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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최일도 다일공동체 대표 <11> -<20>
영국신사77
2019. 3. 1. 23:09
[역경의 열매] 최일도 <11> “하나님께 먼저 묻고…” 고민하는 나를 다독인 아내
성당 포기하고 새문안교회 함께 출석… “5세 연상 수녀 안 된다” 모친 결혼 반대
입력 : 2017-12-15 00:00
1982년 9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일도 목사와 김연수 사모가 미소 짓고 있다.
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마련했고 나는 오랫동안 미뤄놨던 책을 다시 잡았다. 목회를 한다면 중도에 포기한 신학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할지, 인문학 공부부터 할지 생각이 복잡했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묻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어도 괜찮다고 했다.
‘올해 시험은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예비고사를 봤다. 기대치 않았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대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합격자 발표 날, 그녀와 서울 광나루의 장신대를 찾았다. 숨을 죽이고 본관 앞 게시판을 살폈는데 놀랍게도 내 수험번호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기에 그날 느낀 기쁨과 부담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본관 로비 건너편 기도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합격 발표 후 경기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국어교사로 근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뒤 7개월간 어려운 일이 많았다. 두 사람 다 수입이 없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교회와 성당 사이에서 엄청나게 방황했다. 난 계속 성당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내가 목회자가 될 사람이기에 내 쪽으로 건너오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보고는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가 제일 맘이 평안하다고 했다. 우리 둘은 새문안교회 성도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난 서울 광장동의 신학교 기숙사로, 그녀는 동두천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장신대 입학 후부터 어머니의 성화는 부쩍 늘었다.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이 줄곧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수업이 끝나면 수도원을 찾아 다녔고 용산의 행려자 숙소나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시설에서 헐벗은 이들과 한뎃잠을 자기도 했다. 불규칙한 삶은 오래가질 못했다.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또다시 입원했다. 며칠간 병원에서 지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결심했다. 그녀와 되도록 빨리 결혼하기로.
퇴원해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 우리는 결혼날짜를 1982년 9월 4일로 잡아버렸다. 어머니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아예 호적을 파가라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섯 살 연상의 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일단 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녀가 개신교에 큰 유익을 주는 목회자 부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신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님은 우리 사정을 아시고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셨다.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식 당일, 우리 두 사람의 하나 됨을 만천하에 고했다. 죽음 같은 고통과 수없이 싸우며, 때론 피 흘리는 산제사를 고독하게 올려 드리며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넘쳤다. 그러나 그 감격은 큰 시련과 풍랑을 만나게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입력 : 2017-12-15 00:00
![[역경의 열매] 최일도 <11> “하나님께 먼저 묻고…” 고민하는 나를 다독인 아내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15/201712150000_23110923866893_1.jpg)
1982년 9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일도 목사와
김연수 사모가 미소 짓고 있다.
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마련했고 나는 오랫동안 미뤄놨던 책을 다시 잡았다. 목회를 한다면 중도에 포기한 신학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할지, 인문학 공부부터 할지 생각이 복잡했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묻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어도 괜찮다고 했다.
‘올해 시험은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예비고사를 봤다. 기대치 않았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대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합격자 발표 날, 그녀와 서울 광나루의 장신대를 찾았다. 숨을 죽이고 본관 앞 게시판을 살폈는데 놀랍게도 내 수험번호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기에 그날 느낀 기쁨과 부담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본관 로비 건너편 기도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합격 발표 후 경기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국어교사로 근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뒤 7개월간 어려운 일이 많았다. 두 사람 다 수입이 없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교회와 성당 사이에서 엄청나게 방황했다. 난 계속 성당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내가 목회자가 될 사람이기에 내 쪽으로 건너오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보고는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가 제일 맘이 평안하다고 했다. 우리 둘은 새문안교회 성도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난 서울 광장동의 신학교 기숙사로, 그녀는 동두천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장신대 입학 후부터 어머니의 성화는 부쩍 늘었다.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이 줄곧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수업이 끝나면 수도원을 찾아 다녔고 용산의 행려자 숙소나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시설에서 헐벗은 이들과 한뎃잠을 자기도 했다. 불규칙한 삶은 오래가질 못했다.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또다시 입원했다. 며칠간 병원에서 지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결심했다. 그녀와 되도록 빨리 결혼하기로.
퇴원해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 우리는 결혼날짜를 1982년 9월 4일로 잡아버렸다. 어머니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아예 호적을 파가라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섯 살 연상의 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일단 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녀가 개신교에 큰 유익을 주는 목회자 부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신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님은 우리 사정을 아시고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셨다.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식 당일, 우리 두 사람의 하나 됨을 만천하에 고했다. 죽음 같은 고통과 수없이 싸우며, 때론 피 흘리는 산제사를 고독하게 올려 드리며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넘쳤다. 그러나 그 감격은 큰 시련과 풍랑을 만나게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올해 시험은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예비고사를 봤다. 기대치 않았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대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합격자 발표 날, 그녀와 서울 광나루의 장신대를 찾았다. 숨을 죽이고 본관 앞 게시판을 살폈는데 놀랍게도 내 수험번호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기에 그날 느낀 기쁨과 부담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본관 로비 건너편 기도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합격 발표 후 경기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국어교사로 근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뒤 7개월간 어려운 일이 많았다. 두 사람 다 수입이 없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교회와 성당 사이에서 엄청나게 방황했다. 난 계속 성당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내가 목회자가 될 사람이기에 내 쪽으로 건너오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보고는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가 제일 맘이 평안하다고 했다. 우리 둘은 새문안교회 성도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난 서울 광장동의 신학교 기숙사로, 그녀는 동두천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장신대 입학 후부터 어머니의 성화는 부쩍 늘었다.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이 줄곧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수업이 끝나면 수도원을 찾아 다녔고 용산의 행려자 숙소나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시설에서 헐벗은 이들과 한뎃잠을 자기도 했다. 불규칙한 삶은 오래가질 못했다.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또다시 입원했다. 며칠간 병원에서 지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결심했다. 그녀와 되도록 빨리 결혼하기로.
퇴원해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 우리는 결혼날짜를 1982년 9월 4일로 잡아버렸다. 어머니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아예 호적을 파가라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섯 살 연상의 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일단 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녀가 개신교에 큰 유익을 주는 목회자 부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신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님은 우리 사정을 아시고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셨다.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식 당일, 우리 두 사람의 하나 됨을 만천하에 고했다. 죽음 같은 고통과 수없이 싸우며, 때론 피 흘리는 산제사를 고독하게 올려 드리며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넘쳤다. 그러나 그 감격은 큰 시련과 풍랑을 만나게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2>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가난함 수용
15만3000원으로 세 식구 한 달 생활, 굶고 걷고… 주변 도움에 마음은 따뜻
입력 : 2017-12-18 00:00
1985년 예수의 작은형제 수도회 수도원을 찾은 최일도 목사 부부와 자녀의 뒷모습.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아내는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싱긋 웃었다. 생명을 잉태했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동시에 과연 아빠가 될 준비가 됐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수입이 없는 신학생으로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형편을 생각하니 태어날 아기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기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동두천과 가까운 의정부로 이사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새벗’에서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낮엔 학교에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밤에는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날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가 될 거라는 설렘이 커서 피곤한 줄 몰랐다.
1983년 2월 봄방학 동안 의정부로 집을 옮겼다. 어렵사리 미군부대 옆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다가구주택 한 층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하지만 잔금까지 치르고 보니 집은 비행장 바로 옆이었고, 수도에는 황톳물이 섞인 지하수가 나왔다. 우는 마음을 달래며 그냥 살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아이가 태어났다. 기도 중에 아이의 이름을 ‘산’으로 짓기로 했다. 산처럼 우람하고 듬직하며, 모두에게 이롭고 높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다.
