 신의 아들로 운명의 서판들을 보관하는 문학과 지혜의 신이다. "나부"라고도하는 느보신은 왕가의 수호신으로 추측된다 (느부갓네살왕, 나보니두스왕 의 이름과 비슷)

 

마르둑신이 여신 티아마트를 공격하고있다, 대영박물관

 

시리아 파르미아 벨신전

 

시리아 파르미아 벨신전

 

시리아 파르미아 개선문과 느보(나부)신전

 

 

바벨론의 이슈타르 여신문, 옆에 느보신전이 있다

 

니느웨성 발굴


홍수이후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손자 니므롯(Nimrod)은 셈의 후손들이 건설한 도시를 정복한 후 앗수르성의 북쪽에 새도성 니느웨(Nineveh)를 건설하고 앗수르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현재 티그리스강의 동편 강안에 위치하고 있는 니느웨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이다. 이 곳은 농업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기때문에 고대에는 자주 앗수르 통치자들에 의하여 그들의 거주지역으로 활용이 되었으며,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삼은 왕은 기원전 705년에서 681년까지 앗수르를 통치한 산헤립이다. 엘살하돈과 앗수르바니팔은 이곳에 웅장한 궁전들을 지음으로서 니느웨를 더욱 장엄하게 만들었다. 요나 선지자의 경고에 따라 회개하였던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지만, 약 100년 뒤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니느웨를 '피의 도시'라고 불렀다. 바벨론왕 나보폴라살의 연대기에 의하면, 갈대아와 메데의 연합군들은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멸망시켰다. 이러한 운명은 나훔 선지자의 예언 속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나훔 2:3-13) 니느웨는 너무나도 황폐되어 있어서 기원전 401년 이곳을 지나갔었던 크세노폰(Xenophon)은 이곳이 한때 위대한 도시였던 니느웨임을 인식치 못할 정도였다. 고대도시 니느웨의 성벽은 그 주변 길이가 12km 이상이나 되었다. 옛 도시의 성문 중 다섯 곳이 발굴이 되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니느웨의 성채에서 16,000개 이상의 점토판들이 보관되어 있는 황실 도서관을 발굴하였다. 산헤립 왕궁도 발굴이 되었는데, 특히 산헤립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석판 벽 조각품도 발견이 되었다. 이러한 조각품들의 대부분 19세기에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르부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일부는 현지에 남아 있다. 성경에는 니느웨 성을 가로지르는데 3일이 걸렸다고 했으니 성의 둘레를 도는 데는 10일 정도가 걸릴 정도로 거대한 성이었다. 니므롯은 새로운 신 니눈타를 이 성의 수호신으로 지정했으며 바벨론(바빌론) 세력은 오랫동안 앗수르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BC 1364년 앗술 우발리트 1세는 앗수르 왕국을 재건하고 니느웨의 주인이 되었다. 그 후로 바벨론과 경쟁하던 앗수르는 결국 바벨론을 지배하게 되었고 BC 884년 즉위한 아슈르바니팔 2세는 니느웨와 앗수르 사이에 갈라 성을 건축하여 대제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앗수르에 갑자기 위기가 닥쳐왔다. 그것은 BC 771년에 즉위한 앗술단 3세 때에 시작되었다. B,C 765년에는 큰 전염병이 돌았고 다시 BC 763년에는 불길한 일식이 있은 후에 우라르투와 전쟁에서 대패했다. 그리고 또 다시 전염병이 돌았다. 바로 그 때 즉,BC 760년께 이스라엘 출신의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그는 적국의 도성에 말씀을 전하기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하려다가 풍랑을 만나 결국 니느웨로 들어간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장 4절). 요나의 외침은 퉁명스러웠다. 그는 단지 큰 니느웨 성을 3일 걸려서 가로질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니느웨 백성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었으며 그 소문을 들은 왕도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은 후 재에 앉았다. 왕은 조서를 내려 심지어는 가축들까지도 베옷을 입히고 금식을 시켰으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부르짖어 니느웨는 멸망을 면하게 되었다. 왜 하나님은 니느웨에 선지자를 보내 회개하게 했을까? 타락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앗수르를 기르시되 그들의 회개에 대한 보상으로 그 나라를 다시 강대하게 해주시려는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앗수르가 다시 강하게 되자 디글랏빌레셀 3세는 태양신 샤마슈를 섬기게 되었다. 또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유린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를 현지에서 축출하고 왕이 된 사르곤 2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벧엘로 보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르곤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산헤립은 유다를 침공했다가 니느웨로 돌아가 그 아들의 손에 살해된다. 성경에 산헤립이 죽은 장소는 니스록의 신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니므롯이 니느웨의 수호신으로 세웠던 니눈타의 신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에 앗수르는 몰락의 길을 걸어 선지자 나훔이 다시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했고 그 말씀대로 B,C 612년에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지금도 니느웨에는 요나의 무덤이 남아 있고 그 지역 주민의 25%가 시리아 정교회에 속한 기독교인이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요나 4장 11절). 니느웨는 현재의 모술 건너 편인 티그리스 강의 동편 강안에 있으며, 이라크 바벨론 북쪽 약 450㎞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강도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가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 수탈함으로써 부강해졌기 때문이다. 