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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35)복음의 등대를 위하여,(36·끝)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영국신사77 2016. 8. 15. 22:43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4)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2012.08.16 21:17


로마 대화재 그리스도인에 누명… 바울 · 베드로 연이어 순교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셋째 날에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성전에 계신 그분을 찾아와서 물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막 12:14∼15) 



그분의 말을 책잡기 위한 질문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그들이 세금 낼 때 쓰는 한 데나리온짜리 은화를 가져오자 

다시 물으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디베료 황제 때의 데나리온에는 그의 흉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이사의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 말씀을 하신 지 34년이 지난 후 

마침내 가이사의 것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AD 64년 7월 18일 밤,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수도에 대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화재는 팔라티누스 언덕 남쪽에 있는 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관중석 밑 상가의 기름창고에서 시작됐다. 

불길은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황제궁과 귀족들의 저택과 

서민들의 5∼6층짜리 공동주택까지 모두 불태웠다. 

14개의 행정구 중 10개구가 불에 타고, 

3개구는 완전히 파괴됐다.

“평지를 휩쓸던 사나운 불길이 언덕으로 옮겨 붙었고, 

저지대로 확산됐다. 

상점과 신전들이 무질서하게 세워진 로마의 거리에 

목재로 지어져 타기 쉬운 가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로마 제국은 불길에 휩싸였고, 

로마 시내는 공포와 죽음의 지옥이 되었다.”

                                       (타키투스 ‘연대기’)

화재는 9일 동안 계속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특이한 것은 이 역사적인 대화재로 

불의 신 ‘베스타’의 신전이 소실됐다는 사실이었다. 

로마 신화의 주신 유피테르의 신전도 역시 불에 탔다. 

가이사의 것이 가이사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 56㎞ 떨어진 안티움의 호화 별장에 가 있던 네로 황제는 

대화재가 진압되자 휴가를 취소하고 급히 로마로 돌아와 이재민 구호를 서둘렀다.

“네로는 마르스의 벌판, 갖가지 공공 건축물 그리고 궁전의 정원까지 모두 개방해 

임시 오두막을 짓고 이재민들을 수용했다. 

오스티아와 인근 도시로부터는 생활필수품이 반입됐고 

곡물 값도 인하됐다. 

백성을 위해 그런 대책들이 마련되고 시행됐으나 민심은 사나워졌다. 

로마 시가 한창 불타고 있을 때 

네로는 안티움의 별장 발코니에서 수금을 타며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타키투스 ‘연대기’)


네로 황제가 특히 백성들의 반감을 산 것은 

화재로 파괴된 로마가 채 복구되기도 전에 

그가 황실을 위한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의 건축을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예술가임을 자처하며 

로마의 설계가 잘못됐다고 불평하던 네로의 말을 근거로 삼아 

황제 자신이 새 로마를 건설하기 위해 

고의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네로를 비롯한 황제의 측근들은 

악화된 민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씌우는 것이었다.

 

로마에 화재의 불길이 번지듯이 

이번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들이닥쳤다. 

바울은 니고볼리에서 디도와 만나기로 돼 있었으나 

AD 65년 다시 체포됐다. 

마술사 시몬의 문제가 해결된 후 석방됐던 바울은 

그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지략과 실천력을 갖춘 디도를 

가나안 사람들의 비밀 기지인 크레타 섬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그 증언이 참 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딛 1:12-13)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그분이 대답하셨다.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로마에 들어간다.”

                             (외경 ‘베드로 행전’ 제35장)

그러자 베드로는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이켰다. 

‘베드로 후서’는 그가 로마에 들어가 

체포된 후에 기록됐다.

 

‘베드로 전서’는 마가가 받아썼을 가능성이 있는데 

‘베드로 후서’는 누가 대필했을까? 

