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있고 그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고 또한 달이 떠 있다. 이는 태양의 격렬한 빛을 받은 별들이 반짝거리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묵시와 의도하신 역사(役事)들이 있어 밤하늘에 존재하듯,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인하여 그 달과 별들처럼 계시의 말씀이 드러난 것이 성서의 이야기들이다(벧후 1:19). 만약에 모두를 낱낱이 기록할 수만 있었다면 이 땅 위에는 둘 곳이 없을 것이다(요 21:25). 그리하나 그래도 부득이 알아야 할 계시의 말씀을 밝히 드러낸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손에 잡고 있는 성경이다(요 20:30-31).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과 기록한 것들이기에 매우 주의하여 말씀을 받아야 한다(벧후 1:20-2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택함 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요, 율법의 선생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빌 3:4-5). 그러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하여 핍박자가 됐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함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행 4:27-28).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감정으로나 지혜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성령과 지혜로써만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없으며(요 14:6) 구원받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그로 말미암아서만 아버지를 알고 또 믿으며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 때 바울은 그리스도를 기다린 사람으로서, 스스로는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시는 성령으로 알게 됨으로써 어두운 데 비취인 샛별처럼 반짝이는 신령한 계시를 전할 수 있는 행복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믿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도가 그의 전도 여행에서와 그가 전한 신령한 편지들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 ‘신약교회의 목회와 성도의 신령한 영광의 생활’이다.
하늘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같이 이 땅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의 성도들이 있다. 나무에서 무성한 가지가 나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것은 땅 속에 감추어진 뿌리들이 가시화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와 성도의 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영광의 소망과 헌신과 거룩함과 의로움 등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現像)이다(고후 11:2). 그러므로 바울이 전하는 바, 그의 믿음의 지식을 통한 가르침과 지혜의 말씀들은 곧 하나님의 의도를 온전히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강조한다. 특별히 치우침이 없는 포괄적인 내용으로써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신약교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확실히 전해주고 있다. 고린도라는 지역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린도교회를 세계 교회의 창(窓)으로 보고, 미래의 세계교회를 함축한 신약교회로서의 고린도교회를 직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와는 달리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 고후 1:1)라는 말로 서문을 연다.
고린도교회의 형편은 동서 세계의 당시와 미래를 보는 한 모형으로써 그 가르침과 권고함이 매우 중요하다. 고린도교회의 형편은 현재 지구상에 있는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을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해당되며, 차별된 신약교회의 가치관에 바른 지침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간 중에서 유별히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는 신약교회의 탄생과 성장과 미래의 소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정의하고 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는 두 가지의 편지는 연속적이라기보다는 두 가지의 가치에 대해 그 내용을 설정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라는 중심에 가치를 두고 권고와 훈계 그리고 소망을 강조한다. 한편 고린도후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는 중심에 가치를 두고 위로와 격려하는 말을 통해 신약교회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고린도전서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라고 한 것과 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고 한 것은 신약교회의 본분과 성도의 가치에 대해 강조한 것이다. 전서에서는 ‘너희’라고 말하고 후서에서는 ‘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성전’이라는 결론이다. 성전이란 복음의 진리인 ‘성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요(요 2:19-22), ‘성전’은 율법과 복음의 해석이며(히 9:1-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심을 깨닫도록 해석한 일이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복음의 명령은 도덕성, 윤리, 신앙의 체험, 부활의 소망에 대하여 이방인과 차별된 높은 신약교회의 가치를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분쟁 없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한 몸을 이루는 길은 오직 사랑뿐임을 강조한다(고전 13:1-3). 신약교회가 사소한 분쟁에 휘말릴 때 득을 보는 것은 마귀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신약교회에는 전혀 득이 없음을 지적하고 이를 고린도전서에 훈계로 깔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의 성취는 “사랑이 제일이다”(고전 13:13)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믿음 위에 있다거나 소망 위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신약교회인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우선되어야 할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는 신약교회의 직분과 직분에 대한 사명을 부각시켰다. 이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들이 할 의무는 우선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하여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다(고후 5:17-19).
다시 정리하여 말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 되심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 교회가 내분 없이 하나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가 전하는 바와 믿음을 위하여 죽는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 우리의 소망인 부활에 이를 때에 떳떳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며,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직분의 영광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고린도교회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낸다.
신앙과 사명은 갈라놓을 수 없는 일치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전서는 신앙생활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즉 신앙인의 생활), 후서는 신앙을 가진 자의 신앙과 신앙인의 생활을 강조한다. 과거나 현재의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 내부의 불협화음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랑’과 ‘나는 주의 것’이라는 사명감은, 신앙과 소망을 더욱 견고케 하는 신약교회의 최우선 순위가 된다.
출처 : | 예수가좋다오 |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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