헨리 오스틴 레이아드는 1845년에 폐허가 된 니느웨에서 12㎞에 달하는 벽으로 된 성고각 지역 전부를 발견하였다. 약 7.3㎢ 넓이를 지닌이 성곽 안에는 두 언덕이 있다. 남쪽의 언덕은 그 높이가 30m이며, 넓이는 약 0.162㎢이고, 원주민들은 이곳을 ‘네비 유니스’(예언자요나)라고 부른다. 북쪽의 언덕은 그 높이가 27m이며, 넓이는 0.4㎢이고, ‘쿠윤직’(니느웨의 성)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레이아드는 북쪽 언덕에서 좌우 양쪽에 날개달린 사자가 지키는 고대의 성문과 설형문자로 산헤립이라 새겨진 성벽을 발굴했다. 그는 옛 성의 중심부에서 산헤립의 왕궁을 발굴했는데, 이 왕궁의 출입구에는 거대한 날개가 달린 황소들이 한줄로 늘어서 있었다. 이 황소들의 몸체에는 설형문자로 왕에 대한 연대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왕궁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거대한 홀이 있는데, 넓이가 12m이며, 길이가 54m나 된다. 산헤립의 왕궁에는 사람 머리를 한 날개 달린 황소와 테라코타 그리고 원통 모양의 구운 점토판 위에 산헤립에 대한 연대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 내용은 B.C. 689년에 산헤립이 바벨론 도성을 포위하여 멸망시킨 것과 B.C.701년에 지중해 동쪽 해안을 따라 이집트를 원정한 것을 포함한 8회의 원정을 거의 완전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블레셋 도성들에 대한 치적과 유다왕국을 침공한 일과 히스기야와 이사야가 살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사실들이 강조되어 있다. 그의 역사기록은 왕하 18:13-19과 사 36-37장에 있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며, 또한 성경을 보충하여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 왕이 유다를 원정했던 기간에 라기스를 포위하여 함락시킨 사건은 이 왕궁의 벽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산헤립은 그가 함락시킨 팔레스타인 성의 수를 말하고 있으며, 꽤 상세하게 전리품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히스기야를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가두었다고 말할 뿐 그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한 이유와 그의 군대에 임하게 된 재앙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최후의 승리를 얻지 못하고 급히 후퇴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왕하 19:36, 37에 있는 산헤립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록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레이아드와 랏삼이 에셀핫돈의 왕궁에서 발견한 육면체의 커다란 원형 점토에 기록된 것이다. 이 에셀핫돈의 왕궁은 네비 유니스라 불리우는 니느웨 남부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 서기 1851년 봄에 레이아드와 랏삼은 산헤립의 왕궁과 인접한 느보신전의 일부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그 신전의 서로 통하는 두개의 커다란 방에서 쓰레기를 치우다가 왕실 도서관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많은 왕들이 수집하여 느보에게 받쳤던 것이다. 서기 1853년 하무즈 랏삼은 니느웨에서 발굴을 계속하던 중 앗술바니팔 왕의 궁전을 발굴하였다. 이 왕궁 안에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낮은 양각의 벽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 병거에 서서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그의 신하들이 사냥에 필요한 무기들을 그에게 건네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접한 높은 천정을 가진 두개의 방에서 수천개의 매우 귀중한 점토서판이 높게 쌓여있는 선반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앗술바니팔 왕의 왕실 도서관으로 판명되었다. 문학에 대한 앗술바니팔의 관심과 학구열은 언제나 대단했다. 왕이된 그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시키고 페르시아와 리디아를 정복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학문적인 탐구에 몰두하여 그가 살던 시대의 가장 강력하고 학식있는 군주가 되었으며, 문학에 있어서 세계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학식높은 서기관들을 앗시리아, 바벨론, 쿠타(수사), 니푸르, 아카드, 에렉, 그리고 그의 광대한 제국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보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점성술, 역사, 문법, 지리, 문학, 법률, 의학, 서신들, 기도문, 찬송, 주술, 신탁, 사전, 역대기, 토지거래행위, 사업계약과 법률기록서 등 특별한 주제들에 관한 점토 서적을 수집복사하여 오도록 하였다. 이렇게 수집된 모든 자료들은 니느웨에 있는 앗술바니팔의 왕궁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 자료들을 연구하고 대조하여 두나라 언어로 된 사본은 하나의 통일된 글로 적어 읽기 쉬운 점토서판을 만들었으며, 니느웨의 백성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조직적인 방법을 사용해 이것들을 분류 정리하였다. 이것이 완성되었을때, 그의 도서관에 있는 사본은 거의 100,000개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고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값진 유물중의 하나가 되었다. 죠지 스미드는 대영박물관에서 이들 서판을 취급하던 중 홍수에 관해 기록한 다량의 서판을 발견하였다. 그는 나중에 창조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서판도 발견하여 마침내 그는 1876년에 “갈대아인의 창조설화”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비록 갈대아인의 창조설화가 창세기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창조 사실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많은 자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여하튼 이 자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암시하고 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발굴