나는 다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아내는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내 수입으로 살기로 했다. 서로 이의 없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이 때문이다.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당시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인간답게 살자’고 비장하게 결의했고 거처는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종로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사례비는 17만원이었다. 십일조를 빼고 나면 15만3000원이 세 가족의 생활비 전부였다. 각오는 했지만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든 수입에서 오는 궁핍함은 생각보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아이의 우유를 제외한 모든 물건의 수준을 전보다 현격히 낮췄다. 옷은 살 엄두를 내지 못해 늘 얻거나 빌려 입었다. 차비가 없어 광진교를 걸어 등하교를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학교 뒤 아차산의 약수로 점심을 때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티내고 싶지 않아 웃고 다녔다. 아내와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궁핍을 즐기는 삶을 이어갔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당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지인들이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친구들은 장신대 성종현 교수의 집에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곤 했다. 어느 가을날 성 교수는 고향 나주의 맛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배와 감이 담긴 종이가방을 갖고 불쑥 우리 집을 찾았다. 85년 딸 가람이가 태어났을 때도 방문해 기도해주셨다.
내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병실에 찾아와 눈물로 기도해 주신 오성춘 교수님과 식권을 사주시고 토큰과 아이 분유를 사주신 조활웅 교수님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무 배고프면 친구들을 찾아가 밥을 실컷 얻어먹고 왔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주머니 쌈짓돈을 슬쩍 내게 건네기도 했는데 그들이 건넨 돈으로 가람이의 분유를 사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가족의 친밀함은 날로 깊어졌지만 냉혹한 현실은 서러운 눈물을 자주 흘리게 했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신학생 수입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는 미래를 위한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아내는 다시 교사로 복직하기를 원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입력 : 2017-12-18 00:00
![[역경의 열매] 최일도 <12>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가난함 수용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18/201712180000_23110923868276_1.jpg)
1985년 예수의 작은형제 수도회 수도원을 찾은 최일도 목사 부부와
자녀의 뒷모습.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아내는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싱긋 웃었다. 생명을 잉태했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동시에 과연 아빠가 될 준비가 됐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수입이 없는 신학생으로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형편을 생각하니 태어날 아기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기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동두천과 가까운 의정부로 이사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새벗’에서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낮엔 학교에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밤에는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날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가 될 거라는 설렘이 커서 피곤한 줄 몰랐다.
1983년 2월 봄방학 동안 의정부로 집을 옮겼다. 어렵사리 미군부대 옆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다가구주택 한 층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하지만 잔금까지 치르고 보니 집은 비행장 바로 옆이었고, 수도에는 황톳물이 섞인 지하수가 나왔다. 우는 마음을 달래며 그냥 살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아이가 태어났다. 기도 중에 아이의 이름을 ‘산’으로 짓기로 했다. 산처럼 우람하고 듬직하며, 모두에게 이롭고 높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다.
나는 다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아내는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내 수입으로 살기로 했다. 서로 이의 없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이 때문이다.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당시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인간답게 살자’고 비장하게 결의했고 거처는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종로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사례비는 17만원이었다. 십일조를 빼고 나면 15만3000원이 세 가족의 생활비 전부였다. 각오는 했지만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든 수입에서 오는 궁핍함은 생각보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아이의 우유를 제외한 모든 물건의 수준을 전보다 현격히 낮췄다. 옷은 살 엄두를 내지 못해 늘 얻거나 빌려 입었다. 차비가 없어 광진교를 걸어 등하교를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학교 뒤 아차산의 약수로 점심을 때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티내고 싶지 않아 웃고 다녔다. 아내와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궁핍을 즐기는 삶을 이어갔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당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지인들이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친구들은 장신대 성종현 교수의 집에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곤 했다. 어느 가을날 성 교수는 고향 나주의 맛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배와 감이 담긴 종이가방을 갖고 불쑥 우리 집을 찾았다. 85년 딸 가람이가 태어났을 때도 방문해 기도해주셨다.
내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병실에 찾아와 눈물로 기도해 주신 오성춘 교수님과 식권을 사주시고 토큰과 아이 분유를 사주신 조활웅 교수님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무 배고프면 친구들을 찾아가 밥을 실컷 얻어먹고 왔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주머니 쌈짓돈을 슬쩍 내게 건네기도 했는데 그들이 건넨 돈으로 가람이의 분유를 사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가족의 친밀함은 날로 깊어졌지만 냉혹한 현실은 서러운 눈물을 자주 흘리게 했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신학생 수입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는 미래를 위한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아내는 다시 교사로 복직하기를 원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수입이 없는 신학생으로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형편을 생각하니 태어날 아기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기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동두천과 가까운 의정부로 이사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새벗’에서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낮엔 학교에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밤에는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날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가 될 거라는 설렘이 커서 피곤한 줄 몰랐다.
1983년 2월 봄방학 동안 의정부로 집을 옮겼다. 어렵사리 미군부대 옆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다가구주택 한 층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하지만 잔금까지 치르고 보니 집은 비행장 바로 옆이었고, 수도에는 황톳물이 섞인 지하수가 나왔다. 우는 마음을 달래며 그냥 살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아이가 태어났다. 기도 중에 아이의 이름을 ‘산’으로 짓기로 했다. 산처럼 우람하고 듬직하며, 모두에게 이롭고 높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다.
나는 다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아내는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내 수입으로 살기로 했다. 서로 이의 없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이 때문이다.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당시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인간답게 살자’고 비장하게 결의했고 거처는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종로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사례비는 17만원이었다. 십일조를 빼고 나면 15만3000원이 세 가족의 생활비 전부였다. 각오는 했지만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든 수입에서 오는 궁핍함은 생각보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아이의 우유를 제외한 모든 물건의 수준을 전보다 현격히 낮췄다. 옷은 살 엄두를 내지 못해 늘 얻거나 빌려 입었다. 차비가 없어 광진교를 걸어 등하교를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학교 뒤 아차산의 약수로 점심을 때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티내고 싶지 않아 웃고 다녔다. 아내와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궁핍을 즐기는 삶을 이어갔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당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지인들이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친구들은 장신대 성종현 교수의 집에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곤 했다. 어느 가을날 성 교수는 고향 나주의 맛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배와 감이 담긴 종이가방을 갖고 불쑥 우리 집을 찾았다. 85년 딸 가람이가 태어났을 때도 방문해 기도해주셨다.
내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병실에 찾아와 눈물로 기도해 주신 오성춘 교수님과 식권을 사주시고 토큰과 아이 분유를 사주신 조활웅 교수님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무 배고프면 친구들을 찾아가 밥을 실컷 얻어먹고 왔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주머니 쌈짓돈을 슬쩍 내게 건네기도 했는데 그들이 건넨 돈으로 가람이의 분유를 사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가족의 친밀함은 날로 깊어졌지만 냉혹한 현실은 서러운 눈물을 자주 흘리게 했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신학생 수입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는 미래를 위한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아내는 다시 교사로 복직하기를 원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3> 인생을 바꿔놓은 청량리역 노인과의 만남
나흘 굶은 노숙인 부축해 설렁탕 대접… 독일 유학 대신 다일공동체 구상
입력 : 2017-12-19 00:01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최일도 목사.
신대원 졸업학기 중인 1988년 11월 11일, 휴강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며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틈만 나면 어디론가 휑하니 다녀오던 방랑벽이 또 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역 광장을 지나고 있는데 대여섯 걸음 앞서 걷고 있던 한 노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를 돕다가 기차를 놓칠까 걱정됐고 다른 누군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다.
춘천에 도착해서 호숫가를 거닐거나 커피숍에서 시를 쓰며 한나절을 보냈다. 일주일 후 모교 채플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역광장을 가로 질러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침에 봤던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온몸을 오그린 채 광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분노였다. 동시에 ‘나는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신대원 졸업 후 독일유학을 다녀와 영성수련센터와 산속에 전원교회를 세우겠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끝낸 터였다. 쓰러진 그 노인을 돌보는 건 내 삶의 계획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신앙 양심은 남아 있어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어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하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서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뒤돌아서서 다시 할아버지를 봤다. 그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먹지 못했다 일도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바닥에 눕혀 놓을 셈이냐.” 주님의 음성이 죽어가는 양심을 찌르는 듯했다.
