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소아시아 일곱교회&밧모섬

<여행기록> 에페스

영국신사77 2007. 3. 17. 09:57

                        <여행기록> 에페스

 

 

출처 블로그 > 여행자의 반려
원본 http://blog.naver.com/luckycmw/60027837668
 
 
에페스 북쪽 입구에 있는 에베소 안내도
 

터키/그리스 여행의 기록(7박9일) 9

 

5)에페스 관광 기록


관광지소개

 

  에페스(Epes)는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74km 떨어진 터키 최대의 관광지로, 1,500년전 그리스 시대에 아테네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고대 도시국가의 유적지이며, 사도 바울이 선교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른 곳이며, 에페스 옆에 있는 밧모섬에서 신약전서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예수를 위해 살다 죽은 기독교 성지이기도 하다.

  에페스(Efes)는 “인내”란 뜻으로 성경에는 “에베소”라고 한다. 기원 전 12세기 이전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도시가 형성됐다.

 

  BC11때 아테네의 왕자인 안드로코스가 여행을 좋아해, 에베소에 도착해 이미 살던 이오니아인을 정복하고 피온산 자락에 고대도시 에베스를 건설하였고,  BC8세기에는 에베소의 문명의 꽃을 피웠다.

 

  BC 560년경 리디아왕 크루네소스가 에페스를 정복하였다.(리디아인들이 500여년간 통치) 그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어 독립하였다.

 

  BC 334년에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가 동방원정후 통치했고, 그의 부하 리시마쿠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 후 로마 마지막으로 이 도시를 지배했다. BC 33년에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주 방문한 후, 로마에 의해 급상장하여 로마는 소아시아의 수도로 정하고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후 금, 은, 보석, 진주, 도자기, 세마포, 향료, 포도주, 밀가루, 소, 양, 말 등을 거래하여 사치와 허영의 도시가 되었다. 따라서 에페스에는 이곳을 거쳐간 문명의 흔적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 에페스(Efes)는 로마제국 시절 인구 25만명이 넘던 대도시였다.

 

  지금은 토사가 밀려와 1km 이상 쌓이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에게해 최대의 상업도시로 번성을 누렸던 에페스도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에게해에 인접한 항구로서 교역 중심지였다. 햇볕 따뜻한 4월이면, 다산(多産)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있던 거대한 신전에 몰렸다.

 

  에페스의 은(銀)세공업자들에게는 그들 앞에 나타난 사도 바울은 골칫거리였다. “신은 하나 뿐”이며, 그 신의 아들 예수가 전해준 복된 말씀을 외치는 바울은,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은제물로 떼돈을 벌던 은세공업자들의 생계마저 위협했다. 그래서 그들의 음모로 죽을 뻔한 바울은,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에페스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가 ‘에베소서(書)’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도 에페스에 머물었다.

 

여정

•7월 30일(일)-두번째 이야기

  아침 8시40분경에 술탄쾌이 마을에서 큰 길로 접어들어 서쪽 에페스를 향해 우리를 태운 버스는 달렸다... 30여분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10시10분에 모피옷가게에 들려 패션쇼를 보았다. 모피잡바가 몹시 가볍고 보드러운 게 품질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다시 야자수 우거진 길을 달려 로 쿰휴게소에 와서 11시40분에 점심을 먹고 10여분 차를 타고 1시10분경에 마침내 에페스에 당도하였다.  


  남쪽의 누가의 무덤이 있는 주차장에서, 중앙대로를 따라 매표소(15YTL)에서 처음 본 것은 바리우스목욕탕이었다.

 

  바리우스 목욕탕 BC 2세기에 세워진 목욕탕으로 그 일부만 남아있다. 오데온극장에서 바른쪽으로 가다보면 아치로 연결된 건물이 목욕탕인데 플라바리우스와 그의 처가 건축했다고 하여 바리우스목욕탕이라 부르며, 냉탕, 온탕, 열탕, 풀장들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그 다음 국영 아라고(광장) 시장터를 보았는데, 이는 BC1세기 아우구스트황제가 완성했다고하는 광장으로 국가의 중요행사가 열리는 장소이다. 또 시장으로도 사용되어 청동제품, 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들이 거래되었다. 광장으로 한가운데에는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앞에 붉은 색의 상수도관들을 보았는데, 이는 1800년 전의 상수도관으로 이 에페소에는 이 상수도관이 묻고 이를 사용하여 공동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았으며 또 비데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위에 돌 들이 무너진 것이 아라고(시장터)의 흔적이다. 터키는 지진이 심한 지역이여서 에베소의 유적들이 이처럼 지진으로 무참히 무너졌다.그리고 맨 앞에 붉은 토관이 상수도관이다. 1800년전에 이 상수도관을 설치하여 비테를 사용하였다 하니, 그들의 높은 문화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 다음 오데온을 구경하였다.

 

  오데온(Odeion) 극장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약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래는 실내극장이었으나 현재는 지붕이 없어졌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회의장으로도 사용되었다한다.


 이 사진은 오데온 소극장으로 음악당이나 극장이나 회의실로 썼다고 한다.