사도들의 서신 중 ‘베드로 후서’의 특이한 문체와 어휘는

 ‘유다서’와 많이 닮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 서신에서 강조하는 

‘종말’의 개념이나 ‘천사론’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

베드로의 종말론은 

로마의 화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예수의 동생 유다가 대필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지막 편지에는 

베드로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듯 

‘종말’에 대한 예감이 믿음과 소망으로 넘치고 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같은 시기에 다시 수감된 바울도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예감하고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6∼8)

당시 체포된 그리스도인들은 

짐승의 가죽을 입혀 들개에게 물어뜯기게 하거나 

말뚝에 묶어 불에 태우는 등의 방법으로 잔인하게 처형됐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과연 누가 로마시를 불태운 죄를

그들에게 씌우자는 놀라운 제안을 했던 것일까? 

네로 황제일까, 아니면 황제의 측근들일까?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는 

그때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 하나가 발견된다. 

보르기오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유대 왕 아그립바 Ⅱ세는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거대한 식당을 건축했다.

“아그립바 왕은 대식당 안에 누워서 먹고 마시며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려다보는 일을 자주 즐겼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8) 

유대인들은 그가 성전을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성전 안의 높은 건물에 더 높은 벽을 쌓아 

헤롯궁 대식당의 전망을 차단했다. 

베스도 총독이 그 벽을 허물라고 지시하자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이스마엘과 성전 담당관 힐기야 등 

10여 명의 대표단을 로마에 보내 

황제에게 이 문제를 호소했다.

“네로 황제는 대표단의 간청을 듣고 

 유대인들의 소행을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운 벽을 그대로 두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네로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그의 아내 포페아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포페아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유대고대사’ 20-8)

오랫동안 유대를 떠나 타국에서 생활을 해 오던 유대인들은 

당국의 고위층에 대한 로비 능력에서 뛰어남을 보였다. 

네로 시대에 황제에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은 포페아 황후였고, 

그녀는 유대인들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스도인 박해의 아이디어가 포페아 황후에게서 나왔다면 

그 출처를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AD 65년 네로는 또 자신의 폭정에 반대하던 스승 세네카를 

반역으로 몰아 자살하게 했고, 

바울은 AD 67년 오스티안 거리에서 참수당했으며, 

베드로는 AD 68년 바티카누스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바티카누스 언덕이나 오스티안 거리에 가보면

교회의 근본이 되는 이 사도들의 기념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2-25)

                                                                             김성일 작가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5) 복음의 등대를 위하여 

 

2012.08.23 17:51 

 


마가, 수감 중인 베드로 권유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가 첫 교회 세워

AD 64년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고

그리스도인을 방화범으로 지목하여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시작되었을 때

마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베네토 만의 개펄에 수상 도시 베네치아를 건설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면

그 시기는 플로루스 총독이 범죄 조직과 함께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한 AD 64년이 절정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베네치아의 첫 단계 공사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각종 수출품의 생산 라인을 이설해 가며

난민들을 정착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날 마가가 아드리아 해 북단의 베네토 만에 들어갔을 때

벌써 그 일은 예비된 것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를 태운 배가

 아드리아 해의 섬들 사이로 개펄이 보이는 해안을 지날 때

  천사가 그에게 전하기를

  이곳에 그대를 기념하는 큰 도시가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AD 65년 바울과 베드로가 다시 감옥에 수감됐을 때

마가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이주시키는 작전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을 것이고,

그는 바울과 베드로를 면회하고 모든 상황을 보고했을 것이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그가 전도한

엘마고라스를 베드로에게 데리고 갔다.

“베드로는 그를 아킬레아 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다.”(‘황금전설’ 2-57)

아킬레아는 베네토만 북쪽에 있는 도시였다.

그가 아킬레아 지역을 담당했다면

베네치아의 영적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베드로 후서’를 받아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즉 주님의 아우 유다였을 수도 있다.

 

유다를 베네치아에, 엘마고라스를 아킬레아에 보내 놓고

마가는 바울과 베드로를 보살피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가

그때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마가는 당시 정부의 고관이나 황제 측근의 인물들을 손이 닿는 대로 만나

바울과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애썼을 것이나,

이미 황제의 칙령에 의해 체포된 상황이어서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자신의 최후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예감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래서 베드로는 마가에게 알렉산드리아로 갈 것을 권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돼 안디옥에서 꽃 피운 복음을

그는 이미 동방의 거점 바벨론에 전했다.