강도 만난 자를 스쳐 지나간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노인을 일으켜 근처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노인을 의자에 앉힌 후 설렁탕을 시켰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고 사지를 주물렀다. 그는 나흘간 아무것도 못 먹었고,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며, 고물상에 박스 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노인과 헤어지고 그를 수용시설에라도 모셔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행려자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에게 설렁탕을 사드렸다. 그들은 청량리 수산시장과 야채시장의 쓰레기더미에서, 경동시장의 한약방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고 역시 끼니 거르는 것은 일상이라 했다.
‘아직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나는 내 가족만 알고 살아 왔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씩 그분들을 만나러 청량리로 갔고 용돈은 날개 달린 듯 날아갔다. 턱없는 지출은 가계에 타격을 줬다. 아내는 혹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됐다. 오해를 풀기 위해 하루는 아내와 함께 청량리역 근처 설렁탕집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와 여덟 명의 행려자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밥값을 치르고 나오자 아내는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질 못했다.
이후 아내는 나를 말렸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일명 ‘대책없음’이라고. 고민 끝에 단안을 내리며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청량리역 가까운 곳에 교회와 다일공동체를 반드시 세워야겠다고. 독일유학과 전원 공동체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입력 : 2017-12-19 00:01
![[역경의 열매] 최일도 <13> 인생을 바꿔놓은 청량리역 노인과의 만남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19/201712190001_23110923868710_1.jpg)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최일도 목사.
신대원 졸업학기 중인 1988년 11월 11일, 휴강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며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틈만 나면 어디론가 휑하니 다녀오던 방랑벽이 또 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역 광장을 지나고 있는데 대여섯 걸음 앞서 걷고 있던 한 노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를 돕다가 기차를 놓칠까 걱정됐고 다른 누군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다.
춘천에 도착해서 호숫가를 거닐거나 커피숍에서 시를 쓰며 한나절을 보냈다. 일주일 후 모교 채플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역광장을 가로 질러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침에 봤던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온몸을 오그린 채 광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분노였다. 동시에 ‘나는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신대원 졸업 후 독일유학을 다녀와 영성수련센터와 산속에 전원교회를 세우겠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끝낸 터였다. 쓰러진 그 노인을 돌보는 건 내 삶의 계획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신앙 양심은 남아 있어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어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하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서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뒤돌아서서 다시 할아버지를 봤다. 그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먹지 못했다 일도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바닥에 눕혀 놓을 셈이냐.” 주님의 음성이 죽어가는 양심을 찌르는 듯했다.
강도 만난 자를 스쳐 지나간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노인을 일으켜 근처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노인을 의자에 앉힌 후 설렁탕을 시켰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고 사지를 주물렀다. 그는 나흘간 아무것도 못 먹었고,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며, 고물상에 박스 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노인과 헤어지고 그를 수용시설에라도 모셔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행려자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에게 설렁탕을 사드렸다. 그들은 청량리 수산시장과 야채시장의 쓰레기더미에서, 경동시장의 한약방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고 역시 끼니 거르는 것은 일상이라 했다.
‘아직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나는 내 가족만 알고 살아 왔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씩 그분들을 만나러 청량리로 갔고 용돈은 날개 달린 듯 날아갔다. 턱없는 지출은 가계에 타격을 줬다. 아내는 혹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됐다. 오해를 풀기 위해 하루는 아내와 함께 청량리역 근처 설렁탕집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와 여덟 명의 행려자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밥값을 치르고 나오자 아내는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질 못했다.
이후 아내는 나를 말렸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일명 ‘대책없음’이라고. 고민 끝에 단안을 내리며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청량리역 가까운 곳에 교회와 다일공동체를 반드시 세워야겠다고. 독일유학과 전원 공동체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 광장을 지나고 있는데 대여섯 걸음 앞서 걷고 있던 한 노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를 돕다가 기차를 놓칠까 걱정됐고 다른 누군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다.
춘천에 도착해서 호숫가를 거닐거나 커피숍에서 시를 쓰며 한나절을 보냈다. 일주일 후 모교 채플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역광장을 가로 질러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침에 봤던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온몸을 오그린 채 광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분노였다. 동시에 ‘나는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신대원 졸업 후 독일유학을 다녀와 영성수련센터와 산속에 전원교회를 세우겠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끝낸 터였다. 쓰러진 그 노인을 돌보는 건 내 삶의 계획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신앙 양심은 남아 있어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어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하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서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뒤돌아서서 다시 할아버지를 봤다. 그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먹지 못했다 일도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바닥에 눕혀 놓을 셈이냐.” 주님의 음성이 죽어가는 양심을 찌르는 듯했다.
강도 만난 자를 스쳐 지나간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노인을 일으켜 근처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노인을 의자에 앉힌 후 설렁탕을 시켰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고 사지를 주물렀다. 그는 나흘간 아무것도 못 먹었고,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며, 고물상에 박스 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노인과 헤어지고 그를 수용시설에라도 모셔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행려자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에게 설렁탕을 사드렸다. 그들은 청량리 수산시장과 야채시장의 쓰레기더미에서, 경동시장의 한약방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고 역시 끼니 거르는 것은 일상이라 했다.
‘아직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나는 내 가족만 알고 살아 왔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씩 그분들을 만나러 청량리로 갔고 용돈은 날개 달린 듯 날아갔다. 턱없는 지출은 가계에 타격을 줬다. 아내는 혹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됐다. 오해를 풀기 위해 하루는 아내와 함께 청량리역 근처 설렁탕집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와 여덟 명의 행려자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밥값을 치르고 나오자 아내는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질 못했다.
이후 아내는 나를 말렸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일명 ‘대책없음’이라고. 고민 끝에 단안을 내리며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청량리역 가까운 곳에 교회와 다일공동체를 반드시 세워야겠다고. 독일유학과 전원 공동체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4> 588 포주들 핍박… 교회 비운 새 십자가가 쓰레기장에
청량리에 교회 열고 행려자 라면 대접 “거지들 얼씬 못하게 하라” 항의 빗발
입력 : 2017-12-20 00:01
![[역경의 열매] 최일도 <14> 588 포주들 핍박… 교회 비운 새 십자가가 쓰레기장에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20/201712200001_23110923869469_1.jpg)
1989년 서울 청량리 588-152번지 인쇄소 창고에 마련한
다일공동체의 첫 번째 삶의 자리.
청량리역 안에 있는 철도청 소유의 건물을 빌려 인쇄업을 하던 신길순 형제를 찾아갔다. 다일공동체 교회 창립을 위한 준비 기도회를 그의 인쇄소에서 갖고 싶다고 말했다. 자칫 부담을 줄까 봐 행려자들을 돌볼 계획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1989년 7월 4일, 첫 준비 기도회를 드렸다. 인쇄소에 붙어있는 간이 사무실이었지만 공간이 있다는 것만도 감사했다. 아내는 내게 “6개월 안에 그만두겠지만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잘해보라”고 했다.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하고,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일’ 공동체 교회가 은혜롭게 창립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인쇄소 창고를 예배당이자 나눔의 집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66㎡(20평)가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정성을 들여 꾸몄다.
89년 9월 10일, 마침내 창립예배를 드렸다. 은사이신 당시 장신대 정장복 교수와 한신대 예영수 대학원장 등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다. 가난한 교회의 창립예배치고는 풍성하고 화려했다. 순서가 모두 끝난 뒤 정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좋았네만 당장 다음 주부터는 무척 쓸쓸히 지내시겠구먼. 이미 각오한바 아닌가. 고비를 잘 넘기리라 믿네.”