영국인 홀므즈 랏삼(Hormuzd Rassam)은 1853년 12월 22일 메소포타미아의 "텔"인 쿠윤직에서 앗시리아 말기의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669-629)의 왕립 도서관을 발굴하였다. 그곳에서 부조와 약 25,000개의 점토판을 파내었다. 그전에 레이어드가 발굴한 곳은 니느웨의 느보(Nebo) 신전이었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고대 최초로 최대의 도서관을 세우고 그의 서기관들과 관리들을 고대의 여러 도시와 나라들, 즉 앗시리아, 바벨론, 구다, 니플, 악카드, 에렉 등지에 파견하여 기록들을 수집하여 보관하였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성경 창세기와 흡사한 창조와 홍수의 사실을 태고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갈라(Calah·창 10:11)는 니므롯 또는 그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건설한 아시리아(앗수르)의 고대 성읍이다(창 10:11). 수메르어로 ‘거룩한 문’이란 뜻의 갈라는 앗수르 북쪽의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오늘날 님루드(Nimrud)이다.  바그다드에서 니느웨(니네베)로 가는 도중 사마라를 거쳐 니느웨 남쪽 35㎞ 지점에 니므롯이 있다. 창세기 10장 12절에 갈라로 나오는 이곳은 BC 2500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BC 1250년쯤 앗수르의 살만에셀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후 BC 884∼859년 아슈르나시르팔 2세에 의해 확장되었고 BC 879∼706년 앗수르의 수도가 다른 곳으로 이전될 때까지 행정수도가 되었다. BC 672년께에는 도시의 외벽과 관련해 이름을 남긴 사람이 에살핫돈(Esarhaddon BC 680∼669년)임이 밝혀졌는데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유다 침공에 실패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하다가 암살 당한 부왕 산헤립(센나케리브)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이 된 사람(왕하 19:37,스 4:2,사 37:38)이다. 그는 왕이 된 후 도시의 동남쪽 성벽을 재정비하고 문을 아치형으로 개조하고 입구 좌우에 자신의 업적을 새겼다. BC 614∼612년 메대(메디아)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BC 401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도시가 되었다.  발굴 작업을 통해 벽돌로 만들어진 약 8㎞나 되는 성곽과 10㎞쯤 떨어진 티그리스 강의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많은 조각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궁전이 있었으며 약 43m의 높은 지구라트도 있었다. 특히 60만평이나 되는 대규모의 성채에서 가장 주된 건물인 아슈르바니팔 궁전과 궁전 뜰에서 발견된 토판들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줬다. 이 토판들은 앗수르 정복 지역에 파견된 관료들이 보내온 공문서들이 포함돼 있으며 BC 707년쯤 사르곤이 수도를 코르사바드(Khorsabad)로 옮기면서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에사르하돈은 수도를 코르사바드에서 다시 이곳 니므롯(갈라)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다만 기념비적인 건축물만 유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외에 이곳에는 니누르타와 나부 신전이 발굴되었다. 성채의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나부 신전(Nabu Temple)은 아다드니라리 3세에 의해 기초가 놓여졌다. 2개의 쌍둥이 성소가 딸려 있으며 BC 7세기 후반에는 중요한 종교건물로 발전하였다. 성경의 노아홍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내용이 담긴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로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살만에셀 3세(BC 858∼824년)의 검은 색 방첨 석탑(Black Obelisk)이 발견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석탑에는 북이스라엘의 예후왕(왕하9:14)이 앗수르 왕에게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란 풍요의 여신