그는 이제 바울과 함께 세계의 수도 로마에 와 있었다.

아쉽게도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은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는 남쪽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아브라함 때부터 애굽은 유대인의 피난처였고

야곱의 아들들이 그곳에 들어가 살았으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려갔던 곳인데

그곳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던 것이다.

 

AD 66년 유대가 로마에 항거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베드로의 마음은 더 급하여 마가를 불렀다.

“마가는 베드로의 지시를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황금전설’ 2-57)

알렉산드리아는 마가가 10년 동안 수학과 철학을 공부한 도시였고

아버지 사업을 복구하기 시작한 곳이었다.

또 예루살렘과 유대가 기근에 시달릴 때

곡물을 실어나를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베드로의 지시를 따라

사업가가 아닌 복음의 전도자로 그곳에 가야 했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나사렛 예수가 잡혀갈 때 도망쳤고

바울과 함께 선교에 나섰다가 버가 항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마가는 자신이 경영하던 모든 사업을

후계자에게 인계하고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마가는 애굽으로 가서

 자신이 기록한 복음을 가르친 첫 번째 사람이며,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설립한 첫 번째 사람이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2-16)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대학자 필로(Philo Judeus)는

그곳에 생기기 시작한 교회 공동체를

매우 경이로운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테라페우테라 불리워졌다.”(필로 ‘묵상하는 삶’)

테라페우테는 헬라어로 ‘데라페이아’ 즉 치료자라는 뜻이었다.

필로는 아직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을 잘 알지 못하여

그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말했거나

사람들이 그들에게 붙인 테라페우테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사업 경영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마가는

복음의 확장에도 그런 재능을 발휘했던 것 같다.

교회 공동체가 자라는 속도에

필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애굽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매우 강하게 일어났다.”

그는 공동체의 특징을 면밀하게 살폈다.

“모든 집에는 성소 또는 수도처로 불리는 거룩한 방이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오직 예언자가 전한 율법과 그들이 받은 영감과 계시와 찬양

 그리고 진실된 신앙에 의해서 완벽하게 성립된 것만을 가지고

거룩한 의식을 행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적인 훈련에 전념하며

 성서를 읽고

 선조들의 지혜를 비유화해서 연구한다.”(필로 ‘묵상하는 삶’) 

필로는 그들이 부르는 찬양에 대해서도 경탄했다.

“그들은 명상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그 내용들을 거룩한 방법에 맞추어

 온갖 형태의 가락과 음률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와 찬송가를 만들고 있었다.”

                                                   (필로 ‘묵상하는 삶’) 

또 그는 교회 공동체의 성서 해석 방법에도 깊은 공감을 표했다.

“성서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비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율법은 그들에게 살아 있는 것을 닮으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육체를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의 교훈을 지니고 있으나

 영혼을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말씀 속에 숨겨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공동체는 그런 의미를 특별히 연구할 대상으로

 또 독특한 아름다움은 밝혀지게 된다는 생각 속에서

 모범을 제공해 주는 말씀으로 생각한 최초의 공동체였다.”

                                                              (필로 ‘묵상하는 삶’)

BC 280년경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토스는

알렉산드리아 항의 파로스 섬에 거대한 등대를 건축하여

애굽 왕 프톨레마이오스 Ⅱ세에게 헌정했다.

등대의 높이는 135m에 달했고 3단식으로 되어

맨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었다.

폭이 넓은 나선형 경사로가 옥탑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밤에는 옥탑에서 불을 밝혔다.