정말 그다음 주부터 교회에는 나와 아내를 포함해 다섯 명의 성도밖에 없었다. 세 명의 성도마저 각자 사정에 따라 1년도 안 돼 다 떠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청량리 588 뒷골목의 작고 쓸쓸한 예배당.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느냐”고 주께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을 다잡고 거리로 나섰다.
등산용 버너와 코펠을 들고 청량리역 주변의 행려자들, 경동시장 구석구석에 누워있는 노숙인 형제들과 무의탁 노인들에게 라면을 끓여드리는 일을 시작했다.
물 인심은 좋아서 가게와 음식점마다 물 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예배당으로 모셔 와서 라면을 끓여 드리기도 하고 그들이 있는 장소로 가서 드리기도 했다. 술에 찌들어 주정하는 이들은 교회로 모시고 오기 힘들었다.
짝을 지은 행려자들이 예배당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날마다 즐겁게 라면을 끓였지만 기쁨은 길게 가질 못했다. 교회 옆 인쇄소와 목재소 등 인근 상가의 사람들이 화를 냈다. 거지들을 동네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내게 호통을 쳤다.
배척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 밖에서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심한 화상을 입은 허벅지를 내놓은 채 다리를 끌며 오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누웠다가 그만 다리를 모닥불 잿더미에 올려놨다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아프다며 병원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할 수 없이 역전 파출소로 뛰어가 도움을 청했다. 죽어도 경찰차는 안 타겠다는 그를 설득해 시립병원 행려자 병동에 데려다줬다. 파김치가 돼 교회로 돌아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모든 집기가 밖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벽 중앙에 걸어놓은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 소각장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예배당이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청량리 뒷골목을 빗자루로 쓸었다. 청량리 588 포주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예수쟁이 놈이 재수 없게”라며 소금을 뿌리거나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부터 올 것이 오는구나’ 싶어 담담해졌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1989년 7월 4일, 첫 준비 기도회를 드렸다. 인쇄소에 붙어있는 간이 사무실이었지만 공간이 있다는 것만도 감사했다. 아내는 내게 “6개월 안에 그만두겠지만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잘해보라”고 했다.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하고,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일’ 공동체 교회가 은혜롭게 창립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인쇄소 창고를 예배당이자 나눔의 집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66㎡(20평)가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정성을 들여 꾸몄다.
89년 9월 10일, 마침내 창립예배를 드렸다. 은사이신 당시 장신대 정장복 교수와 한신대 예영수 대학원장 등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다. 가난한 교회의 창립예배치고는 풍성하고 화려했다. 순서가 모두 끝난 뒤 정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좋았네만 당장 다음 주부터는 무척 쓸쓸히 지내시겠구먼. 이미 각오한바 아닌가. 고비를 잘 넘기리라 믿네.”
정말 그다음 주부터 교회에는 나와 아내를 포함해 다섯 명의 성도밖에 없었다. 세 명의 성도마저 각자 사정에 따라 1년도 안 돼 다 떠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청량리 588 뒷골목의 작고 쓸쓸한 예배당.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느냐”고 주께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을 다잡고 거리로 나섰다.
등산용 버너와 코펠을 들고 청량리역 주변의 행려자들, 경동시장 구석구석에 누워있는 노숙인 형제들과 무의탁 노인들에게 라면을 끓여드리는 일을 시작했다.
물 인심은 좋아서 가게와 음식점마다 물 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예배당으로 모셔 와서 라면을 끓여 드리기도 하고 그들이 있는 장소로 가서 드리기도 했다. 술에 찌들어 주정하는 이들은 교회로 모시고 오기 힘들었다.
짝을 지은 행려자들이 예배당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날마다 즐겁게 라면을 끓였지만 기쁨은 길게 가질 못했다. 교회 옆 인쇄소와 목재소 등 인근 상가의 사람들이 화를 냈다. 거지들을 동네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내게 호통을 쳤다.
배척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 밖에서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심한 화상을 입은 허벅지를 내놓은 채 다리를 끌며 오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누웠다가 그만 다리를 모닥불 잿더미에 올려놨다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아프다며 병원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할 수 없이 역전 파출소로 뛰어가 도움을 청했다. 죽어도 경찰차는 안 타겠다는 그를 설득해 시립병원 행려자 병동에 데려다줬다. 파김치가 돼 교회로 돌아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모든 집기가 밖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벽 중앙에 걸어놓은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 소각장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예배당이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청량리 뒷골목을 빗자루로 쓸었다. 청량리 588 포주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예수쟁이 놈이 재수 없게”라며 소금을 뿌리거나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부터 올 것이 오는구나’ 싶어 담담해졌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5> 라면 대신 쌀밥에 소고깃국… 부활절 첫 ‘밥 나눔’
아내의 전 재산 79만원 통장으로 결행… ‘부활절 오찬’ 소문 나자 곳곳서 도움이
입력 : 2017-12-21 00:01
![[역경의 열매] 최일도 <15> 라면 대신 쌀밥에 소고깃국… 부활절 첫 ‘밥 나눔’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21/201712210002_23110923870093_1.jpg)
다일공동체 초기 최일도 목사가 대접한 라면을
먹고 있는 행려자와 무의탁 노인들.
청량리의 겨울은 길고 험했다. 창립예배를 드리고 얼마 후 그해 연말까지만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남은 기간은 한 달 남짓, 공간을 구할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집 없고 배고픈 이들을 가족처럼 섬길 수 있는 나눔의 집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매일 청량리 일대를 돌며 공간을 찾았다. 마땅한 곳을 찾기도 했지만 건물주들은 번번이 거지들 밥 먹여주는 교회엔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낙심하고 있을 때 도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신대원 1년 선배이자 당시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던 이재철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분과는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교정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이 목사는 우리의 절박한 소식을 들었다며 선교비를 다일공동체를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때 주님의교회는 창립한 지 2년 밖에 안 된 신생교회였다. 이 목사는 예배당 건물을 짓지 않고 헌금 총 수입의 50%를 선교비로 쓰기로 교인들과 약속했다고 했다. 주님의교회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 목사는 이후 200만원을 아무도 모르게 더 보내왔다. 그 귀한 도움을 받아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낡은 건물의 4층 옥상 위 가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밖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일명 ‘라면공동체 가족’이던 행려자, 노숙인들과 함께 길바닥에 눕기도 하고 예배당에서 어울려 자기도 했다. 세탁할 옷가지를 들고 집에 오면 아내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대책 없는 분 오셨다”고 인사를 시키곤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내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남편을 위해 정성스레 밥상을 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밥상을 받고 목이 메었다. 아무리 삼키려 해도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속울음이라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밥을 굶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이들이 생각났다. 난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데 그들에게는 라면밖에 대접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아내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냈다. “밥 한 끼도 편히 못 먹고 청승 떨려면 당장 그만둬요. 나도 정말 못 참겠어요.” 아내는 눈물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더니 아내가 말했다. “그만 두지 않으려면 얼른 이밥 먹고 기운내서 그들에게도 밥을 해주면 될 거 아녜요.”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아내는 내게 통장 하나를 건넸다. 우리 집에 있는 현금 전부라면서 내 소원대로 밥 한끼라도 손수 지어 나누어 드리라고 했다. 너무 미안했다. 통장을 열어보니 79만원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전기밥솥 네 개와 40명분 수저를 샀다. 반찬, 배식할 사람, 밥을 옮길 도구 등 많은 것이 더 필요했지만 일단 밥을 손수 지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라면공동체 가족들에게 부활절 점심 때 청량리역 광장에 다 모이라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멀리 퍼졌는지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소망교회의 손은경 전도사와 여전도회 회장이 밥집을 지원하고 싶다고 현장을 찾아왔다. 그분들이 모금한 1000만원의 전세 계약금으로 밥을 지을 작은 공간을 빌렸다. 밥 나눔이 있을 거란 소문을 들은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도 날 찾아왔다. 