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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이해 / 이만열

영국신사77 2008. 4. 8. 15:26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이해
 
                                                                                           글쓴이 : 웹섬김이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만열(숙대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1. 초기 기독교 수용에 대한 종래의 학설

  1.1. 기독교(개신교)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을 방문한 것은 1832년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Karl Guetzlaff)의 홍주만 고대도의 상륙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약 1개월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소개하고 교제를 나누었지만, 그의 방문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의뢰를 받고 조선과의 통상을 타진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조선은 그가 다녀간 후에도 계속 서양 여러나라에 대해서는 물론 복음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지 않았다.

  귀츨라프가 조선을 방문한 지 30여년이 지난 후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는 웨일즈 출신의 중국 선교사 토머스(R.Thomas) 목사였다.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된 후 구미제국의 중국진출이 활발해지자 여러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지원했는데, 토머스도 1860년대 초에 중국에 도착하였다. 동행했던 아내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들과의 불화가 그를 괴롭혔지만 윌리엄슨과의 만남은 그를 조선에 대해 튿별한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는 1865년에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에 대한 뜻을 굳히게 되었지만,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와의 동행은 대동강에서의 희생을 초래했다. 이 두 사건은 1801년 신유박해에서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혹심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때에 나타난 사건으로, 조선이 계속 쇄국 정책을 취하는 한에서는 기독교의 수용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종래 한국의 기독교 수용사는 귀츨라프와 토머스 목사의 입국 사건이 있은 후 20여년간의 시간이 경과된 후에야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래의 기독교사에 의하면, 1883년 주한미국공사관이 서울에 설치된 후 1884년과 1885년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의 효시로 보았다는 뜻이다. 1884년에는 당시 미국 감리회(북)의 일본 선교사였던 매클레이(R.Maclay) 목사가 6월 24일-7월 8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결과 미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 결과 그 이듬해에는 미국 감리회의 교육·의료 등의 여러 분야에 걸친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H.N.Allen, 安連)이 그 전 해에 개설된 주한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여 정주하게 되는 것은 그 이듬해(1885)인데, 미 감리회의 아펜젤러(H.G.Appenzrller, 亞扁薛羅) 목사와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 목사가 4월 5일 부활 주일에 함께 입국하여 이 나라에도 ‘부활의 아침’을 맞게 해 달라는 기원을 드리게 되었다.

  1.2. 미국계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 데는 1882년 5월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거기에 따른 한미관계의 진전이 크게 주효하였기 때문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가 교환되는 1883년에 미국에서는 전권공사로서 전 캘리포니아 검찰총장 출신의 푸트(Lucius Foote, 福德)가 비준서를 가지고 한국에 입국하였고, 비준서를 제정한 후에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주한미국공사관을 개설하였다. 지금의 정동의 미국 대사관저가 그 때에 자리잡은 곳이다.

  비준서를 한국정부에 제정한 후 미국은 한국에 대해 상응하는 조처를 권고하였다. 즉 한국의 국왕이 비준한 조약을 미국 정부에 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고에 따라 한국 정부는 민영익(閔泳翊)을 단장으로 하는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을 구성하여 1883년 7월 파송하였다. 그들은 일본을 거쳐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대륙횡단절도를 타고 시카고· 뉴욕을 거쳐 워싱톤으로 향하였다. 이 열차 안에서 미국 감리회의 목사 가우처(J.F.Goucher)가 이들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가우처는 뉴욕의 감리회해외선교부 본부에 헌금과 편지를 보내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는 물론 일본 선교사로 파송된 미 감리회의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연락하여 한국의 선교상황을 탐지하도록 부탁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매클레이 목사가 1884년 6월 24일에서 7월 8일까지 2주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김옥균(金玉均)을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미국 북감리회가 한국에서 교육 및 의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낸 데에는 바로 이러한 뒷배경이 있었다.