 

이 신전은 셀루키드 왕조(313 - 64 BC)때에 건설된 것으로 캉가와르시(Kangavar city)에 그 터가 남아있다. 이 신전의 건축구조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식이 혼합된 방식이며 고대 이란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던 딘메흐르(Din Mehr)의 딸 아나히타(Anahita)와 연관되어 있다고들 한다. 이 신전은 기언전 200년 경에 건설되었으며 오늘날 주택과 거리들이 그 신전이 있었던 자리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극히 일부분만 발굴되어 보존되어 있다. 주위에 이맘저데 모스크가 있다.

 

아나히타-칼디어(바빌로니아 남부)

페르시아에서 순결한 존재로 알려진 여신 아나히타는 대지 생성의 근원이 되었던 별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상징하는 신이었다. 그리스신화의 달의 신이자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원형으로 알려진 풍요로운 물의 여신으로, 천상에서 습한 기운을 내뿜어 대지에 비옥함을 부여했다고 한다

 


우르 주랑신전

 

갈대아 우르의 N층에서는 주랑신전, 赤신전, A신전, B신전, C신전, D신전이 출토되었다. 이 주랑신전은 직경 2.6m의 원주가 늘어서 있으며, 그 전면은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이 시대의 모자이크 장식은 색점토를 7∼8㎝의 원추로 구워서 벽과 기둥에 박아 넣어 아름다운

기하학 문양을 만들어 냈다.

 

우르의 발굴

 

영국 고고학자 울리(L.Woolley)는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서기전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의 여신 인안나의 신전으로 18층으로 지었다. 하늘의 사원,

높은집으로 알려진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는

수메르의 고대 설형문자가 발견 되었다

 

팔미라 유적지      (출처- http://www.photodragon.com/s01_34.htm)

 

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할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 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 곳은 10m 이상 되는 팜트리(Palm Tree)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이 곳 지명의 이름도 타드몰(Tadmor :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이었고, ‘팔미라’라는 어원도 ‘팜트리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팔미라는 동쪽의 페르시아 만과 이란, 서쪽의 지중해를 잇는 동서 무역의 중요한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팔미라에는 많은 상인이 살았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인도와 아라비아 산물을 로마 제국으로 운반하였다. 또한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던 카라반(caravan)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다. 셀레우스코 왕조 때부터 중개무역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팔미라는 로마가 점령했던 기원전후 약 30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도 한 때 이 곳에까지 영향을 미친 적도 있었지만, 팔미라는 역사의 대부분을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사막 교역로를 지켜주는 대가로 통과세를 받기도 하였다. 그 결과 팔미라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희랍과 로마시대가 전성기였으며, 이 때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이름을 바꾸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팔미라 유적지

 

팔미라는 로마 제국에서 이슬람 왕조로 지배권이 넘어가면서 교통과 군사상 요지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시대가 되자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더욱이 11세기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팔미라의 유적들은 모조리 모래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야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16 만평에 달하는 팔미라를 발굴하는 작업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금씩 발굴되고 있는 팔미라의 신전과 석주들이 화려했던 팔미라의 옛모습을 현대에 전해주고 있다.

 

팔미라 유적지

 

팔미라 유적지

 

시리아 제노비아의 파르미온 신전 군

 

오늘날 팔미라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1~3세기의 로마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거친 표면이지만 세련미가 돋보이는 그래서 팔미라를 대표하는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인 벨 신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의 석조기술을 알 수 있는 원형극장, 벨 신전 맞은편에 있는 나부신전과 개선문, 정치집회장 혹은 시장으로 이용된 아고라와 그 밖의 많은 석주들. 이 모든 유적들을 보면 눈부시고 황홀한 팔미라가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벨 신전 전경

 

중동지역 최대 유적 중 하나인 팔미라의 벨 신전. 고대 실크로드의 교역지로 번영을 누렸던 팔미라 유적에는 화려한 옛 제국의 영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팔미라는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아 페허가 되었으나 그 중에 벨 신전만은 그 화를 면하였다. AD32년에 셈족이 숭배하던 태양신의 신전으로 200m길이 사각형태의 성벽으로 둘러싸여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정원안쪽으로 신성한 장소인 신전이 있다.

