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40여일 만에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을 한다.
가장 치열했던 328고지 전투
뺏고 뺏기는 전투는 8월의 날씨만큼 뜨거웠다. 다부동 일대의 주요 고지에선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8월 13일부터 12일간 전투가 벌어진 328고지에서는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만큼 치열했다.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전우 절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죽은 전우를 땅에 묻을 시간도 없이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더 끔찍한 것은, 고지 전체가 바위산이기 때문에 호를 파기 어려워 병사들의 시신을 방호막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등중사였던 황대형 노병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 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건빵 먹는 것을 보고 고참병인지 신병인지 판단할 정도다. 병사들은 건빵 두 봉지를 배급받았는데, 고참병은 한 알 두 알씩 꺼내서 천천히 먹는다. 신병은 배가 고파 마구 먹는다. 고참병들은 건빵을 먹는 대로 갈증이 몰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천천히 먹으면서 갈증을 피한다. 신참은 허겁지겁 먹고 목이 메어 물을 마시려고 산에서 내려가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박형수 노병은 이렇게 증언했다. “다부동 그 지역에 328고지라고 있어요. 거기에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와서 교두보를 확보했어요. 이제 제트기가 와서 네이팜 탄을 쏘고 뒤에서 미군 155㎜ 포가 사흘을 내리퍼부었어요. 푸른 산이 빨갛게 될 정도로 다 타버렸어요. 상부에서 328고지를 점령하라는 작전 명령이 내려와서 공격을 시작했는데 탄알이 비 오듯 떨어지는 거예요.”
류형석의 ‘낙동강’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328고지 정상 주변에 2,000여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328고지는 더 이상 인간 세계가 아니었다. 검게 탄 시체,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땅바닥에 널려 있고, 나뭇가지에도 걸려 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의 신음과 비명과 절규, 염천의 열기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시신의 배가 ‘펑’하고 터질 때는 수류탄이 날아온 줄 착각하고 또 한 번 놀랜다. 파리 떼가 극성을 부리고, 악취가 진동하여 숨을 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