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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청와대에선 같은 新聞 봐도 세상과 다르게 해석… 人의 帳幕 쳐져 있어"
영국신사77
2016. 8. 8. 14:53
[최보식이 만난 사람] "청와대에선 같은 新聞 봐도 세상과 다르게 해석… 人의 帳幕 쳐져 있어"
[박근혜 후보 '원로 7인회' 멤버… 김용갑 새누리당 고문]
"내가 민정수석땐 民心 전달… 전두환 前대통령, 내 보고에
종일 일이 손에 안잡혔다더라… 직언하는 데도 기술 있어야"
"1987년 11월 大選 기간에 군부 쿠데타 모의 진행…
대통령에게 보고 않고 주동자와 몰래 담판 지어"
―박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하면 되지, 신문 인터뷰를 통해 전달해야 하나?
"그게, 허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스타일이지 않나. 그렇다고 전혀 섭섭 안 해. 당초 그쪽에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내가 좋아서 박근혜를 택한 거니까."
―박 대통령이 김 고문 같은 분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많은 사람이 바른길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나, 신문에서도 조언해주고 있고. 내가 만나서 말해봐야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격이지."
―대통령이 여론과 민심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신문·방송·인터넷이 있고, 또 대통령에게는 국정원·경찰 등 온갖 군데서 정보가 들어와. 문제는 청와대에 들어가면, 같은 신문을 보고 글자는 같은데도 바깥세상과 다른 해석을 해. 구중궁궐처럼 인의 장막이 쳐져 있어. 세상 민심과 안 맞는 선택과 결정이 나오는 거야. 이럴 때 민정수석의 역할이 있는 거야. 지금 우병우 사태를 보면서, 내 경험(1986~1988년 민정수석)을 말해주고 싶은 거지."
'강성(强性)' '원조보수'로만 비쳤던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다음 날 중식당에서 만나 대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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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고문은 “직언하는 참모 못지않게 받아주는 보스가 훌륭하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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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된 우병우 민정수석의 거취 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은 침묵하는데.
"그게 그 양반 스타일이지. 내부감찰에서 특별한 게 안 나오면 그냥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우병우를 해임해야 한다고 보나?
"설령 죄가 없다 해도 이미 신뢰를 잃었어. 나라면 그런 소리가 들리기 전에 사표를 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로 정권의 동력이 떨어질 거다. 박근혜 후보 시절에 '당선되면 민정수석 한 명만 똑똑한 사람 써도 나라를 잘 운영할 수 있다. 검찰 출신을 절대 뽑지 말라'고 몇 번 말했다. 이 양반은 '그렇게 걱정되면 바깥에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대통령께 전화 걸도록 측근들이 놔두겠나."
―그런데 왜 검찰 출신은 안 된다고 특정했나?
"상명하복에 익숙해 거슬리는 직언을 못 하니까. 민정수석은 세상 바닥 민심을 가감 없이 전하고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다. 함께 일할 사람을 잘 써야지."
―사람 잘 쓰는 문제는 민정수석만 아니라 참모 전체에 해당된다.
"다들 대통령의 심기를 좋게 할 뿐, '노(No)'라고 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 민정수석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직언해줘도…. 내가 1986년 초 민정수석이 됐을 때 개헌 문제로 시국이 시끄러웠다. 그해 4월 야당에서 직선제를 위한 대규모 집회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었어. 점퍼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가 지켜봤다. 발각되면 난리 났겠지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내 눈으로 현장을 봐야 되겠다 싶었다."
―어떤 내용의 보고였나?
"개헌 논의를 막아왔던 전두환 대통령은 차선책으로 '내각제' 구상을 하고 있었다. 독대 자리에서 내가 '막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 내각제와 직선제 어느 쪽이 좋은지 공론화시키자'고 했다. 그 말에 대통령의 고민이 해결된 거야. 바로 다음 날 개헌 논의를 공식화하는 담화를 준비시켰어."
―개헌 논의는 1년쯤 끌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4·13 호헌(護憲)'으로 끝났는데?
"서로 내각제와 직선제를 고집하니 타협이 될 리 없었지. 개헌 논의 중단을 선언하자, 시국이 더욱 혼돈에 빠졌다. 그 절정이 '넥타이 부대'라는 회사원들까지 가담한 '6·10' 시위였다. 그날 밤 3000여 명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내가 몰래 성당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뒤 '퇴로를 열어주자'고 경찰 지휘부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대다수 농성자들은 빠져나갔다."
―세간에는 '계엄령' 소문도 돌았는데?
"그해 6월 14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대통령이 시국수습 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군과 경찰 수뇌부도 참석했고. 계엄령이 논의됐지만,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이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도 실제 그런 의사가 없었을 거다. '단임(單任) 실천'에 대한 분명한 신념이 있었기에, 계엄령을 선포하면 평화적 정권 교체는 물 건너가는 것이니까."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에 막후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6월 18일 대통령 독대 자리에서 '각하 지금 임기가 얼마 남았습니까?'라고 시작하자, 이분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어. 내가 '8개월 정도 남았는데 지금 상태로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겠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직선제를 받아주고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느냐. 설령 져도 정치 보복이 없을 거다'며 한 시간가량 보고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문구도 써가며. 물론 DJ도 풀어줘 야당 후보끼리 경쟁시키는 등 정치공학적 계산까지도 해놓은 거지."
