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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구 약 중 간 기 (1)

영국신사77 2007. 5. 21. 12:19
 
                               신 구 약  중 간 기   
엘리야(cjej0128) http://cafe.naver.com/cjej0128/82


                               400년간의 침묵기

 

   구약 최후의 예언자 말라기(BC 400경) 이후 예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정경 형성의 필수적 요건이 되는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 정경을 한정하고 완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AD 1세기 말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일은 아닥사스다 1세(BC 465~424년) 통치하에서 이루어졌다.

 

 


 

                                1. 중간시대의 사건

연대(BC)

유 대 사

세 계 사

424-

   331년



359-

   323년

338-

   323년







323-277년
















 

198년



167-165년



구약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페르시아 총독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소관구
팔레스타인은 다메섹 또는 사마리아에 수도를 둔 페르시아 제5관구 지경 내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대군주 치세하에

               비교적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위협과 페르시아 대군주에 대한 충절로 분열되었다.
'알렉산더'는 수리아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두로(BC 332년), 가사를 침공하였다. 유대인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항복하여 환대를 받았다. 알렉산더는 애굽을 점령하였다(BC 332년).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그리스 언어.문화.철학이 유포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BC 323-198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처에 안주시켰으며, 경제.문화의 수준을 고양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구약의 헬라어 번역Septuagint.. 70인역)작업이 시작되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계속 헬라화

되어갔고,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엄격한 전통주의를 고수했다.

셀류코스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BC 198-165년)

대왕 '안티오쿠스 3세'는 팔레스타인에서 애굽인을 추방시켜 이를 셀류코스제국에 병합하였다. 집회서가 기록되었다(BC 180년경).

 유대인들의 헬레니즘화가 강요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여 성전을 더럽혔으며, 번제단 위에 올림피아 제우스의 제물을 바쳤다.

 마카베오 반란이 노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에 의해 일어났다.

페르시아 제국
크세르크세스 2세(BC 424-423년)
다리우스 2세(BC 423-404년)
아닥사스다 2세(BC 404-358년)
아닥사스다 3세(BC 358-338년)
아르세스(BC 338-336년)
다리우스 3세(BC
336-331년)
마케도니아제국
필립(BC 359-336년)이 그리스 도시국가의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캐로네아(BC 338년)의 승리. 그리스의 도시국가 세력이 파괴되었다.
알렉산더 대왕(BC 336-323년)은 3차에 걸친 결정적인 전쟁, 즉 그라니코스(BC 334년), 잇소스(BC 333년), 가우가멜라(BC 331년) 전투를 통하여 페르시아제국을 점령하였다. 영토는 인도까지 이르렀다(BC 327년). 바벨론에서 죽었다(BC 323년)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들은 권력다툼을 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셀류코스제국

프톨레마이오스 1세
(BC 323-285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
(BC 285-246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
(BC 246-221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
(BC 221-203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
(BC 203-181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애굽이 로마제국의 한 지방으로 편입(BC 30년)되기까지 로마 지배하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셀류코스 1세
(BC 312-280년)

안티오쿠스 1세
(BC 280-262년)

안티오쿠스 2세
(BC 261-246년)

셀류코스 2세
(BC 246-226년)
셀류코스 3세
(BC 226-223년)
안티오쿠스 3세
(BC 223-187년)

 

셀류코스 4세
(BC 187-175년)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BC 175-163년)

안티오쿠스 5세
(BC 163-162년)

데메트리우스 1세
(BC 162-150년)