 

다음으로 에베소 시 공회당터를 보았다. 

  에베소 시 공회당 건물이 있었던 터이다. 현재는 기둥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이곳에서 성화가 날마다 밝혀졌으며 선발된 시민들이 윤번제로 불을 밝혔다고 하나 지금은 기둥만 남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폴리오의 을 보았다.국영 아라고 서쪽에 있는 크고 높은 아치형의 유적이었다.

  폴리오의 유적-AD97년에 세크티라우스 폴리오라는 사람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다음으로 도미티안 신전(Donitian Tenple) 보았다. 로마제국 때 폭군이었다는 도미티안 황제에게 바쳤다는 신전으로 7m가 넘는 그이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메미우스 비 앞 광장 모퉁이에 2층짜리 돌기둥이 있는데 이것이 신전의 유물이라 한다. 에페소 사람들이 도미티안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을 신으로 모셔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만든 신전이라한다.  도미티안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하고 밧모섬으로 유배를 시켰던 사람이다.요한은 이 밧모섬에서 낮에는 노역을 하고 밤에는 굴속에서 예수의 계시대로 요한계시록을 작성했던 사람인데 도미티안황제가 암살당한 후 에페소로 돌아와 예수를 전도하며 성모마리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폭군 도미티안 신전으로 현재는 기둥만 남았다. 도미티안은 사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보낸 폭군이었으나 암살당하여 요한이 다시 에베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메미우스의 관광. 후기 헬레니즘시기에 지은 것으로 조각상은 폰토스의 난에서 에페스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와 아들 가이우스를 나타내고 있다한다. 메미우스는 술라의 손자이고 3대에 걸쳐 에페스를 지배했다한다.


술라의 손자 메미우스가 만든 비라고 한다.
 

  다음 니케의 부조가 있는데 원래는 헤라클레스 문에 있던 것이라 한다. 여기 조각물에 J자의 낚시 모양이 있는데, 나이키회사에서 단돈 50달라에 매입하여 상표로 등록하여 사용한다 한다.


  니케의 여신상으로, 원래는 헤라크레스문에 있던 것이 여기까지 이전된 것이다.니케가 영어로 나이키로 승리를 의미하는 j자 문형을 이 여인상에서 따왔다고 한다.
 

  다음으로 헤라클레스의 문 관광. 이 문은 크레티아 거리 입구 양쪽에 2층으로 된 대리석 문으로, 평민과 귀족의 경계가 되는 문이다. 헤라클레스가 네메아골짜기에서 사자를 죽였다고 하여, 대리석 받침대 좌우에 그 모습을 부조해 놓았다.

 

  원래는 사자의 털가죽을 두른 헤라클레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여 헤라클레스의 문이라고 하지만, 현재 동상은 없다.


그레티아 거리에 있는 헬라클레스의 문
 
 

  다음으로 트리얀황제의 우물을 관광.

이 우물은 AD102∼104년에 건립되었으며, 황제 트리얀누스에게바치는 우물이었다. 원래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 세워진 트리야누스 황제의 동상 발끝에서 물이 흘렀다고 한다. 또 이곳은 아프로디테의 동상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옛날엔 연못이 있었고, 이 황제의 발끝에서 물이 흘렀다는데 트리얀황제의 눈물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하드리아누스 신전(Hadrian Temple)관광.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바친 신전으로   크레티아거리 공중화장실(목욕탕) 옆에 있는 신전이다. 138년경에 건축된 코린토 양식의 신전으로 현재 현관 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 두 개는 아치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운명의 여신 키게, 북쪽에는 메두사의 모습을 부조하고 있다. 그 아래에 아테네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페스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테오데시우스황제와 그 아버지, 아르테미신, 케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부조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모습
 

  다음 크레아티아 거리 관광했다. 메미우스의 비부터 대극장까지의 길을 크레아티아거리라고 한다.

날씨가 무척 더워 땀을 많이 흘린 날이다.가이드는 이것이 터키의 전형적인 날씨라고 했다. 그렇지만 좌우에는 많은 유적들이 들려주는 말없는 역사 이야기에 땀을 닦을 여유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유명한 셀수스(세루시우스)도서관관광했다. 헤라클레스문에서 북쪽으로 크레티아거리를 더 가면 나타난다. 쥴리우스 셀수소는 소아시아 총독이었는데 그가 70세에 죽자 그의 딸 쥴리우스 이퀼라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축한 도서관이다. 정면 입구에 지혜, 행운, 지식, 미덕의 의미를 상징하는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셀소수 총독의 딸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서관으로, 밑에 지혜, 행운, 지식, 미덕을 상징하는 여성들의 석상을 조각하여놓았다.
 

  다음 셀수스도서관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길 바닥에 있는 매춘숙소 광고도 보았다. 그리고 도서관 앞에 있는 무너진 창녀촌 보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원형극장을 구경했다. 피온산 기슭의 대극장인 이 원형극장은 2만4천명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던 터키 최대 규모의 극장으로 피온산 사면의 경사를 이용한 야회극장인데 BC 3세기(리시마쿠스시대)에 건축했다한다. 관객석은 높이 38m, 지름 158m의 반원형이며, 청동과 도자기제의 확성기가 설치되어, 현재의 마이크보다 음향효과도 뛰어났다.