역 광장에서는 밥 나눔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형사가 직접 알려준 청량리 야채시장 쓰레기더미 위에서 처음 밥을 나누기로 했다. 흰쌀로 지은 밥에 소고깃국, 김치와 잡채 등을 식판에 담아 나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처음으로 떠먹던, 지극히 작은 자들의 미소를 난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나는 매일 청량리 일대를 돌며 공간을 찾았다. 마땅한 곳을 찾기도 했지만 건물주들은 번번이 거지들 밥 먹여주는 교회엔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낙심하고 있을 때 도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신대원 1년 선배이자 당시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던 이재철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분과는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교정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이 목사는 우리의 절박한 소식을 들었다며 선교비를 다일공동체를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때 주님의교회는 창립한 지 2년 밖에 안 된 신생교회였다. 이 목사는 예배당 건물을 짓지 않고 헌금 총 수입의 50%를 선교비로 쓰기로 교인들과 약속했다고 했다. 주님의교회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 목사는 이후 200만원을 아무도 모르게 더 보내왔다. 그 귀한 도움을 받아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낡은 건물의 4층 옥상 위 가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밖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일명 ‘라면공동체 가족’이던 행려자, 노숙인들과 함께 길바닥에 눕기도 하고 예배당에서 어울려 자기도 했다. 세탁할 옷가지를 들고 집에 오면 아내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대책 없는 분 오셨다”고 인사를 시키곤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내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남편을 위해 정성스레 밥상을 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밥상을 받고 목이 메었다. 아무리 삼키려 해도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속울음이라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밥을 굶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이들이 생각났다. 난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데 그들에게는 라면밖에 대접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아내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냈다. “밥 한 끼도 편히 못 먹고 청승 떨려면 당장 그만둬요. 나도 정말 못 참겠어요.” 아내는 눈물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더니 아내가 말했다. “그만 두지 않으려면 얼른 이밥 먹고 기운내서 그들에게도 밥을 해주면 될 거 아녜요.”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아내는 내게 통장 하나를 건넸다. 우리 집에 있는 현금 전부라면서 내 소원대로 밥 한끼라도 손수 지어 나누어 드리라고 했다. 너무 미안했다. 통장을 열어보니 79만원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전기밥솥 네 개와 40명분 수저를 샀다. 반찬, 배식할 사람, 밥을 옮길 도구 등 많은 것이 더 필요했지만 일단 밥을 손수 지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라면공동체 가족들에게 부활절 점심 때 청량리역 광장에 다 모이라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멀리 퍼졌는지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소망교회의 손은경 전도사와 여전도회 회장이 밥집을 지원하고 싶다고 현장을 찾아왔다. 그분들이 모금한 1000만원의 전세 계약금으로 밥을 지을 작은 공간을 빌렸다. 밥 나눔이 있을 거란 소문을 들은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도 날 찾아왔다. 역 광장에서는 밥 나눔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형사가 직접 알려준 청량리 야채시장 쓰레기더미 위에서 처음 밥을 나누기로 했다. 흰쌀로 지은 밥에 소고깃국, 김치와 잡채 등을 식판에 담아 나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처음으로 떠먹던, 지극히 작은 자들의 미소를 난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6> “있는 돈 다 내놔” 내 목에 칼 겨눈 행려자
밥 먹이고 잘 곳 줬더니 원수로 갚아… 공동체 생활, 뼈깎는 담금질 이어져
입력 : 2017-12-22 00:00
![[역경의 열매] 최일도 <16> “있는 돈 다 내놔” 내 목에 칼 겨눈 행려자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22/201712220000_23110923871116_1.jpg)
최일도 목사(왼쪽)와 다일공동체 식구들이 배고픈 이들을 위해
마련한 밥과 국, 반찬이 담긴 통을 수레에 실어 옮기고 있다.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이 마련되면서 그동안 생각으로만 머물던 공동체 생활이 구현되었다. 하지만 삶의 자리가 너무 열악하다 보니 공동체 생활을 희망하는 사람은 나와 두 명의 신학생, 행려자였던 전씨, 칼갈이 아저씨뿐이었다.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엔 그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다. 왕따를 당하거나 비난받는 사람일수록 받아들이자고 했다.
공동체 식구들은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아침기도를 올리고 봉사자들과 함께 점심밥을 지었다. 봉사자들이 매일 온다는 보장도 없어 음식이 담긴 무거운 통들을 나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매우 기쁜 마음으로 했다.
밥을 함께 먹는 이들은 행려자나 무의탁 노인만이 아니었다. 영세 상인들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이면 누구나 밥을 먹도록 했다.
무료급식을 하면서는 봉사자들에게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봉사자들이 간혹 있었는데, 날 아주 심하게 욕하고 떠났다.
밥 한 그릇에 예수님을 팔지는 말자고, 참사랑을 갖고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면 결국은 예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나를 향해 급진적이라며 질책하고 정죄하는 근본주의자나 율법주의자를 대하는 일이 포주나 조폭을 상대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럴수록 ‘복음을 입술로 전하진 말자.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가끔 공동체를 비울 때가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난감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행려자였다가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A씨가 자원봉사자들에게 용돈을 요구했던 것도 그중 하나다. 봉사자들이 그를 가엾게 여기고 돈을 줬고 A씨는 그 돈으로 늘 술을 마셨다. 문제는 술만 들어가면 폭언을 하고 행패를 부린 것이다. 참다못해 회의 끝에 그를 제명하기로 했다.
그날 밤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다가 눈을 떠 보니 A씨가 부엌칼을 내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는 “있는 돈 다 내놔.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기가 막혔다. 길에서 굶어 죽어가던 사람을 데려다 밥 먹이고 잠자리도 제공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늘어갔다.
또 다른 구성원인 B씨는 판단력이 흐려 가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몰고 왔다. 밤늦도록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다가 잠들어 화재를 내거나 음식 만들다가 소금이 모자란다고 다른 집에서 소금을 가져와 절도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다른 세입자들은 우리가 건물에 들어온 것을 못마땅해했다. 일부러 수돗물 공급을 끊기도 했다. 수백 명 분의 밥을 짓는 것도 문제였고, 한여름에 설거지를 못해 잔반이 쉬거나 썩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날은 물이 나오고 있음에도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있는 일이 있었다. 왜 처리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내가 두 번이나 설거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남겨둔 것이라 했다. 죽어가는 사람들 살려보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그랬던 건데 기가 막혀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정기적으로 반복됐다. 하나님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살을 찢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통해 깨닫게 하셨다.
나같이 모난 곳이 많고 함량 미달인 자를 하나님이 편하게 쓰기에는 멀었다고,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만난 그분들이야말로 쓸모없는 나를 담금질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은 도구라 여기게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공동체 식구들은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아침기도를 올리고 봉사자들과 함께 점심밥을 지었다. 봉사자들이 매일 온다는 보장도 없어 음식이 담긴 무거운 통들을 나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매우 기쁜 마음으로 했다.
밥을 함께 먹는 이들은 행려자나 무의탁 노인만이 아니었다. 영세 상인들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이면 누구나 밥을 먹도록 했다.
무료급식을 하면서는 봉사자들에게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봉사자들이 간혹 있었는데, 날 아주 심하게 욕하고 떠났다.
밥 한 그릇에 예수님을 팔지는 말자고, 참사랑을 갖고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면 결국은 예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나를 향해 급진적이라며 질책하고 정죄하는 근본주의자나 율법주의자를 대하는 일이 포주나 조폭을 상대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럴수록 ‘복음을 입술로 전하진 말자.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가끔 공동체를 비울 때가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난감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행려자였다가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A씨가 자원봉사자들에게 용돈을 요구했던 것도 그중 하나다. 봉사자들이 그를 가엾게 여기고 돈을 줬고 A씨는 그 돈으로 늘 술을 마셨다. 문제는 술만 들어가면 폭언을 하고 행패를 부린 것이다. 참다못해 회의 끝에 그를 제명하기로 했다.