166-

   134년











134-104년






104-69년












63년






62-41년






40-4년

하스모네가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BC 166-163년)
'유다'(BC 166-160년)는 수리아 군대를 격퇴시킴으로 성전을 정결케 하여 재봉헌하였다(BC 166, 165년).
'요나단'(BC 160-142년)은 외교적 군사적인 면에서 유대 독립을 위한 장족의 진보를 가져왔다.
'시몬'(BC 142-134년)은 유대 독립(BC 142-63년)시대의 서장을 열었다. 예루살렘에서 수리아 주둔군을 축출시켰고 게셀과 욥바 지역을 점령하였다.
마카베오상서.토비트서.유딧서
70인역의 완성(BC 150년경)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BC 134-104년)는 정복사업을 시작하여 갈릴리 하부에서 네겝에 이르고 지중해에서 나바테야에 이르는 소제국을 통치하면서 요단서편과 사마리아(그리심산 성전의 파괴), 에돔을 정복하였다.
필로.요세푸스.플리니우스와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 알려진 에세네파와 유대교의 2대 교파(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발생
요한 히르카누스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4-103년)는 통치 직후 죽었다.
무자비한 정복자 '알렉산더 얀나이우스'(BC 103-6년)는 바리새파를 이간시킴으로써 하스모네가 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알렉산더 얀나이우스의 처 '알렉산드라'(BC 76-67년)가 지배자가 되었다. 바리새파의 황금시대
솔로몬의 지혜서, 시빌 신탁서, 에녹서, 요벨서, 마카베오하서가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BC 66-63년)는 폐위되어 로마로 송치되었으며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빛내어 주었다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로마 통치하에 두었고, 트랜스 요르단에 유다의 세력과 비등한 데가볼리(10도시)동맹을 조직하여 유다를 약화시켰다.



   로마인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BC 63-AD 135년)
이두매인 '안티파테르'가 로마 승인을 받아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였다(BC 55-43년).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롯과 파사엘'은 분봉왕이었다(BC 41년).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누스'는 대제사장으로 바대인(BC 40-37년)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다.
'헤롯 대왕'은 로마 원로원의 인준으로 유대 왕이 되었다(BC 37-4년).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BC 6년 혹은 5년경)

데메트리우스2세와 알렉산더 발라스의 왕위 투쟁


알렉산드리아 발라스(BC 150-145년)

데메트리우스 2세(BC 145-139년)는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였으며, 실제로 유대인들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였다(BC 143년).


   안티오쿠스 7세(BC 139-134년)는 유다를 침략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과중한 공물을 강요하였으나 ,그가 죽음으로써(BC 134년) 사실상 셀류코스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그 종식을 고하였다.

 

   폼페이우스가 이 지역을 로마의 한 지방으로 만들기까지, 무력한 수리아 왕국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사해 북서 해안에 있는 에세네파의 본부 키르벳 쿰란이 BC 110년경에 설립되어, 대략 BC 37년까지 번성하였다. 대다수의 사해 두루마리의 연대는, 이 시대나 그 이후로(BC 1년경-AD 70년) 추정된다.

   알렉산드라의 장자, 히르카누스는 대제사장이었다.

   알렉산드라 사후, 이두매 총독 안티파테르는 히르카누스를 설득하여 페트라로 달려가서,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경쟁을 물리치고, 유다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나바테야 왕자 아레타스의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계속되는 투쟁으로 로마에 원조를 요청하게 되어, 로마가 개입함으로써 하스모네가 왕정은 몰락하게 되었다.

   카틸리네의 음모, 키케로의 부각, 카틸리네의 피살(BC 62년)
   폼페이우스.카이사르와 크랏수스가 제1삼두정치를 형성했다(BC 60년).

   카이사르의 갈리아전쟁(BC 58-51년)과 내전(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은 카이사르의 암살로 종식되었다(BC 44년).
   제2삼두정치[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BC 43년)]는 빌립보 대전(BC 42년)과 악티움해전(BC 31년)으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BC 27-AD 14년)의 제정 로마 시작.
   사해 근처 에세네파 본부인 키르벳 쿰란의 부흥 

 

 

 

 

                                         2. 중간시대의 중요성

 

 

   이 400년 기간의 많은 중요 사건 가운데, 구약이 헬라어(당시의 상용어, BC 280-150년경. 70인역으로 부름)번역이 완성 되었다. 이 일로 히브리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구약의 진리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전달되었다.

 

  • 외경(Apocrypha)

   외경은 구약 정경이 편집된 이후, 구약과 신약 중간시대에 기록된 14권의 책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외경서들은 구약 히브리 정경에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책들은 70인역과 불가타역에 수록되어, 구약과 신약 사이에 놓여졌다.

 

   로마가톨릭교회는 14권 가운데 11권을 소위 '제2의 정경'으로 인정하여 AD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성경의 한 부분으로 선포하였다. 신교에서는 내.외적증거로 하여 이 책들의 정경적 지위를 부정한다. 이 외경서들은 유대인들이나 예수, 신약에 의해서 또한 그 증거를 객관적으로 조사한 교부들 중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성경으로 인정된 일이 없다.

