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영국신사77 2007. 3. 5. 23:12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출처 블로그 > VoMMee's Happy life
원본 http://blog.naver.com/sky5891/120017899271

 

 

  랍비 요하난은 유태 민족이 사상 최대의 정신적 위기에 당면했을 때 활약한 사람이다. A.D. 70년에 로마인들이 유태의 성전을 파괴하고 유태인을 절멸시키려고 했을 때. 요하난은 매파가 항상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요하난은 유태 민족이 영원히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어떤 일에 관하여 로마의 장군과 협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 당시 유태인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출입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요하난은 한 계교를 생각해 내어 탈출하는데 성공

 

했다. 그는 거짓으로 환자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랍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이윽고 살아나기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고 얼마

 

뒤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제자들은 그를 관 속에 넣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 안에는 묘지가 없었기 때문에 시체를

성 밖에 매장할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매파의 경비병들은 랍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반신

반의하여 칼로 시체를 찔러 보겠다고 말했다. 유태인들은 절대로 시체를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시체를 직접 보고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관 위에서 칼로 찌르려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돌아간 분을 모목하는 행위라고 필사적으로 항의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드디어 로마군의 전선을 향해 갔다.

 

 

  그런데, 전선에 이르자. 로마병 역시 칼로 관을 찔러 보겠다고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제

자들은 다시, " 만일 로마의 황제가 죽었다면, 당신들은 칼로 관을 찌르겠는가? 우리들은

전혀 무장도 안 하고 있지 않느냐?" 고 주장하여 드디어 전선을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관 속에서 나온 랍비는 사령관을 만나고 싶다고 신청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로마의 사령관 앞에 나가자, 그는 사령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는 당신에 대하여 로마 황제와 같은 경의를 표합니다." 하고 말했다. 황제와 같다는 말을

들은 사령관을 로마의 황제를 모욕한다고 화를 냈다. 그러자 랍비는,

 

"내 말을 믿으시오. 당신을 틀림없이 다음 번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라고 잘라 말했

다. 그러자 사령관은. "당신의 말은 이해하겠소. 그런데 당신이 내게 하려는 말이 무엇이

오?" 하고 말했다.

 

 

"네, 꼭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하고 랍비는 대답했다.

"학교를 꼭 하나만 만들어 주십시오. 교실 하나라도 좋습니다. 10명의 랍비가 들어갈 수 있

는 학교 하나만 만들어 주시되,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

 

 

  랍비는 조만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점령되어 파괴될 것을 알고 있었다.모든 가옥이 파

괴되고 많은 유태인들이 학살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만 하나 있으면 유태인의

전통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청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령관은, "좋소, 약속하지요." 하고 말했다. 이

윽고 로마의 황제가 죽고 그 사령관이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로마군에게 "그 작은 학교 하

나만은 손대지 말라" 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 때 그 작은 학교에 남아 있던 학자들이 유태인의 지식과 전통을 지켜주었다. 그

리고 전쟁이 끝난 뒤의 유태인의 생활 양식도 그 학교가 지켜 주었던 것이다.

 

 

  "착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다." 라고 요하난은 말했다. " 당신은, 인간이기 때

문에 남편과 아내와의 사이, 나아가서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

다." 라고 요하난은 말했다

 

 

 

 

             유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로마 장군 티투스의 이야기

출처 블로그 > jkt1324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jkt1324/80018730476


 
  주후 70년 이스라엘이 민족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이스라엘 온건파의 지도자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멸절시키려고 예루살렘을 둘러 진치고 있는 세계 최강 로마의 군대를 맞아 자기 민족의 미래를 보전할 궁리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 최후의 시간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한가지 일을 획책하였다. 자신이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문병을 다녀가고, 그의 병은 점점 깊어져 결국 죽었다는 소문이 성중에 나돌았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이스라엘의 대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시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이 시신을 성벽 바깥으로 가져다가 매장키로 한 것이다.

  온건파의 항복을 저지하기 위해 성문 출입을 통제하고 있던 강경파에서도 결국 그의 시체 매장에 관해서만은 성문 밖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동족의 감시와 로마 경비군의 경계를 빠져나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로마 장군 티투스와 담판의 자리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티투스를 보고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한가지 간청을 하였다.