 

벨 신전 (태양신전)

 


벨 신전

 


벨 신전

 


Temple of Baal

 

태양의 신전인 발 신전과 기둥. 약 1.5km의 길이이고 본래는 1,500여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있었다. 부근에 타드무르(Tadmur)도시가 세워졌다.

 


대열주와 테트라필론 신전

 


아폴론 신전

 

개선문, 나부신전

 

벨 신전 건너편으로 유적지가 시작되는 입구에는 아치형의 기념문(Monumental Gateway)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데 다시 복원된 것이라도 매우 아름답다. 이곳을 지나게 되면 대 주랑(The great colonnade)이 길게 이어지며 도시의 동맥과 같은 곳이었던 이 길을 따라 왼편으로 네보신전(Temple Nebo), 극장, 시장, 법원과 의회가 있던 자리가 남아있다. 이중에서도 극장은 그 자태가 매우 아름다워 가는이의 발길을 사로잡는데 1950년까지 모래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유적지에서 멀리 보이는 산에는 17세기 아랍성이 있다.

 

팔미라 문화유산

 

독자성을 유지했던 팔미라의 문화는 그 미술에서 특히 조각에서 확실히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주변의 구릉에 석회암이 풍부했던 덕택이기도 하다. 많은 팔미라의 조각은 양식화된 정적인 미술이고 서아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벽화

 

 

 

 

 


원형극장


파르미라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동정부터 활발한 대상도시로 출발하였다. 이 파르미라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기는 기원전 1세기경 중국 한나라와 로마의 교류가 성행지기 시작한 시기부터이다. 당시의 오리엔트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제국의 각축장이었고, 파르미라는 로마측에 속하면서도 2대 세력의 균형 위에서 중계무역으로 기원전 2∼3세기에는 번영의 절정을 이루었다. 개선문도 이 당시의 건조물이었다. 서기 2세기 중엽에서 3세기까지 번영의 절정을 이루며 로마에 도전했으나 273년 로마군은 파르미라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대상도시 파르미라는 번영의 절정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란 초가잔빌 유적지 전경

 


초가잔빌 지구라트의 원래 모습

 


남쪽 정문

 


남서쪽 문과 제단

 


북동쪽

 


서쪽

 


동쪽 묘지

 

 

초가잔빌 [Tchogha Zanbil]


이란 후제스탄주에 있는 고대도시 유적지로 BC 13세기 중반 엘람 왕국의 왕  운타시 갈(Untash Gal:BC 1250경 재위) 건설한 도시이다. 수도인 수사 남쪽에 있으며 당시에는 '두르운타시'라고 불렸다. 수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신 인슈시나크를 모신 성소로서 엘람 왕족의 묘지가 있는 성도이다. BC 640년 무렵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수사와 함께 파괴되었으나 1935년 유전탐사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도시는 2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총길이는 약 4km이고 안쪽에는 내벽이 둘러쳐져 있다. 내벽 안쪽은 가로 470m, 세로 380m, 면적 약 18ha로서 성역으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성탑  지구라트, 신전, 안뜰, 무기와 장식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이 세워져 있었다. 지구라트 북서쪽 벽으로 둘러싸인 사각 모양의 공간에는 남신 이슈니칼랍·나피리샤와 여신 키리리샤를 모신 3개의 신전이 있다. 각 신전에는 안뜰 지성소·공물보관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기단은 불에 구워 만든 벽돌, 건물 위쪽은 햇볕에 말린 어도비 벽돌로 지었으며 벽에는 엘람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유적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는 서아시아 최고의 규모로서 현재 높이 28m이다. 초가잔빌은 원래 5층이였으나 현재 3층까지만 남아있으며 원래 높이는 60미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25미터이다. 밑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2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이다. 4모퉁이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1935년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가 지역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대 이란땅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산을 신성시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산이 없어서 산의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초가잔빌의 지구랏트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이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다.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 인데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고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된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인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다