그날 밤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다가 눈을 떠 보니 A씨가 부엌칼을 내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는 “있는 돈 다 내놔.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기가 막혔다. 길에서 굶어 죽어가던 사람을 데려다 밥 먹이고 잠자리도 제공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늘어갔다.
또 다른 구성원인 B씨는 판단력이 흐려 가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몰고 왔다. 밤늦도록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다가 잠들어 화재를 내거나 음식 만들다가 소금이 모자란다고 다른 집에서 소금을 가져와 절도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다른 세입자들은 우리가 건물에 들어온 것을 못마땅해했다. 일부러 수돗물 공급을 끊기도 했다. 수백 명 분의 밥을 짓는 것도 문제였고, 한여름에 설거지를 못해 잔반이 쉬거나 썩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날은 물이 나오고 있음에도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있는 일이 있었다. 왜 처리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내가 두 번이나 설거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남겨둔 것이라 했다. 죽어가는 사람들 살려보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그랬던 건데 기가 막혀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정기적으로 반복됐다. 하나님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살을 찢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통해 깨닫게 하셨다.
나같이 모난 곳이 많고 함량 미달인 자를 하나님이 편하게 쓰기에는 멀었다고,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만난 그분들이야말로 쓸모없는 나를 담금질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은 도구라 여기게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7> 오늘 밥퍼 앞마당서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
야채 시장 쓰레기 더미서 첫 배식 후 30년… 오늘까지 1000만 그릇 넘도록 중단 없어
입력 : 2017-12-25 00:01
![[역경의 열매] 최일도 <17> 오늘 밥퍼 앞마당서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25/201712250001_23110923872264_1.jpg)
지난해 12월 노숙인과 무의탁노인 등이 참여해
거리 성탄예배를 드리는 모습.
쓰레기 더미 위에서 밥을 짓고 나누는 모습을 본 청량리 야채시장 영세 상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배식이 끝나고, 빌려 온 그릇을 돌려 드리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야채시장을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채소 팔던 아주머니가 손수레를 세웠다. 그분은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무와 배추 꾸러미를 내가 끄는 손수레에 올려놓더니 말했다. “이거 내일 아침에 설렁설렁 썰어서 무국 해드리면 좋겠어요.”
조금 더 가니까 이번에는 생선 팔던 아저씨가 생선을 아예 궤짝으로 올렸다. “이거 팔다가 남은 거긴 하지만 상하진 않았소. 가져가서 저녁 때 조려 두었다가 내일 반찬으로 먹으면 좋을 거요.” 그도 나도 소리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집에 갔더니 누군가가 쌀을 가져다 놓았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쌍굴 다리 아래로 리어카를 밀고 나갔더니 누군가가 벽에다가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글을 정성스럽게 써 놓았다. 그 벽 앞에서 얼마나 많이 또 울었는지 모른다.
단 한 끼라도 함께 나누기 원해서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시작한 나눔이었다. 당장 내일의 대책이라곤 아무것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의 소식을 들은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시켜 주셨다. 사랑이 나눠지는 곳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기적이 일어난다. 야채 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처음 배식을 시작한 그날 이후 30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 1000만 그릇이 넘도록 하루도 먹을 거리가 없거나 자원봉사자가 없어서 밥의 나눔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물론 나는 기적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서 한강을 두 쪽으로 가른다 해도 나는 그런 기적은 믿지 않는다. 쫓아가서 구경할 생각도 없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기적엔 나는 아무 감동을 느끼질 못했다.
다른 종교에도, 심지어는 이단 종파에서도 신기한 일은 갖가지 형태로 일어난다. 인도에 가면 별별 희한한 사람이 다 있다. 나무 위에 까치처럼 매달려서 100일을 살기도 하고, 물속에서 50일씩 지내는 사람도 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피를 쏟고도 멀쩡하고 작두 위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 행위 안에 참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나 같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오늘 2017년 12월 25일, 밥퍼 앞마당에서는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가 열린다. 1988년 12월 25일, 노숙인 형제 세 사람 넙죽이, 억만이, 이차술과 초 한 자루 켜들고 쌍굴 다리 옆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캐럴을 부르던 것이 처음 예배였다. 그 세 사람 중 둘은 길에서 잠을 청하다가 얼어 죽고 말았다. 한 사람 이차술 형제만이 살아남았고, 그는 봉사자로 거듭나 17년째 헌신하고 있다.
이제는 매년 각 언론사에서 우리 공동체의 거리 성탄예배를 소개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이 찾는 자리가 됐다. 드러낸 일이 없는데 드러나고야 말았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말구유로 내려가지 않고는 성탄의 정신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젠 제발 우리 시대 작은 자라고 불리는 형제자매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만 전해지는 성탄이 되길 소원한다. 청량리의 무의탁 노인이나 청와대 대통령이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다. 생명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초막이든 궁궐이든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조금 더 가니까 이번에는 생선 팔던 아저씨가 생선을 아예 궤짝으로 올렸다. “이거 팔다가 남은 거긴 하지만 상하진 않았소. 가져가서 저녁 때 조려 두었다가 내일 반찬으로 먹으면 좋을 거요.” 그도 나도 소리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집에 갔더니 누군가가 쌀을 가져다 놓았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쌍굴 다리 아래로 리어카를 밀고 나갔더니 누군가가 벽에다가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글을 정성스럽게 써 놓았다. 그 벽 앞에서 얼마나 많이 또 울었는지 모른다.
단 한 끼라도 함께 나누기 원해서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시작한 나눔이었다. 당장 내일의 대책이라곤 아무것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의 소식을 들은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시켜 주셨다. 사랑이 나눠지는 곳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기적이 일어난다. 야채 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처음 배식을 시작한 그날 이후 30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 1000만 그릇이 넘도록 하루도 먹을 거리가 없거나 자원봉사자가 없어서 밥의 나눔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물론 나는 기적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서 한강을 두 쪽으로 가른다 해도 나는 그런 기적은 믿지 않는다. 쫓아가서 구경할 생각도 없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기적엔 나는 아무 감동을 느끼질 못했다.
다른 종교에도, 심지어는 이단 종파에서도 신기한 일은 갖가지 형태로 일어난다. 인도에 가면 별별 희한한 사람이 다 있다. 나무 위에 까치처럼 매달려서 100일을 살기도 하고, 물속에서 50일씩 지내는 사람도 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피를 쏟고도 멀쩡하고 작두 위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 행위 안에 참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나 같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오늘 2017년 12월 25일, 밥퍼 앞마당에서는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가 열린다. 1988년 12월 25일, 노숙인 형제 세 사람 넙죽이, 억만이, 이차술과 초 한 자루 켜들고 쌍굴 다리 옆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캐럴을 부르던 것이 처음 예배였다. 그 세 사람 중 둘은 길에서 잠을 청하다가 얼어 죽고 말았다. 한 사람 이차술 형제만이 살아남았고, 그는 봉사자로 거듭나 17년째 헌신하고 있다.
이제는 매년 각 언론사에서 우리 공동체의 거리 성탄예배를 소개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이 찾는 자리가 됐다. 드러낸 일이 없는데 드러나고야 말았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말구유로 내려가지 않고는 성탄의 정신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젠 제발 우리 시대 작은 자라고 불리는 형제자매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만 전해지는 성탄이 되길 소원한다. 청량리의 무의탁 노인이나 청와대 대통령이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다. 생명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초막이든 궁궐이든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8> 588 희야 자매 “아저씨는 희망 일깨운 ‘꿈퍼’ 목사님”
입력 : 2017-12-25 08:05:01

숙이가 이사 가던 날,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은 봉사자들로 북적댔다. 근모 형제와 함께 숙이의 방에 찾아갔다. 골목길에 세워둔 용달차가 꽤 오래 기다렸는지 ‘왜 이제야 오느냐’는 눈치였다. 짐이 빠져나간 숙이의 방은 적어도 그녀에겐 붉은 방이 아니었다.