  1.3. 미국계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게 된 배경에는 19세기에 이르러 고조되고 있던 미국 교회의 선교열을 간과할 수 없다. 17-18세기의 대각성운동과 그 뒤에 일어난 무디(D.L.Moody)의 부흥운동은 미국민들을 영적으로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활로를 사회 속에서 새롭게 개척하도록 하였다. 영적으로 고양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국내적으로는 인디언 선교에 정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이미 소외현상이 일어나고 있던 산업현장에 복음을 적응하기 위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해외선교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일본에 와서 고등교육에 종사하던 그리피스(Wm.E.Griffis)는 <은둔의 나라 한국, Corea, the Hermit Nation>을 써서 아직까지 서양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을 소개하였다. 이 책이 1911년까지 9판이나 거듭되어 출판된 것을 보면 얼마나 그 영향력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근거로 미국 교회에서도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 북장로회 등 해외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였던 교단의 해외 선교부에서 먼저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같은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은 미국의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대각성운동과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1880년대에는 이 운동이 여러 신학생들 사이에 사에에 해외선교를 위한 ‘신학생해외선교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집회를 가지며 선교열을 고취하였다. 이들 집회에는 뒷날 한국에 첫 선교사로 파송된 아펜절러와 언더우드도 참석하였다. 신학생들의 이 집회는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선교열을 고취시켰다. 한국에 파송되었던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가 1891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귀국했을 때, 테네시 주 내슈빌(Nashville)에서 열렸던 이 집회에 참석하여 한국 선교를 소개하고 선교사 지망을 권고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연이 되어 뒷날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에 나서게 되었던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4. 1884년과 1885년 미국 북감리회와 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의 한국 정주를 계기로, 구미 여러 나라로부터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내한은 여러 나라, 여러 교단에서 대부분이 교단을 배경으로 하였고 더러는 YMCA 같은 기독교 기관에서 파송을 받거나 혹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서 일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파송과정을 일률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비교적 초기에 들어와서 뒷날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룬 감리회의 2개 교단과 장로회의 4개 교단 선교부의 한국 입국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885년 4월 5일에 미국의 북감리회(아펜젤러)와 북장로회(언더우드)가 복음선교사로 입국한 후, 1889년 10월에는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회 신도협회의 재정지원으로 데이비스(J.H.Davies) 목사와 그의 여동생(Mary)이 들어왔다. 그들은 부산에 선교거점을 확보하려고 서울을 출발했으나 여행 중에 병을 얻어 1890년 4월 데이비스 목사가 병사하자 동생도 그 해 8월 호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10월 호주 장로회에서는 매케이(J.H.Mackay) 멘지스(B.Menzies) 포오셋(Fawcett) 페리(J.Perry) 등을 파송하여 한국 선교를 본격화시켰다. 이들은 데이비스의 순교지인 부산으로 곧 바로 들어와 선교거점을 부산과 경남 지역에 확보하였다.

  1892년 11월에는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슈빌의 신학생해외선교연맹 집회에 참석하여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었던 남장로회 소속의 신학생들(L.B.Tate, C.Johnson, W.D.Reynolds)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지원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였다. 여기에 레널즈의 친구였던 전킨(W.M.Junkin)이 합류하였다. 여기에다 언더우드와 그의 형(John Underwood)과 친구들이 내놓은 5천 달러의 선교기금은 이들의 한국 선교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남장로회 해외선교부는 앞서의 신학생 테이트, 레널즈, 전킨과 새로이 지원한 여성들로 테이트의 여동생(Mary Tate), 데이비스(L.Davis), 레이번(M.Leyburn), 보울링( P.Boling)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한국에 파송하였던 것이다.