 

  우리 팀의 염진 선생님 사모님이 가곡을 맨 앞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뒤에 까지 마이크보다 더 선명하고 실감나게 노래소리가 들려, 옛날 사람들의 지혜에 감복했다.

 


항구거리에서 올려다 본 원형극장의 모습이다.
 

  정면에서 본 원형극장.으로 무대에는 많은 조형물을 뒤에 설치했다. 바른쪽의 길은 아카디아나라고하는 항구거리인데 길양편으로 코린트양식의 기둥들이 서 있다. 옛날에는 이 길 끝이 바로 바다이어서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나 귀족들, 총독이 배를 타고 들어도던 통로로, 에페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던 거리였다. 이 길 대리석 밑으로 배수로가 깔려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운동장에서 아데미신을 믿지 말고 예수를 믿을 것을 전도하던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9장에 나옴) 이 그림 맨 위에 솟은 산봉우리(항구거리 길 끝에 보이는 산)의 감옥에 갇혀 고생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항구 거리를 구경하고 북문을 이용하여 에페스 구경을 마쳤는데, 이 때가 오후 3시10분경이었다.

 

  버스를 타고 셀추크(에페소에서 차로 5분 거리) 초입에 있는 아르데미 유적을 구경하였다.

 

  아르데미스신전(Artemis Temple) 세계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아르데미스는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쌍둥이 남매 중 여자이다. 아들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며 여동생 아르데미스는 순결한 여신으로 다산의 여신으로 불린다. 그녀를 기리는 신전으로 이 신전 자리에서 300m 떨어진 거리에 에페스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모형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아르데미신전은 BC7세기경에 120년에 걸쳐 건축했는데, 당시 이 건물의 길이가 115m, 폭 55m, 높이 19m, 대리석 원주가 127개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2배 크기의 건축물이었다 한다. 그 뒤 고트족의 약탈과 파괴로 폐허가 된 것을 알렉산더대왕이 자기 이름을 넣고 재건하면 건축비용을 주겠다고 했으나 에페소 시민들이 이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귀금속을 받쳐 265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동로마가 성소피아성전을 지을 때 이 신전을 헐어다가 건축자재로 사용하여 이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인 T J 우드에 의해 발굴이 되어 현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는 지하 7m에서 이 신전의 흔적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현재는 파괴된 기둥하나만이 발굴되어 남아 있다.

 

  참고 ; 아르미테미스=아데미신

①그리스 신화에서는 순결의 상징

토속신앙-에베소 先主 民族의 土母神으로 가슴에 24개의 유방을 가진 다산과 풍요를 주장하며 인간과 동물의 생식을 주관하는 신

③달의 여신으로 매년 5월 아르데미스 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벌리는데 이때 남자 사제들이 24개의황소고환을 목에 걸어 준다고 한다.

몹시 웅장하고 컸던 아데미신전 유적지-지금은 기둥하나만 남아서 옛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아테미신전터의 구경을 마치고 나서 3시 30분에 이즈미르를 향해 달렸다. 이즈미르(Izimir)는 인구 약 삼백만이 사는 터키 3번째로 큰 도시로,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를 쓴 호머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1차대전시 그리스와의 격전지였으며 현재 나토기지가 있는 곳으로 혼혈인이 많고 기독교인들도 살고 있는 유럽풍의 도시였다.

 

  4시 20분경에 이즈미르 시내를 통과하여, 터키 서쪽 땅의 끝인 체쉬메로 향해 달렸다.

 

  체쉬메는 인구 3만8천명이 사는 에게해에 있는 항구도시로 대형선박이 정박하는 곳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령 시오스로 가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5시15분에 체쉬메에 도착하여 우리는 터키를 떠나며 그동안 7일동안 정들었던 가이드 김현무씨와 악수를 나누고 헤여졌다. 이별이란 서운한 것이었다.

 

  체쉬메는 국경 항구라서 여권을 보이고 통과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여객선에 올라 6시10분에 정들었던 터키를 떠나가게 되었다.

 

  터키는 남북으로는 흑해로부터 에게해까지이지만, 서쪽 체쉬메에서 동쪽으로는 아르지방 Dilucu까지 무척 긴 고구마처럼 생긴 나라였다. 한반도보다 5배가 큰 나라이나, 강우량은 우리나라의 반 밖에 되지 않아 건조한 나라이다.

 

  흑해는 바닷물이 검어서 흑해가 아니라, 가이드 말에 의하면 밤에 육지에서 바다로 불어오는 바람이 센데, 고기가 밤에 많이 잡히기 때문에 밤에 목선들이 바람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 “공포의 바다. 암흑의 바다” 란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아무튼, 터키는 대리석과 양탄자가 많이 생산되는 나라로, 먼 옛날에 여진족이 서쪽으로 넘어와 하타이 왕국을 만들어 발전된 국가로,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 때에 가장 국력이 강했던 나라였으며, 가는 곳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 유적이 남아 있는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