 

   외경에 속한 책들을 열거,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 제1에스드라서 이 책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역대하 정경과 동일한 역사적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광범위한 부분(3:1∼5:6)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대체로 전설적인 이야기로, 그 내용은 참 지혜를 확증하기 위해 다리오 왕정에서 세 사람의 유대인 시동(侍童)이 벌이는 경연으로 되어 있으며, 스룹바벨이 승리자였다. 그는 상으로서 유대인의 송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왕명으로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책은 BC 100년경에 기록되었다.
  • 제2에스드라서 이 책은 AD 100년경에 완성된 몇 편의 예언적 성격을 띤 묵t시 작품이다. 1∼2장은 유대인 에스라의 묵시 원문인 3∼14장에 첨가되는 반유대적인 부분이다. 3∼15장까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살랫디엘 묵시 : 3∼10장은 악의 문제와 이것의 내세에서의 해결을 취급하고 있다. ② 독수리 환상 : 11∼12장은 로마제국과 메시야 도래를 취급하고 있다. ③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인간(메시야)의 환상 : 13장, ④ 에스라가 어떻게 성문학을 재기록하였느나를 설명하는 전설 : 14장. ⑤ 마지막 15∼16장은 신약과의 어구적인 일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소 뒤늦게 기록한 것으로 AD 270년으로 추정된다.
  • 토비트서 이 이야기는 BC 150년경에 기록된 종교소설이다. 이것은 앗수르에 이주되어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 토비트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토비트는 앗수르치하에서 살해된 자기 동족을 격식을 갖추어 장사지내다가 사고로 눈이 멀게 된다. 비통 중에도 토비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가바엘이라는 친척에게 예치해 둔 돈 전부(약 2만 달러)를 찾아오게 한다. 천사 라파엘이 믿을 만한 친족으로 가장하여 토비아스와 함께 간다. 그것은 눈 먼 토비트의 기도에 응답해 줄 뿐만 아니라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과 에드나의 딸 사라를 도와 주기 위해서였다. 악신 아스모데오의 시기로, 사라와 결혼했던 일곱 남편이 모두 결혼 첫날 밤에 차례로 살해되었던 것이다. 토비아스는 티크리스강가에서 야영을 하다가 물고기 염통과 간을 태워서 악신을 쫓아버리고는 사라와 결혼한다. 라파엘은 그 사이에 라구엘에게 달려가서 돈을 찾고, 니느웨에 있는 토비트와 그의 처 안나에게로 토비아스와 갓 결혼한 아내를 인도하여 돌아온다. 토비아스의 여행이 오래 지체됨으로 그들은 비통에 잠기게 되었으나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신부를 맞이하여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 돈으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라파엘의 지시대로 토비아스가 연로한 아버지의 눈에 물고기의 쓸개를 얹어 놓음으로써 토비트는 시력을 회복한다. 천사 라파엘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사라진다.
  • 유딧서 이것 또한 교훈적인 가치가 있는 소설적인 이야기로 BC 2세기에 기록되었다. 유딧은 용모가 아름답고 경건한 유대인으로 베툴리아(세겜의 가명)의 과부이다. 유딧의 용기는 홀로페르네스 휘하 느부갓네살 침략군으로부터 그녀가 속한 도시를 구해낸다. 그 도시의 장로들이 5일 이내로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유딧은 당당하게 그 도시를 떠나 홀로페르네스 진영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미모와 언약을 통하여 장군을 현혹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베툴리아로 돌아온다. 이 결과 그 도시의 수비대는 진격하게 되고 홀로페르네스의 대군은 잇따른 혼란 속에서 도망하다 파멸된다. 대제사장 요아킴(Joakim)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걸 유딧을 칭송하기 위하여 베툴리아로 온다.