포주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쟤가 행복하게 살길 빌겠어요. 숙이처럼 착한 애는 어딜 가나 인정받지 뭐.”
이 동네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자신의 돈벌이를 위한 기계라고 생각하는 직업여성의 새로운 삶을 위해 포주가 등을 떠밀며 축복해주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 놀라운 현실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포주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 뭐해요. 목사가 기도나 할 일이지. 숙이야 넌 좋겠다. 그렇게 목사님 얼굴 한 번 더 보고 가면 좋겠다고 하더니.”
난 너무 감격스러워 말을 할 수 없었고 침묵으로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588번지의 주민으로 더불어 살다보니 그네들은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약했고 눈물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도 점점 호감을 갖게 됐고, 마침내 음식을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서로 들어주고 격려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시집을 들고 가던 날 한 펨푸(호객꾼) 아주머니가 “그 책 내게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나눔의 집 앞 길 위에 책을 잠시 풀어놓고, 주변에 있던 직업여성들과 호객꾼, 포주들에게도 한 권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책을 받아든 그들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 번졌다.
588 뒷골목에서 책 잔치가 벌어졌다. 음식이나 좋은 옷, 생활용품 등을 나눠줄 때 행려자 무의탁노인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을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시집을 나누자 저마다 나와서 받아가는 거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문화선교의 길을 우리 다일가족들에게 가르쳐 주는 기회가 됐다.
가정과 가족, 친구들을 떠나 몸으로 세파를 헤쳐 가는 그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결코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같은 상투적인 전도 구호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전 내내 가사상태에 빠진 듯 활기 없던 거리에 해가 기울고 붉은 등이 켜질 무렵, 반라의 몸으로 진열대에 쭉 늘어앉아 몸을 파는 어린 누이들이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서정적인 시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돈을 주고 육체를 사고파는 588 뒷골목에 아내의 시집과 내 책이 나누어지던 날,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다가섰지만 시집을 받은 그날부터 나를 ‘꿈퍼 목사’라고 부르던 희야 자매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밥퍼 목사님이라 부르지만요 내게는 꿈퍼 목사님이에요. 그동안 아무 희망 없이 살던 내게는.”
난 그때 사람만이 희망이란 사실을 절감했다. 사랑하는 누이들의 찢어진 마음속에 간직한 못다 피운 아름다운 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희야는 숙이처럼 인간적인 포주를 만나질 못해서 여러 번 도주를 시도했다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희야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보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고 떨며 입술을 깨물고 있자 희야가 도리어 다가와 날 위로했다. “괜찮아요, 꿈퍼 목사님. 이번에 또 얻어맞고 붙들려 왔지만 반드시 여길 빠져나갈게요. 사람답게 살아보는 꿈을 반드시 이루도록 계속 기도해줄꺼죠.”
그날 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찬송 490장을 밤이 하얗게 새도록 불렀다. 너무 감사하고 아파서 울며 불렀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19> 개미군단 십시일반… 무료병원 설립 기적
시장 한모퉁이 무료진료소로 시작… 다일 가족들·직업여성들도 헌금
입력 : 2017-12-27 00:01
![[역경의 열매] 최일도 <19> 개미군단 십시일반… 무료병원 설립 기적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27/201712270001_23110923873528_1.jpg)
서울 동대문구 시립대로 다일천사병원 전경. 이 병원은 한국에 세워진 기독교 최초의 전액 무료병원이다.
다일천사병원이 오늘까지 운영되고 있다는 건 기적이다. 이 병원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전액 무료병원이다. 말 그대로 개미군단이 십시일반 정신으로 설립해 운영하는 자선병원이다.
지난 15년 동안 무의탁 노인, 노숙인, 외국인 근로자 및 절대 빈곤지역에 사는 이웃나라 어린이 등이 찾아와 생명을 얻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역사가 충만했다.
길바닥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지 못한 채 다시 차에 태워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으로 모시고 올 때면 나는 실의와 절망에 빠졌다.
“하나님, 어쩌란 말입니까. 앞이 캄캄하네요. 대안이 안 보입니다.” 미아리 성가복지병원에 할머니 한 분을 입원시켜 드리지 못하고 거절당한 날도 하나님께 따졌다. 그날 마음속에 들려온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
“일도야. 나의 대책은 너 자신이다.” 응답은 너무 막연했다. 사글세 20만원 내기도 버거운 다일공동체가 무슨 수로 대책이 된단 말인가. “하나님, 부디 제가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도와주세요. 제발 하나님.”
청량리 588뒷골목에서 진행했던 무료진료소는 늘 한계에 부닥쳤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처음에는 채소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시장 한 모퉁이에서 진료를 했다. 이후 청량리 농수산물 조합건물 한 구석을 빌리거나 나눔의 집의 비좁은 방을 치워 환자를 돌봤다.
찾는 이는 나날이 늘었다. 언제 씻었는지 모를 환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차라리 시궁창에 코를 처박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토로하는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
환자들은 일주일 내내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진료는 토요일과 공휴일에만 하니 돌아가세요”라며 궁색하게 말했지만 그들은 아랑곳없이 아픔을 호소했다.
주말 진료에 오는 의대생들은 용돈을 털어 의약품을 준비하고 선배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해서 노인들의 틀니도 직접 제작하는 등 헌신했다. 하지만 상설 진료소는커녕 전담 의사와 간호사가 없었고, 의료장비는 그야말로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 하나, 헐벗은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있었다.
다일교회 신자들과 공동체 가족들이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기독교 최초의 상설 무료병원이 마련되길 간절히 기도했던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100원부터 100만원까지 헌금하는 소액기부운동으로 전액 무료병원을 세우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를 미쳤다고 할지 모릅니다.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읍시다. 열심히 뛰고 달리며 이 자리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쌓아봅시다. 주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아멘”을 합창했다. 한 달 후 다일가족들이 모은 돈 1100만원과 588번지 아주머니들과 직업여성들이 모아준 47만5000원을 합한 1147만5000원을 무료병원 설립을 위한 밀알 헌금으로 드릴 수 있었다.
천사병원의 기적은 이때부터였다. 늘 다일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조성기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 등 선배들과 장신대 교수님들이 발 벗고 나서서 협력해 주셨다. 후원회원들과 협력교회들은 100만원을 선뜻 맡겼고, 학생들과 가난한 이웃들은 매달 5만∼10만원씩 분납하겠다고 약속했다.
천사의 사랑을 모아 무료병원을 세우고 운영해보자는 이야기는 KBS 성탄특집 방송을 통해 전국에 확산됐다. 현재까지 ‘천사운동’에 1만2000명 이상이 후원에 동참해주셨다. 기적이라는 단어 이외에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지난 15년 동안 무의탁 노인, 노숙인, 외국인 근로자 및 절대 빈곤지역에 사는 이웃나라 어린이 등이 찾아와 생명을 얻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역사가 충만했다.
길바닥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지 못한 채 다시 차에 태워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으로 모시고 올 때면 나는 실의와 절망에 빠졌다.
“하나님, 어쩌란 말입니까. 앞이 캄캄하네요. 대안이 안 보입니다.” 미아리 성가복지병원에 할머니 한 분을 입원시켜 드리지 못하고 거절당한 날도 하나님께 따졌다. 그날 마음속에 들려온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
“일도야. 나의 대책은 너 자신이다.” 응답은 너무 막연했다. 사글세 20만원 내기도 버거운 다일공동체가 무슨 수로 대책이 된단 말인가. “하나님, 부디 제가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도와주세요. 제발 하나님.”