  1896년에 시작된 미국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에는 개화파 인사였고 중국의 중서학원(中西學院)을 거쳐 미국의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수학한 윤치호(尹致昊)의 공헌이 크다. 그는 미국 재학 시절 한국 선교를 호소했고 귀국에 앞서 에모리 대학의 캔들러(W.A.Candler) 총장에게 한국 선교를 위하여 200달러를 기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국 후에도 남감리회의 선교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1895년 10월 중국에서 내한하여 선교상황을 점검한 바 있는 리드(C.F.Reid, 李德)가 그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캐나다인들의 초기 한국 선교는 대부분 개인자격으로 시작되었다. 토론토대학 YMCA의 후원을 받은 게일(J.S.Gale, 奇一)이 1888년에, 토론토 실업인들의 후원을 받은 펜윅(M.C.Fenwick, 片爲益)이 1889년에, 토론토 의과대학 기독청년회의 지원을 받은 하디(R.A.Hardie, 河鯉永)가 1890년에, 역시 같은 단체의 지원을 받은 에비슨(O.R.Avison, 魚丕信)이 1893년에 각각 입국하였다. 이들은 뒷날 한국에서 선교부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게일과 에비슨이 미국 북장로회와, 하디가 미국 남감리회와, 펜윅이 침례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1898년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1893년 12월에 매리타임즈 지역의 장로교대학학생선교연맹의 파송을 받아 선교하던 매켄지(W.J.McKenzie, 梅見施 혹은 金世)의 불우한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소래에서 활동하던 매켄지는 ‘동학혁명’을 맞아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던 농민군에게 호의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영양실조에 걸렸으면서도 그를 염려한 서울의 언더우드가 보낸 서양식 음식을 거부하고 한국인과 함께 주거와 식음을 같이하다가 그 결과 1895년 6월 24일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인들의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켰고, 매리타임즈 대회가 중심이 되어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그리어슨(R.Grierson, 具禮孫) 맥레(D.M.McRae, 馬具禮) 푸트(W.R.Foote, 富斗一) 등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98년 9월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위에서 본 감리회와 장로회 외에, 영국성공회는 1890년에 트롤로프(M.N.Trollope, 趙馬可) 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190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 공사관 안의 교당에서 공식예배를 시작하였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진남포 용강 등지에서 손흥조·임기반 등에 의해 교회를 설립하였고, 1907년에는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가 김상준(金相濬)·정빈(鄭彬)에 의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으로 시작되었으며, 1908년에는 영국의 구세군이 호가드(R.Hoggard, 許加斗)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밖에도 미국 침례교 계통의 선교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1895년에, 영국 계통의 플리머드형제단(Plymouth Brethren)이 1896년에, 일제의 한국침략에 발맞추어 일본의 조합교회(組合敎會)가 와다세(渡瀨常吉)를 앞세워 1909년 4월에 한국에 각각 들어오게 되었다

  1.5. 지금까지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경위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살폈다. 여기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전래 초기부터 한국에는 여러 교파가 무절제하게 전래되었다는 점이다. 뒷날 한국 교회에서 병폐로 나타났던 추악한 분열상은 이 때에 벌써 예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파적인 특징을 배경으로 하여 시작된 선교는 초기부터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부분의 선교부가 서울과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한꺼번에 선교부가 많이 몰려 그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곳과 선교사의 발이 닿지 않은 지역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감리회와 장로회 사이에 선교지역을 분할하게 되었다. 선교지역 분할은 초기의 경쟁관계를 완화하기는 하였으나, 앞서 지적한 여러 교파의 도입이 한국 교회를 분열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한국교회의 분열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같은 외국 선교부의 도입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수용의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가령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1882년에 도일(渡日)하여 그 이듬해에 개종한 이수정(李樹廷)이 미국의 선교잡지(예를 들면 The Missionary Review)에 한국 선교를 간절히 호소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미국 남감리회의 경우 윤치호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거니와, 북감리회의 경우도 일본에 갔던 김옥균이 한국의 기독교 수용의사를 강력히 피력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어렴풋이나마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세력확장의 선봉대로 선교사를 먼저 파송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한국 선교가 추진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중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약한 점이 전혀 없다고는 부정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욕구를 지닌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기독교 수용 의지와 함께 이뤄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외국선교사 입국 이전의 기독교 복음의 전래