  • 에스더의 추가서 이것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본문 가운데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70인역에서는 정경 에스더서에 삽입되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모르드개의 꿈과 그가 왕에 대한 모반을 사전에 막는 이야기. 히브리 정경 제1장의 앞에 17절이 포함디어 있다. ②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 이 부분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왕의 조서. 이 부분은 히브리 본문 3:13에 이어진다. ③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 히브리 정경 4장에 이어진다. ④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극적으로 알현함. 5장에 8절이 추가된다. ⑤ 하만의 처형과 유대인을 칭송하고 자위적 방비를 허락하는 왕의 조서. 정경 8:12에 이어진다. ⑥ 모르드개의 꿈 해석과 부림절의 의미에 대한 끝맺음말. 이 부분은 히브리 정경 에스더의 마지막 장에 이어진다
  • 솔로몬의 지혜서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있는 외경서 가운데 하나로 BC 50년경에 기록되었다. 첫부분(1:1∼6:8)은 '종말서'라고 불리는데,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비교함으로써 비도덕성의 진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부분(6:9∼11:1)은 솔로몬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지혜의 찬사이다. 셋째부분(11:2∼19:22)은 앞 부분들보다는 못한데, 이 부분은 애굽과 광야의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서 우상숭배(13∼15장)의 기원과 악함을 거론하며 끝맺는다. 복합적인 이책은 기록자 불명이다.
  • 집회서 51장으로 된 이 책은 「호크마」 또는 히브리 지혜문서에 속한다. 이것은 외경 가운데 저자가 알려진 유일한 책이다. 그는 예루살렘 시락의 아들 예수(50:27)로 BC 175년경에 기록하였다. 그의 손자는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BC 132년 히브리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집회서의 전통적인 라틴어 명칭은 외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회서' 임을 보여 주며 '금언'이 지닌 높은 도덕성과 영적인 성격, 초기시대 이래 그리스도인 들에게 널리 호평을 받았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 마카베오상 수준 높은 역사, 문학작품. 이 책은 134년 모데인반란(BC 167년)에서 시므온 마카베오의 살해(BC 134년)까지 마카베오 일가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 후임자에 맞서 싸우는 모데인의 마따디아 아들들, 즉 유다.요나단.요한.엘르아살과 시므온의 전율어린 용솟음치는 애국심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 마카베오하 이 책은 부분적으로 마카베오상과 동시대(BC 175-160년)의 기록이나, 역사적인 가치면에서는 그것보다 떨어진다. 그리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이 다소 신화적인 찬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레네 사람 야손의 작품을 요약한 이야기라고 하나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바룩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이 바벨론에서 기록한 것으로 공언되는 작품이다. 전반부(1:1∼3:8)는 산문체로, 후반부(3:9∼5:9)는 시가체로 기록되었으며, 이사야.예레미야.다니엘 및 기타 예언서와 흡사하다. 이 책은 포로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담고 있으며 회복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 세 젊은이의 노래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이 외경은 풀무불 이야기(단 3:23) 다음에 삽입되었다. 이 책은 아자리아의 감동적인 기도, 기적적인 구원의 기사와 세 젊은이가 합창으로 드리는 찬양시로 되어 있다.
  • 수산나 이야기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외경으로, 정숙한 바벨론 부인 수산나가 어린 소년 다니엘의 지혜로 어떻게 조작된 간음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헬라어 역본에서는 제1장 앞에, 라틴어 불가타역에서는 제13장에 기록되어 있다.
  • 벨과 용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우상숭배를 조롱할 의도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다니엘서의 세 번째 추가 외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상 벨 신상은 살아 있는 신이어서 매일 밤 그 곁에 차려진 엄청난 양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고 생각되었다. 다니엘은 신전 바닥에 재를 흩뿌려 놓아서 제물을 정작 먹어 없애는 것은 벨신 제사장이라고 왕에게 증언한다. 그 즉시 왕은 벨 신상을 파괴하며 그 제사장들을 처형한다.