등대 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Ⅰ세의 입상이

태양신의 형상으로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Ⅱ세가 유대인의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초청한 유대 학자 72명은 그 파로스 섬에서 ‘70인역 성경’

즉 ‘셉튜아진타’를 완성했고

그것은 필로의 학문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마가는 그 ‘셉튜아진타’의 터 위에

파로스의 등대보다도 더 높고 밝은 ‘복음의 등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말씀을 따른 그의 절대적 순종이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5-16)

성도들의 수가 급증하자

마가는 그의 신발을 수리해 주던 제화공 안니아노스에게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맡기고

자신은 오직 전도에만 힘을 썼다.

“하나님이 마가에게 큰 은총을 내려

 그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금욕과 선행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마가의 능력은

 단지 기적이나 설교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몸소 본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추기경 페트로스 다미아니) 

마가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로마의 감옥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바울은

자신을 보살펴 주던 그를 보고 싶었다.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며

그는 마가를 데려오라고 당부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딤후 4:11)

그러나 마가는 로마로 갈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의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과 헬라인 사이에서 그리고 총독의 진압 과정에서

성도들을 보호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가는 AD 67년 바울이 참수당할 때에도 로마에 없었고,

AD 68년 그가 아버지처럼 섬기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릴 때에도 그곳에 없었다.

 

그만큼 알렉산드리아의 상황이 험악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환난 속에서도 복음의 등대는

더 높고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성일 작가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6·끝)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012.08.30 18:22

 


 마가 순교할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음성

필자가 추적한 대로라면

마가는 AD 50년 바벨론에 가서 베드로를 만났고,

그의 구술을 받아서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그리고 AD 62년 당시 로마에 연금돼 있던 바울을 만나

그의 부탁을 받고 골로새 교회로 갔다(골 4:10).

마술사 시몬이 로마의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던 당시 상황으로 보아

바울은 그에게 베드로를 찾아 로마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마가는 AD 63년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와 동행했을 것이다.

AD 65년 베드로가 체포되자

마가는 그의 지시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마가는 애굽으로 가서 자신이 적어 놓은 복음을 가르친 첫 번째 사람이며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설립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2∼16)



그리고 마가는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서 순교했다.”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그러나 그가 언제 순교했는지에 대해서는 혼선이 있다.

“네로가 통치한 지 8년째 되는 해에 안니아노스는 복음사가

 마가 이후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책임 맡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2∼24)

이 기사를 근거로 네로의 즉위 후 8년 즉, AD 62년에

마가가 죽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가는 AD 62년 골로새 교회로 갔고,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쓴 AD 66년에도

분명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딤후 4:11)

그러므로 마가의 순교 시기를 추정하려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정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권을 놓고 늘 충돌해 온 유대인과 헬라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세 번의 큰 폭동을 일으켰다.

그 첫 번째가 카이우스 황제의 말기 AD 40년이고,

다음은 AD 66년 본국 쪽의 소요에 동조해 폭동을 일으켰다가

5만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큰 사건은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후에 일어났다.

“유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알렉산드리아로 탈출한 시카리 단원들이 있었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7∼10)

열심당과 함께 로마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암살 전문 테러 단체 ‘시카리’의 도망자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건너와

그곳의 유대인을 선동했다.

“로마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우리는

 로마와 싸워 자유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유대고대사’ 7∼10)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총독의 보고를 받고

유대인의 회당을 파괴하여 폭동의 원천을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시카리 지도자 요나단의 선동으로 폭동이 재발하자

로마군은 유대인 지도층 3,000여명을 학살했다.


요나단이 체포되고 폭동은 진압됐으나

유대인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안니아노스에게 교회를 맡기고

펜타폴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던 마가가 돌아오자

알렉산드리아의 거상이었던 그에게

유대인의 분노가 쏠렸을 가능성이 있다.

“마가가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마가를 거리로 끌고 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북쿠리로 데려가자고 소리쳤다.”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북쿠리’는 도살장이라는 뜻이었다.

마가는 도살장이 있던 자리에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투성이로 해안의 북쿠리에 끌려간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폭도들이 그를 땅바닥에 엎어 놓고 사지에 못을 박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했던 말씀과 같은 것이었다.

