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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 사원, 피라미드와 장제전(이집트 태양신전)

영국신사77 2010. 8. 10. 09:41

             스핑크스(출처- http://blog.paran.com/jhd112/14818027)

 

  스핑크스는 '교살자'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이며, 원래 이집트어로는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의미로 불려졌다. 전체가 하나의 석회암으로 조각된 것으로, 주변을 골짜기 같이 깎아서 만들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피라미트처럼 단을 쌓아서 올라가며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돌덩이를 깎아서 만들었다.

 

 오랜 세월동안 스핑크스는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변의 모래에 파묻혀 있었는데, 기원전 1400년경 투트모세 4세가 왕자시절 사냥후 지쳐서 스핑크스 머리 밑에서 잠이 들었다가, 스핑크스가 '숨막히는 모래에서 나를 꺼내주면 왕이 되도록 해 주겠다'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뒤 모래를 치워 스핑크스의 모습을 드러내게 했고, 왕이 된 투트모세 4세는 스핑크스의 두 발 사이에 이 꿈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머리는 턱 끝부분에서부터 이마꼭대기까지 크기가 19피트(5.8 m)이고, 얼굴폭이 20피트(6.1 m)이다. 그리고 원주가 91피트(27.7m)이다. 스핑크스의 발은 전방으로 56피트(17m미터) 뻗어있고, 몸통은 길이가 172피트(52 m), 총 몸길이는 242피트(73.7 m)이고, 전체 높이는 머리꼭대기까지 66피트(20m)이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장제전
 

                                  스핑크스 사원 장제전     

 

 피라미드는 초기 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2대 조세르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타바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타바를 6단 포개 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 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 소신전· 중정이, 남쪽에는 제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고,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둘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이것들을 '피라미드 복합체'라고 부른다

 

                          장제전에서 본 피라미드 

 

(사진출처- http://oi.uchicago.edu/OI/IS/SANDERS/PHOTOS/EGYPT/GIZA)

 

 

 

 

 

 

 


태양신 상징, 피라미드 

 

                                               피라미드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352,000개에서 268만 여개 정도의 각 2.5t 내지 10t 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석회암은 모깔담과 기자 남동쪽 15km 지점의 엘뚜르 등에서 캐내어 이용하였다. 화강암의 경우는 카이로 남쪽 85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해 왔다. 돌을 쌓은 단층의 수는 원래 210계단이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203계단이다.

 

 하루 10만여명이 1년에 3,4 개월씩 20여년(총 2천여일)동안, 연인원 2~3억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로서, 용도는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밑변의 길이 230.3m, 겉표면에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자재로 재활용되느라 벗겨 졌다.

 

 칼리프 알마문이 뚫은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 갈 수 있으며 원래의 입구는 이보다 위쪽 10m 지점에 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50년간 통치한 쿠프왕은 모든 신전을 폐쇄하고 제사를 금지시키고 자기만을 숭배토록 했다.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하여 돌을 옮길 둑길을 만드는데 만도 10년이 소요되었는데, 전체길이가 1km, 폭이 18m,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14.4m였다. 이 길에 여러가지 동물의 모습을 새겨 장식하였고, 다듬은 돌로 축조하였다. 돌길이는 90cm 이하가 없었다.

 

 피라미드에는 상형 문자로 이 일에 동원된 일꾼들이 먹어치운 무, 양파, 마늘의 양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액수는 은 1,600 달란트에 해당된다. 이것이 맞는 기록이라면 공사용 철제품과 노무자들의 주·부식 옷가지 등을 지급하는데 따른 비용은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상상이 안 간다. 돌을 잘라 나르고 지하 수로를 파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하의 쿠프왕의 현실은 나일강의 물을 운하로 끌어드린 물로, 마치 섬처럼 만들어 졌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기초를 쌓는 데는 이디오피아 산의 다양한 색깔의 돌을 사용하였다. 그는 쿠프왕의 동생으로 56년간 통치하였다. 쿠푸, 카프레 왕은 106년간을 통치하였다.

 

 카프레 왕의 아들인 멘카우레 왕은 신전을 다시 열고 노역에서 해방시켜 생업에 종사토록 하였으며, 종교적인 관습을 실행하도록 허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