  2.1. 위에서 언급한 한국 기독교의 수용사는 다분히 선교사 중심으로 한국의 기독교사를 이해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체계에 의하면, 선교사 입국 이전의 한국인이 기독교와 접촉하고 수용한 역사적인 사실은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의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었고 많은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들 중에는 상당수가 번역된 성경을 한 반도로 갖고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과 만주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반도에서는 번역된 성경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으며 신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기독교 복음은 선교사들의 입국에 의해 이뤄졌다는 종래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하며, 한국기독교의 기년(紀年)도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2.2. 중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40년의 아편전쟁과 그 2년 후의 남경조약에 의해서다. 구미의 선교단체들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많이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회와 성서공회도 중국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1860년대에 만주 요하(遼河) 하류 지역의 영구(營口)와 우장(牛莊)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만주 선교에 착수하였다. 주역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였다. 이들은 얼마 안 있어 1870년대에는 봉천(奉天, 瀋陽)에도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의 하나는 한국에 대한 선교의 깊은 열정 때문이었다. 봉천에 선교부를 설치한 때를 전후하여 로스는 한·만 국경 관문이라 할 고려문을 방문하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은 만주에 와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한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축적하였다. 로스는 1877-79년 사이에 그 나름대로의 한국어 첫걸음에 해당하는 ‘Corean Primer’와 한국의 역사책인 ‘History of Corea’를 써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그들에게 배운 한국어 실력을 기초로 그곳의 한국인들과 힘을 합쳐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정력을 기울였다. 1879년에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고 누가복음 등의 복음서가 번역이 완료되었다. 로스와 동역자들은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인쇄에 필요한 기구들을 갖추고 1882년에는 번역된 성경을 인쇄에 붙쳐, 이 해 3월에는 누가복음을, 5월에는 요한복음을 각각 3천부씩 봉천의 문광(文光)서원에서 간행하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던 해에 이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김청송(金靑松)과 서상륜(徐相崙)이 세례를 받았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들은 출판된 성경을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지역과 의주 서울 등지에 반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즉 성경과 전도책자를 반포하는 권서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문광서원에서 간행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종 각각 1천부씩을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부의 톰슨 목사에게 전했다. 톰슨 목사는 1883년초에 일본인 권서(勸書) 나가노(長坂) 등을 통해 부산과 대구에서 이 복음서들을 한국인에게 보급하였다. 우리의 연구는 아직 이 때 남쪽에서 보급한 이 복음서들을 통해 기독교 복음에 접했다는 사실을 찾아낸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압록강 대안의 만주와 한국의 북쪽 지역에 보급된 성경을 통해서는 많은 열매가 맺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2.3.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된 후, 로스· 매킨타이어와 함께 성경 번역·출판에 종사했던 한국인들은 그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협력하였고 그 노력이 수세(受洗)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먼저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지역에서 행한 성경 반포와 그 성과다. 당시 압록강 대안의 만주 땅에는 흉년과 기근,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도강(渡江)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조선과 청 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서인지, 그 수는 무려 3만여명이나 되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 약 800만명에 비하면 이 숫자는 대단하였다. 이들은 28개의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로스의 성경 출판을 도왔던 김청송이다.

  김청송은 자신의 고향이자 고구려의 고도 국내성이었던 집안(輯安)을 중심으로 28개 한인 부락을 돌며 수백권의 <누가복음>과 전도문서를 반포하였다. 1882년에 들어 6개월간의 권서활동 후에, 그는 로스에게 세례 희망자가 있음을 보고하였으나 로스는 믿지 않았다. 그 이듬해 김청송은 다시 6개월간 권서활동을 한 후에 개종자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로스는 1883년과 그 이듬해에 임오군란으로 좌천된 군인과 한인촌 계곡의 학자가 자신을 찾아 봉천에까지 왔던 사실에 자극과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로스는 1884년 11월 중순 동료 선교사 웹스터(J.Webster)와 함께 서간도의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그들은 혹한 속에서 600마일의 긴 여행 끝에 묘이산에서 시작되는 한인촌으로부터 20명, 10명, 25명, 10명, 또 10명씩 도합 75명을 문답 후에 세례를 베풀었다.

 

  75명의 수세자들은 16세부터 72세까지였으며 대부분 가장들이었다. 이 때 수세자들은 엄격히 선별되었고, 더 많은 수의 문답자들이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며, 아직도 문답들 거치지 않은 훨씬 더 많은 수의 세례 희망자들이 28개 마을에 산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로스는 “이러한 결과를 보니 몇권의 책을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하고 감사했고, 동행한 웹스터는 “나는 이 계곡들에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을 어떻게 복음화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고백하였다.[J.Webster, "The Maker of the Manchuria Mission - An Appreciation of the Late Rev.John Ross, D.D." The Missionary Record of the United & Free Church of Scotland, Vol. 15, 1915, p.394]