  • 또 하나의 전설은 바벨론에서 숭배되는 용의 이야기다. 용에게 경배하라고 소환된 다니엘은 역청과 머리털과 비계를 섞어 용에게 먹임으로써 용의 숭배를 타파시킨다. 격노한 백성들은 사자굴 속에 다니엘을 던져 넣으라고 왕에게 강요한다. 이 속에서 그는 유다에서 추수꾼들에게 음식을 가져가는 길에 천사에 의해서 머리털을 휘어잡혀 바벨론으로 옮겨진 예언자 하박국의 도움으로 엿새 동안을 먹고 지내게 된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다니엘을 건져내고 그를 해치려던 자들을 굶주린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 므낫세의 기도 이것은 의도적으로 기록된 므낫세의 참회기도다. 그는 유다의 사악한 왕으로 앗수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었다. 대하 33:19 이하에 삽입되었으며, 대체로 BC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 위경(Pseudepigrapha)

   외경 이외에도 위경('허위문서')이라고 불리우는 문서들이 있다. 이것들은 BC 2001년∼AD 200년에 걸쳐 기록된 종교적인 작품으로 아담.에녹.노아.모세.스바냐.바룩가 같이 훌륭한 구약인물들이 저작자라고 허위 주장한다. 외경(로마가톨릭교회는 1권 가운데 11권을 정경으로 인정함)과는 달리, 위경 문헌들은 한 번도 정경의 위치에 오른 적이 없다. 이 책들은 주로 묵시서, 교훈집, 전설적인 이야기들이다. 일부 중요한 책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모세 승천서 대율법 작성자인 모세가 임종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전달하고 위임했던 예언들이라고 주장된다. 이 책은 그 당시 바리새파가 점차 세속화함에 따라 한 바리새인이 AD 15년경에 기록한 항변서다.

 

  • 이사야 승천서 이 책은 세 부분, 즉 이사야의 순교, 이사야의 환상, 히스기야의 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랫동안 사멸되었던 히스기야의 유언 부분(2:13∼4:18)은 사도시대 말기 그리스도교회의 영적 상황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이사야의 환상(6:1∼9:40)은 1세기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과 천국에 관한 신앙을 조명해 보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이사야의 순교는 여러 부분에 나뉘어 있다(1:1, 2, 6∼13; 2:1-8, 10; 3:12; 5:1-14). 이것은 악독한 므낫세에 의해 톱으로 켜서 갈기갈기 찢겨진 이사야의 죽음을 재현해 주고 있다.

 

  • 에녹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장차올 심판에 대하여 노아와 에녹에게 임했던 묵시서라는 평을 받는 단편 작품이다. 저자 불명으로 BC 1, 2세기에 기록되었다.

 

  • 회년서 50년 주기(레 25:8-12)의 회년기로 세계역사를 구분하면서 이 작품(BC 153-105년)을 기록한 바리새인은 비도덕화하는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유대교를 구해내기 위해 율법을 격찬하며 히브리 족장들의 우수함을 기록하였다.

 

  • 시빌신탁서 이 신탁서는 마카베오시대의 것이다. 제국의 몰락과 메시야시대의 도래를 취급하면서 헬라인 시빌의 예언담을 모방하였다. 원작 쿠매의 시빌은 에베소의 헤라클리투스(BC 500년)가 최초로 언급하였다.

 

 

  • 솔로몬의 시편 이것은 BC 1세기 중엽부터 내려오는 18편의 시편으로 되어 있다. 익명의 바리새인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 메시야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 십이족장 예언서 이 12유언서는 창세기 49장에 시사된 바와 같이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유언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자료는 BC 2세기 초에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책의 형성은 AD 250년 이후로 보고 있다.

 

  • 탈굼(Targums)

탈굼은 히브리성경을 후일 포로 후기시대팔레스타인의 일상용어가 되었던 아람어로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에 구전되었다가 히브리성경으로 읽혀졌으며 아람어 번역본에 이르게 되었다. 최초에 기록된 탈굼, 즉 온켈로스의 모세오경이나 요나단의 예언서 등은 그리스도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 탈무드(Talmud)

이것은 모세 율법을 기초로 한 히브리 기본법과 민법의 모체다. 이는 BC 300년에서 AD 500년에 이르는 랍비사상의 결정체다. 탈무드('교훈')는 「미쉬나」, 즉 모세의 성문법 그 자체에서 연유한 전통 구전 율법과 「게마라」, 즉 이러한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게마라에는 아람어가 사용되어 있다. 탈무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은 미드라쉬로서 이는 초기 회당에서 히브리 구약성경을 상세히 해설했던 히브리어 및 아람어 설교였다. 이 미드라시는 BC 100년-AD 300년에 성행하였다.