  이제 곧 멸절의 패망을 당할 민족을 앞에 두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간청하고 싶었던 그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방이라도 좋습니다. 열 명쯤 되는 랍비가 들어갈 수 있는 교실만이라도 하나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만을 파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티투스 장군은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성전 등의 파괴는 물론 대학살을 일으켰지만, 오하난 벤 자카이와의 약속만은 지켰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중서부 해안 도시, 얌니아에 세워진 랍비 학교였다...

 

 

 

 

   *주후 70년 이후에 자치권의 상실과 더불어 성전파괴로 인해서 지도층이던 제사장 계급이 몰락한 팔레스틴에 새로운 지도력이 탄생했다.

바리새 전통을 지닌 랍비들과 서기관 계급이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ai)가 그 핵심에 있었다.

이들이 일으킨 새로운 고난 이해 운동은 얌니아(Jamnia)를 중심으로 해서 흥왕하여 예루살렘 탈무드(Yerusalmi)와 미드라쉬(Midrash)를 열매로 남겼다.

 

 

 

  또한 주후 135년에 일어난 바르 코흐바(Bar Kochba) 폭동 이후 바벨론으로 이주한 랍비들은 후기 유대주의 역사에 있어서 팔레스틴을 능가하는 역할을 해냈으며, 이들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소위 탈무드라고 줄여서 말하는 바빌론 탈무드(Babylonian Talmud)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탈무드는 오늘날까지 살아서 유대인들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들이 고난에 부딪힐 때 마다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지혜와 종교적 전통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68~70년에 발생한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항쟁 당시에 극적으로 예루살렘을 탈출한 후 욥바 근교에 있는 야브네(Jabne 혹은 Jamnia)에 랍비학교를 세우고 유대주의를 발전시킨 위대한 학자이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온건파로써 강경파의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대 민족이 영원히 살아 남을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던 끝에 로마의 장군과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출입이 전혀 불가능했다. 이에 요하난 벤 자카이는 하나의 계교를 생각해 내어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거짓으로 환자노릇을 했고, 그를 병 문안하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나기 어렵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제자들은 그를 관속에 넣고 시체를 성 밖에 매장할 허가를 신청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안에 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경파 경비병들은 랍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반신반의하여 칼로 시체를 찔러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돌아간 분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필사적으로 항의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강경파의 눈길을 피하여 드디어 로마군의 진영으로 나갈 수 있었다. 로마군 진영에 이르자, 이번에는 로마병들이 칼로 관을 찔러 보겠다고 하였다. 제자들은 다시 로마의 황제가 죽었다면, 칼로 관을 찌르겠는가 라고 주장하면서 로마군의 진영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관속에서 나온 랍비는 로마군 사령관을 만나고 싶다고 신청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로마의 사령관 베스파시안 장군 앞에 나간 그는 사령관이 앞으로 로마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조그만 학교를 하나 세워 줄 것과 그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고 보존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후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가 되고 말았지만, 유대교의 전통만은 요하난 벤 자카이와 그와 함께 한 십 여명의 랍비들에 의하여 보존될 수가 있었다. 


   열심당원을 중심으로 한 로마와의 전쟁에서 실패하자 이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원들과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그리고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되고 오직 바리새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구심점이던 성전 파괴는 신학적으로 유대교의 위기이기도 하였다.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백성들은 신앙적으로 방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에게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만 했다.

 

  랍비 문학은 바리새파가 어떻게 성전 파괴 후에 대처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여호수아 벤 하나니아에게 스승이었던 요하난 벤 자카이가 말한다. "파괴된 성전을 위해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에게는 다른 보상이 있다. 그것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호 6:6)는 말씀이다" 성전 파괴 후 포도주와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 여호수아는 "그렇다면 숨도 쉬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성전 파괴는 유대인에게 끝이 될 수 없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토라가 남아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몇 몇 바리새파 율법선생들과 더불어 야브네(헬라어로는 얌니아)에서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쉬)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인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 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율법을 공부하는 학교들이 야브네를 비롯하여 모든 유대인 마을에 생겨났다. 주전 1세기 힐렐과 샤마이에서부터 시작하여 3세기 랍비 유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율법의 지도자들인 '타나'(율법선생)의 지도 하에 율법이 계승되어 갔다. 아브네에서는 유대교와 관련된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이 있었다. 하나는 100년경에 확정된 히브리어와 아람어 구약성서의 정경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85년경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표준기도문이 18개 기도문(18 조항을 의미하는 점에서 '슈모네 에스레'라고도 하고 서서 드리는 기도문이라는 의미에서 '아미다'라고도 함)의 확정이다.