 

 

 

 

 


이라크 지구라트

 

 

6층에 바알신의 지성소가 있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나보포라싸왕은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바벨탑)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Tower of Babel (바벨탑)


바벨탑의 기사는, 창 11:1-9에 보여지는데, 홍수 후의 인간의 문명의 하나의 도달점이 여기서 간결한 기사에 의해 훌륭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한답이 보여져 있기도 하다. 제1은, 어찌하여 지상의 민족은 종류가 다른 말을 쓰고 있는가, 제2는, 어찌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민은 오늘날도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구운 벽돌의 탑(塔) 지구라트(Ziggurat)를 세웠는가의 물음인데, 이 물음과 답에서 성서기자는 심원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탑은, 인간이 자기의 위대함과 하나님 없이 인간의 일치를만들 수가 있다는 인간의 세속적 야심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어떤 폭력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다만 언어를 혼란케 하시는 방법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호 이해의 수단을 잃고, 각자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일은, 이 바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역(逆)이었다(행 2:1-11). 여기서는 하나의 말이, 많은 언어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모국어로 말하듯이 이해되었다. 바벨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말해졌지만, 형제는 서로 이해치 못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많은 다른 언어의 사람들이 서로형제처럼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가 바벨의 분열의 비극이고,[여럿에서 하나로]가 오순절의 축복이다. 성령에 의한 참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이시다(창10장과 행2장에 여러민족의 列記가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바벨탑의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도시국가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지구라트(Ziggurat)이다. 이것은 피라미트 형(形)의 높은 탑으로서 보통은 7층루(七層樓)로 되어 있으며, 신원(神苑)의 중앙에세워졌는데, 정상에는 신전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제의가 행해졌다. 7층루는 일곱 가지 색으로 칠해지고, 5개의 유성과 태양, 태음, 또는 그것에 상당하는 신신의 상징으로 다음과 같은관계였다.


제1층 토성(土星)ㆍㆍㆍㆍ니니브(Ninib)ㆍㆍㆍㆍ흑색(黑色)

제2층 목성(木星)ㆍㆍㆍㆍ(마르두크Marduk)ㆍㆍ등황색(橙黃色)

제3층 화성(火星)ㆍㆍㆍㆍ네르갈(Nergal)ㆍㆍㆍ심홍색(深紅色)

제4층 태양(太陽)ㆍㆍㆍㆍ샤마슈(Samas)ㆍㆍㆍ황금색(黃金色)

제5층 금성(金星)ㆍㆍㆍㆍ이슈타르神(Istar)담황색(淡黃色)

제6층 수성(水星)ㆍㆍㆍㆍ느보神(Nebo)ㆍㆍㆍㆍ남색(藍色)

제7층 태음(太陰)ㆍㆍㆍㆍ신神(Sin)ㆍㆍㆍㆍ백은색(白銀色)


바벨론에 있어서의 발굴의 결과, 바벨탑은 마르두크의 신전(神殿) 에사길라(Esagila=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의 북방 에테메난키(Etemenanki=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라고 불리우는 지구라트로 동정된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인데, 결국 셈족의 침입에 의한 정치적 변동 때문에 준공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 미완성인 탑의 거대한 유물은 오랫동안 고대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되었다.산헤립(Sennacherib 전 704-681)이 바벨론을 점령한 때 이 유물을 제거하려 했으나 성공치못했다. 에살핫돈(Esarhaddon 전 680-669),앗슈르바니팔(Asshurbanipal 전 668-631)등도 이재축(再築)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나보폴랏살(Nabopolassar 전 626-605)도공사를 계속했으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그 완성은 겨우 느브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 전 605-562)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의 비분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탑의 지계(地階)는 91.4㎡이고, 높이 36.5, 제2층의 주변은 지계(地階)보다 좁고, 높이는 20m, 제3층에서 6층까지는 각 층 모두 높이 6.4m, 그 주변은 층을 거듭함에 따라 좁아지고, 제7층 즉 최상탑은 높이 17m, 그 가운데 신전이 세워져 있으며 탑 전체의 높이는98.5m에 미치고 있었다. 바벨론 멸망후 이 폐허는 주변 주민의 흙벽돌 절취장(切取場)으로 되어버렸다. 옛 탑의 기초였던 부근은 현재 불과 91.5㎡의 구덩이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