―'직선제 수용' 보고에 대한 전 대통령의 반응은?
"이분이 '지금 당장 노 대표에게 가서 내 특명이라고 하고 그대로 설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표는 '내가 전국을 돌면서 내각제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는데 어떻게 갑자기 말을 바꾸느냐'며 못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다음 날 대통령이 '노 대표의 반응은 어땠나?'고 묻기에, 부정적이었다고 할 수가 없어 '검토 중인 모양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오늘 안가(安家)에서 노대표와 저녁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노태우의 안가 회동 결과는?
"다음 날인 20일 아침 전 대통령이 '노 대표가 지도자의 정치 노선이 왔다 갔다 하면 되겠냐고 하던데'라고 했다. 내가 '나라를 살려야 하는 마당에 정치노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라고 맞받았다. 전 대통령이 '그렇지, 지금 정치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내 인생에서 민정수석 시절이 가장 보람이 있었다."
―5공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뒤 6공 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으로 발탁됐는데?
"내가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기여했다고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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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출범 직후 '5공 청산'이 시작됐고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쫓겨갈 때 어떠했나?
"역사의 큰 흐름이었다. 6공 정부 초기에 핵심 실세 회의가 있었다. 나도 그 멤버에 들어 있었다. 어느 날 불러서 갔더니 '오늘부터 전두환을 귀향시키는 논의를 해보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감정이 폭발했다. '전 대통령은 6·29를 받아들였고 정권을 잡도록 뒷받침했다. 당신들은 5공에서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이렇게 해도 되는가.'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1987년 11월 군부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고 공개했는데?
"유세 동안 지역감정과 사회 혼란이 심화되면서 그런 일이 있었다. 육사 후배인 보안사의 한 책임자가 '보안사령관에게 아직 보고는 안 했지만 너무 걱정된다'며 제보했다."
―신뢰할 만한 정보인가? 군부에서 단순히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를 쿠데타 모의로 과대 해석한 것은 아닌가?
"가담자들은 예비역인 육사 11기와 내 동기(17기), 현역 장성 등으로 대부분 하나회 출신이었다.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수사가 이뤄졌나?
"직무상 대통령께 보고해야 하지만, 그 순간 계엄령이 선포되고 가담자 체포와 함께 선거가 중단된다. 쿠데타 모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 '권력 연장을 위한 조작된 친위쿠데타'라고 들고일어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했다."
―청와대 참모가 자기 선에서 그런 중대한 사안을 처리해도 되나?
"안무혁 안기부장과 상의하려고 전화하니, 강릉에 있었고 술을 마신 것 같았다. 괜히 화가 나 '거기서 뭐하느냐'로 시작돼 언쟁이 붙는 바람에 정작 그 말을 못 꺼냈다. 그때 말을 꺼냈으면 감청이 됐을 것이다. 대통령께 보고도 안 한 정보였는데, 나까지 큰일을 치를 뻔했다."
―쿠데타 모의 건은 어떻게 수습했나?
"플라자호텔에서 주동자를 만났다. 그는 '지금 상태로 가면 나라를 송두리째 김일성이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한 당신(김용갑)이 역적이다'고 했다. 내가 '안 멈추면 내일 아침 대통령께 바로 보고하겠다. 24시간 내 출국하면 비밀에 부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는 출국했고 그 뒤 군부 동향에 촉각을 세웠다."
―이들의 실명을 왜 밝히지 않나?
"그건 밝힐 수 없다. 그 사람들이 타격받고, 지금 와서 '그런 일 없었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민정수석 시절 전 대통령 앞에서 '땡 전(全) 뉴스'에 대한 언급도 했다고?
"독대 자리에서 대통령 기분이 좋은 걸 보고는 '땡 전 뉴스'를 꺼냈다. '9시 땡하면 전두환 대통령 동정(動靜) 뉴스가 나와 시청자들은 TV를 껐다가 5분 뒤에 켠다. KAL 기가 러시아 상공에서 격추돼 269명이 숨졌을 때도 뉴스 첫머리에 대통령의 새마을 청소 동정이 나갔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이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 뒤로 바뀌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경호실장이 '각하께서 아침에 민정수석한테 보고받고 나면 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하더라'고 둘러 말했다. 사실 직언하는 데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
―직언의 기술이라면?
"퇴임을 앞두고 연희동 사저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민심이 안 좋았다. 하루는 '각하, 택시를 타니까 운전사가 연희동에 아방궁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합디다.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했지. 그래서 집 외형은 그대로 두고 안에만 조금 손보는 걸로 그쳤다. 동생 전경환을 국회의원 시켜줄 마음을 갖고 내 의사를 물었을 때 '안 됩니다. 전경환은 정권이 바뀌면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기분 하나 맞춰주지 않은 내게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직언을 할 수 있는 참모도 대단하지만, 이를 받아주는 보스야말로 훌륭한 거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직언을 받아주는 게 더 어렵다. 지금은 너무 저평가돼 있지만 전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정말 통이 컸다."
[최보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