  로스는 1885년 초여름에도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그러나 이 때에는 벌써 개종자들에게 심각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었다. 중국인 지주들이 한국인 소작인들을 동원하여 ‘야비한 마적단’을 고용해서 무장시킨 다음 ‘새로운 운동과 관련된 주요인물들’(아마도 개종자들인 듯함)을 덮치도록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손수 지은 집과 개간한 농장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박해의 분위기 속에서 로스는 “핍박이 있거나 없거나 교회에 들어오려고 원하는 자들”[ J.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90. 4., p.246 ]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김청송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1884년 겨울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이렇게 100명의 수세자를 남겼다. 그러나 로스의 첫번째 방문 이후 중국인 지주들이 가한 새로운 기독교운동에 대한 의심과 심한 박해는 두번째 방문의 열성을 가로막았지만, 이것은 도리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더 큰 진보를 이루게 했다. 집과 농토를 잃은 수세자들이 흩어지면서 이들 ‘디아스포라’(diaspora)들에 의해 압록강 남쪽 연안이나 서북지방에 기독교 복음이 더욱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웹스터가 남긴 “얼마 후 개종자들의 대부분은 한인계곡들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들고 갔고, 미국 선교사들이 북부지방에 들어갔을 때 이곳 저곳에서 압록강 계곡의 옛 거주지에서 신앙지식을 받아들였던 믿는 무리들을 발견하였다”. [J.Webster, "The Maker of the Manchutia Mission" p.396 ]고 한 기록을 통해서, 한국의 초대 기독교가 서북지방에서 어떻게 그렇게 발전될 수 있었는가의 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4. 1882년 문광서원에서 최초로 간행된 복음서들은 일본과 만주에만 공급된 것이 아니고, 압록강을 건너 한 반도에도 들어와 복음화의 초석을 놓기 시작했다. 백홍준·이응찬이 의주 지역에서, 유진천(? Liu ChuinT)이 평양에서, 서경조가 소래에서 그리고 서상륜이 서울에서 권서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복음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 자신들이 먼저 복음화의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서상륜이 서울에서 권서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입국하기 전으로서, 이 점은 역사학계의 주목을 끈다고 하겠다.

  1870년대 후반, 홍삼 장사차 요하 하류의 영구(營口)에 갔던 서상륜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목사를 만나는 것을 인연으로 하여 성경번역 사업을 도왔고, 1882년 복음서가 출간될 즈음에 로스로부터 세레를 받고 그 6개월 후인 10월 6일에 로스 목사 부처와 “함께 엎디어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하고 서로 작별”. <셔션 샹륜의 경력> 그리스도신문 5권 38호, 1901년 9월 19일자.
기도한 후에 권서행로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약 3개월간 의부 등 한국의 서부지역에서 권서활동을 전개한 후에 서울로 향했다. 그가 서울에 이른 것은 아마도 1883년 1월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함께 의주를 떠난 동생 서경조가 당숙이 있는 소래에 이른 것도 같은 무렵일 것이다

  서울에 이르자 서상륜은 이 사실을 로스에게 알리고 성경의 보급을 요청한 듯하다. 로스는 5월 22일 평양 출신의 청년 편으로 <요한복음> 300권과 <누가복음> 100권을 전달하였고, 이것을 받은 서상륜은 이것으로 그 해 연말까지 6개월간 은밀히 전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러 명의 개종자를 얻은 그는 로스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고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J.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p.247]
그러나 로스는 올 수 없었다.

  1884년경 봉천의 로스는 서상륜에게 <신약전서>와 <덕혜입문(德慧入門)>이 든 상자를 보냈다. 로스는 상해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지부에 연락하여 서울의 묄렌도르프(P.G.Moellendorff, 穆麟德)를 거쳐 최종의 수취인인 서상륜에게 이 상자가 도달하도록 하였다. 서상륜은 소래에 있는 동생 서경조를 불러 성경과 <덕혜입문>을 전달하였다. 서경조는 이것을 받은 후 반년 동안이나 ‘심중전(心中戰)’을 거친 후 이 해 말에 가서야 믿게 되었다.. 徐景祚, <徐景祚의 信道와 傳道와 松川敎會 設立歷史> 神學指南 1925년 10월호, p.88

  우리는 여기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소래교회의 설립연도의 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에서 권서활동을 하던 서상륜은 1885년 초에 봉천의 로스를 방문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2년간 서울에서 사역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로스는 서상륜이 보고한 내용을 받아 런던의 영국성서공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 이상’의 세례 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885년 3월 8일자로 영국성서공회에 보낸 John Ross의 편지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편지가 발송된 1885년 3월 8일 이전에 서상륜이 활동한 서울에서 세레청원자 70 이상이 있었다는 점과, 서울의 근처에 18명 혹은 20여명이 모이는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점이다.

 

  1885년 3월 8일이라면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 부활절보다 거의 1개월가량 앞섰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변에까지 와 있던 기독교는, 그 수용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위대한 모험을 감행한 자기희생적인 한국인 신앙 선각자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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