청량리 588뒷골목에서 진행했던 무료진료소는 늘 한계에 부닥쳤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처음에는 채소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시장 한 모퉁이에서 진료를 했다. 이후 청량리 농수산물 조합건물 한 구석을 빌리거나 나눔의 집의 비좁은 방을 치워 환자를 돌봤다.
찾는 이는 나날이 늘었다. 언제 씻었는지 모를 환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차라리 시궁창에 코를 처박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토로하는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
환자들은 일주일 내내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진료는 토요일과 공휴일에만 하니 돌아가세요”라며 궁색하게 말했지만 그들은 아랑곳없이 아픔을 호소했다.
주말 진료에 오는 의대생들은 용돈을 털어 의약품을 준비하고 선배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해서 노인들의 틀니도 직접 제작하는 등 헌신했다. 하지만 상설 진료소는커녕 전담 의사와 간호사가 없었고, 의료장비는 그야말로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 하나, 헐벗은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있었다.
다일교회 신자들과 공동체 가족들이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기독교 최초의 상설 무료병원이 마련되길 간절히 기도했던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100원부터 100만원까지 헌금하는 소액기부운동으로 전액 무료병원을 세우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를 미쳤다고 할지 모릅니다.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읍시다. 열심히 뛰고 달리며 이 자리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쌓아봅시다. 주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아멘”을 합창했다. 한 달 후 다일가족들이 모은 돈 1100만원과 588번지 아주머니들과 직업여성들이 모아준 47만5000원을 합한 1147만5000원을 무료병원 설립을 위한 밀알 헌금으로 드릴 수 있었다.
천사병원의 기적은 이때부터였다. 늘 다일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조성기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 등 선배들과 장신대 교수님들이 발 벗고 나서서 협력해 주셨다. 후원회원들과 협력교회들은 100만원을 선뜻 맡겼고, 학생들과 가난한 이웃들은 매달 5만∼10만원씩 분납하겠다고 약속했다.
천사의 사랑을 모아 무료병원을 세우고 운영해보자는 이야기는 KBS 성탄특집 방송을 통해 전국에 확산됐다. 현재까지 ‘천사운동’에 1만2000명 이상이 후원에 동참해주셨다. 기적이라는 단어 이외에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일도 <20> 고독사하는 노인들 위해 ‘작은천국’ 개소
무의탁 노인·노숙인들 정성으로 섬겨… 입소 후 90%는 세례받고 새삶 얻어
입력 : 2017-12-28 00:00
![[역경의 열매] 최일도 <20> 고독사하는 노인들 위해 ‘작은천국’ 개소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228/201712280000_23110923874212_1.jpg)
최일도 목사가 지난해 5월 9일 다일작은천국에서 별세한 김휴식씨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린 뒤 김씨 시신이 실린 구급차에 손을 올려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고독사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이 늘어났다.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의탁 노인과 거리에서 죽음을 맞닥뜨리는 병든 노숙인들, 가족에게 버려져 홀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섬기기 위해 웰다잉 하우스가 될 ‘다일작은천국’을 2011년 5월 31일 개소했다.
이 땅에서 가장 외로운 천사들이 노상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다. 천국 가기 전까지 함께 울고 웃으며 소망을 나누기 위함이다. 다일작은천국 덕분에 영원한 쉼을 누리며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서울시가 노숙인 쉼터 41곳에서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임종을 앞둔 분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며 다일공동체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간청을 해왔다.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여기고, 가족으로 품어 더불어 살아가자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기에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고, 돌보기 힘든 분들이 있다면 저희 다일천사병원에 보내주십시오.” 그랬더니 서울시는 노숙인들의 자활을 위한 영성수련 프로그램인 ‘다시 한 번 일어서기’까지도 보내 우리들이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작은천국이 우리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며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로 계속 쓰임받는 것은 주님의 은혜다. 또 천사 후원회원과 만사 후원회원 덕분이다. 매월 1만원씩 후원하시는 분들이 3만여명으로 늘어나면 ‘작은천국’에 입소하기 원하는 분들을 천사병원에서 더 받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인간으로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천사병원에서 행복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섬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한 건물 안에 작은천국과 천사병원이 함께 있어 의료적인 접근이 용이하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작은천국에 들어오고 싶다는 문의가 전국에서 하루에도 몇 통씩 오고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가 한국계 미국인인 홈리스 한 분을 임종 때까지 돌봐 달라고 당부하고 간 일이 있었다.
“그 많은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을 다 두고 이곳으로 모시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영사는 “이곳이야말로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인종에 관계없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천국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당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는 ‘진실로 감사하고 감동했다’며 감사장을 보내왔다.
대부분 말기환자로, 입소했다가 치유되고 회복해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는 분들이 언어와 피부색, 종교를 초월해 늘고 있다. 자립 자활 가능성이 있는 입소자는 집중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사회적 재활의 초석을 마련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는 임정순 원장님과 김은겸 김승규 이기환 박하림 안금영 조윤호 김인 남연옥님 같은 분들은 이 땅 위의 천사나 다름없다. 그 모든 궂은일과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날마다 웰다잉 하우스를 지상천국으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천국에 입소하는 이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절망이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있던 분들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 가족처럼 지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90%가 세례 받고 신자가 돼 천국시민으로 영원히 산다. 절대로 세례 받도록 강요하거나 부탁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서울시가 인가한 41곳의 노숙인 쉼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 분들이 하나같이 “다일작은천국은 노숙인과 무의탁 노인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기’에 가장 좋은 지상천국”이라는 말을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유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이 땅에서 가장 외로운 천사들이 노상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다. 천국 가기 전까지 함께 울고 웃으며 소망을 나누기 위함이다. 다일작은천국 덕분에 영원한 쉼을 누리며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서울시가 노숙인 쉼터 41곳에서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임종을 앞둔 분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며 다일공동체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간청을 해왔다.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여기고, 가족으로 품어 더불어 살아가자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기에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고, 돌보기 힘든 분들이 있다면 저희 다일천사병원에 보내주십시오.” 그랬더니 서울시는 노숙인들의 자활을 위한 영성수련 프로그램인 ‘다시 한 번 일어서기’까지도 보내 우리들이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작은천국이 우리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며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로 계속 쓰임받는 것은 주님의 은혜다. 또 천사 후원회원과 만사 후원회원 덕분이다. 매월 1만원씩 후원하시는 분들이 3만여명으로 늘어나면 ‘작은천국’에 입소하기 원하는 분들을 천사병원에서 더 받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인간으로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천사병원에서 행복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섬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한 건물 안에 작은천국과 천사병원이 함께 있어 의료적인 접근이 용이하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작은천국에 들어오고 싶다는 문의가 전국에서 하루에도 몇 통씩 오고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가 한국계 미국인인 홈리스 한 분을 임종 때까지 돌봐 달라고 당부하고 간 일이 있었다.
“그 많은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을 다 두고 이곳으로 모시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영사는 “이곳이야말로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인종에 관계없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천국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당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는 ‘진실로 감사하고 감동했다’며 감사장을 보내왔다.
대부분 말기환자로, 입소했다가 치유되고 회복해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는 분들이 언어와 피부색, 종교를 초월해 늘고 있다. 자립 자활 가능성이 있는 입소자는 집중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사회적 재활의 초석을 마련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는 임정순 원장님과 김은겸 김승규 이기환 박하림 안금영 조윤호 김인 남연옥님 같은 분들은 이 땅 위의 천사나 다름없다. 그 모든 궂은일과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날마다 웰다잉 하우스를 지상천국으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천국에 입소하는 이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절망이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있던 분들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 가족처럼 지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90%가 세례 받고 신자가 돼 천국시민으로 영원히 산다. 절대로 세례 받도록 강요하거나 부탁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서울시가 인가한 41곳의 노숙인 쉼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 분들이 하나같이 “다일작은천국은 노숙인과 무의탁 노인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기’에 가장 좋은 지상천국”이라는 말을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유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69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