 

  • 회당(Synagogue)

회당(헬라어 「시나고게」<'모임'>은 최초 바벨론 포로시대의 가정(겔 8:1; 20:1-3)에서 기원된 것이 분명하다. 가정에서 모였던 초기 그리스도교회와 같이 이 '가정 회당'은 포로시대 이후 점차로 발전되어 교육과 공중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공식 회합이 되었다. 이 회합은 성전 예배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팔레스타인 밖에 멀리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BC 300년∼AD 300년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정착된 도시마다 율법과 예언서를 가르치며 예배를 드리는 회당(눅 4:16-30)을 세웠다. 이 회당에는 히브리성경이 안치 되어 있었다. 그리고 회당은 그리스도복음이 전파된 최초의 장소 중 하나였다(행 13:5, 14:14:1). 로마 통치시대에 유대인들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은 그들의 일반적인 집회 장소였다.

 

  • 산헤드린(Sanhedrin)

산헤드린은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귀인의 집단으로 그 기원은 정확히 여호사밧 왕 시대로부터 유래되었음이 틀림없다(대하 19:5-11). 그것은 유대인의 국가 최고법정으로 발전하였고, 예루살렘이 멸망(AD 70년)하기까지 사회와 종교 분야의 일들을 처리하였다. 대(大)회당으로 알려져 있는 에스라-느헤미야시대(BC 450년-400년)의 공의회가 일반 전통에 반영되어 BC 250년경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70명 회원의 산헤드린(헬라어「시네드리온」의 아람어의 형태 '함께 앉음. 회의')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 바리새파(Pharisees)

요한 히르카누스(BC 134-104년) 통치하의 마카베오시대에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같은 파당이 형성되었다. 바리새파는 대체로 하시됨('경건한 자들')의 계승자들로 BC 168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교 금지 당시에도 율법을 진실하게 지켰던 자들이다. 이들은 기도와 회개, 구제를 표어로 내걸었던 엄격한 율법 고수주의자들이었다. 마카베오 수난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경이로운 출발을 보였던 이들은 점차 퇴폐하여 예수시대에는 유명무실하고 파렴치한 종교주의자들로 변하였다.

 

  • 사두개파(Sadducees)

   솔로몬 당시 제사장 사독(왕상 2:35) 일파로 여겨지는 사두개파는 대개 귀족적이며 세속화된 제사장들로 구성되었고 문자적인 율법에 충실하였으며, 부활과 장차의 심판을 부인하였다. 이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며 호전적인 책략과 교묘한 수완으로 세속적인 영달을 꾀하였다. 이들과 바리새파의 분열로 하스모네가 왕조가 몰락되었고 그 후에도 그들간의 격심한 알력은 예수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 서기관과 에세네파(Scribes and Essenes)

   서기관들과 성경 필사본자로서 모세율법에 정통하였던 까닭에 율법학자라고도 불렸다. 성경 중간사 시대에 이들의 영향력은 증대되어, 예수 당시 괄목할 만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에세네파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같은 파당이라기보다는 금욕적인 분파였다. 1947년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되기까지는 피로.요세푸스.폴리니우스 등이 이 공동수도회에 대한 사실을 제공하는 유일한 출처였다. 사해북동 해안 쿰란에서 동일하지는 않으나 유사한 집단의 그 본부를 발굴하게 됨으로써 지금은 그들에 대해 더욱 잘알게 되어었다. 그들의 규율과 의식이 기록된 책을 발견하게 되어 고대 자료들에 대한 확증과 BC 200년∼AD70년사이의 유대교 분파에 대한 지식을 더해 주었다.

 

  • 헬라어 신약성경의 형성 여건

   성경 중간시대의 헬라어 방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사업으로 헬레니즘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이 공용어는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쳐, 마침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70인역)하기에 이르렀다. 이 번역은 신약성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이 번역본을 통하여 초기 기독교의 성경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헬라 학문과 문화, 로마법과 도로망, 유대 유일신교와 회당(후자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고 인하여 확산됨) 그리고 유대인들의 묵시적인 메시야 소망 등이 그리스도의 강림과 기독교를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오랜 중간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었다. 그 정점은 구약에서 자주 예언되었던 대망의 메시야, 즉 세상의 구세주의 성육신의 탄생이었다. 앞서 전개된 세계의 모든 역사, 특히 유대 역사는 이 위대한 사건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