   요하난은 힐렐과 샤마이에게서 유대 전통을 이어받았던 인물이었다. 힐렐은 자신이 죽기 전에, 가장 나이가 어린 자신의 제자 요하난 벤 자카이가 앞으로의 세대를 대표할 학자가 될 것임을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 요하난의 생애는 그의 스승 힐렐의 경우와 같이 40년씩 3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40년 동안 그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40년 동안 그는 공부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40년 동안은 가르치는 일에 전력하였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생애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10년 동안 야브네를 중심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본다면, 그의 율법선생으로서의 위치는 적어도 30년 혹은 40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율법을 배우는 것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 일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신이 토라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면, 그것으로 당신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토라를 배우는 것이 곧 당신이 창조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기간이나 가르치는 동안에는 그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한 적이 없으며, 토라를 깊이 묵상하는 일이 없이 네 걸음 이상을 간 적이 없었다고 전해온다. 그는 율법학교에 가장 먼저 왔고 제일 나중에 공부하는 방을 떠나는 학생이었다. 그는 오르지 공부하는 일에만 매달렸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http://www.bibleland.or.kr/blnews/제15호/5.htm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랍비)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

  로마의 네로 황제가 다스리고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 투쟁을 벌이다. 이것이 서기 66년~70년까지 계속된 '유대전쟁'이다. 네로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가장 신뢰하던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유다왕국을 함락시키도록 명령한다. 베스파시안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유다왕국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68년, 전쟁이 시작된지 3년째 되던 해에 베스파시안은 유다왕국을 점령했지만, 유대인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예루살렘은 함락시킬 수 없었다.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주민들이 굶주려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이 무렵, 예루살렘 안에서는 강경파인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는 한 평화주의자가 있었다. 그가 유명한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바리새인인 그는 유대전쟁이 결국에는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임을 예견하였다. 그는 유다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로마의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포위되어 있던 예루살렘은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 천명씩 사망했으나,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확신을 토로하고 함께 예루살렘 탈출 계획을 짰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아가 옷을 찢으며 슬픈 목소리로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결려 사망했다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존경하는 랍비의 시체를 도심 외곽에 매장하여 도시에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도록 요청하여 허락을 얻어냈다. 결국 제자들은 랍비가 든 봉인된 관을 들고 예루살렘을 나와 베스파시안 장군의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관에서 나온 랍비는 로마 장군에게, 베스파시안이 곧 황제에 등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자신과 몇몇 제자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평화롭게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를 세우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랍비의 예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랍비의 요청은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다. 놀란 로마 장군은 예언이 사실로 밝혀지면 호의를 베풀어 주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해 네로는 자살하고 세 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만에 살해되었다. 69년에 로마 원로원은 베스파시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단순했던 베스파시안은 랍비의 예언이 성취된 데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랍비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베스파시안은 약속을 지켜 야브네라는 도시에 최초의 유대학교 예시바가 설립하도록 허락했다. 이것이 전쟁으로 패망한 유대인들의 생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맥스 디몬트<김재신 역>, {유대민족사}, 크리스챤 디이제스트사, 1994, 96-97)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비록 유다왕국이 로마의 무력에 의해 패망한다고 할지라도 학교를 통해서 유대전통이 전승되기만 한다면 유대민족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서기 70년에 유대왕국이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투쟁에서 패한 후에, 패망한 유대민족의 역사를 이어간 것은 바리새파였다. 바리새파에서 민족의 지도자들인 유명한 랍비들이 등장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을 이끌어 갔다.

                                 http://www.hanshin.ac.kr:8080/~yunej/bbs/zboard.php?id=yune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