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영국신사77 2017. 11. 1. 13:18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마틴 루터의 3대 논문으로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크리스천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를 든다.

 

1.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1) 기록배경

본서는 루터가 1520년에 기록한 논문으로

루터가 기독교계를 개혁시킬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개선해야 할 여러 가지 점을 들어

그 당시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낸,

하나의 뜻있는 권면과 충고의 글이다.

2) 논문 내용

본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고 보는데

기본적인 문제를 논하는 부분과 실제 문제를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 첫 부분은 1천년 가까이 서방세계의 사회, 경제, 정치, 법조, 종교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던 기본적인 문제들을

이른바 “로마의 세 가지 담(fence)"에 비유하면서 신학적으로 논박한 것이다.

 

첫째 담()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의 담인데

이러한 계급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계급”에 속하는 것이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세속적 계급에 대한 영적 계급의 우위성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모든 크리스천은 다 사제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선언한 것이다.

 

둘째 담성경해석자인 교황과 교황의 무오설에 관한 내용이다.

루터는 교황이 성경의 유일한 교사가 되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즉 교황은 스스로 유일한 권위자라고 생각하며, 교황은 악인이거나 선인이거나 간에 신앙문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敎皇) 무오(無誤)의 거짓 주장을 하여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루터는 성경적인 근거(고전14: 30)를 제시하면서 모든 크리스천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요 6:45)고 하였다

 

셋째 담교황과 공의회의 담이다. 즉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결의를 확인하는 것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이 자신들의 법령에만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실례로 공의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가 주교에 의한 것이 아닌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이 되고 확인되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이 논문의 첫째 부분에서 직업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신자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세 가지 담을 파괴한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당면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27개 항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취급하였다. 교회 내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분야 등 다방면에 걸쳐서 문제의 핵심들을 다루어 개혁을 제안한바 첫 수입세의 폐지와, 로마의 임명에 대한 금지, 그리고 개교회의 권리회복을 주장하는 등 본 논문에서 신학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개혁의 방침을 세웠는데 교황권의 악정과 직임 임명, 과세는 억제되어야 하며, 부담이 되는 의식은 철폐되어야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일 교회는 마땅히 독일 민족교회 산하에 있어야 하며 교직자의 결혼은 허락되어야 하며, 수많은 성일은 줄여서 산업과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탁발 교단들을 포함한 구걸은 금지되어야 할 것은 말하였고 사창가는 폐쇄되어야 하고, 낭비는 억제되어야 하며, 대학의 신학 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2. 교회의 바벨론 감금(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1) 기록배경

이 논문은 루터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한 2개월 후에 나온 글로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반박한 글이다.

제목의 “바벨론 감금”이란 말은 성례전의 왜곡된 가르침을 일례로 통칭하는 말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움에 패하여 오랫동안 바벨론이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 고난의 생활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성례전이 중세기 로마 교회에 의하여 “포로”가 되었던 현실을 비유해서 붙인 표현이다.

 

2) 논문 내용

루터는 본 논문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를 비판하였다. 즉 카톨릭 교회의 7가지 성례인 세례, 성찬, 참회, 안수례, 견신례, 결혼례, 그리고 임종시의 도유식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7가지의 성례 가운데서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참회까지도 성례로 보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참회와 같은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터는 나머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면 성례전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논점이다.

 

루터는 성례에 관하여 말하면서 성례의 첫째가는 폐해는 참회를 완전히 폐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황청은 참회를 회개와 고백과 보상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그 하나하나에 있어서 좋은 것은 다 제거해 버리고 거기에다 자기들의 변덕과 횡포를 가져다 놓았다는 것이다.

 

3. 크리스천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1) 기록배경

교황이 선택한 자들(사제들)들을 통해서 만이 회개할 수 있고 그들만이 예배를 주관하고 이하의 그 어느 누구도 사제들의 미사행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사제들 이외의 사람들은 스스로 신앙의 성숙과 구원의 확신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이 두 가지 명제에 대하여 루터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두 가지 모습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의 두 가지 모습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사람이 한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는 내적이고 영적인 사람이고 하나는 외적인 사람 즉 옛 사람이다. 우선 외적인 것은 어떤 것이라도 기독교적인 의나 자유를 만들어 내거나 또는 반대로 불의나 종속됨을 만들어 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과 의와 자유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 즉 그리스도의 복음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 복음이 신앙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2) 논문 내용

루터는 이 논문에서 결국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그는 말하며 이것이 신앙의 첫 번째 능력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고귀한 예배는 우리가 진실성과 정직성과 그리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돌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 신앙의 두 번째 능력이고, 영혼과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것이 신앙의 셋째 능력이라는 것이다.

 

3) 영향

 

종교개혁의 확고한 신념에의 루터의 주장과 위 세 개의 논문들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종교개혁이 후 기독교(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주요 또는 핵심 교리가 변혁되었고 발전되어서 칼빈주의로까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교황중심(인본주의 신앙)”에서 “하나님 절대주권 주의(하나님 중

심)”로 인간의 노력과 선행, 물질 등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회)생활

중심”에서 “성경 중심주의”로 세상과 타협하고 성경과 교회 밖에서 진리

를 찾으려는“세속화 주의”에서 “교회 중심주의”로 체계화 된 것이다.

덧붙여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복음이 전승

되도록 역사하신 일이시기에 루터의 역활이 큼에 대해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확실하나 루터가 성경 66권 중 일부 몇 권을 상대적으로 비하하거나

그 권위에 차별을 두는 지적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인생에 있어 치명적인 신앙과 신학과 사상의 결점이며 그것은 그의 업적

전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리고 수포로 돌아 갈만 하게할 잘못된 신

학사상에 의한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이런 잘못된 성경관의 결과는 계22장에 기록된 대로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마5:18~19, 계22:18~19)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하나님의 일을 하다 가령 순교를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간 따위가 감히 그리 가볍게 여기거나 취급한다

면 하나님을 가볍게, 우습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만든 유한한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루터가 이런 잘못된 성경관(이것은 비단 성경관 뿐 아니라 신관 전체

의 잘못된 사상일수도 있겠다)을 회개하지 않음으로 구원받지 못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감히 왈가왈부 할 자격이 없는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된 신학과 신앙관으로 인간은 얼마든지 교만해 질 수 있고 지금도 잘

못된 신학(성경관)과 신앙관으로 탄생되어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이단들

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많이 열심히 배우느냐? 보다 얼마나 바른 성경관과 신학을 배우고

연구하여 깨닫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신학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기독교 즉 하나님께서 진

정 원하시는 교회가 이 땅에 회복되었다고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것

다.

위 세가지 논문들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자세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

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일깨워 준다.

우리의 구원의 주체와 주관하심의 전권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삶의 이유

와 목적도 그리고 "우리 인생의 전부도 하나님" 이시기에 나의 행복과 안

위와 성공, 권위, 권세, 출세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하도록, 이 지구상의 마지막 그 한사람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포기하고 버리고 나의 전부를 드림” 이 우리가 지

향하여야 할 신앙관이며 우리의 삶을 통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또한 예

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완성이 되심을 목숨을 걸고라도 선포하고 간증하

고 자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 이 논문들이 끼친 가장 큰 영향

력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