“저의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황금전설’ 2∼57)

AD 70년경 마가가 순교한 이후

사도들의 순교 소식이 잇달았다.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서 도끼에 찍혀 숨을 거두었고,

나다나엘은 아르메니아에서 전신의 가죽이 벗겨진 채 순교했다.


셀롯인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톱에 썰려 죽었으며,

다대오 역시 페르시아에서 숨졌다.


스쿠디아에서 돌아온 안드레는

아가야 지방의 파트라스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렸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자객의 칼에 찔려 순교했다.


도마는 AD 72년 인도 마드라스에서 네 개의 창에 찔려 죽었고,

빌립은 AD 78년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작은 야고보’로 불렸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죽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듬해에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 시가 파묻히는 참극을 목격했고,

2년 후 40세로 단명했다.

 

AD 81년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정치적, 군사적 공적이 없는 자신의 권위를 폭정으로 세우려 했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인에 모진 박해를 가하여

네로 이후 교회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티투스 치세 2년에 로마 교회의 책임자 리누스는 아넨클레투스에게 직임을 인계했고,

 도미티아누스 치세 12년에 아넨클레투스는 클레멘트에게 그 직분을 넘겨주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3∼13, 15)

그 환난의 시대에 사도 요한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로 있었다.

그는 세 개의 목회 서신을 쓰면서도

베드로가 기대했던 복음서의 완성을 미루고 있었다.


바울이 순교한 후 누가는 헬라의 중남부 보이오티아에서 소천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그의 묘는 지금 에베소에 남아 있다.

누가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에베소로 옮겨 묻어달라고 유언했음에 틀림없다.

혹시 누가는 시신이나마

요한이 다니는 길목에 지켜 서서

복음서의 완성을 촉구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AD 95년 요한은 체포되어 밧모 섬에 유배당한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장차 될 일의 환상을 보고,

그분의 지시로 ‘요한계시록’을 쓰게 된다.

 

이듬해 도미티아누스가 죽어 에베소로 돌아온 그는

마침내 ‘요한에 의한 복음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은 비로소 예수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곧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실리적 성품의 마가는 베드로의 기억을 되살려 내었고,

레위 출신의 마태는 말씀의 성취를 증거했으며,

의사인 누가는 치유의 능력에 중점을 두었고,

현실의 욕망을 따르던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했다.


후일의 교회는 마가를 사자에,

마태를 말씀의 전달자인 천사에,

누가를 일하는 소에,

그리고 요한을 공중의 독수리에 비유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그의 복음서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다.

오직 출세와 야망 때문에 세례 요한을 만나러 갔다가 그분을 만난 일,

나사로를 시기하여 그분을 슬프게 해드린 일,

그분이 잡혀갈 때 혹시 최후의 반전이 있을까 하여 혼자 골고다에 갔던 일,

거기서 그분의 어머니를 떠맡게 된 사연까지

모두 진솔하게 다 털어 놓으며

그는 복음서를 완성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요 21:24)

요한은 마가, 마태, 누가의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들의 서신이나 그 사본들까지도 대부분 손에 넣고 있었다.

 

AD 367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지도자 아타나시우스는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 21편과

요한계시록을 합해 27권을 신약성경의 정경으로 채택했고,

AD 397년 카르타고 공회가 이를 확정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전한 그분의 나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개역한글판)

그로부터 다시 70년이 지난 AD 467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방문하여

거액의 헌금을 약속하고 마가의 무덤을 열었다.

“마가의 유체를 무덤에서 꺼낼 때

 그윽한 향기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거리에 가득했다.”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동의를 얻어

마가의 유체는 베네치아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장려한 기념 교회를 건축했다.


베네치아의 모든 거리에서는 지금도 마가의 상징인 사자를 볼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성 마가의 축일을 4월 25일로 정했는데,

이는 본래 곡물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농사제 날이었다.

그는 또 유리 세공업자, 금속 공예업자, 가죽 제품 업자와

건축 노동자들의 수호 성자가 되었고,

또 각종 병을 예방하는 성인으로도 추앙을 받고 있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